•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대륙 조선사 연구회
 
 
 
카페 게시글
역사토론방(출처있는글) 1890년부터 춘천에 관청건물 신축 공사를 시작하고 증축하다.
김재만 추천 0 조회 419 11.02.19 18:41 댓글 30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1.02.19 19:05

    첫댓글 춘천(春川)에 관한 자료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두 찾아보세요... 시기별로요...

  • 11.02.19 19:06

    1895년에는 "23부제"의 행정 구역상, 춘천부(春川府)가 영서(嶺西) 지방의 대부분을 관할하였습니다.
    "23부제" 시행 이전과 그 이후의 행정 구역을 비교해 보시고요...

  • 11.02.19 19:09

    關東首府 春川郡

    春川은 關東首府오 貊國古都다.
    新羅 善德女王 6년에 牛頭山麓牛頭里에 牛首州를 置하고 軍主로써 此를 治하다가
    其後 文武王 13년에 首若(音야)라 칭하얏고 烏斤乃 又는 首次若라고도 칭하다가 景德王時에 次를 改하야 朔州라 하고 其後 또 改하야 光海州라 하다가
    高麗 太祖 23년 距今 約 950여년 전에 春州이라 號하야 現邑에 移하고
    李朝 太宗 13년에 비로소 春川이라 改하야 今日에 至햐얏다.
    [출처=http://db.history.go.kr/url.jsp?ID=ma_13_042_0160]

  • 11.02.19 19:10

    춘천은 바로 옛날에는 나라의 수도였는데 그 지형이 정말 좋은 곳입니다.
    -------------------
    "貊國古都"(맥국고도)

  • 11.02.19 19:14

    춘천부(春川府)가 영(營)으로 승격된 이후로 관청 건물을 증축하고 군사 제도를 잘 정비하여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승격 기념으로??? 요즘과 비슷하네요...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을 써가며 관청을 신축 또는 증축하죠...

  • 11.02.19 19:33

    1888년(고종 25년) 춘천(春川)에 유수군(留守郡)을 두면서 강원과 관할을 달리하였으나
    1895년(고종 32년) 8도(道)를 폐하고 춘천유수군(春川留守郡)을 춘천부(春川府)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관내를 양분하여 강릉(江陵)과 춘천(春川)에 관찰부를 두었으며,
    원주·영월·평창·정선의 4군을 충주관찰부로 이속하였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제(道制)로 부활할 때 다시 춘천부(春川府)와 강릉부(江陵府)를 병합하여 관찰사를 춘천에 두고 원주 등 전기 4군이 다시 환속되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11.02.19 19:48

    1895년에는 관내를 양분하여 강릉(江陵)과 춘천(春川)에 관찰부를 두었다고 합니다. (8도제 폐지, 23부제 시행, 관할 분리)
    영서(嶺西)는 춘천부(春川府)의 관할이었고, 영동(嶺東)은 강릉부(江陵府)의 관할이었습니다.
    1896년에 춘천부(春川府)와 강릉부(江陵府)는 병합되었네요... "23부제" 곧 "23부(府) 337군(郡) 체제"는 단명하였고요...

  • 11.02.19 19:50

    <대륙사관>이든 <반도사관>이든 관계없이요..... 강릉(江陵)은 애초부터 줄곧 영동(嶺東) 지방에 속한 지명입니다.

  • 작성자 11.02.20 03:01

    강릉이 분명이 영서에 속한 지형이라고 이미 자료를 제시하였는데,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애써서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시는 이유를 보면, 만약 강릉이 영서에 속하게 된적이 있었다면, 문제가 생기는 부분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인 것 같습니다만... 제가 핵심을 바로 잡기는 잡은 것 같습니다...^^...

  • 작성자 11.02.20 03:02

    역으로 말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강릉이 영서에 속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렇게 해석됩니다.

  • 작성자 11.02.20 03:03

    하나만 더 이야기를 돌려서 하면, 그것이 '산천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어서 인가요?...^^...

  • 11.02.20 10:13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년) 4월 16일 3번째 기사, 선조 38년(1605년) 7월 23일 3번째 기사, 선조 40년(1607년) 4월 4일 3번째 기사,
    정조 7년(1783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는 사서(史書)의 기록이 아닌가요???
    강릉(江陵)은 애초부터 영동(嶺東)에 속한 지명으로 나옵니다.
    자기 자신의 주장에만 유리한, 자기가 보고 싶은 내용만을 찾아서 연구하면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가능하시다면, 관련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두 찾으셔서 자세히 읽어보신 후에, 결론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 11.02.20 10:21

    김재만 선생님이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주장하셨으므로, 저도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반대 증거는 더 있습니다.
    하여간,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합니다.
    대다수 연구자들이 "일제(日帝)가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왜곡/날조하였다"고 믿는다면, 더욱더 논쟁의 가치는 없습니다.

  • 작성자 11.02.20 11:22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찾아서 읽은 필요는 없어요, 시기마다 지명이 이동했기 때문에, 가장 한반도에 적합하고 시초적인 지명의 이식 시점이 어느 순간인가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 중심이 되는 지역이 어디인가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기 때문이지요...

  • 11.02.20 12:15

    그러니까요...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년) 4월 16일 3번째 기사, 선조 38년(1605년) 7월 23일 3번째 기사, 선조 40년(1607년) 4월 4일 3번째 기사,
    정조 7년(1783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는 사서(史書)의 기록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무시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것만 날조되었나요??? (하하하)
    하여튼... <조선왕조실록>에서 강릉(江陵)은 애초부터 영동(嶺東)에 속한 지명으로 나옵니다.
    관련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두 찾으셔서 자세히 읽어보신 후에, 결론을 내리셔야 합니다.

  • 11.02.19 20:03

    성책(成冊)과 성책(城柵)은 서로 전혀 다른 낱말인데요...... 부수(部首)가 빠진 게 아니고... 성책(成冊)은 틀린 표기도 아니고요...
    성책(城柵)의 뜻풀이 자료를 본문에 인용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 작성자 11.02.20 02:41

    인용을 한 이유는 바로 한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 11.02.20 02:41

    그 성책이 무슨 뜻이 겠습니까?

  • 작성자 11.02.20 02:42

    일부러 가운데 따옴표를 많이 붙여 본문을 희안하게 만들어 버렸군요... 잘 읽지 못하게요...

  • 11.02.20 10:23

    한문이 틀리긴 합니다.(부수가 빠져있군요...)
    -----------------
    이것이 의아해서 질문하였습니다.

  • 작성자 11.02.20 11:21

    잘 보면 부수가 빠져 있지 않습니까? 성책이라면 성곽, 즉 성을 말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당시로서 목책을 세우기 보다는 작은 규모의 성이 있어야 되는데, 춘천에는 성터가 없다는 말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대형의 성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성이 되야된다는 것이죠... 이제 의아함이 풀리셨겠네요...

  • 11.02.20 12:18

    제 말은... <조선왕조실록> 고종 27년(1890년) 7월 10일 2번째 기사에서는.....
    "춘천의 군사 756명과 가평의 군사 512명을 두 도(道)의 도신(道臣)들에게 명하여 관하(管下) 각 읍에 적당히 분배한 후에,
    성책(成冊)을 만들어 총어영(總禦營)에 보고하고, 군포를 거두는 절차는 한결같이 원안대로 시행하라"고 나오죠....
    그런데, 서로 전혀 다른... 성책(成冊)과 성책(城柵)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 11.02.20 10:38

    제 올린.... <여헌집(旅軒集)> 제4권에 나오는, 청구(靑邱)와 소중원(小中原)에 관한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청구(靑邱)는 곧 소중원(小中原)이므로, 중원(中原)에 있는 지명(地名)들을 청구도(靑邱圖)에 이식(移植)하였다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중원(中原)에 있는 강릉(江陵)이라는 지명(地名)이 청구(靑邱) 지역에도 등장하는 겁니다.
    수원(水源), 한양(漢陽), 강원(江源)이라는 지명(地名)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명(地名)의 이식(移植)은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 11.02.20 10:45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검토하면, 아래와 같은 대비 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관련 글을 올렸습니다.

    中國(중국) vs 東國(동국)
    中朝(중조) vs 本朝(본조)
    中夏(중하) vs 東夏(동하)
    中州(중주) vs 靑邱(청구)
    中華(중화) vs 小中華(소중화)

    게다가... <여헌집(旅軒集)> 제4권에 따르면, "中原(중원) vs 小中原(소중원)"이라는 관계도 성립됩니다.

  • 작성자 11.02.20 11:19

    中原이 관계가 있죠... 가운데 원이 그려져 있어야 하고, 한쪽으로 통로가 열려있어, 사방을 삥둘러 요새와 같은 도시 형태를 갖추어하죠. 즉, 그 지역으로 사람이 몰려 온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죠...

  • 작성자 11.02.20 11:19

    일종의 '성전'(최후의 보루)인 셈입니다... 최후의 군영이 됩니다..

  • 11.02.20 12:54

    천하가 주 나라로 돌아가자 기자가 동방으로 와서 같이 온 자들과 함께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대개 이때의 동방은 의문(儀文)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서 일개 오랑캐 나라에 불과하였습니다.
    기자가 나라를 다스리자 교화가 크게 행해지고 예악이 빛나게 되어 대략 중화(中華)와 같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출처=<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년) 11월 8일,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 11.02.20 12:55

    우리 청구(靑邱)는 동쪽 한 구석에 치우쳐 있지만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로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의상이 문채롭고 빛나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속습(俗習)이 점차 낮아지고 본받을 곳이 멀어진 나머지 품제(品制)가 사치스럽고 유폐가 심해져서 옷의 소매가 차츰 넓고 길어지게 되어
    아예 옛 제도를 근거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낭비와 겉치레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출처=<승정원일기>, 고종 21년(1884년) 6월 10일,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 11.02.20 12:56

    너무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운 덕분에
    기성께서 군부(君父)와 스승의 자격으로 내림(來臨)하여 중화(中華)의 문화로써 우리나라를 변화시켰으니,
    팔조목(八條目)의 가르침을 홍범(洪範)에서 연역해 내어 우리에게 만세토록 끼쳐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부터 인륜이 비로소 바루어지고 법과 기강이 처음으로 밝혀져서 무지한 백성들의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라는 명칭을 들을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억만년토록 이어갈 기업(基業)은 그 모든 것이 다 기성께서 내려준 것입니다.
    [출처=<일성록 >, 정조 3년(1779년) 2월 15일,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 11.02.20 13:10

    바로 위에 관련 기록을 더 올려보았습니다.
    청구(靑邱)가 곧 소중화(小中華)라는 기록은 더 많이 있습니다. 모두 다 왜곡/날조된 것일까요???
    사실... 지명(地名)의 이식(移植)은 어려운 게 아니라서요....
    중원(中原)에 있는 지명(地名)들이 소중원(小中原)인 청구(靑邱) 땅에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그렇게 대략 이식(移植)되었기에, 앞뒤가 안맞는 현상이 많아요..... 중요한 문제는 그 지명(地名)들이 실제로 이식(移植)된 시기(時期)입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