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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선의 글] “사관생도가 간첩 누명을 쓰다”
註: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면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벌써 70여년이 흘렀지만 몽매에도 잊지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어느날 갑작이 그 추억을 글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불끈 일어났다. 글 쓰는데는 소질이 없지만 용기를 내어 수필 형식으로 그 추억을 머리속에서 끌어내려고 한다. 졸필 이해하시고 저의 추억 한토막을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2024년 9월 16일 이종선 배상
6.25전쟁이 한창 치열했던 1952년에 나는 진해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에서 2년차의 생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많은 생도들이 그랬드시 6.25전쟁으로 나는 가족들과 헤어진 이후 지난 2년 동안 그분들의 안위를 전혀 모른체 지내고 있었다. 바쁜 일과 중에도 가족들 생각만 하면 곧 우울해지고 그리워지고 몸부림 치곤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어느날 매형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전시라 그런지 그 편지는 돌고 돌다가 무려 2년 만에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편지를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 지고 가슴이 뛰었다. 2년만에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라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과 동생들의 소식이라도 전해온 것인가 마음 조리며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내용은 간단했다. “매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헌병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누나는 건강하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들의 소식은 전혀 모르고 있다. 어데던 전시의 열악한 환경이지만 안전하게 잘계시리라 믿는다. 언젠가는 웃으며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부디 열심히 생도생활을 하고 건강히 잘 있어라.” 이런 내용뿐이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텅 빈 강당 한구석에 앉아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가족 걱정으로 울먹이곤 했다.
많은 날들을 밤잠을 설치며 어떡하면 거제도로 1박2일 특별외출을 갈 수가 있을까. 우선 누님이라도 만나보고 온다면 한 시름 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없고 오로지 구대장님께 간청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다음날부터 구대장 사무실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어느날 용기를 내어 구대장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담임 구대장은 나ㅇ국 중위였다. 나는, 이종선 생도 구대장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 보시다가 무슨 일이냐? 물으셨다. 나는 매형의 편지를 보여드리면서1박2일의 특박을 요청들였다. 그 순간 옆책상에 앉아있던 김ㅇ우 중위가 벌떡 일 어나더니 나의 뒷통수를 치면서 이놈 정신나간 놈이군, 지금 전시 중에 어델 가. 나중위, 혼좀 단단히 내세요. 나구대장도 같은 말로 나의 간절한 건의를 받아 주지않았다. 이런일이 있은 이후에도 나는 누님 만나고 싶은 마음에 내무생활이며 각종 훈련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집총훈련 중 넋을 잃고있다가 교관으로부터 기합을 받은 때도 있었다.
구대장께 다시 한번 요청 들여 보자. 마음 먹고구대장실로 향했다. 김0우 중위가 출타중임을 확인하고 노크를 하고들어갔다. 너 또왔나. 하는 구대장의 표정을 살피니 오늘도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함은 용기로 변했고 나의 같은 뜻을 힘있게 요청 드렸다. 누님을 한번만 보고오면 더욱 열심히 복무할 것 같습니다. 목이 메었다. 그랬더니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돌아가 있어”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구대장실을 나오면서 쾌재를 부르면서 마음속으로 가능성을 갖게된 것 같아 대단히 기뻤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집체훈련 중 연락병이 교관에게 접근하여 무슨말을 하더니 나를 불러내어 구대장실로 가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미칠 듯이 뛰어 단숨에 구대장실로 갔다. 나구대장님은 나를 보자 종이 한장을 내 보이면서 상세한 시간계획서라면서 바드시 이 시간계획서에 따라 행동해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 차질로 미귀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나구대장은 주도면밀한 계획 수립과 실행에 남달은 분이라고 정평이 나 있던 분이었다. 군인에게 미귀영이 얼마나 불명예 스럽고 다른 전우들에게 피해를 주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1박2일 특박증과 약간의 용돈까지 주시면서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오기 바란다는 훈시를 하셨다. 어떤일이 있어도 시간내에 귀영할 것이라는 약속을 드리고 구대장실을 나와 내무반으로 가서 외출복장으로 갈아 입었다.
당시 외출복이라야 아래위가 연결된 작업복에 정모를 쓰는 것이었다. 정모는 장교용이었으나 당시 상부의 특별 배려로 생도들에게 지급되었다. 나는 구대장이 준비해준 시간계획표를 손에 쥐고 그 계획서대로 행동하리라고 다짐하면서 학교 정문을 나섰다. 학교정문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약 20~30분 후에 진해읍에서 하차하여 곧바로 진해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그 때 시간이 오후 2시경이었다. 선편을 살펴보니 나구대장님의 시간표 대로 거제도 장승포행이 오후 3시 20분에 있음을 확인하고승선표를 구매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구대장이 마련해준 시간계획표가 얼마나 정확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 큰 배는 아니었지만 승객도 제법 많았고 적고 큰 짐들로 배 중앙은 만선이었다. 승선하고 한참 가다가 그 시간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배는 목적지 장승포 선착장으로 직행하는 배가 아니고 도중에 5~6군대의 조그마한 섬들에 기착하여 다시 내리고 타는 승객이며 짐도 내리고 싣는 관계로 한 선착장에서 약 20~30분의 시간이 소요됨을 알고 잘못되어감을 느꼈다. 아무리 면밀히 짜여진 시간표 일지라도 현지에서 재확인하고 융통성 있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었지만 배는 이미 떠난 후라 어쩔 수 없이 잘 될거라는 믿음으로 몇시간 후의 일들을 운명에 맡기고 항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장승포에는 오후 8시 조금 지나서 도착했는데 11월달의 오후 8시는 이미 땅거미가 덥혀 어둑 어둑 하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포로수용소 가는 길을 물으니 왕복 2차선 비포장도로를 따라 약 12km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스편이 있는지 물어 보다가 당시 그곳은 오후 8시가되면 모든 교통편이 두절될 뿐 아니라 통행금지로 일체 통행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누님댁을 불과 지척에두고 통행금지로 접근도 못하다니 낙심천만인 때 어느 촌로가 “이 산길로 30m정도 옥녀봉 쪽으로 올라가면 우측에 오솔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가면 포로수용소에 다달은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험한 산길이고 더욱이 달도없는 야간이라 많은 고생이 뒤딸을 것이라고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험하더라도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일렴에 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입산 처음에는 희미한 산 오솔길이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혀 전후좌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암흑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내 키의 3~4배는 족히 되는 잡목들이 밀집되어 있는데다 넝쿨이 뒤엉켜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꼭 맹인 행세를 하며 조심조심 발 걸으을 옮겼다.
한참 가다 보니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길이 보였다. 이 산 중에 어쩜저런 좋은 길이 있을까 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기로 하고 들어서는 순간 펑덩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 것은 길이 아니라 물로 채워진 물길로 별빛에 비추어 평탄한 길 처럼 보였던 것이다. 옷이 완전히 젖어버리고 일어서는 순간 어찌나 추운지 벌벌 떨면서 옷과 몸을 추수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전진을 계속했다. 얼만큼 갔을가 밀림이 우거지고 달도 없던 그 때 나뭇가지를 스치는가 하더니 내가 쓴 정모가 가지에 걸려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모는 어렵사리 지급된 모자로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재 지급이 불가능한 것이어서 온 신경을 써가며 찾을려고 노력했다. 그 근처 사방을 더듬어 훑어 나갔다. 한 20여분 되었을까 손에 와닿는 물체를 잡아보니 바로 내 정모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모자를 펴고 두드리고 해서 착모하고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걸은 것 같았으나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에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면서 좀 높은 지대나 좀 높은 위치에 있는 바위 같은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의 현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좌측으로 어렴푸시 보이는 높은 지대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오를려 노력했다. 경사가 가파라서 올라가면 미끄러지기를 수 차례 결국 미크러져 내리다가 나무에 부딛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너무 아팠다. 그러나 기어히 바위 위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환한 불빛을 배경으로 산 마루가 시루엣처럼 보였다. 마치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르기 전 동이 틀 때의 모습이다. 대략 방향을 확인하고 더듬어 내려와 또 다시 전진했다. 산 기슭이 가까워 오니 밀림도 차츰 허술해 져서 전진하기에 좀 쉬어졌다. 이제 오르막 산길을 따라가 능선에 올으면 포로수용소가 눈앞에 전개되고 곧 누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피로도 아픔도 추위도 모두 사라지는 듯 했다. 드디어 능선에 다달으니 생각대로 포로수용소의 외등으로 온통 불바다 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산길이 훨신 밝아졌다. .나는 먼저 옷을 벗어 물을 짜고 다듬었다. 군화 속에 찬 물도 빼냈다. 정모도 정돈하고 잠시 돌위에 앉았다가 심기일전해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불과 12km의 거리를 무려 6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정적에 쌓인 새벽 약간은 흥분된 심정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누구야! 하면서 총부리를 등에 꽂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순간 너무 놀래서 숨이 멎는듯 했다. 나는 공군사관생도로 가족을 만나러 왔다고 했지만 그에겐 통할리가 없었다. 총구를 몇 번 찌르더니 “머리에 손을 얹고 내려가!” 솔직히 겁이나서 경비병 하라는데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경비병은 호루라기를 불더니 주위에 있는 경비병을 불러 함께 나를 호송(?) 하는데 참여했다. 잠시뒤에 천막으로 된 헌병대 분실에 도착했다. 중사계급장을 단 분실장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며 왜 새벽에 산속에서 나왔느냐.” 나는 그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진해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교육을 받고있는 사람이며 6.25 전쟁으로 헤어진 누님과 매형을 만나러 왔다고 하는 순간 군화로 왼쪽 정강이를 걷어 차는 바람에 쓰러져 고통을 받아야 했다. 외박증을 제시해 봤자 내용도 보지않고 툇자 놓았다. 그는 여러 곳에 전화를 시도하는 것 같았는데 더욱이 야전 전화기로 공군사관학교와 통화는 전혀 불가능했다. 한편 헌병대 본부와 거제도에 있는 모든 분실에 전화로 확인한 결과 서봉만(나의 매형이름)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벌써 2~3년이란 세월이 흘러 모두 전속을 가버렸으니 아는 사람을 찾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꿇어앉아 총을 겨누고 있는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면서 날이 밝으면 헌병대 본부로 이첩한다는 말 뿐으로 그 분실장은 어덴가 가버렸다. 분실장이 전화를 하는 동안 이상한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곳은 포로수용소이고 뒷산에는 550m 높이의 옥녀봉이라는 험한 산이 있는데 간첩들이 은거하면서 포로수용소와 관련된 간첩활동이 빈번한 지역으로 공군사관학교 생도로 가장한 간첩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내일 본부로 이송할 터이니 그 곳에서 심문조사를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런 통화 내용을 듣게된 나는 너무나 긴장하고 놀라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다만 간첩과 연루된 사건으로 몰아가는 헌병당국의 말에 극단적인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자세에서 좀 편해 보려고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듣고있던 한 사람이 있었 다. 11월 새벽은 추워서 그랬는지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청진기를 목에 걸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불을 쬐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스토브의 불빛이 새어나와 그분의 모습을 순간순간 비췄는데 비추인 조각 모습을 이리저리 마추어 보니 어데선가 뵙던 낯익은 모습을 감지하고 깜짝 놀랬다. 저분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물리선생님이셨는데 아냐 그분이 의사가 됬을리가 없잖아. 그러나 관찰을 계속할수록 그분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주저함도 없이 선생님 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랬더니 벌덕 일어나면서 너 누구야 하시며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이어 선생님 저 서울공업고등학교를 나왔읍니다. 그때 물리과목을 맡으시어 저희들을 교육하신 김예흠 선생님 아니십니까. 선생님은 맞아 내가 김예흠이야. 그러면서 헌병분실장을 불렀다.
자고있던 분실장은 놀라 뛰쳐 나오더니 박사님 무슨일 이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아까 대화 내용을 다 들었는데 내 물음 한마디면 저 사관생도의 신분이 확인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너 몇기생이라고 했지. 네 저는 2기생입니다. 그럼 김임흠 생도를 아는가. 네 알고말고요 저와 동기생으로 함께 진해 공사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임흠 생도도 저와 같은 서울공업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저사람은 공군사관학교 생도가 틀림 없습 니다. 제가 신병을 인수토록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실장은 자기에게는 결정권이 없고 일과가 시작되는데로 본부에 이첩토록 하겠습니다. 그 곳에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선생님은 나의 신분이 분명히 확인된 이상 망설임없이 신병인수를 위해서 각서도 쓸 것이며 모든 사후책임을 질 것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더니 드디어 각서를 쓰고 나를 인수하여 선생님의 숙소로 갔다. 당시 숙소라고해 봐야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담요 2~3장 뿐인 아주 열악한 숙소였다.
그 선생님도 6.25 때 가족과 헤어졌고 겨우 동생인 김임흠과 만 함께 하다가 동생은 공사에 입교하고 선생님 혼자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선생님이 의사가된 것은 원래 북한 평양의전을 나와 북한의 의사면허증은 있으나 남한으로 내려온 후로는 의사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가 그 후 한국정부의 의사자격 인정으로 의사가 됬지만 종합병원에서는 흔쾌히 받아 주지 않았고 개인병원 창업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잠시 서울공업 물리선생으로 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포로수용소 의무관 모집이 있어 자원했다는 말씀으로 의사가된 의문이 해소되었다. 내 옷이 너무 젖어 내일 아침까지 말를 것 같지않차 그분이 갖이고 있던 카키복 한벌을 주시기에 갈아입을 수가 있었다. 아직도 젖어있는 작업복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밤을 꼬박 뜬눈으로 보내고 그 숙소를 나 왔다.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반은 콩비지에 반은 꽁보리밥이었다. 의사나 행정요원 등 수용소 근무자들에 대한 대우가 대단히 열악한 단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엄혹한 전시에 이 정도면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선생님이 몸소 거제읍선착장까지 배웅해주시면서 선비까지 지불하시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이렇게 나는 매형과 누님을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얼마나 허전하고 비통한 마음인지 자신을 가누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매형은이미 오래전에 일선으로 전출된 후 였으니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귀영시간 이내에 귀교해서 귀영보고를 하고 새로운 생도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기적과 같은 김예흠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위기를 탈출 할 수 있었던 그 때를 한시도 잊어 버린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958년 9월 19일 나의 동기생 金壬欽 소령 (金禮欽 선생님의 동생)이 서해안 상공에서 불의의 비행사고로 순직하는 일이 발생했다. 수원 비행단에서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 장례식에 갔더니 그 곳에 김예흠 선생님이 와 계셨다. 서로 침통한 만남이었지만 여러가지 대화 중에 김선생님은 현재 왕심리에서 '김예흠외과 의원'을 개업하고 계신것을 알았다. 몇개월 후에 병원으로 찾아뵙고 점심을 같이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두번째 방문했더니 병원은 폐업되고 선생님은 숙환으로 생을 마감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번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괴로운 심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부디 이승에서 못다하신 복록을 받으시며 김임흠 아우님과 함께 천상에서 백락을 누리 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ㅡ 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