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1. 4. 수요일.
<아름다운 5060카페> '삶의 이야기방'에는 ''지존님'의 '엄마는 날날이 아줌마였다.'가 떴다.
오래 전... 어머니가 '동회'에 나가서 구호물품인 '쌀'을 얻어와서 식량을 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글을 읽고는 아래처럼 댓글 달았다.
시대상을 그려냈군요.
'지금이 670년대도 아니건만 어찌 세상을 거꾸로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위 문구로 보면 서기 670년대로 착각할 겁니다. 신라가 삼국통일한 바로 직후이기에.
'1960 ~ 70년대'로 고쳐야 할 듯
1960 ~ 70년대의 춥고 배고팠던 시대상황이 그대로 들어나는군요.
'동회'
혹시 '동사무소'를 뜻하나요?
구호물품으로 '쌀'을 조금씩 퍼서 나눠주었군요. 가난한 사람한테는 정말로 소중한 양식이었군요.
저는 시골에서 살다가 1960년에 대전으로 전학 갔지요..
대전 대흥동 천주교 성당에서 '강냉이죽'을 쒀서 바가지로 퍼 주대요.
저는 처음으로 양푼에 '강냉이죽'을 얻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나눠 먹었지요.
왜그리 창피했던지...
그래도 그런 구호물자를 나눠주던 사회단체가 있었다니 춥고 배고픈 서민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지요
제가 살았던 대전시내의 시대상 : 루핑-종이로 지붕을 덮은 허름한 집들이 엄청나게 많았지요.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년대, 70년대의 시대상이 떠오릅니다.
위 글에서도 폐유 콜타르-기름을 덕지덕지 바른 종이로 지붕을 해서 덮었다니....
글맛 좋아서 엄지 척!
꼭 수필집으로 책 내세요!
서울 청계천 하꼬방집
*사진은 내 임의로 퍼 왔다.
시대상황을 설명하는 사진이기에...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확대됨.
나는 충남 보령 웅천읍 구룡리 화망에서 태어났다.
산 아래에 있는 전형적인 촌이었다.
나는 1960년 봄에 대전 은행동으로 전학갔다.
대전 대흥국민학교를 다녔고, 시내 변두리의 주택과 시대상은 위 사진과 거의 흡사하다!
* 대전 목척교 아래에는 루핑집이 정말로 많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가 얼마 안 되는 시기라서 이북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동냥아치, 거지들도 많았다.
* '루핑집'이란 용어로 검색하면 위와 비슷한 사진이 무척이나 많이 뜬다. 많이 인용했다는 뜻.
'루핑집(rooping)' :
아스팔트 찌꺼기로 코팅을 한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만들어 얹은 집.
방수성이 커서 방수 공사나 지붕 바탕에 주로 쓰인다.
"하꼬방'
'하꼬방', '판자집'과의 뜻.
1) '하꼬방'과 '판잣집'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판잣집은 그저 집을 이룬 재료 이외의 의미가 없지만,
하꼬방은 일본어의 하꼬(상자)와 방(房)의 합성어로 한국 전쟁 전후(前後)의 우리 현실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2) 판자 이외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건축한 무허가 불량주택이 밀집된 무허가 정착지. 불량촌·해방촌, 板子村
3) 판자집은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미군이 진주할 때 가지고 온 라왕·미송 등의 목재 조각과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하여 바락크 집을 지은 것이다.
판자집은 1953년 서울의 경우 상자집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하꼬방이라는 별칭도 사용되었다.
4) 하꼬방의 어원(일본어) :
하꼬방 - 箱(はこ)+방 [아주 작은방]
箱(はこ)는 상자, 궤짝 등을 가리키는 일본어인데 여기에 방(房)이 합쳐진 말이다.
판자로 벽을 만들어 흡사 궤짝같이 지은 허술한 판잣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9. 1. 말쯤에 태어난 나.
집나이 일흔다섯 살인 지금(2023. 1. 4.)의 시간에서 1950년대, 60 ~70년대의 시대상을 떠올리면
세상은 마치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고, 발전했다.
나보다 한 세대(30년) 뒤에 태어난 내 자식들은 위 시대상황을 상상도 못한다.
내 자식들은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지금도 잠실아파트에서 살기에 이런 시대상황을 전혀 짐작도 못할 게다.
1.
지난 늦가을부터 나는 유난히도 추위를 탄다.
2개월이 넘도록 외출한 것은 불과 몇 번밖에 안 된다.
당뇨약이 떨어졌기에 내과병원에 가야 했고, 전립선비대증약을 처방받으려고 비뇨기과병원에 두 번 간 것이 전부였다.
아파트 내 방안에 갇혀서 지낸다.
내가 할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무기력하고....
별 수 없이 컴퓨터를 켜서 사이버 세상에 들락거리면서 인터넷 뉴스를 읽고, 개인카페에 들락거리면서 회원들의 글을 읽고는 나도 댓글 달아서 내 의견을 덧붙인다.
이 짓이라도 해야 덜 미칠 것 같다.
이런 댓글을 달면서 나는 지나간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지나간 시간 속에는 정말로 많은 기억, 추억, 지식, 경험, 사상, 생각들이 들어있다.
이를 꺼집어 내서 글로 적으면 그게 소중한 자산/자원이 된다.
문학을 추구하는 나한테는 문학적인 글감이 된다.
나중에 더 보탠다. 잠시 쉬자.
2023. 1. 4. 수요일.
첫댓글 네 지금 세대 이해하기 힘들어요.
댓글 고맙습니다.
사실은 저도 저보다 한 세대 이전인 부모님의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1910년대 말, 1920년에 태어난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무학자들이지요.
하도 가난했기에 일제시대에 소학교(지금은 국민학교, 초등학교)조차도 다니지 못한 채....노동으로 살다가 그렇게들 세상 떠나셨지요.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의 산골 아래의 시골생활이란 천지가 뒤바뀐 것처럼 많이도 변화했지요.
하나의 예 :
1974년 여름에서야 산골마을에 전기불이 들어왔지요.
전등불을 처음 켜는 날. 마을사람들은 두 손 번쩍 들고는 '만세 만세 만세'를 세 번 외쳤지요.
시골에서 살다가 대전으로 전학갔는데....
도시의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거지들이 무척이나 많았지요.
한국전쟁 직후라서 그럴까요.
이북 피난민도 무척이나 많았던 대전 원도심지...
성님 그리 세세하게 설명안해도 동시대 살아온 사람들 이라서 다안답니다 ㅎㅎ
초가집에서 발전된게 루삥집이나 스레트집이였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지존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자꾸 많이 꺼집어 내세요.
나중에 추려서. 다듬어서 책으로 내면 아주 소중한 책이 될 겁니다.
또한 독자의 인기도 굉장할 겁니다.
지존님의 글에서 저는 늘 글감을 얻지요.
초가집, 루핑집, 스레이트집....
서해안에 있는 제 시골집.
원래는 초가였다가 함석집이 되었고... 나중에 작은 창고는 지붕을 스레이트로 올렸는데 이게 말썽을 피울 것 같습니다.
불과 몇 평이 안 되는데도 스레이트는 독이 있어서 철거할 때에도 지방관청에 신고해야 하지요.
충성!
양철 지붕 밑에 산 적이 있지요
여름엔 불처럼 달구어지고 겨울엔 지붕에서 서리가 내린 듯 춥던 양철집 장마때 방안에 있으면 지붕에서 콩 튀기 듯 요란하던 빗소리 참 그땐 어찌 그리 살았는지
댓글 고맙습니다.
운선 작가님은 많은 기억이 있을 겁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았지요, 한국전쟁 직후라서 상이군인/병신이 된 제대군인이 시골마을에 찾아와서 뗑깡 부리며 돈 달라고 하고..
거지들은 바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보리밥이라도 달라고 하고...
그런 것을 숱하가 보다가 대전으로 전학갔지요. 대전에도 왜그리 가난한 사람, 노동자, 거지들이 많았던지...
운천 님의 양철지붕이 무슨 뜻인지를 저는 짐작하겟군요.
양철지붕.... 지붕에 흙벽이라도 발라야 하는데도 그런 것조차도 없는 양철지붕...
비가 내리면 양철지붕을 두둘이는 빗소리가 요란하지요.
서해안 제 시골집은 함석집. 1957년에 지은 집이라서 지금은 너무나도 낡았지요.
이런 이야기는 운선작가님도 아실 터...
가고 오는 댓글과 덧글로도 좋은 글감, 글 소재가 되겠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