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 그림
송유경
끝 종이 울렸다. 마지막 문제를 읽고 있는데 그만 펜을 놓고 나가라는 시험
감독이 야속하기만 했다. 단 일 분이 이렇게 절실할 줄이야
낯설기만 한 시험장을 뒤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그냥 아무 데나 주저앉고 싶
은 몸을 추스르며 가슴에 가방을 꼭 안고 터벅터벅 걸었다. 넓은 차선에 오가
는 차들은 쌩쌩 달려가고 있건만 내 귀에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허허롭게 들
린다.
경기의 하강곡선은 저 점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끝없이 내려갔다. 여기저기에
서 무너지는 기업체들, 증가하는 실업자들을 지켜보는 샐러리맨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다. 평생 직장이 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확산은 언제 쏟
아질지 모르는 검은 구름으로 떠 있어 우리 집 가장도 예외일 순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한 박스의 책을 들고 들어왔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는 만약을 대비해 자격증 하나라도 더 가지고 있음으로서 위안이 될 것 같아
서일까. 남편의 불안한 마음은 읽을 수 있었기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그 상자는 뜯어지지도 않은 채 이리 저리 밀쳐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에 매어 있는 사람인지라 대인관계 유지하랴 섭외 하랴 시간이 없는데 영
어 공부하면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너무 벅찼나보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책 주인은 그 책을 손에 들지 못하고 시간만이 흘러갔다. 그 꾸러
미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능력 있는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주
위 상황에 그렇게 민감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상자를 열어 보았다. 물류 관리론, 화물 운송론, 보관 하역론, 물류 관련 법
규 등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무슨 일을 시도 하
려하면 앞 전개와 뒤 결론이 딱 맞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와 동떨어
진 자격증이 무슨 소용 있다고 이 책들을 주문 했을까.
시험 날짜를 보니 삼 개월 남았다. 그날 하루 동안 내 마음은 동전 앞뒷면
처럼 뒤집어졌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해보자. 그것으로 남편 마음에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 할 수 있다면. 그게 아니어도 괜찮다. 내가 공부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면...'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타이
르지만 또 다른 내 마음은 시험 결과로 내 스스로 힘들어 할 걸 생각하니 망
설여 질 수밖에.
나의 새로운 공부는 더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직은 괜찮으리라 믿었던 머
리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순발력도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굳어버렸는지 더
디기만 했다. 한두 줄 읽고 나면 이미 머리 속은 다른 세상에 가 있고 겨우
넣어 놓은 것 다시 보면 캄캄한 기계 이름들. 어디 그뿐인가, 조금만 책을 보
아도 목에서부터 어깨 척추까지 뻐근해졌다. 밑그림부터 난감했다. 잡다한
집안 일은 왜 그리 많은지.
모두 잠든 밤 나만이 깨어 있다는 만족감에 한 밤을 지새우다보니 한 달이
금새 지나갔다. 알 듯 모를 듯한 책의 내용들이 눈에 익혀지고 책상에 앉아있
는 시간도 늘어났다. 성실함, 공부는 바로 성실함의 척도인 것을 모르고 예전
에 나는 참 불성실하게 산 것 같다. 좋지도 못한 머리만 믿고 시험 때만 당일
치기로 성적관리를 하면서 기억력 좋다고 우쭐댔으니...그것 마저 시시하게
여겨버린 결과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싶어진다.
이번에는 성실해야지 다짐하건만 모르는 공부를 하려니 도무지 팍팍해 머리
가 아팠다. 나이가 들어 피만 늘어난 건지 조금 알 것 같아 건방을 떠는 건
지, 안 하면 불안해 책을 펴놓고 놀면서 공부하는 척 하는 습성이 생겨 버렸
다.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담임했던 아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도 하고 싶은데요 아니 해야 된다는 건 아는 대요. 수학 책만 펴면 머리
가 아프고 이걸 배워 어디에 써먹나 싶어져요."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제 내가 그 아이가 되어 버린 게 아닌
가. 그래서 사람 사는 건 아무도 모른다고 했나보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났다. 눈이 침침해지며 눈물이 질금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노안인가 싶은 노파심으로 안과를 갔더니 난시와 근시가 겹쳤다며 안경
을 쓰란다.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못했던 미옥한 내눈은 이제 세상을 정확
보려하는 나에게 다른 보조물을 통해 보라한다. 다시 안경을 쓴 나는 그옛
날 고3으로 되돌아가 책을 보지만 기분 뿐이다. 집중하고 40분이 지나면 손
은 메모하고 머리는 흐리하게 닫혀 있었다.
시험 전 날 문제집을 풀다보니 새벽 3시였다. 6시 차를 타고 서울로 가야하
는데 그제야 잠을 잘 수도 안 잘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시계
알람을 5시에 맞추어놓고 누웠다. 아뿔싸 5시50분. 시간은 정확했다. 그 누
구의 개인 사정에 치우침 없이 똑딱거리는 소리만 낼뿐이었다.
시간은 나에게 항상 너그럽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에 쫓
기는 듯 살기 싫은 나의 합리화에 불과한 어리석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
게 주어진 기회들을 알람소리처럼 듣지 못하고 흘러 보낸 후 때를 놓쳤다고
허둥거리며 사는 지도 모르겠다.
진공 청소기 속으로 빨려드는 먼지처럼 어떤 흡입력에 의해 휩쓸려 들어가는
사람들, 그 무리 중의 하나가 되어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내 수험 번호가 붙
어 있는 자리에 앉아 앞 뒤 좌우를 살펴보았다. 주민 등록증 첫 자리 숫자가
7인 이들 틈에서 내 주민 등록증 사진을 보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내가 있
어야 할 자리가 분명 여기란 말인가.
시험지를 받아보니 예상 문제집 문제와는 너무 달랐다. 50분씩, 4시간. 사
지선다형의 짧고 간단 한 문제들 일거라 생각했는데 100분씩 2시간, 길고
아리송한 오지선다형 문제들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나
의 집중력 한계는 40분인데 그후 60분의 긴장을 어떤 힘으로 견디나...아직
은 못할게 없다는 나의 착각은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는 중년의 아낙임을 받아
드려야 했다.
초장부터 너무 얼어버린 탓인지 손이 발발 떨리고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그나
마 서글픈 배짱이 남아있어 내 머리를 바짝 조여 주었다. 숨소리와 시험지 넘
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분위기에서 내 앞사람은 나가겠다고 하고 다 끝날 때까
지 못나간다고 하는 시험감독의 실랑이는 나의 신경을 분산 시켰다. 다시
100분 후 나는 녹초가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내 앞에 나뭇잎이 뒹군다. 중간에 포기한 잎인지 제
몫을 다한 잎인지...괜스레 가슴이 울컥해 지며 눈물이 핑 돈다. 나는 왜 남
들이 탐내던 그 자리를 그리 쉽게 포기해 버렸을까? 그러고도 지금껏 그 자
리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고 살아왔음은 생활의 어려움을 못느끼며 살아다
는 것이 아닌가. 이제서야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왜 감사해야하는지 알것같
다.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보니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하다.
파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분명 저 구름도 어느
정점을 향해 가고 있으련만 그 과정을 즐기기나 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한
무리의 구름이 모양새가 흩어져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기는데 되돌아서 지우려
하지도 다시 그리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앞을 향해 간다. 그러다가 다른 한
무리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그들의 모양새를 만들면서 잘된 그림이든
잘못된 그림이든 자신의 갈 길만 가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고 되돌아서서 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리며 나도 가고 있다.
첫댓글 파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분명 저 구름도 어느 정점을 향해 가고 있으련만 그 과정을 즐기기나 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한 무리의 구름이 모양새가 흩어져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기는데 뒤돌아서 지우려 하지도 다시 그리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앞을 향해 간다. 그러다가 다른 한 무리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그들의 모양새를 만들면서 잘된 그림이든 잘못된 그림이든 자신의 갈 길만 가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고 뒤돌아서서 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리며 나도 가고 있다.
파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분명 저 구름도 어느
정점을 향해 가고 있으련만 그 과정을 즐기기나 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한
무리의 구름이 모양새가 흩어져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기는데 되돌아서 지우려
하지도 다시 그리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앞을 향해 간다. 그러다가 다른 한
무리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그들의 모양새를 만들면서 잘된 그림이든
잘못된 그림이든 자신의 갈 길만 가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고 되돌아서서 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리며 나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