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자 법전이 인정전이라면 왕이 가장 오래 머물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곳이 바로 침전인 희정당이다.
인정전과 선정전이 외전 즉 왕의 공적인 공간인 ‘궐’이라 하면,
왕가가 거처하는 내전 ‘궁’에 해당하는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은 외전 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궁궐의 동쪽에 위치하며 희정당의 북쪽으로 내전의 정궁인 대조전이 있다.
희정당은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이었다.
침전에 딸린 경전으로 평상복으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으로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이다.
인정전. 선정전. 대조전은 건물의 최고 위계를 나타내는 '전'(殿)인데,
희정당은 그 다음 위계인 '당'(堂)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왕의 침전인 희정당이다.
돌출된 모양이 우리 궁궐과는 모양이 다른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되면서
순종이 차에서 내려 눈, 비를 맞지 않고 침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지붕의 모양을 변형했다.
희정당 왼쪽으로 보이는 파란 청기와가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이다.
희정당은 임금과 왕비의 사적인 생활 공간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구중궁궐).
선정전 동쪽으로 맨 앞에는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이 자리잡고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등 부속 건물과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희정이란 '화평하고 느긋하여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는 즐거운 정치'를 뜻한다.
고종 즉위 직후 3년간 조대비가 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 희정당에 머물렀고 순종은 승하 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임금의 거처답게 거의 담 높이에 이르는 높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어,
이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행랑과 구별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 한쪽에 하월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었고 등을 두어 밤에 마당을 밝힐 수 있게끔 하였다.
동궐도에서 희정당은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기단 서쪽에는 아궁이가 건물 동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현재의 전각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로, 정면 9칸, 측면 3칸 주위로 툇간을 설치하여 통로로 썼다.
1920년에 재건할 때 서양문물이 들어와 중앙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좌우에 여러칸의 작은 방을 만들어 골방이나 목욕탕등으로 사용했다.
희정당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건축사에서도 주목된다.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며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 희정당의 요상한(?) 일본식 현관
앞에 지붕을 덮은 현관은 순종이 차를 타거나 내릴 때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재건되면서 돌출된 아치형의 서양식 건물 양식을
따랐다.이는 순종황제의 자동차 캐딜락이 들어올 수 있게 변형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희정당은 창덕궁의 본래 희정당이 아니다.
1917년 창덕궁에 원인모를 큰 불이 일어나 대조전과 희정당이 전소되었다.
이때 일본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희정당을 다시 짓지 않고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 다시 지었다.
총독부가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조선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의 정문으로 바뀌었다.
당시 복원하는 기본 방침이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따른다'라는 원칙으로 만들다 보니
우리 궁궐 본래의 모습을 잃고 요상한 모양으로 변했다.
1922년 희정당 현관 모습과 순종황제의 캐딜락 리무진(국립중앙박물관 사진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