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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에서 아버지와 만난 신산했던 삶의 여정에서 수없는 풍파와 고초를 겪었어도 어머니는 5남매를 깊은 모성애로 잘 길러냈다. 고향 영천에서, 울진에서, 경북 청송에서 기타 삶의 길목에서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던 부모님들이 울산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복된 선택이었다.
울산은 당시 석유화학 단지가 조성되며 공업화의 기치를 힘차게 내걸 때였다. 고진감래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울산에서 20여년 만에 마침내 작은 집 한 채를 장만하게 된 어머니가 맞닥뜨린 일은 부친의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서 막걸리에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퇴근하기 일쑤였고, 그런 아버지의 피곤한 발을 나는 세숫대야에 담긴 물로 마치 세례를 베풀듯 깨끗하게 씻어드리곤 했다. 술을 많이 드신 아버지는 현장의 사고로 나중에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으로 몇 년 생활하셨다. 그 후 술을 멀리하고 담배도 거의 끊었지만 아버지는 환갑 바로 직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서울의 신학교에서 수업을 받다 `부친위독 급래요`라는 전보를 받고 고속버스로 급히 울산 집에 내려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내가 기도라도 하면 살아나기라도 할듯 살아생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잠자듯 편해 보였다. 그렇게 부친이 돌아가셨어도 슬픔은 잠시였고 5남매의 연이은 결혼과 출산에 이어 손자들과 손녀들이 찾아올 때마다 어머니의 미소는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함박웃음이었다. 어머니의 사진첩에는 그런 구구절절 온갖 사연과 함께 진득한 삶의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빈집은 폐허처럼 스산했지만 야음동 일대의 재개발 소식에 딱히 집을 손볼 처지도 아니었다. 게다가 개발업체에서 집 팔라고 연일 찾아오는 바람에 머잖아 재개발이 되려니 했는데 벌써 3년이 훌쩍 지났다.
60년 된 야음시장이 재개발을 시작하자 제대로 장사를 못하는 세입자가 번개시장으로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장사해서 벌어 먹고 사는 것이 정상인데 보상비가 적다고 퇴짜를 놓는다니 뭔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 필자가 철거를 앞둔 어머니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예 예정에 없었던 일인데 개인 사정으로 모친의 자택에 입주하게 됐다.
부모님의 인생을 살펴보면 월세살이, 전세살이, 내집 마련, 출산과 육아, 자녀들 혼사, 손자 손녀들로 점철된다. 굽이굽이 그야말로 인간 삶이 낙화유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집성촌의 친인척과 문중들이 거의 돌아가셨기 때문에 앞으로 왕래가 없으면 사촌들을 길에서 봐도 모를 판이다. 가화만사성이란 가훈이 말해 주듯이 집성촌 사람들은 가난했으나 이웃과 담이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울 땐 서로 돕고 기쁜 일엔 함께 웃으며 삶을 함께 했다.
집성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던 초기에도 부모님 세대는 이웃들과 삶을 함께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낡은 사진첩 속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신산한 인생살이를 이어가고 있다. 명리와 이치와 계산에 빠른 사람은 부동산, 주식, 금으로 재산을 증식하려고 애를 쓰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소시민들이야 언감생심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왔을 때 가족들이 모두 무탈하면 그것이 축복인 줄 알고 살고 있다.
"태어나니 일제강점기요, 열심히 살아보려니 6.25전쟁이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니 고향 산천이 폐허와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고 하는 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의 탄식이었다. 그래도 그분들은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고 가열차게 살아왔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리품처럼 집 한채를 장만하고 얼마나 기뻐했을 것인지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 집에 다시 발을 들여놨다. 뼈와 살을 물려준 부모님이 전 재산까지 후손의 몫으로 돌려준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식들 잘되기를 하늘에서 빌어주고 있을 것이다. 부모의 은덕이라는 말이 새삼 되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