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황제. 효황후 어차 캐딜락 리무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1874~1926)의 어차 캐딜락 리무진(7인승.배기량 5153㏄)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1918년 제작했다.
순정효황후(1894~1966)의 어차 다임러 승용차(7인승.3309㏄)는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 제작한 것이다.
두 어차는 창덕궁 어차고에 장기관 보관되어 있었는데,
노후화와 부품 손실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1997년부터 5년간의
수리‧복원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현재는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순종 어차 캐딜락 리무진
미국 제너럴모터스사가 1918년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크기는 높이 210㎝·길이 478.8㎝이다.
20대 정도 제작되어 현재는 4대 남아있다.
순종효황후 어차 다임러 리무진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 제작했다.
크기는 높이 179.2㎝·길이 444.4㎝다.
당시 4대 만들어진 희귀차로 현재는 세계에서 두 대뿐이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소개된 지 120년이 됐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자동차는 조선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고종이 타려했던 어차다.
1902년 12월 조선의 대신들은 고종에게 신식문물의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칭경예식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참여해줄 것을 간청했다.
고종은 가뜩이나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고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강권에 밀려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고종 어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고 고종의 주치의로도 활동한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을 통해 들여왔다.
그러나 1902년 12월 개최할 예정이었던 칭경예식은 그해 겨울이 너무 춥고 나라 사정도 여의치 않아
그 다음해인 1903년에 열렸다.
1903년 수입한 고종황제 어차 러·일전쟁 때 사라져
그런데 고종은 자동차를 타지 못했다.
알렌이 섭외한 자동차가 수송수단이 번거로워 칭경예식이 열리고 나서도 4개월 후에 우리나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1903년 들어온 고종 어차를 두고 포드 리무진이니 GM 캐딜락이니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포드 리무진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소장은 <고종 캐딜락을 타다>라는 책에서
“두 회사 모두 칭경예식이 열렸던 1903년 설립되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기존 주장을 반박했다.
전 소장은 비록 알렌을 통해 들여왔지만 당시 포드나 GM 같은 미국 회사들은 4인승을 만들지 못했던 반면
유럽 자동차 회사들은 4인승 리무진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 착안, 유럽에서 들여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포드와 GM은 1903년 말에 가서야 4인승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03년 들어온 고종황제 어차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어차는 모두 7인승 대형 리무진으로 차체는 목조를 사용한 마차 형태로 완성됐다.
외부는 전통 기법인 옻칠로 도장하였으며, 문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무늬가 금장으로 새겨졌다.
내부에는 황금색 비단이 붙어 있으며, 차체는 철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졌다.
전체 모양은 마차와 비슷하다.
두 차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국가문화재(등록문화재 318,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GM 캐딜락은 20대 제작해 4대, 다임러 차는 4대 제작해 2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나라 백성들이 처음 본 자동차는 정황상 1911년.
역시 고종황제 어차용으로 황실에서 수입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4기통)이다.
2년 후인 1913년에는 순종황태자용 어차가 들어왔는데, 캐딜락(8기통)이었다.
수입한 연도, 제작연도 등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고 제각각이어서 정확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보다는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어차의 가격이 세계 최고가?
희귀종을 인정받아 한 대당 400만~500만 달러의 가치라지만 황제. 황후가 탔던 것을 감안하면 그 값을
매길 수없는 것으로 추정한다.
초기의 차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자동차시대를 개막시킨 순종과 의암의 캐딜락
고종에 이어 두 번째로 왕실에서 자가용을 탄 사람은 순종이었다.
왕실에서는 마지막 임금님인 순종황제를 빼놓을 수 없어 미국으로부터 1915년 V형8기통 엔진을 얹은
캐딜락 리무진 한 대를 들여와 타도록 했다.
이 캐딜락 역시 지금까지 실물이 전해와 2003년 복원되어 현재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이 캐딜락은 당시 20대 정도 밖에 만들지 않은 귀한 차로서 현재는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차와 합쳐
세계에 단 4대밖에 없다고 한다.
1945년 해방되어 독립을 찾아 대한민국 건국 초대 대통령부터 캐딜락을 다시 타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할 때까지 1954년형 캐딜락 푸리트우드 임페리얼 리무진을 탔다.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증했다는 이 차는 캐딜락 중에서 가장 컸던 경 방탄차로
V형 8기통 6000cc 230마력 엔진에 히터와 에어컨까지 달려 있었다.
이 모델은 후에 윤보선 제4대 대통령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현재까지 남아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GM은 세계적 VIP들을 위해 610대만 생산했던 희귀종이다.
1915년 의암 손병희선생 자가용 캐딜락 리무진
왕실이나 고관 대작들이 아닌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해 탔던 최초의 우리 민간인은 제3대 천도교 교주였으며
독립 운동가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었다.
선생은 서자로 태어나 정치의 부패, 적서차별, 반상제도 등 봉건적인 악습을 배척하고 못 사는 나라가 한이 되어
부의 축적과 교육, 그리고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쳐 나중에 3・1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애국자의 한 거목이었다.
1915년 의암 손병희의 캐딜락 리무진
손 병희선생은 35세 때인 1897년부터 민족 종교인 동학을 이끌어 오다가 부패한 조정에 대항했던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인 1905년경 동경에서 우리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해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때 일본에도 겨우 10여 대의 자동차밖에 없었다고 한다.
의암이 자가용을 탄 것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일본인들에게 과시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망명에서 귀국한 후 1915년경 일본에 볼일이 있어 잠깐 건너갔을 때 마침 공진회라는 국제산업박람회가
동경에서 열려 여기에 출품된 미국제 캐딜락 자동차를 보고 한 대를 사와서 자가용으로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의암의 자동차가 순종의 차보다 좋은 것을 알고
“내가 어찌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타리요” 하고는 순종의 차와 바꾸었다고 한다.
이 차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유리벽이 있어 의암의 대화를 운전사가 듣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의암이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지시할 때는 앞뒤로 설치된 소리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당시 운전사가 귀해 중국인 운전사를 고용했는데 서울 가회동 자택을 드나들 때마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