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나눔과 일치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 즉 생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고, 그를 위해 땀 흘려 일합니다. “삶에 대한 애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삶의 확인이며,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힘입니다.”
앞으로 5주 동안 주일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봉독하게 되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 첫 단락을 들려주십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은 네 복음서가 전해줄 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 이어 이 기적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의 긴 말씀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요한복음서의 빵의 기적의 초점은 바로 이 말씀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참 생명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전하며 “나누어 먹어라, 그러면 먹고도 남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나고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보리 고개’란 말을 아실 것이며, 농촌에 사셨으면 체험도 하셨을 것입니다. 끼니거리가 부족하여 콩나물 죽, 꽁보리밥, 칼국수, 감자와 옥수수로 끼니를 대신했던 기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는 시루떡을 하여 온 동네 집집마다 돌려 나누어 먹든 기억, 가난했지만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웃집 꼬마가 아프면 동네의 관심이 그 집에 쏠리고 좋다는 약을 들고 찾아 위문하고, 구 남매를 키우셨던 저희 어머니는 동네의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의원에 가기 전에 어머니의 처방을 받아 대개는 치유되었습니다. 따스한 정이 넘치던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나눔이 없기에 더욱 빈곤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식사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같은 음식을 먹는데 천국의 사람들은 살찌고 평화롭고, 지옥의 사람들은 깡마르고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남에게 나눔이 있고 없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긴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데 천국에서는 자신보다 먼저 앞의 사람, 이웃을 먼저 먹여 주어 모두가 배불리 먹어 평화롭고 풍요로운데 지옥은 자기만 먹으려하니 모두 먹을 수 없고 음식을 밖에 버리는 결과를 가져와 모두 배고프고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 이웃과 나누는 사랑이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두 사람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봉헌했을 때 예수님은 이 작은 희생을 통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다하더라도 나의 능력과 시간, 가진 재물을 주님께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희생을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일치를 호소하십니다. 진정한 나눔은 우리에게 사랑의 일치를 가져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모두를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 영성체는 같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받아 모심은 이웃과 일치와 화해를 약속하는 다짐이어야 합니다.
“억 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나누지 않으면 썩습니다. 그리고 썩은 돈은 인간도 부패시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가난해도 나눌 수 있고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생이 됩니다. 재물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목마르게 되고 나누면 나눌수록 배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성체 예수님은 나눔과 일치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