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원 지하철에 힘겹게 낑겨탔다. 임산부석 근처에 섰는데, 앉은 사람은 임신부는 아닌 듯 했다.
몇 정거장 더 가 임신부가 탔다. 비지 않은 자리를 보고 멀찍히 서길래, 앉은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켜 일으키고 임신부를 앉혔다.
내릴 채비를 하는데 임신부가 일어선다. 이 칸은 환승역이 가장 가까워 사람의 밀침이 심하다. 어깨빵을 백만번쯤 당해봤다.
출입문 가운데쯤 버티고 서서 임신부를 먼저 내보냈다. 혹시나 싶어 거리를 두고 졸졸 따르며 밀리지 않을까 지켜보다 자연스레 헤어졌다.
#2.
나는 수월한 임신부였다. 입덧도 없고, 불편한 곳도 없었다. 평소보다 배만 점점 부르고 아침밥 한끼 더 먹는 정도.
양수가 많아 쌍둥이냐 물을 정도로 나온 배로, 출산 2주전까지 왕복 3시간의 출퇴근을 겪었다. (일하다 애 낳으러 가는 로망이 있었지만, 배를 보신 이사님이 출근하다 애 나오겠다며 출근을 말렸다)
출산예정일이 겨울인 탓에, 패딩으로 돌돌 말린 몸으로 패딩으로 돌돌 말린 사람들 틈에 서면, 그렇게 부른 배도 감쪽같이 감춰졌다.
라떼는 말이야, 임산부 배지도 없었다.
만삭의 몸으로 한시간 반 동안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이동하는 게, 임신기간의 가장 큰 고난이었다.
지하철 정거장에 들어서면 부러 지퍼를 열고 배를 내놓기도 했지만, 패딩으로 가득찬 만원지하철에서 남의 배가 보일리 만무했다.
그때, 그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만 보면 벌떡 일어나 손을 잡아끌던 할아버지.
언제인가, 내 배를 보시고는 임신부인 걸 아신 후엔 내가 타면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몇번인가는 사양도 해봤고, 몇번인가는 다른칸으로 도망도 가봤지만, 한시간 반을 서서 가는 게 너무 고단한 나머지 나중엔 지하철에 오르면 할아버지를 찾곤 했다.
할아버지는 멀리서도 나만 보이면 손을 흔들며 이리로 오라고 큰소리로 부르셨다.
출산하고 휴직하며 사이클이 달라져 할아버지를 더 뵙진 못했지만, 가끔 노약자석을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3.
미혼때였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는데, 언젠가부터 만삭의 임신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양보를 잘 안해주는 탓인지, 종종 양보를 해주는 내 앞으로만 서던 임신부가 좀 얄미웠다. 양보해줘도 인사도 안하고 본척도 안하고 새침하게 쏙 앉아버리는 탓도 있었다.
나도 먼 길을 가야 하는 탓에, 가끔은 그 임신부를 피해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나서기도 했고, 몇번인가는 자는 척 하며 버텨보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부가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이 눈 앞에서 너울대면 좀 투덜대더라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버스안이 매우 혼잡하던 어느날, 맨 앞에 앉아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서로 밀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 혼란한 틈 사이, 익숙한 흰 장갑이 내 앞의 손잡이를 다급하게 잡는 걸 봤다. 놀라 옆을 보니 거의 울듯한 표정의 임신부가 사람에 쓸려 뒤로 밀려나려는 걸 간신히 버티고 서있었다.
아. 그렇게나 절실한 거였구나.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그간의 내 마음이 조금 미안해졌다. 사람들에게 임신부가 있다고 소리쳐 알린 후 밀려난 임신부를 불러 자리에 앉혔다.
그래도 인사 하나 없이 또 새침하게 앉는 임신부. 그러나 나는 더이상 얄밉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미 울듯말듯 절실하고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을 봐 버렸으니까. 당신의 흑기사라고 생각하자. 자리 맡아주는 매우 소소한.
그로부터 십여년 후, 나는 만삭으로 지하철에서 나의 흑기사를 만났다.
#4.
가끔 나는 흑기사가 된다.
그들은 모르겠지. 말 그대로 흑기사니까.
그래도 괜찮다. 나도 나의 흑기사가 있었고, 아마 지금도 있을테니까.
달곰님, 게시판을 잘 찾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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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잉 왜 눙물이...ㅠ 저도 그 시기를 겪어봐서 그런가 훌쩍~ 넘 따듯한 이야기네요. 언제나 좋은 글로 절 웃겼다 울렸다 하시는 요요~ 소듕한 달곰님 같으니라구 ㅋㅋㅋㅋ
^^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한 댓글로 예뻐라 해주시는 감사한 달곰님~>_<
너무 따뜻한 이야기에요. 우리는 서로 주고 받게 되는 그런 사이인데, 가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죠.
달곰님처럼 흑기사를 만났다가 내가 흑기사가 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다 함께 사는 사회라는 게 무색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런분을 발견하는 게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넘 따뜻한 글.. 읽고 좀 먹먹해졌어요. 달곰님의 흑기사였던 할부지도 멋지고 달곰님은 더 멋지고~ 따순 연말보내세요~
^^ 달곰님도 따뜻한 연말되시길 바라요
달곰님 같은 흑기사들이 있어서 추운 겨울 그래도 따뜻한 거겠죠? 할아버지도 고마우시고 달곰님도 멋지세요. 내성적인 임산부 분도 마음은 고마우실 거라 생각해요. ^^
^^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사실 벌써 십수년 된 일이라 뭐..ㅎㅎㅎ
와 가슴이 따뜻해져요 ㅎㅎ 넘 멋지세요~! 글도 넘 잘 쓰세요^^
^^ 칭찬 고맙습니다.
아우 뭉클해요 ㅠㅠㅠ 달곰님 글 너무 따뜻하고 좋아요
^^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글솜씨 좋은데다 내용도 따뜻해요. 작은 배려가 살만하게 만드는거죠♡♡
저도 남에게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달곰님처럼요~ㅎㅎ
달곰님 멋진사람^^♡♡♡
^-^ 달곰님도 멋진 사람인거 다 압니다.ㅋㅋ
고맙다는 한마디로 충분한데... 그 분은 왜 그 말을 아끼는건가요..
그땐 좀 서운했으나, 이젠 다 털어버렸어요.ㅎㅎㅎ
읽다가 눈물이 왈칵…글을 너무 잘 쓰세요. 게다가 마음까지 따뜻하시네요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아유 달곰님!!! 감동의 물결~~!!!
따뜻한 마음과 멋진 글솜씨!!
우리 달곰님 천사 흑기사♥
^^ㅋㅋㅋ 아이 부끄
따뜻한 글 감사해요 저도 흑기사가 되려고 노력해야겠어요
우리 서로서로의 흑기사가 되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