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어서 꼬릿글에 "무장공비님 멋져요>_<" 같은 답글을 달아 본인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
시키시라. 속물근성 많은 본인은 독자들의 응원을 먹고 산다. 으흐흐흐.
잡소리가 길었다. 슬슬 돌이 날아오니 우리 모두 본론으로 돌아가자.
에헴~에헴~ 험험~ -ㅅ-!!
이런 얄팍한 글 하나 쓰는데도 쓰는 주체(본인)의 성깔이 크게 좌우하는것이 인생이란 법
아닌가? 그렇다면 인생과 인생이 모여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모여서 얽어내는 역사또한
예외 이겠는가.
물론 평소에 [역사라는 말의 고삐를 쥔 기수는 돈이다]라는 지극히 천박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기 좋아하는 본인 이지만(으흐흐흐~ 황금 만능주의 만쉐이~). 가끔씩은 다른 관점을
취해보는것, 이 또한 음식으로 치자면 별미라고 부를만한 독특하고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사 관점을 [조헌]이라는 인물에 살짝 맞춰 보도록 하자.
너거들 독자제헌이여. 독자들의 머릿속에 조헌이라는 인물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조헌이란 인물을 디립다 파고 들지 않는 이상은 [칠백의총]이라던지
[꼴랑 칠백명으로 자살공세에 나섰다 전멸]정도의 십중팔구 아주 피상적인 수준의 지식만
있으리라 생각한다. 불장난과 책을 좋아했던 본인처럼 어렸을때부터 괴짜였다면 [옥쇄와
군욕신사를 실천한 성리학 광신자]라던지 [자살공격 끝에 왜놈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힘]
정도의 지식을 더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 얘기가 자꾸 엉뚱하게 흘러나간다.
여기서 본인이 하고 싶은말은 [조헌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역사 전공자 같은 특수한 위치에
있지 않은 이상 피상적이다]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부터 얘기할 조헌이라는 인물의 이미지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막말로 본인 꼴리는대로 정립시킨 이미지란 말이다 (물론 수집한 사료와
자료에 기초를 두었지만) 그런 이유로 본인 이 글 후편을 끄적거리면서 고민을 마이 해따.
이걸 쓸까말까 하고 . . . .
하지만 오랜 고민(대략 10초?) 끝에 결국은 쓰기로 해따.
무엇보다도 제 눈에 안경이라고 동일한 인물, 동일 사건에 대한 해석은 오만가지로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정도 면죄부를 들고있다면 사고를 쳐도 크게 칠 수 있을듯 해서 쓰기로
해따. 음흐흐흐흐흐흐.
[깐깐하고 똥고집에 자기가 아니다 싶으면 서슴없는 충고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호랭이
수염이라도 뽑을 인간, 하지만 그 만큼 책임감 있고 든든하며 믿을 수 있는…. 한마디로
바른생활 사나이.]
꽤나 피곤하지만 믿음직한 친구 아닌가?
뭐시라!! 독자5! 이런 친구가 엄따고? 인생 헛 살았다. 반성하시라.
여튼!! 굳이 친구가 아니더라도 독자제헌들 모두 주변에 이런 사람 하나쯤 있으리라고 본인
무장공비는 철썩 같이 믿는다. 여튼 본인이 나름대로 정립한 조헌의 이미지는 대략 위와 같은
것이다.조헌 이 양반이야 말로 사대부 중의 사대부요, 건전한 선비정신을 스스로 실천한, 우리
시대에는 죽어버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인것 가따.
본인이 여기에 그분이 언제 태어났는지나 끄적거리고 죽은 뒤에 무슨 벼슬에 추증 되었는지
떠들어 봐야 무엇에 쓰겠는가. 쓰바. 언제 태어났으며 죽은뒤 어떻게 되었는지 보다는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겠는가?
. . .독자제헌이여 이번에도 걍 [그런갑다~] 해주시라 . . .사실은 정초부터 이사를 준비중이라 책을 다 꾸렸다-_-;;; 그래서 뒤적거릴 자료가 별로 엄따 . . . 뭐!! 게다가 무조건 자료가 엄써서
하는 궤변도 아니다!! 본인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살고 죽느냐가 중요한것 아닌가!!
-독자제헌 : 너 우리한테 돌 맞아 죽어볼레 . . . . +ㅁ+
헉!! 그런 최후는 정말 실타//ㅂ//) 돌만 내려 놓으시라~ 본인은 여러분을 싸릉한다~ 아잉~♡
[퍽~!! 퍽퍽~~!! 아악-------!!!](死)
여튼;;; 본인의 평소 좌우명도 그러하거니와 자료의 부족 또한 겹쳤으니 걍 본인 꼴리는대로
글을 쓰게따;;;(뭔 상관이야!) 독자들이여 걍 [그런갑다~]하시라. 본인이 원래 꼬리대가리 엄따.
하여튼 조헌이..... 이 냥반, 본인이 결론 짓기로는 그런 사람이었다.
독자제헌들이여 저런 성격의 사람이 어떤지 잘 알것이다. 저런 타입의 사람 최대 단점은 주변
사람을 졸-_-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_-;;; 동기고 선배고 후배고 엄따. 티끌 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졸라 물고 늘어지며 사람은 겁나게 피곤하게 만든다;;
하물며 예나 지금이나 엉망진창인 정치판에서야!!
채근담에 말하길 [물이 너무 맑으면 큰 고기가 없으며, 사람이 너무 곧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조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성격은 [임직->파면->
낙향->은거->임직->파면->낙향->은거->임직->파면->귀양->임직….]이라는 졸라 산만한
싸이클을 무한 반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헌이 이 양반 성격은 정말 곧고도 불 같았다.
조헌 이 양반이 관직에 몸 담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조헌은 일종의
국비장학생 이라고 할 수 있는 유생들의 뒷바라지와 종묘제례, 제사에 소요되는 물건을
관리하는 벼슬자리에 있었다.
(독자제헌들께 정말 미안타;; 벼슬 이름이 생각 않나는데다 자료도 다 싸 버려서 엄따-_-;;;)
그러던중 하루는 대비로 부터 [불공에 쓸 향을 내달라]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조헌 이 양반.
대뜸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이 향들은 종묘제례와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낼때 쓰이는것. 함부로 내줄수 엄쏘이다]
새파랗게 젊은것이(당시로써는;;) 대비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니 판세가 어떻겠는가?
독자제헌들이여 당신은 그럴수 있겠는가? <국왕'S 마더>되시는 분께서 '감히' 불공에 드릴
향을 달라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할수 있겠는가? 더욱이 당시는 조선 중기, 후기와 같이
남존여비 사상이 바닥에 깔린 지극히 폐쇄적인 조선과는 달랐다. 여자 또한 남자와 같이
재산을 상속 받을 정도로 아직은 비교적 여자의 지위와 발언권이 높던 시대였다.
졸라 소심한 본인은 죽었다 깨나도 그렇수 엄쓸것 같다.
(솔직히 "아 예~ 그러문 입죠~^0^" 하고 얼른 내놨을것 같다.)
솔직히 이런때 대비마마께 잘 보이면 뭐 국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천박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모두들 생각해보자. 설혹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끽해야 향을 보내준 뒤에 혼자 뒤에서 궁시렁 거릴수 밖에 엄찌 않겠는가?
그런대 조헌, 이 양반은 그리 하지 않았다.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기 마련인
(보통 서열상 제일 윗사람이며 연장자니까) 대비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물론 조헌또한 선비였고, 조선은 숭유억불을 정책으로 내세웠던 만큼 <불공>에 사용될 향
요청을 거절했다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본인은 달리 해석하고 싶다.
"왕이라 하더라도 사초를 볼 수 없다!"
라고 당당히 외치는 사관의 정신,
"왕이라 하더라도 용봉장막을 함부로 칠 수 없다!"
라고 간언하고 죽어가는 선비정신.
조헌 또한 그런 것 ㅡ왕족이라도 나라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사사로이 쓸 수 없습니다ㅡ의
연장이 아닐까 하고 슬몃 생각해본다. 뭐 여기서 본인이 이래 나름대로 심각하게 떠들어도
[진실은 저너머에]지만 말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사실은 조헌이 괜히 심통나서 향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훠훠훠훠훠.
하여튼 사건이 커지고 나중에는 왕(선조)까지 나서서
-야..거 째째하게 굴지말고 쫌 줘라? 응? 울 오마니 보는데 쪽팔리게….
라고 슬슬 압력을 넣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조헌이 이 양반 . . .관직을 때려쳤다-_-;;
관직 때려지고 고향으로 낙향해서 밭갈고 공부나 했다. 일이 이쯤되니 선조.. 조금은 뻘쭘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냐-_-;
그렇게 그 사건은 그냥 묻혀 지는듯 하였다. 조헌이 낙향해서 밭갈고 공부하며 소일한지
약 1년이 되는때쯤 되서 선조는 다시 조헌을 불렀다.
-어이~ 조씨. 와서 전에 하던일 하라고.. 거 째째하게 굴지말고~
-나보고 또 불공 드릴 향이나 내놓으라고? 그러면 나 않해. 나 부르지마.
- . . . . . . . -_-^
글타. 우리의 조헌선생. 스카우트 제의를 무질러 버린건 물론이요 왕에게 깡 리며 공갈까지
치는 경지에 올라선 거시어따. 선조 일마. 일이 이 쯤 되자 나사가 풀렸다.
이거시 바로 조헌표 깡다구의 시작이었다-_-;; 조헌 이 양반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 수록
고집과 깡이 쎈 양반이었다. 옳지안타 싶으면 호랭이 수염은 물론 임금 상투도 쥐고 흔들,
아니 불알도 잡아 챌 성격의 인간이었다.
(근디 임금 불알은 뭐라 그러나? 용란(龍卵)? 옥환(玉丸)?)
이외에도 그는 무수한 [복직-파직-복직-귀양]의 싸이클을 겪는다. 지방 행정관으로 재직중
관인으로 민폐가 심한자를 잡아다 직접 문초하다 죽인일로 귀양도 갈 정도였으니 그의
대쪽같은 -무엇하나 빼고 보탤것 없이- 성격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귀양 생활중 아버지가 돌아가셔 이것이 조헌에게 천추에 한으로 남을 지경이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임종전 소고기를 드시고 싶어하셨으나 가세가 어려워 못
사드렸다는 말을 동생으로 부터 전해 듣고는 조헌은 평생 소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 그 한이야 가히 짐작이 가능할 듯 하다
(이와 더불어 큰아들 하나가 저렇게 윗사람들과 치고 박으며 해고되고 귀양가기 바쁘니
노인네 고기 한 점 못먹일 정도로 집안꼬라지 또한 말이 아니었던 것도 짐작이 가능할듯 하다)
더군다나 이렇게 낙향과 귀양을 반복하는 와중에서도 선조에게 무수한 상소장을 올리니
그 소심줄보다 질긴 끈기 또한 알만하다. 급기야 선조는 나중에는 조헌의 '조'자만 들어도
히스테리를 부릴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캭~~ 또 조헌이가 상소 보냈냐!! 이런 상소쟁이!! 나 이거 않 읽어!!
그의 깡다구 성격은 임란 발발 직전 일본에서 사신이 왔을때의 사건에서 가장 극적으로
들어난다. 임란 발발 직전 겐소를 비롯한 몇몇 일본 사신들이(아마 전쟁전 위력정찰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서울로 입성했다는 소식을 고향땅에서 전해들은 조헌은 그날로 상소문 하나
썩썩 쓰고 도끼를 하나 어깨에 걸머 매고는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는 광화문 앞 한복판에 넙죽 엎드려서는
-악~ 씨바~ 저 새끼들은 다 간첩이여!! 다 죽여버리고 전쟁 준비해야되!! 악~!!
하고 읍소(泣所), 그러니까 울면서 간하였다. 솔직히 말이 좋아서 읍소지 그야말로
서울 한복판에서 지-_-랄, 발-_-광, 땡-_-깡을 쓰리콤보 이단 옆차기로 부린거다-_-;;
그리고는 한 술 더 떠서는
-여기있는 도끼로 저놈들 다 쳐 죽여야되~!! 쓰바 저것들은 간첩이라니까~
그게 아니면 여그 이 도끼로 날 쳐 죽여라!!
라고 배째라식 무기한 농성을 벌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말이 좋아서 읍소니 상소니 하지
요새로 치자면 청와대 앞 사거리에서 왼손에 석유통, 오른손에 라이타들고 그 짓거리를
하는건데 그 쪽팔림이야 오죽 하겠는가? 깡도 보통 깡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개깡'이어따.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조헌은 졸-_-라 큰소리 쳤다.
-쓰바!! 전쟁나면 젤 먼저 도망갈 것들이!! 니들 낭중에 산속으로 피난가면서
내 말을 곱씹을 꺼다!!
2백년 넘게 커다란 변란 하나 없이(물론 작은 규모의 난은 서너번 있었지만) 지내며 평화무드에
빠져들었던 사람들로서는 그야말로 광인(狂人)의 짓, 그야말로 미친짓에 불과했다. 우리의
선조도 이 쯤되니 머리가 졸 지끈거렸다.
외국사신도 와있는데 '개깡'부리는 조헌이라니 . . .
선조실록에는 당시 선조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고 한다.
-조헌이 일전에 망령된 참소를 일삼기에 귀양을 보내었는데 이제와서 또 저와 같이
행동하니 조헌은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로다.
독자제헌들 이해하기 쉽게 수식어 띄고 감정 좀 넣어서 풀이하면 다음과 같겠다.
-이런 닝기리 썅썅바!! 조헌이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어째 쪽 팔린줄도 몰라! 아~ 쓰바!!
못난놈이 못난짓만 골라한다고 결국 하루 종일 히스테리를 부리다 지친 선조는 조헌을
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리고 이듬해 임진년 조헌은 유배지에서 전쟁발발의 소식을 듣게 된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밀고 오는 일본군. 그 진격속도는 놀라운것 이었다. 그리고 선조는
8천 군사 탄금대에서 꼴아박고 난감해지자 달래강에 풍덩한 신립의 소식에 쇼크 먹은체 짐
꾸리다가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되따.
-아 쓰바-_-;; 그 성가신 상소쟁이 말대로 되뿌렀네-_-;;; 이제 쪽 팔려서 어쩌지 . . . .
에이씨!! 할 수 엄찌. 나 죽었다 해야지 뭐. 어이!! 도승지!! 편지 한 장 대필해라!!
며칠후 전쟁소식을 들었으나 귀양으로 매여있는 몸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조헌에게 선조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날아 들었다.
-야! 조헌아!.. 그게.. 그러니까.. 미..미.. 에이씨! 야! 조헌아 졸-_-라 미안타. 내가 잘못해따!!
귀양 보낸거 없던걸로 해줄께. 응? 니가 하자는대로 다할께? 응? 그러니 가서 좀 싸워줄래?
- . . . . . . . .
-아~씨!! 우째 대답이 엄냐? 응? 내가 잘못 했다니까? 삐졌어? 아이 그러지 말고? 응?
- . . . . . . . .
-아 증말~ 이거 왜이래~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자너? 않그래?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자네~
응? 나 한번 만 살려주라. 조헌아~ 응?
- . . . . . . . . 성은이 망극 하여이다~
물론 외적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집안싸움 할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선선한 조헌의 대답이었다.
(니미럴 . . . . 이래서 왕이 좋긴 좋구나-_-;; 쓰바)
귀양지에서 풀려난 조헌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로 내려가 옥천과 보은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며 의병을 모으기 시작해따. 이제 조헌. 이 냥반의 개깡과 쇠고집이 일본군을 타겟
삼아 120% 발동되기 시작했으니 . . . . 일본군 이제 잠 편하게 자기는 다 글렀다 으흐흐흐흐흐.
<이노무 쒜끼들 우리땅에서 꺼져!!>
앞서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조헌은 4월 하순께, 그러니까 전쟁이 발발한지 채 2~3주가 지나기
전에 선조 넘아의 징징거리며 사정하는 편지-그걸 어명이라고 부르던것 같다;;-를 한 통 받고는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조헌은 귀양지에서 풀려나기 바쁘게 거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따.
신속하게 자신의 고향(=활동거점)으로 돌아온 조헌은 지방향반들과 문무인들을 규합하여
5월 하순경에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했으며, 충청도 서남지역을 순회하며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
2달여 만인 7월 하순경에는 이미 16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게 되었는데 이는 여러가지로
감안해 봐도 상당히 신속한 행동이어따.
(독자제헌이여 조헌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이해 않가시는가? 글타면 직접 해보시라-_-;;;
1600명에 창 하나만 들려주고 밥 한 공기씩만 먹인다 쳐도 본인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토 나올것
가따(=ㅠ=; ) 초보는 전술을, 고수는 보급을 공부한다는 군사격언을 다시 한번 상기하시라.)
조헌은 1600여명의 병력과 함께 충청도 보은 지역으로 진출한후 승장 영규가 지휘하는
승군 1천명과 합류함으로 일단의 군편성을 마쳤다. 하지만 조헌이 이렇게 전세를 가다듬을 때
까지도 전황은 숨 가쁘게만 돌아갔다.
전에 상편글에서 길게 노가리를 풀었다시피 조헌이 한참 의병을 모집하고 있던 6월 중순경에는
평양성 함락을 기점으로 일본군의 전격전이 대강 마무리 지어졌으며, 바다에서의 일본군의
패배가 이어졌다. 이에 일본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충청도를 점령하고 이를 교두보로 삼아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출을 모색했으니 7월 초순경의 웅치와 이치전투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이 두차례 공세는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격퇴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었으나 일본군이
전라-충청도의 접경지대인 금산일대에서 계속 자리잡고 있는한 조선은 머리위에 불화로를
올려 놓은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상편글의 설명, 아마 독자제헌들도 기억이 날거이다.
(기억이 않나시는 분은... 알아서 반성 하시라...-_-;;;)
굳이 [전라도 진출의 교두보]라는 이점을 제외한다 해도 교통의 요지인 충청도는 일본군에게나
조선군에게나 중요한 땅이었다. 이해가 않가신다는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교통요지인 대전과
천안이 어느 동네에 쳐박혀 있는지 우리나라 지도를 살펴 보시기 바란다.
쉽게 말해 만약에 본인이 [체제전복]의 깃발을 내걸고 충청도륵 점령, 모든 충청도 길을 콱!
막아불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시라 이거시다. 아마 독자제헌 너거들은 단박에 위아래로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될거시다. 음흐흐흐흐흐흐 -_-+
(뭐!! 비행기타면 된다고!! 음-_-+ 한 3~4대만 공중폭파 시키면 누가 탈까나~ 잇힝~)
일본군 점령지가 부산에서 평양까지 대각선으로 반도를 종단하는 형태였던 만큼 일본군에게는
중간연결지. 즉 사람으로 치자면 허리와 다름엄는 충청도 지역이 매우 중요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인해 서해 진입로가 봉쇄된 당시로서는 충청도 일대의 연결로가 실함될 경우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선발대는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하게 고립될 위험조차 있었다.
더욱이 비교적 험악한 지형으로 인해 수운이 발달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한강을 통해서
강원도와 경기일대가 연결되고 경상도 접경지대에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충청도의 가치는
더욱 부각 되는것이어따.
여튼 각설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충청도는
[일본군 남북 연결로]와 [전라도 진공의 교두보]라는
두가지 요점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일본군간의 밀고당기는 힘싸움이 일어날수 밖에 엄는,
그런 곳이었다. 당연히 조선군은 이곳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런 이유로 조헌이 아직
한참 병력을 모으고 있을 무렵인 7월 초순경에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의 주도로
제 1차 금산성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정황을 대강 순서대로 논하자면 다음과 가따.
[전라도 진공을 위한 충청도지역의 교두보 확보]라는 임무를 띤 고바야가와의 7군이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방어를 포기한 금산을 점령한 것이 7월 7일이었고, 이에 앞서서 하루 먼저
출발한 안고쿠지의 6군이 전주를 향해 진군하며 웅치에서 조선군과 맞장을 깐 것이 8일 이어따.
고바야가와의 7군 또한 전주로 진군을 개시 7월 9일 조선군과 이치에서 맞짱을 까게 된다.
하지만 앞서서 상편글에서 설명했듯이 안고쿠지의 6군은 사흘을 죽어라 싸운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7월 9일경 웅치를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고바야가와의 7군은 7월 8일 하루
종일의 격전끝에 이치에서 권율의 고지 방어전-FM버전-에 작살이 남으로 전주로의 진군을
포기하고 오후 4시경 금산으로 철군한다.
그리고 고바야가와의 7군이 금산으로 철군한 바로 다음날인 7월 9일날 금산성으로 광주출신의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7천여 의병을 이끌고 금산성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당연히 7군 오야붕인 고바야가와씨, 졸라 쫄았다.
애시당초 조선으로 출병했을 때의 병력은 1만5천 가량 되었으니 언뜻보기에 전력상으로는
압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아닌 것이 충청도의 기타지역의 치안유지와 후방경비를 위해
분산배치 시켜놓은 병력도 그 숫자가 상당하거니와 (금산만 충청도가 아니다 독자제헌이여)
무엇보다도 바로 전날 FM대로 까대는 권율에게 배나무 고갯길에서 손발리 오그라지게 졸라
두들겨 맞은 후유증이 심했던 것이다.
졸라 쫄은 7군 오야붕 고바야가와씨 금산 성문을 걸어닫고 그 안에 틀어 박혔다.
-아~ 씨바~ 이젠 어쩌지? 아~ 씨바씨바씨바씨바~
9일, 고경명이 이끄는 조선군은 30명 안팍의 돌격조를 편성해 성문을 폭파하고, 민가를 불태워
연기로 일본군의 시야를 방해하며 포격을 가하여 성내의 건물들을 불 태우는 등 종일 공격을
퍼부었으나 지극히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일본군이 지키는 성을 탈환 하는데는 실패 하고 만다.
날이 저물자 공격군을 철수시킨 고경명은 야습에 대비, 야음을 틈타 복병을 배치하기 위해
몰래 출성한 일본군도 수십여명을 사살했다.
10일,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으로 집중투입했다.
씨바 거리면서 조선군의 진형을 살피던 고바야가와씨, 서문에 공격이 집중되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 하다가는 동문의 공세는 비교적 약하다는 보고를 듣고는 짱구를 굴렸다.
-야 이 쒜끼들아~ 죄다 동문으로 튀어나가자~~ 동문이다~ 늦는놈은 밥없다!! 공격!!
7군 오야붕 고바야카와 지휘아래 과감하게 출성공격을 감행한 일본군은 비교적 포위망이
얊은 동문의 조선군들을 하나씩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곳을 책임지던 곽영 휘하의 관군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함으로 조선군의 포위망은 구멍이 뚫렸다.
동문 포위망을 돌파한 일본군이 우회를 성공해서 후방을 압박하고 서문의 일본군도 과감한
출성공격을 감행하자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큰 혼란에 빠진 조선군은 결국 패배하게 되어따.
진영이 무너지자 대빵 고경명에게 탈출을 건의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고경명은 이를 거부하고
전투를 끝까지 독려 했으며 고경명을 돕던 유팽노 안영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로서 전라도 침략의 교두보인 금산성을 탈환하려는 조선군의 1차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거시어따. 아 곽영새끼 좀 더 버티지 쓰바.
<요걸로 끝인줄 알았냐!! 뎀벼 쒜끼들아!!>
고경명 휘하 7천 전라도 의병들이 시도한 금산성 탈환전 1라운드는 일본군의 과감한 출성
공격으로 인해 조선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주장인 고경명 이하 다수의 장수들이 전사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나름대로의 의의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이치에서 큰 손실을 입은 일본군에게
재차 공세를 가함으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작전에 막대한 심리적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고 이런 상황에서 8월 초 조헌이 이끄는 3천여명의 병력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당시 청주성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휘하의 일본군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우여골절끝에
조선군이 졸라 몰려 왔다는 보고를 접한 일본군이 긴장해서 성밖의 조선군을 빼곰이 내다보니
그 몰려왔다는 조선군이 졸라 웃겼다.
정규군도 아니고 그나마 무장이나 군복도 통일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방어사 이옥이 이끌고
참전한 5백명의 정규군(관군)을 빼면 하나같이 오합지졸로 보인거시어따.
무리도 아닌게 당시 의병의 무장은 다양했다.
정규군이 아닌만큼 얼마 않되는 창검, 활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들을 제외하면 의병들의
대다수였던 농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쇠스랑, 낫, 도끼 같은 농기구 같은 농기구나
죽창, 환도와 같은 허-_-접한 무장이 대부분이었으며 승병들 중에는 곤장.
그러니까 나무몽-_-디로 무장한 사람도 있었다니 솔직히 참으로 무장의 수준이 거시기 했던
것이다. 방어구 또한 지갑(종이갑옷) 부터 시작해서 무쇠통판이 들어있는 간단한 수준의
가죽갑옷이나 장수들이나 입을수 있는 두정갑까지 너절하게 섞여 있으니
이런 조헌의 의병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때는 한참 더워지는 8월 초순경. 더위를 타던 일본군은 이런 조잡하기 그지 없어보이는 이런
조선군을 보고는 뒤집어져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더니 간이 부어서는 출성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번거로운 갑옷과 방어구도 홀랑 벗어버린 체
일본의 전래식 빤-_-쮸;; 그러니까 훈도시 차림으로 창칼 하나씩만 덜렁 들고 나와 버렸다.
-얘들아 덥지? 빨리 쫒아 버리고 들어가서 쉬자. 응?
빤쮸하나 차고 나와서 조총을 쏘아대며 기세를 올리는 일본군을 본 조선군 당연히 졸라 어이
없었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개호로 샥끼들!!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냐!!
-썅!! 모가지를 뽑아다 똥꾸녕에 박아뿔라!!
-니미 쒸팔!! 싹 다 쥐겨버려러어어!!
-저놈들이 쌩가죽 갑옷을 입고 나왔구나! 이놈들아!! 옷이나 입어라!! 전군공격!!
조헌의 가벼운(썰렁한?) 개그와 함께 전투력이 120% 증강된 의병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하는 조선군을 맞이하여 맹렬하게 조총으로 제압사격을 펼치는 일본군을 조선군은
지형과 수목을 이용 교묘하게 사격을 피하며 우회하여 포위한후 사방에서 활로 집중사격을
가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형에 의존한 집중공격은 무서운 법이다. 음.
조총쏘던 넘아들이 죄다 고슴도치가 되서 벌렁 자빠지니 일본군 졸라 당황했다.
하지만 그래도 검마들이 하나 희망을 거는 것이 조선군은 육박난전에 졸라 약하다는것이었다.
하물며 무장도 제대로 통일 않된 이런 잡병들에게야!!
-캬악~ 도스께끼!(돌격!)
하며 전병력을 동원해서 조선군에게 육박전을 걸어보니. 이게 왠걸. 잡병치곤 졸라 잘 싸우는
것이어따. 농기구로 때린다고 사람 않죽는다는 법은 엄써따. 오히려 때로는 그 거대한 크기와
무게로 인하여 창칼과 같은 정교한 동작은 힘들지만 단순함에 깃든 위력을 끌어낼수 무기가
될수도 있는 것이 농기구들이었다.
독자제헌들이여 기억하시라. 서양의 빌,헬버드,워엑스와 같은 중장갑 상대용의 무지막지한
장대무기들은 대부분 그 기원을 농기구들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낫으로 찍어서 끌어내리고 쇠스랑으로 찍고 도끼로 갑옷이고 뭐고 아작을 내는데 일본군,
방도가 엄서따. 더욱이 일본인이 왜 왜놈으로 불렸던가? 우리네보다 머리통 하나씩은 작다해서
키 작은 난장이 왜놈들이라고 비하해 부르던 넘들이 아니었던가?
평생에 온갖 잡일들로 단련된 솜씨로 작살을 내는데 너절한 무장만 보고 방심하고 알몸으로
기어나온 일본군들 정신이 한 개도 엄써따. 그야말로 우락부락하기가 범강장달이 같은
승병과 민병들이 낫으로 풀 베듯이 왜군을 쓸어버린 거시다.
일본군들 이쯤되니 사태가 이상하다는거 똥꼬가 아리도록 통감을 했을 꺼이다.
-악!! 이게 아니네!! 쓰바!! 퇴각! 모두 성내로 퇴각!!! 캭!!
이때를 노칠 조선군인가. 곤-_-장들고 달려드는 일본군 하나 죽사발로 만든 승장 영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 시끼들 도망간다!! 조져 버려어어어!!(이게 스님이 할 소리냐..쿨럭…)
당연히 기세를 탄 조선군의 공성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당황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대나무 사다리를 성벽에 걸고 성벽을 타넘기 시작했다. 청주성 탈환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던 거이어따. 그런데 이게 왠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그야말로 한치앞도 않보이게 쏟아지기 시작한 거시었다.
조헌 이 냥반도 재수도 지지리 엄찌 쓰바……
-하늘의 뜻이로구나….대략낭패…
하고 중얼거린 조헌은 병사들을 철수 시키고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 내리는
폭우를 피해 금산 서면 산봉우리에 진을 쳤다. 사태가 그쯤되자 청주성 내에서 실컷 두두려
맞다가 간신히 정신차린 일본군은 발칵 뒤집혔다.
-아 졸라 무서워따 ㅡㅜ
-부처님이 도우셔서 살았다..졸라 무서워쪄…오흙..ㅜㅜ
-오야붕~ 이제 우리 어쩌죠?
-. . . 에이씨!! 나도 몰라!!
-오야붕이 나가서 싸우자고 그랬자나요!!
-조선군 보고 니가 제일 크게 웃었자네!!
-오야붕이 갑옷도 벗고 나가자 그랬자나요 씨이~
-아냐!! 나까무라가 그랬어!!
-내가 언제요!! 썅!! 어쨋던간 오야붕 어쩔꺼에요, 쟤들 졸라 무섭네요.
-맞아요!! 내일이면 또 와서 쥐랄을 틀을텐데 어쩔꺼에요 오야붕!!
-얘들아!!
-???
-도망가자~ 잇힝~♡
-아이 조아~ 꺄하하하하~
글타-_-;; 일본군이 폭우와 야음을 틈타 청주성을 버리도 후퇴함으로 다음날 조헌이 이끄는
조선군은 청주성을 탈환하게 된다. 이때가 8월 2일. 조헌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청주성을
3개월 여만에 탈환하고 일본군의 남북연결로 중 하나를 끊어버리니 이만하면 데뷔전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만한 전과였다.
첫댓글 ㅎㅎㅎㅎ 재밋습니다. 다음편도 정말 기대되네요.^^ 그리고 무장 공비님의 말씀 "초보는 전술을, 고수는 보급을" 저도 동감입니다. 아무리 전투력이 뛰어난 군대라고 해도 하루만 굶으면 끝장이죠.
또 정신동결입니까? 그럼 3편은 언제 나온다는 겁니까!!!!!! 끄아아아아악!!!!!!!!!!!!!!!!!!!!!!!!!!!!!!!!!!!!!!!!(정신병원에 끌려간다)
무장공비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비님 멋져요!!!'(으으으...)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 ^ ~
정말이지 재밌는 글이군요. 저런식으로 유명한 고대/중세 전쟁을 쓰면 참 재밌을것같습니다. 추신: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