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1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한 것을 한 언론은 ‘예수, 매춘부 옹호 발언
파장’이라고 보도 하고 한 언론은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사주하다‘라고
보도했다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여론이나 언론의 평가가 사람들의 편견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풍자함입니다.
요한복음 12:12절 이후의 말씀은 유대인의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편견의 핵심적 원인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하십니다.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편견을 바로잡아 주려 하십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동일해 보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편견 때문에 본질을 놓쳐 버립니다.
동생들이 초막절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명절이 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찿아 다닙니다.
군중들 가운데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좋은 사람이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야, 그는 백성을 속이고 있어‘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속인다고 왜곡된 편견을 가질까요?
#2
초막절 명절 기간이 거의 절반쯤 지났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신기해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제대로 공부한 사람만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이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말세에 내가 성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행 2:1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님으로부터 살아서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정결의식을 행하려고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옵니다. 성령님은 그 시각에 시므온을 성전으로 인도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게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언을 합니다.
시므온이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 성령의 계시를 받고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노인입니다.
성령님이 계시하시고 인도하시고 예언하게 합니다.
“주권자이신 주님,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을 놓아 주셔서 내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주님의 이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빛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축복하고 예언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아기를 믿지 않아 망하기도
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때 당신은 마치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생각은 다 드러날 것입니다“(누가복음 2:25-35)
#3
예수님을 무식꾼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글을 읽으실 줄 아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서로 빈정거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면 내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내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대인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핵심적인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불의가 없다“(18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만 그 속에 거짓과 불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거짓과 불의의 수단이 됩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일지라도, 수도 없이 많은 하나님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 받고
성경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도 당시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들어도, 예수님의 교훈이 대단하다고 놀란다 하더라도
인생의 목적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여전히 편견과 거짓과 불의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므로 예수님을 오해하고 신성모독자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신들렸다고 매도합니다.
발단은 예수님이 안식일 날 38년 동안 앓고 있는 환자를 고쳐준 일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을 깨트리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 하는 말을 율법 준수라는 겉모양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풀어 설명해 주심으로 유대인들의 편견을 버리라 촉구하십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증명하는 표식입니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만사를 제처 놓고 할례를 행합니다.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다음 날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근거로 유대인들의 자기 모순을 지적합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너희는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고 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사람이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완전하게 고쳐 주었다고 너희가 나에게 화를 내느냐?
겉모양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23-24절)
할례도 일이 아니냐? 그런데도 안식일에 할례를 베푸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지
않니? 왜 그렇지? 할례의 겉모양보다 할례 속에 담긴 본질-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니? 안식일의 겉모양보다 안식일에 담긴 본질이 더 중요하지 않겠니?
그러니 겉모양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공의(하나님의 사랑)으로 판단해
형식적 논리의 편견에서 벗어나라 하심입니다.
#5
예수님에 대하여 편견을 갖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25-27절) 그때 어떤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 이 사람은 당국에서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냐? 이 사람이 터놓고 말해도 그들이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을 보니 지도자들도 이 사람을 진짜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어디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사람이 난 곳을 알고 있지 않은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갖는 편견의 이유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가지고 예수님을 죽여야 할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을 비아냥 거립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들이 알고 해석하는 성경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관한 지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입니다(이사야 9:6-7,미가서 5:2)
또 하나의 지식은 메시아는 하늘 구름을 타고 홀연히 임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다니엘 7:13, 말라기 3:1)
이런 메시아관을 갖고 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초라하게 태어난 평범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비아냥이 당연해 보입니다.
땅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답답하셔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한 두 번 한 말이 아닙니다.
듣지 않으려 하니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안다 하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따로 계신다. 그분은 참되신 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28-29절)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시는
외아들이 그분을 알리셨다“(요한복음 1:18)
“하늘에서 내려온 나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3:13)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요한복음 6:38)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요한복음 8:29)
#6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는 그릇된 편견 때문에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편견은 그릇된 판단의 원인이 됩니다. 편견은 사람의 마음을 닫아 버리고 눈을 가립니다.
편견은 오해와 분쟁을 일으킵니다. 편견은 당을 짓게 만듭니다.
편견은 다른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 원인의 상당 부분도 편견 때문이 아닙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편견을 고착화시키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편견의 이유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결과는 아닙니까?
인종에 대한 편견, 학벌에 대한 편견, 출신에 대한 편견, 지역에 대한 편견,
외모(姓, 장애, 미모..)에 대한 편견, 姓 편견, 종파/교리에 대한 편견....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 바리새인 관원 니모데모를 만나기도 하고
사마리아의 이름 없는 여인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경계선이 허물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겉모습으로 판단한
모든 경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