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아들을 키운 한 여인에게
연전에 옥천을 지나갈 기회가 있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정지용문학관에 들렀습니다. 방명록을 기록해 달라는 해설사의 부탁에 붓을 잡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그립다”라고 썼습니다.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라던 “향수”가 문득 생각나 멈칫거림도 없이 그렇게 썼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軒軒丈夫에 天衣無縫한 삶을 살다 간 분이였습니다. 내가 성장할 무렵에는 몹시 가난한 소작농으로 사셨습니다. 돈이 없어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한 채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 다녔는데 쉴 때면 아버지와 돌팔매질로 멀리 던지기 내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길 때면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아버지는 천부적인 美聲을 타고나셔서 사랑방에서 긴긴밤 “심청전”을 읽으실 때면 동내 사람들이 모두 훌쩍거렸습니다.
어머니는 곱고 착하기만 한 여인이었습니다. 딸 부잣집에 4대 독자, 쉰둥이로 나를 낳았으니 자식 성화가 오죽했을까? 초등학교 갔다 오면 엄마 젖을 빨며 국어책을 흥얼거렸고, 엄마는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린 채 바느질을 하셨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젖이 안 나와 이웃집 영택이 엄마에게 젖동냥을 했고, 엄마 없이 보챌 때면 시집도 안 간 누나가 젖을 물려 달래며 키웠다고 합니다.
철이 들 무렵, 나는 문득 두 분이 다투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면서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늙고 가난하게 되자 뒤늦게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더 이상 압박과 고통을 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恨 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나는 내가 나중에 저렇게 되면 어쩌나 싶어 방 모서리에서 오들오들 떨며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졸도하면 오밤중에 침쟁이 김법사를 부르러 개구리 소리만 들리는 논두렁을 달렸습니다. 얼마나 무섭던지 .... 내 사춘기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1957년, 열다섯 살에 나는 고향이 싫어 서울 시구문 밖에서 가게를 한다는 누나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나는 내가 만든 개다리 책상을 부셨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여인의 흐느낌이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엄마가 부엌문을 잡고 울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나에겐 모정이라는 것을 느낀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고향에 내려갔는데, 잠결에 부모님이 내 다리를 만지며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컸어” 나는 자는 체하며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 명절 때가 되면 엄마가 보고 싶어 고향에 간다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장가를 갔습니다. 아내는 서울의 개명된 집안 딸이었습니다. 나는 헤어진 지 7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모시고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낯설고 멀었습니다. 그 뒤 10년을 중풍으로 누워 계시다가 내가 유학하던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제전화를 받았을 때 불쌍한 한 여인에 대한 연민뿐, 울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말에 비행기가 없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나의 遺棄불안과 分離불안은 결혼 뒤에 더 심해졌습니다. 늘 엄마나 일행이 나를 떼어놓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꿈을 지금도 꿉니다. 병원에 갈 때도 아내가 데려다 줍니다. 지방 학회에 갈 때면 역까지 데려다 주었고, 돌아올 때면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함께 상경한 동료 교수들이 나자빠질 듯이 놀랐습니다.
아내는 “동갑내기 아들”을 치다꺼리하느라고 그렇게 45년을 보냈습니다. 나느 아들이 하나인데 아내는 아들이 둘이랍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더 보채고 저지레 한다고 푸념합니다. 내가 이룬 것은 없지만 이 여인이 없었더라면 이나마 사람 노릇을 했을까?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돌아보면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나와 또 결혼하겠느냐는 물음에 아직 대답이 없습니다.
오늘따라 아내의 귀가하는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글/신복룡 건국대학교대학원장을 지냄 “한국분단사”, “한국정치사상사”를 출판했고, 요즘 “삼국지”를 번역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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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효산2750 원문보기 글쓴이: 효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