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8년 10월28일 여러 언론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황성옛터(원제 : 황성의 적(跡))’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가 98세의 나이로 생존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황성옛터’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는 초창기 대중가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노래를 1932년 처음 발표한 가수가 이애리수다.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황금기라 할 193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린 가수였던 이애리수는 1935년 결혼과 함께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거의 세간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이로 보아 당연히 사망했으리라 추정되던 사람이 살아 있다니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생존 뉴스가 보도된 1년 후에는 다시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또 한 번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본명이 이음전(李音全)인 이애리수는 1911년(1910년이라는 설도 있다) 개성 출신이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희극배우였던 외삼촌을 따라 극단에 들어가 1920년대 말부터 무대에 올라 배우가 되었고, 연극 막간에 노래를 부르는 막간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에는 막간에 노래 부르기로 되어 있던 이애리수가 나오지 않아 관객들이 항의를 하고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벌어질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내면서 레코드 가수로 데뷔했고 1932년 그 유명한 ‘황성옛터’를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인기의 절정을 달릴 무렵 연희전문 학생이던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유부남이었고 게다가 “연예인을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남자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두 차례의 자살 기도 끝에 결혼을 인정받고 이후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춘 채 평범한 주부로 평생을 살았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지어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의 적>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1932)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이애리수의 삶에는 진한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가득하다. 그 멜로드라마는 식민지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극 양식이었던 신파극(新派劇)의 구조와 닮아 있다. 대개의 신파극에서 주인공은 무력한 여성이거나 착하기 짝이 없는 기생들이고 이들은 완고한 전근대의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상반되는 현실에 놓이게 되며 이런 비극적 상황이 눈물과 비탄으로 표현된다. 식민지 시대 여성 연예인들의 처지는 신파의 여주인공 같은 스토리를 적지 아니 만들어냈다. 이애리수의 경우는 목숨을 내건 처절한 선택을 통해 결과적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지만 끝내 비극으로 끝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애리수보다 몇 년 앞서 인기를 누린 가수 윤심덕의 스토리가 그 하나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보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동경음악학교에서 공부하며 연극 활동에 참여하던 중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유학하던 극작가 김우진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호남의 지주 아들이었던 김우진은 이미 결혼해 처자식을 가진 처지였다. 천대받는 딴따라 여성과 명문가 유부남의 사랑은 당대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 필연적으로

비극성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후 성악가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서던 윤심덕은 여동생 윤성덕의 미국 유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레코드 녹음을 하게 된다. 1926년 녹음을 위해 일본으로 간 윤심덕은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녹음을 한다. 이 때 윤심덕이 예정에 없던 곡을 녹음하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하여 한 곡을 더 녹음하게 되는데 그 곡이 저 유명한 ‘사의 찬미’이다. 사흘간의 녹음을 마치고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하던 중 윤심덕은 연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짧고도 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이 알려지면서 이 노래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며 최초의 대중적인 히트곡으로 기록되게 된다.
이 노래의 인기와 함께 당시까지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유성기와 레코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를 계기로 이 땅에서 대중가요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곡조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쓴 ‘사의 찬미’는 두 연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유서와도 같은 노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 사건은 앞서 말한 이애리수의 경우보다 한층 더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거기에는 이루지 못할 사랑의 좌절이 있고 봉건적 인습과 질서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근대인의 욕망이 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의 고뇌가 있고 식민지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한 지식인의 절망이 있다. ‘사의 찬미’의 노랫말은 바로 그러한 좌절과 욕망, 고뇌와 절망을 응축하는 극한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사의 찬미> (이바노비치 곡, 윤심덕 작사, 1926)

‘사의 찬미’와 ‘황성옛터’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시대를 연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두 노래가 보여주듯 초창기 대중가요의 기본 정조는 비애(悲哀)의 정서라 할 수 있다. 그 비애의 정조가 식민 시대를 살아야 했던 대중들의 깊은 절망에 닿아 있음은 물론이지만 외세와 민족, 근대와 전근대의 모순 속에 파열음을 내며 몸을 던져야 했던 지식인, 예술인들의 짙은 고뇌가 배어있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