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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칠원회안이씨의 自成李族 이동경로 세거지 (기원전 분황사 서라벌서남부
-칠토국 咸安일대-畿內와 염현등 한강수계 회안)
1.상고, 原三國시대-
기원전 서라벌(성읍국가,城邑國家) 인근에서 마을의 우두머리로 자성을 선출하여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원래 북방계의 철기족으로 남하하여 서러벌에 정착하여 일대에 영향을 미치다
서라벌은 북방민족의 남하, 왜 가야와의 통교를 통하여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철기족 정착.왜와 가야통교->금관가야등 병합(왜,가야문명)
중국 백제 고구려와 교역(삼국통일기반완성)
분항사 인근의 읍락촌에서 이룬 집단마을 체제로 당시의 촌주(수장)는 自成이다.
원래 서라벌은 기원후에 이르러 20여개의 집단마을 연맹의 성읍국가였으며
남쪽과 서북쪽의 지역을 확대하여 연맹국가를 이루어 갔다
自成 李族을 포함한 촌주(이사금)들은 처음 박혁거세를, 동에서 온 석탈해 등을 뽑아
서라벌 일대를 통치하는 부족장(왕)으로 옹립하였다
당시의 집단 촌주 들의 호칭이 이사금으로 이사금들이 모여서 서라벌 체제를 주도한다.
이사금체제는 朴昔金과 6村의 9개 集團 촌주를 포함하여
수십여개의 邑落集團 體制로 이루어진 城邑 國家가 고대 신라 모습이다.
서라벌 초기 집단이 이사금집단 연명체이다, 만장일치 회의(화백)를 통해서 결정한다.
『최초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을 개연성이 크다.
그것은 신라 역시 금속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국가가 출현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지역으로의 금속문화의 유입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속기의 사용은 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강한 자극이 없이는 국가 수준의 정치체를 성취할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할 때 서기전 2세기 말에 발생한 고조선의 멸망과 이에 따른 주민 이동,
특히 남한지역에 삼한사회가 성립되는 세력 재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성읍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사량(沙梁)·본피(本彼)·모량(牟梁, 혹은 漸梁)·
한기(漢岐, 혹은 漢祉)·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복속관계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주일대 왕릉급 무덤에서 지방의 이사금 또는 성읍국 통치자임을 나타내는
『이소지왕』 명문을 발견, 고대 서라벌이 9족장이 아닌 수십여개 족의
집단의 성읍국가임을 나타내고 서라벌의 신라가 박석금과 6촌의 연맹이 아닌,
다수 집단의 연명체라는 것이 통설이다)
2.. 奈勿王대, 內史令 자성李族시대
서라벌 회백회의는 읍락집단의 이사금 중에서 강한 촌주 (이사금)을 추천하여
왕을 선발하다가, 내물왕대에 이르러 내물족의 이사금을
간으로 옹립, 중앙집권 체제의 전제제를 완비하다, 이가 내물 마립간(내물왕)이다.
중국으로부터 신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토를 확장하고, 고구려 왜와 통교하다,
자성은 내물왕대에 내부의 내사를 관리하다(내사령).
이후, 내물왕의 직계-김씨왕 옹립에 기여하다,
실성 다음, 내물왕의 직계인 눌지를 옹립하다.
『그런데 내물왕(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고처(高處)의 지배자〔干〕
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苻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3. 가야지역에『포상 8국의 난』이 일어나자 가야가 지원을 요청하다
『내해 이사금』은 태자, 왕자등 자성 이족등을 보내
『포상 8국의 난』을 평정하고 (김해 창원등과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영향력을 확대하다 자성이족등이 통제하다.(가야 일부지역이 평정된 후에)
이후 신라는 ,군대를 보내서 가야 지역을, 전부 평정하다,.
4.柒浦國 칠토國의 城伯時代
가야함안 『 칠포 칠토 칠제국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의
일대를 지배하는 성백이 된다(성주) 자성 이족들이 무리지어
이곳에서 통일신라 말까지 거주하다. 칠토국은
신라 상층부(자성이족)가 다스리는 지역이 된다.
즉, 왕권 옹립과 가야 지역의 칠포국을
정벌한 공으로, 그 지역의 성백을 세습하여, 이 일대가 자성이족의 호족세력이
된 것이다.
『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5.톨일신라시대의 자성이족
--신라 왕제의 확립(군린 용수)에 기여하다
6.통일신라시대의 문예 부흥, 대당교역.외교등에 힘쓰다
(동이)
-우리 자성이족은 칠토 칠제국의 일대 (김해 창원북부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에서
-집단으로 일가를 이루며 살다
7.통일신라 말기-지방 호족 시대
-통일신라초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9주 5소경을 두어 다스렸으나
후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지방은 호족들이나 지방무장세력이 반기하여
군웅할거하는 혼란기가 도래하니
이것이 견휜 궁예 양길 기훤등의 후삼국과 지방호족이 난립된 한반도의 상황이다
-지방 호족들이 각자 나라라고 칭하며 봉기하기도하고, 가병을 모으고 치정을 담당하다
자성이족도 칠원일대에서 강세하다
-평주, 송악, 철원,명자성,명주, 국원, 충주, 사벌주,
-죽주, 완산주,청해진,창원,공산,나주, 김해 (칠제등지)일대에서
『7세기 말부터 시작된 신라의 번영은 8세기 후반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780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고, 809년 김언승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에 오르는 등 진골 귀족간의 내분으로 왕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무열왕의 직계후손이 왕위를 차지하던 왕위계승의 전통은 혜공왕대에서 끝나고, 785년 원성왕의 등장으로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후 150년간 20여 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을 겪으며 왕권과 사회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 속에서 무열왕의 후손인 웅주도독 김헌창은 822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으며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촌주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나, 중앙에서 내려온 진골 귀족, 해상세력, 군사세력 등 출신도 다양했다. 이들은 일반 농민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앞세워 성과 군대를 거느리며 반독립적인 소왕국을 건설했다.
이 시기 사회 변화에 가장 앞장섰던 계층은 골품제도에 큰 불만을 품었던 6두품들이었다. 관직 승진 등에서 큰 제약을 받았던 6두품 출신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는 개혁을 요구했지만 중앙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 6두품 지식인들은 호족세력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8. 한반도는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봉기하고 후백제 후고구려 등 10여 개의 분국이 난립되어
통일 신라의 통치영역은 사실상 옛 서라벌의 소국으로 전락하다.
신라는 9주 5소경에 의한 통치가 무너지고 각지의 호족들이 봉기하고 이어서
궁예 왕건의 태봉마진의 후고구려, 진현 기현등의 후백제의 침공을 자주 받다,
후백제군에 의해 경애왕이 죽고, 경순왕이 오르다 경순왕은 후백제에 의하여 통제를 받다,
신라 북부와 서부는 대부분 봉기한 지역의 호족과 후고구려 후백제. 세력권이되고
나중에는 지방호족들도 독립을 이루거나 강한 후고구려,. 후백제의
예하로 귀속 되어가다.
후백제 잦은 침공과 섭정으로 경순왕은 왕건에게 귀부의사를 밝히다
자성 이족들과 태자, 왕자 김일, 일부 친서라벌 왕국의 호족,
성주의 호족장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등등은 이에 반발하고 계속 고려군에 항거하다.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 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8.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자성이족 이한희 공, 일부 친서라벌 호족,
궁예 왕건에 불만이 많는 호족, 지방 군벌들이 이에 항거하다
자성이족들은 함안김해 창원북부일대 (창원북부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
신라서남부에서 항거하였다.
왕건의 군대와 대치하다 몇달인지 모르나 증강된 고려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다
9. 성이 함락 당한 자성이족은 수장(호족장) 이한희 이사금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과
기타 봉기한 호족 세력들과 .
경순왕의 항복 대열에 이어서, 저항세력과 함께 북상하다.
(후 명칭 칠원성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 창원북부,김해일대)성을
함락당한 자성 이족은 신라
부흥군과 함께(부흥군, 경순왕 호송의 일부의 군대 세력, 태자, 왕자와 이순유세력)
북상하다.
--한편 항복 교서를 왕건에게 바친 경순왕은 신료,왕자, 부인, 귀족, 호위군사, 백성들과
함께 북상하다.
--북상대열은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길(12키로미터)이 되다, 1000여필이다
--대열의 신라 인원은 합하여 3만에 이르다.
『고려 귀순 후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왕건은 딸을 경순왕과 결혼시키다, 식음과 녹봉을 주고 위무하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10.자성이족과 경순왕항복 호종세력, 기내의 봉기세력들은
기내 회안 일대에 거주하며, 신라 부흥( 3갈래-궁예를 따른 세력, 친신라
세력,경순왕 태자세력) 봉기를 이어가다
일부는 태자를 따라서, 강릉 명주 인제등지에서 독립하여 항거하다
(당시 경순왕을 따라온 무리, 태자, 황자, 이순유, 자성이족등)
--왕건이 죽다,이후 정종 광종 경종등이 이어가다
--경순왕이 개성에서 죽다 ,고려 경종대
--경순왕을 따르며 개경과 기내에 거주하던 신라 사람들이 경순왕의 무덤을 서라벌에
묻어야한다면서 시신을 모시고, 서라벌의 장례길에 나서자,
고려의 수도 개경이 텅텅 비다. 장례행렬이 기내를 벗어나려하자. 황급히
--이에 놀란 고려 왕조는 100리길 불가 칙서와 대군을 보내다. 연천에 강제로 묻히다
(신라유민들이 봉분을 쌓고 표하다)
--고려왕조는 지속하여 기내외 기외의 신라부흥세력과 지방호족을 위무하면서
결혼정책으로 또는 무력으로 전부 평정하다
(고려사. 삼국유사. 이제가기)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
.
10.기내 이주후, 신라유민들과 부흥 운동 실패한 자성이족 이한희 이사금의 무리들은,
이때부터 다른 무리의 신라 사람들과 함께,
畿內 회안일대 (염현, 용인 이천등 당시의 한산주 일대)에 정착하게 되다.
고려는 신라 서라벌을 경주(동경)으로 개칭하다,
11. 이족들은 모여서 조상을 기리다 (회안일대)
--멀리 신라에서 발흥한 역사와 이주의 내력을
팔면비석에 새기고, 비석으로 세워, 신전과 제단을 세우다
--선조를 기리다(매년 10월과 3월에 전 종족이 전부 모여서 제사를 지내다)
--제단의 위치는 상고할 수가 없으나 염현으로 보아,
예성강 한강의 수계 연안, 개경의 인근 또는 용인, 이천 일대로 여겨짐
12. 고려군부가 지방 호족등 잔존독립세력을 평정하고, 기내 신라 부흥세력도 위무,
전국을 완전 통제하다, 건국후 100년이 지난 뒤이다,고려 성종조
(후백제 후고구려 멸망, 봉기세력 고려 귀부)
13.高麗朝 安定으로, 회안의 자성李族은 (畿內 즉,
회안일대에서) 身分이 정향(회안으로) 이속(문호공 신도비명, 박상 기록) 되다.
--신분이 강계되다.
--서라벌 함안의 칠포, 칠토,창원북부, 가라국이 칠원현으로 개칭 되다,
후에 고려중기에 사람들이 부르기를, 너희들은 본이 어디냐 어디서 왔느냐 물으니
"우리는 칠원에서 왔으므로, 칠원 이족이라고 하다.
--일부는 역리가 되다.
--일부는 아전이 되다.
--회안일대에서 세거하며 주거를 이루다.
(이때에 기내와 강원 일대에 서라벌에서 이주한 신라 사람들이 살게되다)
--자성李족,칠원李족의 수장豪族長(니사금 임금 마마 간,님금의 諱 군린 , 마마의 諱 용수, 마마의 諱 한희, 마마의 諱 방린)호칭에서 戶長의 호칭인
諱 향임 당임 존임(어르신, 나리.사군, 백)님으로, 되다(호칭하다).
(栗亭 世傳草譜)
일부는 역리로 이속되다.
14. 무신정권시대인 고려 중말기이후에야, 身分이 상승(高麗 中期)하다,
민망히 여긴 담로한 대신들이(고종) 광릉 삼익. 삼현
--무신정권이 등장하여 王權이 弱化되고, 地方 豪族長 時代 되다
--민망한 고려 대신, 담로(지방 호족장)들이
자성이족-칠원 李族을 승계시키다.
15.고려말, 원나라 간섭시대로 왕권이 약화되고, 호족등이 지방을 통제하고
(자성이족은 이른바 광릉시대 회안이씨의 후기시대)
고종 | 高宗 | 충헌 | 忠憲 | 안효대왕 | 安孝大王 | 철 | 皞 | 홍릉 | 洪陵 | 1213년~1259년 | ||
--호족들의 자제들이 주정 학문을 배우고, 두터워진 신진 사류들이
--중앙 정계에 전면에 등장, 중앙정부를 장악하다, 자성이족도 이에 이르고,
-- 출사에 이르다.
-가야 나라의 칠원현은 그 뒤, 창원부로 복속, 없어졌고,
조선왕조 開國後에
주군현제도 개편으로, 다시 칠원현漆原縣이 獨立되다.
*마의 태자라는 명칭은 1930년 이광수 소설에서 유래, 사기에 마의 태자는 없다.
*칠원은 고려 태조가 가야지역 일대 칠토등을 칠원이라고 개칭해서 부름.
*이후 없어졌다가 조선조 초기에 칠원현으로 칠원으로 복원
.....................
첨부, 참고자료
『휴징, 필행의 선세사적』,
『통판공과 율정공의 세전초보』,
『좌찬성 휘 우생의 묘지명』,
『조종운, 씨족원류고』,
『문호공비문』,
『이이만가의 세전초보』,
『복암가장초보』,
『정곤수 광주이씨 선대도』.
『이명징가의 광이 선대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 고려사』,
『칠원읍지』,
『송악지』,
『이제가기』,
『후고구려기』
『세종실록지리지』
『신라부흥운동』『신라 멸망 직후 부흥운동 소고』
........................
고려국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능호 | 재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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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에서 내린 시호 | 고려·조선에서 올린 시호 | |||||||||||
1 | 태조 | 太祖 | - | -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건 | 建 | 현릉 | 顯陵 | 918년~943년 | |
2 | 혜종 | 惠宗 | - | - | 인덕명효선현고평경헌의공대왕 | 仁德明孝宣顯高平景憲義恭大王 | 무 | 武 | 순릉 | 順陵 | 943년~945년 | |
3 | 정종 | 定宗 | - | - | 지덕장경정숙영인경간장원문명대왕 | 至德章敬正肅令仁簡敬莊元文明大王 | 요 | 堯 | 안릉 | 安陵 | 945년~949년 | |
4 | 광종 | 光宗 | - | - |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 소 | 昭 | 헌릉 | 憲陵 | 949년~975년 | |
5 | 경종 | 景宗 | - | - | 지인성목명혜순희정효공희헌화대왕 | 至仁成穆明惠順熙靖孝恭懿獻和大王 | 주 | 胄 | 영릉 | 榮陵 | 975년~981년 | |
6 | 성종 | 成宗 | - | - |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 | 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 | 치 | 治 | 강릉 | 康陵 | 981년~997년 | 개령군(開寧君) |
7 | 목종 | 穆宗 | - | - |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 | 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 송 | 訟 | 공릉 | 恭陵 | 997년~1009년 | |
8 | 현종 | 顯宗 | - | - |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 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 순 | 詢 | 선릉 | 宣陵 | 1009년~1031년 | 대량원군(大良院君) |
9 | 덕종 | 德宗 | - | - | 선효강명광장경강대왕 | 宣孝康明廣章敬康大王 | 흠 | 欽 | 숙릉 | 肅陵 | 1031년~1034년 | 연경군(延慶君) |
10 | 정종 | 靖宗 | - | - | 홍효안의강헌영렬문경용혜대왕 | 弘孝安毅康獻英烈文敬容惠大王 | 형 | 亨 | 영릉 | 英陵 | 1034년~1046년 | 평양군(平壤君) |
11 | 문종 | 文宗 | - | - |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 | 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 휘 | 徽 | 주릉 | 周陵 | 1046년~1083년 | 낙랑군(樂浪君) |
12 | 순종 | 順宗 | - | - | 영명정헌선혜대왕 | 英明靖憲宣惠大王 | 훈 | 勳 | 경릉 | 景陵 | 1083년 | |
13 | 선종 | 宣宗 | - | - | 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 | 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 운 | 運 | 인릉 | 仁陵 | 1083년~1094년 | 국원후(國原侯) |
14 | 헌종 | 獻宗 | - | - | 공상정비회효대왕 | 恭殤定比懷孝大王 | 욱 | 昱 | 은릉 | 隱陵 | 1094년~1095년 | |
15 | 숙종 | 肅宗 | - | - | 문혜강정명효대왕 | 文惠康正明孝大王 | 옹 | 顒 | 영릉 | 英陵 | 1095년~1105년 | 계림공(鷄林公) |
16 | 예종 | 睿宗 | - | - | 명렬제순문효대왕 | 明烈齊順文孝大王 | 우 | 俁 | 유릉 | 裕陵 | 1105년~1122년 | |
17 | 인종 | 仁宗 | - | - | 극안공효대왕 | 克安恭孝大王 | 구 | 構 | 장릉 | 長陵 | 1122년~1146년 | |
18 | 의종 | 毅宗 | - | - | 강과장효대왕 | 剛果莊孝大王 | 현 | 晛 | 희릉 | 禧陵 | 1146년~1170년 | |
19 | 명종 | 明宗 | - | - | 황명광효대왕 | 皇明光孝大王 | 호 | 晧 | 지릉 | 智陵 | 1170년~1197년 | 익양후(翼陽侯) |
20 | 신종 | 神宗 | - | - | 경공정효대왕 | 敬恭靖孝大王 | 탁 | 晫 | 양릉 | 陽陵 | 1197년~1204년 | 평량공(平凉公) |
21 | 희종 | 熙宗 | - | - | 인목성효대왕 | 仁穆誠孝大王 | 영 | 韺 | 석릉 | 碩陵 | 1204년~1211년 | |
22 | 강종 | 康宗 | - | - |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 浚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清元孝大王 | 오 | 祦 | 후릉 | 厚陵 | 1211년~1213년 |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 |
23 | 고종 | 高宗 | 충헌 | 忠憲 | 안효대왕 | 安孝大王 | 철 | 皞 | 홍릉 | 洪陵 | 1213년~1259년 | |
24 | 원종 | 元宗 | 충경 | 忠敬 | 순효대왕 | 順孝大王 | 정 | 禎 | 소릉 | 昭陵 | 1259년~1269년 복위 1270년~1274년 | |
임시 | 영종 | 英宗 | - | - | - | - | 창 | 淐 | - | - | 1269년 | 안경공(安慶公) |
25 | - | - | 충렬 | 忠烈 | 광문선덕경효대왕 | 光文宣德景孝大王 | 거 | 昛 | 경릉 | 慶陵 | 1274년~1298년[1] 복위1298년~1308년 | |
26 | - | - | 충선 | 忠宣 | 선효대왕 | 宣孝大王 | 장 | 璋 | 덕릉 | 德陵 | 1298년 복위1308년~1313년 | |
이지르부카[2] | 益知禮普花 | |||||||||||
27 | - | - | 충숙 | 忠肅 | 의효대왕 | 懿孝大王 | 만 | 卍 | 의릉 | 毅陵 | 1313년~1330년 복위1332년~1339년 | 강릉대군(江陵大君) |
아라트나시리[2] | 阿刺訥忒失里 | |||||||||||
28 | - | - | 충혜 | 忠惠 | 헌효대왕 | 獻孝大王 | 정 | 禎 | 영릉 | 永陵 | 1330년~1332년 복위1339년~1344년 | |
부다시리[2] | 寶塔實里 | |||||||||||
29 | - | - | 충목 | 忠穆 | 현효대왕 | 顯孝大王 | 흔 | 昕 | 명릉 | 明陵 | 1344년 ~ 1348년 | |
바스마도르지[2] | 八思麻朶兒只 | |||||||||||
30 | - | - | 충정 | 忠定 | - | - | 저 | 胝 | 총릉 | 聰陵 | 1348년~1351년 |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 |
미스젠도르지[2] | 迷思監朶兒只 | |||||||||||
31 | - | - | 공민 | 恭愍 |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 전 | 顓 | 현릉 | 玄陵 | 1351년~1374년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
바얀테무르[2] | 伯顔帖木兒 | |||||||||||
32 | - | - | - | - | - | - | 우[3] | 禑 | - | - | 1374년~1388년 |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
모니노[2] | 牟尼奴 | |||||||||||
33 | - | - | - | - | - | - | 창 | 昌 | - | - | 1388년~1389년 | 윤왕(允王) 후폐왕(後廢王) |
34 | - | - | - | - | 공양왕 | 恭讓王 | 요 | 瑤 | 고릉 | 高陵 | 1389년~1392년 |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공양군(恭讓君) 간성왕(杆城王) |
1. 신라
신라는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시대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서는 이〔표〕중 제1기에서 제3기까지를 상대(上代), 제4기를 중대(中代), 제5기 이후를 하대(下代)로 구분하고 있으며,『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제2기를 상고(上古), 제3기를 중고(中古), 제4기 이후를 하고(下古)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주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독자적인 시대구분이지만, 불교의 공인 혹은 율령의 제정 같은 중요한 사건도 참작한 것이므로 신라 역사의 발전대세를 가지고 시대구분할 때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국호 신라는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혹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수풀의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가장 많이 가진 신라로 확정하였다고 하지만 414년에 건립된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에 이미 신라의 사용 예가 보인다.
『삼국사기』찬자에 의하면, 신라의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유교적인 해석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신라의 모태(母胎)가 된 사로국은 백운산(울산광역시 두서면 내와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한 뒤 영일만을 통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형산강 지구대(地溝帶)에 전개된 경주평야를 무대로 형성되었다. 이곳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가장 넓은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지대가 낮아서 예로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경주는 형산강 지구대의 중심에 위치한 형산강 평야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사로국의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경주분지는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하천의 범람에 의해서 퇴적된 선상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가지 서쪽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외에 북천(일명 알천)과 남천(일명 문천)이 경주분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천은 토함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명활산과 금학산을 통과한 뒤 직선방향인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시가지 북쪽을 흐르는 남천과 합류하여 주변 여러 곳에 늪지를 발생시켰다. 그런 까닭에 경주분지 내에서는 북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지역에 일차적으로 거주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의 경주분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의 성과를 갖고 본다면 황성동유적에서 삼한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1세기 중반경의 고식(古式) 와질토기가 발견된다거나 대단위 취락이 형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인왕동고분군 하층 유적에서 볼 수 있듯 서기 3세기 전반경부터는 왕궁이 있었던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 이내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어쩌면 황성동 일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월성 주변으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남천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는 이 황성동지역과 월성지역 사이는 뒤에 조정에 의해서 개발되기까지 오랜 동안 습지상태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한편 경주평야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중국의 경우처럼 수도 외곽에 별도의 나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만큼 천연적인 성곽을 이루고 있었다.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촌의 시조전설을 보면 시조들이 하늘에서 경주 주위의 표암봉·형산·이산(일명 개비산)·화산·명활산·금강산에 각기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경주의 지리적 조건과 결부시켜 윤색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경주의 성곽도시적 성격은 초창기 사로국의 발전과 자위(自衛)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산강과 그 지류들을 끼고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국읍은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내부적인 통합을 꾀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국가의 지배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진한 12국 시대는 국가들 사이에 연맹과 전투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 시대였는데, 사로국이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주위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 지리적인 이점(利点)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인의 보수성이랄까 지역적인 폐쇄성이랄까를 양성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신라는 진한의 동료국가들을 모두 병합한 뒤 소백산맥 동남부의 영남지방을 본부로 하여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소백산맥은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해 영남지방을 보호하는 천연적 장벽의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한편 교통상으로는 그 만큼 큰 장애물이 되어 심한 격절성(隔絶性)을 띠었다. 이를테면 외부의 주민들이 북쪽으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마치 울타리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다시는 여기서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세종실록 지리지』의 도별(道別) 성씨 분포상황을 보면 경상도 성씨는 다른 도에 비하여 토성(土姓)과 내성(來姓)·속성(續姓)의 성관(姓貫) 수효가 가장 많은 반면에 망성(亡姓)은 가장 적다. 이는 이 지방 호구의 다른 도(道)로의 유출이 가장 적은 대신에 반대로 다른 도로부터 토성의 유입은 가장 많았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사로국 건국기의 형편을 추측할 수가 있다.
고조선의 멸망을 역사적 계기로 하여 광범위하게 진행된 주민 이동의 물결 속에서 뒤에 진한과 변한을 형성하게 된 이주민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중층적으로 잡거(雜居)하는 가운데 이 지방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교적 빠른 기간 내에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한 토착적 성격마저 띠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3백년 이상에 걸친 가혹한 삼국 항쟁기를 거쳐 7세기 중·후반 한반도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그 지배 영역은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이처럼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핵심부, 소백산맥 동남부를 본부로 생각하는 삼국 항쟁기의 편협한 지역 구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이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다스림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수도 경주를 끝내 고수하고, 더욱이 경주 6부 사람에 한하여 관직을 부여한 것은 그 뚜렷한 예증이다. 하기야 신라조정은 경주의 편재성(偏在性)을 보완할 목적에서 각지에 다섯 개의 소경(小京)을 두었으나, 김해에 설치한 금관경(金官京)을 제외하면 모두가 경주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소백산맥 바로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결국 신라가 한반도에 군림하게 된 뒤에도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방어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요컨대 경주분지와 영남지역이 제공한 지리적 이점은 신라의 성장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 그것은 동시에 신라 지배층의 폐쇄적인 영역의식을 낳게 되어 한반도를 대부분 통일한 뒤에는 오히려 새로운 발전을 제약 내지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성립과 발전
1. 건국과 초기의 발전
제1기는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연맹왕국(聯盟王國)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신라도 다른 초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최초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을 개연성이 크다. 그것은 신라 역시 금속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국가가 출현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지역으로의 금속문화의 유입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속기의 사용은 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강한 자극이 없이는 국가 수준의 정치체를 성취할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할 때 서기전 2세기 말에 발생한 고조선의 멸망과 이에 따른 주민 이동, 특히 남한지역에 삼한사회가 성립되는 세력 재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성읍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사량(沙梁)·본피(本彼)·모량(牟梁, 혹은 漸梁)·한기(漢岐, 혹은 漢祉)·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복속관계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 초에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타멸되고,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대세력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날카롭게 대립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동쪽사회도 이에 큰 자극을 받아 신라를 맹주(盟主)로 한 국가통합운동이 급속히 진전된 결과 4세기 중엽에는 연맹왕국이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제2기는 연맹왕국의 발전기로서 다음에 전개될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준비하던 태동기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이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 등의 왕호는 계승자 이상의 권력자의 의미를 풍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물왕(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고처(高處)의 지배자〔干〕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苻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 뒤 475년(자비마립간 18)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무력으로 침공,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백제와 다시 결혼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한층 강화했고, 일선지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단행하였다. 종래의 족제적(族制的)인 6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했으며, 다시 490년에는 수도에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하게 하였다.
5세기를 통해 신라조정이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음은 이 시기에 축조된 금관총이나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한 수많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487년 혹은 지증왕 때에 설치된 김씨왕실의 종묘로서의 신궁(神宮)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제3기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가던 시기였다.『삼국유사』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이른바 중고가 바로 이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는 법흥왕 때의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사회적 기반은 전왕인 지증왕 때에 대체로 마련되었다. 502년에 농사를 장려하는 왕의 명령을 공표하는 가운데 우경(牛耕)이 시작된 것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종래 구구하게 사용 표기되어오던 국호를 신라로 통일했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체제 확립에 수반하는 조처들이었다.
대외관계에서도 521년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4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법흥왕 때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 관부를 설치하며, 진골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한 시기였다. 520년(법흥왕 7)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관의 공복(公服)·17관등 등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 경상북도 포항시 중성리(북구 흥해읍)와 냉수리(신광면)에서는 각기 501년과 503년에 건립된 두 개의 비석이 발견되어 조정이 공론을 거쳐 교령(敎令)의 형식으로 6부 세력가의 현지 촌락 지배 혹은 재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민간의 분규를 평결하고 그 내용을 비석에 새긴 사실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524년(법흥왕 11) 건립의 거벌모라(居伐牟羅)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촌 사인(使人)들과 도사(道使)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장(杖) 1백대 혹은 60대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한 550년경에 세워진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赤城)비에는 호령(戶令) 및 전령(田令)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문들을 통해 당시 율령의 수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게 되었다.
율령제정에 앞서 516∼517년경에는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가 설치되었다. 531년에는 진골귀족회의의 주재자로 상대등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상대등의 설치를 전후한 527년 내지 535년경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이 무렵 왕의 칭호도 종래의 매금왕(寐錦王) 대신 대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소속 부인 탁부(喙部) 출신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6부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이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미 법흥왕 때에 김해에 있던 본가야를 병합해(532) 낙동강 하류지방에서부터 북상하면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했는데, 진흥왕은 다시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를 병합한 다음 562년(진흥왕 23)에는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공략,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사업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한강 유역의 점령이었다. 550년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충청남도 天安 혹은 충청북도 槐山)과 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충청남도 全義 혹은 충청북도 鎭川)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듬해에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하고, 친정하면서 백제 중흥의 영주(英主) 성왕과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신라는 처음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의 6군을 기습 공격해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554년에는 신라의 약속 위반에 분격해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沃川)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의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편으로는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556년에는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일명 碑利城)를 설치했고, 56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에 있는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신라는 560년대에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때부터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660년대까지 한 세기 동안 실지회복을 노리는 고구려·백제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국가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진평왕대 후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두 나라의 침략은 선덕여왕의 즉위 후 한층 가열해졌다. 642년(선덕여왕 11)에는 한강 방면의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南陽)이 양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직전까지 갔으며,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陜川)은 백제군에 함락되어 대야주 군주(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서부 군사령부는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대당외교(對唐外交)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지적한 여왕통치의 문제점과 그 대안으로 제시한 당나라의 황족에 의한 신라의 감국안(監國案)이 도리어 신라정계를 분열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에 여왕 측근세력과 문벌귀족세력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중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반란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내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그들은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정치·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춘추가 즉위,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이로써 제3기는 종말을 고하고, 신라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무열왕의 즉위를 기해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무열왕은 이 같은 군사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종래의 수세에서 벗어나 일약 공세로 전환하였다. 바야흐로 종전의 국가 보위전쟁은 삼국통일전쟁으로 대전환을 맞았다. 대당 친선외교는 당이 고구려와 백제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거중(居中)조정을 청원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양국 간의 군사동맹 체결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무열왕은 660년 당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무열왕이 죽자 삼국통일의 대업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게 넘겨졌다. 문무왕은 663년백제 부흥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668년에는 당군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만 당군은 백제 고지(故地)와 고구려 땅에 주둔하면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려고 하였다. 당의 야욕을 간파한 문무왕은 당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군대는 옛 백제 땅으로 진출해 이를 송두리 채 차지하였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군을 몰래 지원했다. 신라와 당 양국간의 긴장과 반목은 이윽고 전쟁상태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671년 이래 당군을 상대로 하여 사투를 벌인 끝에 676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압록강 너머 만주지방으로 물러갔다. 이로써 신라는 진정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제4기는 왕통상으로 보면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간 시대이며,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이전과는 달리 왕권이 크게 강화된 전제왕권시대였고, 문화상으로는 신라 문화의 극성기였다.『삼국사기』의 시대구분인 이른바 중대가 바로 이 시대이며,『삼국유사』는 이때부터를 하고(下古)로 잡고 있다.
신라가 이 시기에 들어와 전제왕권을 구축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태종무열왕과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크게 고양된 점,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단행된 중앙귀족의 도태·숙청 및 지방세력과의 연계 강화, 집사부(執事部) 중심의 일반행정체계와 유교적 정치이념의 도입과 강행, 나아가 이로 인한 관료제의 발달 등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기여한 요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집사부 중심의 정치운영이 전제왕권의 안전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본래 집사부는 651년(진덕여왕 5)에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해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 설치한 국왕직속의 최고관부였다. 이는 품주가 지닌 가신적(家臣的)인 성격을 표면화해 왕정의 기밀을 맡게 됨으로써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국왕의 집사장 구실을 맡게 되었다. 이른바 중대왕권은 이를 통해 전제화되어 갔다. 제3기가 불교식 왕명시대(王名時代)였다고 한다면, 이 시대는 중국식 묘호(廟號)를 쓰기 시작한 시대로서, 당시 정치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대의 전제왕권은 신문왕 때에 정력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의 여러 행정·군사조직을 완성하였다. 중국 제도를 모방해 6전조직(六典組織)을 갖추거나, 제일급 중앙행정기구의 관직제도를 다섯 단계로 정비한 것, 지방에 9주(州)를 비롯해 5소경(小京)을 설치한 것, 수도와 지방에 각각 9서당(誓幢)과 10정(停) 등의 군사조직을 배치한 것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성덕왕 때에는 전제왕권하의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 때에는 진골귀족들이 반발하였다. 689년에 폐지된 바 있는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757년에 부활된 것은 귀족들이 전제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움직임을 막기 위해 경덕왕은 757년에 전국의 모든 지명을, 759년에는 모든 관청·관직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이렇게 겉으로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표방하면서 국왕의 권력집중을 위한 정치개혁에 열을 올렸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 때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잇따랐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반란은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얽혀 싸웠다고 하는 대란으로서 3년 동안 지속되었다. 774년에는 반왕파의 중심인물인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780년에 혜공왕이 김양상·김경신(金敬信)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삼국사기』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3대의 마지막 시대인 하대가 개막되었다.
제5기는 왕통상으로 원성왕 계통이지만, 원성왕 자신이 내물왕의 12세손임을 표방한 점에서 혹은 부활내물왕계통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진골귀족들이 왕실에 대해 서로 연합하는 형세를 띠면서도 각기 독자적인 사병세력을 거느리고 있어 귀족연립(貴族聯立) 혹은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야를 전국적으로 확대해본다면 지방의 호족세력이 크게 대두하고 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9세기 말에 전개되는 호족의 대동란은 실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개창자인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인 뒤 즉위해 선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변혁기의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경쟁에서 승리한 상대등 김경신이 즉위, 원성왕이 되었다. 그는 788년에 국학(國學) 출신자에 대한 관리등용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는 등 정치 개혁에 착수했으나, 왕실 직계가족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 뒤 애장왕 때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이 되어 율령의 개정과 오묘제도(五廟制度)의 확립을 통해 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고, 김언승이 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된 뒤로는 이와 같은 노력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왕실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소외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이 커져 822년(헌덕왕 14)에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웅천주(熊川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으나,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이 이로써 크게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뒤 흥덕왕 때에는 진골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대 개혁정치가 단행되었는데, 그 실효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더욱이 그가 죽은 뒤에는 근친왕족 사이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 3년간에 걸쳐 2명의 국왕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골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政爭)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차츰 성장해 장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해상세력가는 그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 뒤 경문왕·헌강왕 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태가 절망적이 되어 국가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에 조정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들의 반란을 유발했고, 조정이 끝내 이를 수습하지 못해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제6기는 왕통상으로 제5기의 계승, 연장이었으나, 신라가 50년 가까운 내란 끝에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 쇠망기이다. 이 시기에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 박씨왕이 3대에 걸쳐서 15년 간(912∼927) 재위했으나, 그들은 김씨 왕통과 혼인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군웅들이 전국 도처에 할거해 신라조정이 전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왕경 자체도 무방비상태가 되어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왕경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할 정도였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 왕통 출신의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 자립하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弓裔)였다. 신라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동안 여맥(餘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태조왕건(王建)이 정책상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골품제도는 6∼7세기경 신라 조정에 의해 법제화된 이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3백여 년간 거의 변함없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대본(大本)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 이 제도는 왕경 6부민을 대상으로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이라든지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한 신분제도였다. 따라서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되고 있다.
본래 골품제도는 신라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복속된 성읍국가 혹은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에 옮겨 6부제로 편성한 뒤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 신분 등급을 매기면서 제정되었다. 그런데 원시씨족제도 내지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지 못한 채 집권화의 방향으로 나갔던 까닭에 등급 구분의 원리는 혈연적·족적인 유대를 토대로 하게 되었다.
골품제도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뒤에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에서 일두품에 이르는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골품제도가『삼국사기』직관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연한 신분체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사회성층의 결정화(結晶化)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그 최종적인 완성 시기는 7세기 중엽이 아닐까 짐작된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 때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뒤 신라의 멸망 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가 구별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진골 중에는 김씨 왕족 이외에 전 왕족이자 중고시대의 왕비족으로도 생각되는 박씨족이나 혹은 신라에 의해 병합된 비교적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부여되었다. 즉, 본가야의 왕족이나 고구려의 왕족출신인 보덕국왕(報德國王)안승(安勝)은 모두 김씨성을 받고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비록, 이들은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본래의 신라왕족과는 구별되었지만, 진골 대우를 받음으로써 김씨 왕족과도 통혼할 수 있게 되었다.
진골 아래의 여섯 개의 신분은 뒤에 가면 크게 상하 두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즉, 6두품·5두품·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었으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렇지 못하여 일반평민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물론,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라도 그 특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진골 바로 다음가는 신분인 6두품은 일명 ‘득난(得難)’이라고 불린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좀처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여기에는 본래의 신라국을 형성한 여섯 씨족장 가문의 후예와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복속되어 왕경 6부에 편입된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영(令)을 장관직으로 하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이나 혹은 6정·9서당 등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이 될 수 없었고, 그 아래의 차관직이나 부지휘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관리나 군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 혹은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원효(元曉)와 같은 위대한 승려나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뛰어난 문장가·학자는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한편, 5두품과 4두품은 6두품에 비해서 보다 낮은 관직을 얻는 데 불과했다. 3두품·2두품·1두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분된 의미를 잃어 9세기 경이 되면 평인(平人) 혹은 백성이라 통칭되었다.
골품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또한 평민들의 등급구분이 없어지게 된 결과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되었다.
834년(흥덕왕 9)에 제정된 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에 대한 사용 제한규정에서 보면, 4두품은 백성과 같은 규제를 받고 있어 점차 백성층으로 강등된 듯하다.
카스트제도와 마찬가지로 골품제도도 최고신분인 성골·진골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4두품 이하의 하층신분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급의 이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지방의 촌락민과는 같이 논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였다.
왕경사람들은 지방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골품제도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도였다. 다시 말해 지방민은 노예나 부곡민(部曲民) 등 천인계층과 더불어 골품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이른바 탈락계층이었던 셈이다.
여러 골품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 정치적 진출에 대한 것이었다. 즉, 골품제도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의 상한선을 설정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진출에 제한을 가하였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에 앞서 법흥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왕경인에 대한 경위제도(京位制度)와 지방민에 대한 외위제도(外位制度)의 이원적인 체계로 구성되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외위제도를 폐지하고 경위제도로 일원화하면서,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그밖에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각기 승진의 한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집사부의 장관직인 중시나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직인 영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장관직은 진골귀족의 독점물이었다.
6두품은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5두품과 4두품은 각기 제3등 관직인 대사와 그 이하 관직인 사지(舍知)·사(史)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와 같은 원칙은 주요 군부대·지방관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골품제도는 정치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규제 또한 엄격하였다.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 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했으므로 최고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왕실 안에서 성골 신분의 남성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충분히 그럼직한 상상이다. 또한, 같은 진골이라도 김씨 왕족은 뒤에 왕경으로 이주해온, 신라에 의해 병합된 조그만 나라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있었다.
이외에도 거처할 수 있는 가옥의 크기에까지 적용되었다. 834년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尺)을 넘지 못하며, 6두품·5두품·4두품은 각기 21척·18척·15척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옷빛깔에서는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9관등인 급벌찬(級伐飡) 이상, 제11관등인 나마(奈麻) 이상, 제17관등인 조위(造位) 이상이 각기 자색(紫色)·비색(緋色)·청색(靑色)·황색(黃色)의 복장을 하도록 규제하였다. 이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 신분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차의 자재 및 장식, 일상생활 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결국 골품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진골이었다.
신라의 정치제도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연원은 마립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치운영방식이나 관제는 뒷날의 화백제도(和白制度) 및 관등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등제도를 예로 들어본다면, 6세기초 법흥왕 때에 크게 정비되었으나, 관등의 원류를 소급해보면 연맹왕국시대에 이미 관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1·2관등인 이벌찬과 이척찬(伊尺飡, 일명 伊飡)은 법흥왕 때 상대등직이 설치될 때까지는 수상에 해당하는 관직이었고, 제4관등 파진찬(波珍飡)은 본래 해관(海官) 혹은 수군(水軍) 지휘관을 가리키는 고유한 직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관등의 관직적 성격은 6세기 이래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점차 지양되었으나, 완전하게 정지되지 않은 채 관직의 제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법흥왕 이후 관등과 관직이 분리된 뒤에도 대사·사지 등 관등명칭은 집사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제3·4등 관직명칭으로 함께 쓰여졌다.
중앙의 통치조직을 보면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516∼517년경에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로서는 처음으로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의 상대등 제도가 채택되었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가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다. 이듬해에는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가 품주로부터 분리, 독립했으며, 승여(乘輿)·의위(儀衛)를 담당하는 승부(乘府)가 설치되었다. 586년에는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창설되어 관제발달을 맞게 되었다. 580년대의 관제조직상의 특징은 새로운 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고, 소속 직원의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보여 일종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일파에 의해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또한, 입법과 형정(刑政)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가 설치되었는데, 667년(문무왕 7)에 또 하나의 이방부가 설치됨으로써 종래의 것은 좌이방부, 신설된 것은 우이방부로 고쳤다. 이와 동시에 예부와 사신접대를 담당하는 영객부(領客府)의 지위를 높였다.
개혁작업은 김춘추가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86년(신문왕 6)에 토목·영선(營繕)을 담당하는 예작부(例作府)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1급 행정관부의 관원조직도 확충되었다. 종전에는 관원조직이 영·경(卿, 병부는 大監)·대사·사의 4단계였는데, 685년에 대사와 사의 중간에 사지를 신설함으로써 결국 5단계조직으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기구들은 신라 멸망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759년(경덕왕 18)에 모든 관부와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친 일은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행정기구 자체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능이나 지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9세기에 접어들면 종전의 내성(內省) 일국(一局)에 불과하던 어룡성(御龍省)이 승격, 독립해 일종의 섭정부(攝政府)로 등장하였다(801). 또한 국왕의 문필(文筆) 비서기관인 세택(洗宅)이 중사성(中事省)으로 승격해 집사성(執事省 : 執事部가 개칭됨) 장관인 시중(侍中 : 中侍가 개칭됨)을 견제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문왕·헌강왕 때에는 문한(文翰)기구의 비중이 커지면서 서서원(瑞書院)·숭문대(崇文臺) 등에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 제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것이 합좌제도(合坐制度)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에서는 이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는데,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政事堂) 혹은 남당(南堂)에까지 소급되고 있다. 하지만 화백제도가 비교적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법흥왕 때 의장인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부터의 일이다.
진골귀족출신의 대신이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 혹은 大衆等)으로서 구성되는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그밖에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四圍)의 청송산(靑松山, 동쪽)·오지산(亏知山, 남쪽)·피전(皮田, 서쪽)·소금강산(小金剛山, 북쪽) 등 이른바 영지(靈地)를 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합좌제도의 존재는 당시의 정치형태가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닌 데 연유하였다. 이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의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척찬과 같은 높은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즉, 상대등은 국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서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였고, 귀족의 통솔자일 뿐 아니라 그 대변자요 대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후보자로 여겨졌다.
다만, 집사부의 설치를 계기로 국가의 정무를 분담하는 새로운 관부가 만들어지자 어느 관청에도 소속되지 않는 대등의 존재 의의는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통일기에 들어와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등으로 상징되던 화백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합좌제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나마 여전히 잔존하였다. 가령 집사부와 사정부·예작부·선부 등 몇몇 관부를 제외한 주요 관청의 장관직인 영이 대개 2명 이상의 복수로 되어 있는 점이라든지, 더욱이 이들 장관직이 겸직의 형태로 소수의 진골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것은 통일기 신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 합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것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지방의 통치조직은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서 설치되어 지방의 촌(村)에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는데, 지증왕 때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즉,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 실시했는데, 군정적(軍政的) 성격을 띠어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때때로 중심을 이동할 수 있었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軍主), 중간 정도 규모의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幢主)라 하였다. 뒤에 군주는 총관(摠管)·도독(都督)으로, 당주는 태수(太守)로 각각 바뀌었다. 한편, 몇 개의 촌을 장악한 작은 규모의 성은, 통일기에 들어와 현(縣)으로 개편되었는데, 장관 명칭은 현의 크기에 따라 현령 혹은 소수(小守)라 하였다.
6세기 전반기 신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 정사인『양서(梁書)』신라전에는 왕경 안에 여섯 개의 탁평(啄評), 지방에 52개의 읍륵(邑勒)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읍륵을 군으로 보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군제도는 한꺼번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주만 하더라도 505년에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강원도 三陟) 1개가 설치되었고, 525년에 다시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尙州), 550년대에 신주(新州 : 지금의 경기도 廣州)·비사벌주(比斯伐州 : 일명 下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상남도 昌寧),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安邊) 등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한편, 주군제도와는 별도로 왕경을 모방해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소경을 설치하였다. 소경은 처음 514년에 아시촌(阿尸村 : 위치에 대하여는 安康·咸安·義城 등이 있음)에, 557년에는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忠州)에, 다시 639년에는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원도 江陵)에 각각 설치하였다. 이들 소경에는 왕경 6부의 진골을 비롯한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경은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주로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한편으로는 주군을 견제, 감시하는 듯한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은 사신(仕臣 : 일명 仕大等)이라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다만, 삼국통일 이전의 소경제도는 전국적으로 체계 있게 정비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은 지방통치조직은 삼국통일에 따른 영토의 확대로 크게 개편되어 685년에 9주·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 방향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통일기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이 같은 각급 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군제도는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현에 파견되는 외관(外官) 중에 문관 출신을 적극 등용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라가 약 1세기 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주·군·현과 소경 밑에는 촌(村)·향(鄕)·부곡(部曲)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촌은 양인이 사는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촌이었는데,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해 현령을 도와 촌락행정을 맡도록 하였다. 한편, 향·부곡은 촌과는 구별된 듯한데, 이는 특수한 직역(職役)에 종사한다거나 혹은 현을 편성하기에 호구(戶口)가 크게 부족한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신라는 처음에 왕경 6부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해 이른바 6부병을 편성, 왕경을 수비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국왕은 전국적인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출신의 무장을 대신 파견해 싸우게도 하였다.
국왕지휘 하의 부대편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독립된 단위부대를 흔히 군기(軍旗)의 뜻을 가진 당(幢)이라고 불렀고 그 지휘관을 당주라고 한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6정 군단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에 화랑도(花郎徒)와 같은 청소년단체가 있었다. 화랑도의 원류는 성읍국가시대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조직으로 생각되는데, 진흥왕 때 대규모의 군단이 편성될 때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화랑도는 단순한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화랑집단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볼 수 있는 충(忠)과 신(信) 등 사회윤리 덕목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일정 기간 수련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 국난기에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갔으며, 특히 무사도의 현양(顯揚)에 이바지한 바 컸다.
화랑출신인 사다함(斯多含)·김유신·김흠운(金欽運)·관창(官昌) 등의 무용담은 신라 무사도의 귀감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화랑세기(花郎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해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군사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중앙군으로서 9서당, 지방 주둔군으로서 10정, 기타 많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같은 개편은 대체로 문무왕·신문왕 때에 이루어졌다.
9서당의 특징은 본래의 신라사람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피정복민을 포함해 구성된 군단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신라민으로는 종전의 서당과 낭당을 각각 개편해 두 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672년에 조직한 장창당(長槍幢)을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라 개칭하면서 9서당에 포함시켜 도합 3개의 군단을 조직하였다. 백제민으로는 전후 2개의 군단을 조직했으며, 고구려민으로는 3개 군단, 그리고 말갈민으로 1개 군단을 조직하였다.
고구려민으로 구성된 3개 군단 중에는 신라의 보호국으로 금마저(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에 세워졌던 보덕국의 성민(城民)으로 구성된 군단이 2개 포함되어 있다. 결국 9서당은 피정복민으로 조직된 군단의 수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신라통일기의 최대군단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었다.
한편,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정을 둔다는 원칙 아래 고루 배치하였다. 다만, 한주(漢州)는 국경지대에 위치했고, 지역 자체도 넓었기 때문에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10정은 국방상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군사조직이었다.
한편, 9주 가운데 특히 다섯 주에 배치된 군대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이는 기병집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국경지대에는 3개의 변수당(邊守幢) 등 여러 군사조직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농업은 여러 산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농업생산의 토대가 된 토지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관심은 성읍국가 성립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국가의 성립 이후에는 그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6세기 이래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성장에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요, 모든 국민은 왕신(王臣)’이라고 하는, 중국 고대의 이른바 왕토사상이 전해져서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토지가 국왕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다. 관직과 군직을 독점한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로 식읍(食邑)·사전(賜田) 등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받았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의 면적은 증가되어 갔다.
또한, 고급 관료들은 녹읍을 지급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특권도 묵인된 듯하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토지제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즉, 687년에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관료전은 다만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성질의 토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귀족들의 토지지배에 부수된 일반농민에 대한 지배를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획기적인 조처였다. 다만,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컸고, 한편 이를 억누를만한 국가권력이 쇠퇴해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때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귀족 관료들은 부활된 녹읍 이외에도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해 국가권력이 퇴조를 보이기 시작한 하대에는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릴만큼 재산을 축적해갔다.
한편, 전제왕권의 전성기였던 722년(성덕왕 21)에는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한 토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를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에 입각한 토지 지급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농민들이 본래부터 자영하고 있던 농토의 소유를 국가에서 인정해 준 조치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크게 피폐해졌고, 더욱이 고리대자본의 성행으로 몰락하고 있던 농민층을 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농민을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적 결집에서 분리시키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淸州지방) 지방 촌락 장적(帳籍)에 의하면,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畓)·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 촌민들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을 정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어쨌든 그보다는 농민들의 자영농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공업 및 상업의 발달과 귀족사회의 번영은 대외무역을 크게 촉진시켰다. 신라의 대외무역은 조공이나 예물 교환형식으로 행해지는 공무역과 사절단의 수행원과 상인들이 사사로이 행하는 사무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대상국가는 중국 특히 당나라이었으며, 그밖에 일본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아랍 상인들까지 신라에 와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쇼소인에 전해지고 있는「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는 752년 일본 조정이 신라 사신을 따라온 상인들로부터 매입한 물품을 적은 것인데, 당시 신라는 7척의 배에 7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 바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소규모의 대외무역이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교통이 한층 손쉽게 되었다.
또한 9세기에 들어오면 중앙 정치무대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지방세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마침 당나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진 데 힘입어 민간의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여 차츰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828년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한국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을 퇴치한 뒤 중국·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해 단기간 내에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파견했으며,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라는 이름의 무역사절단을 파견해 신라·당나라·일본 사이의 삼각(三角) 무역을 주도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내왕이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반자치적인 신라인의 집단거류지가 생겼다.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렀고,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까지 설치되었다.
이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장보고가 산둥성 원덩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이 번성해지자, 일본은 812년에 지쿠젠(筑前 : 지금의 九州 福岡縣 북서쪽)에 신라어학생(新羅語學生)이라는 통역생을 두었으며, 그 밖에 대마도(對馬島)에 신라역어(新羅譯語)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고조선이 멸망되기 전에 진국(辰國)에서 중국의 한(漢)나라에 국서를 보내려 했다는 역사기록을 보면 남한지방에서 한자가 사용된 시기는 한이 낙랑군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신라에서는 5세기의 고분에서 명문 자료가 출토되고 있으며, 6세기에 들어오면 많은 비석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인들은 문어(文語)로는 외국문자인 한자 및 한문을 쓰면서 구어(口語)로는 이와 그 구조를 전혀 달리하는 우리말을 쓰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일찍부터 독특한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 표기법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신라인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두(吏讀)를 성립시켰고, 7세기 후반에 설총(薛聰)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吐)를 넣은 이두문의 문법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755년(경덕왕 14)에 완성된 「신라 화엄경 사경 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표기법은 일본으로 전해져 그들의 음절문자인 가나(假名)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자연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순수비 비문은 현재 남아 있는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한문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행해진 국가적인 편찬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545년(진흥왕 6)『국사(國史)』의 편찬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가 상주해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왕명을 받은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해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새로이 관찬사서를 편찬했을 법한데,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8세기 초 성덕왕 때에 진골출신의 정치가요 역사가인 김대문이『계림잡전(鷄林雜傳)』·『화랑세기』·『고승전(高僧傳)』·『한산기(漢山記)』·『악본(樂本)』등 많은 저술을 했다고 한다. 김대문의『고승전』외에도 여러 고승들의 전기가 나왔고, 김장청(金長淸)에 의해『김유신행록』과 같은 화랑 출신의 대표적 위인에 대한 전기도 저술되었다.
이들 저술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때에『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남아 있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에 의해서『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는데, 이 역시 현재 그 편린만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랑도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유교덕목은 신(信)과 충(忠)이었는데,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확인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 국가가 앞장서서 유교도덕을 널리 국민에게 권장했던 것과 관계가 있는데,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충신정성(忠信精誠)해 나라를 위해 절개를 다하는 인물을 표창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비문에서는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통일기에 들어오면 유교는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이 설립되었다. 본래 국학은 통일 직전인 651년에 설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사무직인 대사(大舍)를 두었으나, 682년에 예부 소속으로 정식 설치되어 3과(科)로 나누어 박사와 조교의 지도하에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여기에 입학하는 학생은 나이가 15∼30세로서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진 관료이거나, 무위(無位)인 자에 한정되었으며, 수학연한은 9년이었다.
그리고 국학생들이 졸업할 때 학력을 시험해 3등급을 매겨서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제도가 788년(원성왕 4)에 생겼는데, 이것이 독서삼품과였다.
국학의 입학생은 주로 육두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유교를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주장하였다. 설총이 지은『풍왕서(諷王書)』(일명 화왕계(花王戒)라고도 함)나 혹은 강수(强首)의 입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골품제 아래서 관계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던 육두품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육두품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나아가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이 894년진성여왕에게 건의한 10여 조의 시무책 중에는 이 같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비록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육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이념은 뒤에 오는 고려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시대의 종교를 보면 재래의 샤머니즘 외에 불교·도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불교는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를 통해 전해져 처음 북쪽 변경지방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전도자들은 당국의 박해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소지마립간 때에 아도(阿道, 일명 墨胡子)가 일선(一善 : 지금의 경상북도 善山)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전도에 힘썼으나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그러던 중 521년에 중국 남조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두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비로소 불교가 신라왕실에 정식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던 법흥왕의 노력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실패로 끝났고, 527년(법흥왕 14) 왕의 총신인 이차돈(異次頓)이 창사(創寺) 준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과 귀족세력간에 일정한 타협을 보게 되어 늦어도 535년경에는 마침내 공인을 받게 되었다.
불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매우 적합했을 뿐 아니라,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적 근거도 갖추었기 때문에 공인 후 국왕과 귀족세력 쌍방의 조화 위에서 국가불교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물론, 질병을 고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호국경전인『인왕경(仁王經)』과『법화경(法華經)』이 매우 존중되었으며, 호국의 도량(道場)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왕궁 가까운 곳에 황룡사 같은 큰 사찰을 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찰에서는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함께 팔관회 같은 호국적인 행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선덕여왕 때 군사적 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중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황룡사의 사주(寺主)로서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불교를 주관한 자장(慈藏)은 신라 왕실이 석가와 같은 찰제리종(刹帝利種, 크사트리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불법(佛法)과 왕법(王法)을 일치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호국을 위한 전쟁이 동시에 호법(護法)을 위한 싸움이라고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였다.
이처럼 승려들에게 있어서 호국과 호법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적극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 자신은 비록 전쟁을 용인한 적은 없으나, 진평왕의 명령을 받아들여 608년 ‘걸사표(乞師表)’를 쓰기도 했으며, 또한 임전무퇴(臨戰無退) 등 전투에 있어서 용감하기를 권하는 세속오계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윤리적·실천적 의미의 현세구복적인 성격에서 점차로 종교적·신앙적인 의미의 내세적인 불교로 바뀌어갔다.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뚜렷한 증좌이다.
정토신앙은 통일 직전 왕경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몰락해 지방으로 낙향해간 사람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는 극락(極樂)에 왕생하는 데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여섯자를 극진한 마음으로 부르면 족하다고 설교하였다.
이로써 교리상의 발전은 물론, 신앙면에서도 위로는 국왕과 귀족을 비롯해 아래로는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갔다.
한편 통일기에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갔다. 통일 전 국가불교가 융성했을 때의 승려들은 현실참여를 강요당하게 되어 교리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다녀온 549년 이래 많은 승려들이 서학(西學)하고 돌아와서 교학불교(敎學佛敎)의 전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역시 6세기 후반에 진(陳)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이 진평왕 때 운문산 가슬사(嘉瑟寺)에 머물면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르쳤던 것은 그 뒤 교학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통일기에는 불교에 대한 허다한 저술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이름난 것이 원효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판비량론(判比量論)』등이었다. 그밖에 원측(圓測)·의상(義湘)·도증(道證)·승장(勝莊)·경흥(憬興)·의적(義寂)·태현(太賢) 등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은 내용이 풍부하고 이해의 수준이 높아서 중국 및 일본에 교리 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교리의 대립을 가져와 여러 교파의 분립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종래에는 흔히 5교(敎)라 하여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법성종(法性宗)·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을 꼽아왔으나 최근에 이 5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통일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데 치중했던 만큼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존하는 교종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 때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이해를 얻지 못하다가 헌덕왕 때 도의(道義)가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함에 따라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9산(山) 선문(禪門)이 성립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달했다. 선종은 진골귀족의 지배체제에 반발하고 있던 지방호족들에게 자립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도가사상(道家思想)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도가사상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의 형태를 띠고 발달했는데, 산악신앙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 성모전설(仙桃山聖母傳說)은 선도와 인연이 깊은 서왕모(西王母)의 전설을 연상하게 한다. 진평왕 때 지상의 범골(凡骨)들과는 다른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세(大世)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김유신이 중악(中嶽)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닦은 것 등으로 미루어볼 때 선풍(仙風)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신선방술(神仙方術)을 곁들인 도교문화가 쉽사리 수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74년(문무왕 14)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세 섬은 삼신산(三神山)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은 유교와 더불어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설(說)을 섭렵했다고 하므로 그가 도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도가사상은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으로 관심을 끌었으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연 속에 묻히려는 은둔사상도 발달하였다. 8세기 초 감산사(甘山寺)를 지은 김지성(金志誠)이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도사로서 일생을 마친 당 진사과 출신의 김가기(金可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라 말기에 지방세력의 등장과 동시에 유행되기 시작한 사상에 풍수지리설이 있다. 이는 인문지리학의 지식에 예언적인 참위설(讖緯說)이 가미된 것이었는데,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9세기 후반에 활동한 승려 도선(道詵)이었다.
그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이른바 명당을 골라서 근거지를 삼거나 혹은 주택과 무덤을 지어야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수의 쇠왕과 순역(順逆)을 점쳤다고 한다. 이 설은 호족들 사이에서 크게 신봉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문학은 원시 심성(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제의에서 발생했는데, 크게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설화문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석씨 출신의 왕자 우로(于老)나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나물왕의 아들을 구출한 박제상(朴堤上) 등에 얽혀 있는 단편 사화(史話)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가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내용도 적국(敵國)인 왜에 대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일종의 영웅서사시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시가문학은 민요·향가 등 다양한 편이다. 민요풍을 띠는 시가로는「서동요(薯童謠)」와「풍요(風謠)」가 있다.
서동요는 백제무왕(武王, 혹은 東城王)이 신라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주가 몰래 자신과 밀회를 즐긴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신라 왕경 안의 민중들에게 모략적으로 유포시켰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민중들이 어떤 왕실귀족의 떠들썩한 연애사건을 풍자해 지어낸 노래인 듯하다.「풍요」는 경주 영묘사 내의 조상(造像) 공사와 관련된 일종의 노동요로서 후대에까지 민중 사이에 불렸다.
시가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진평왕 때 향가로 발전했으며, 통일기에는 많은 향가작가가 나타났다. 소박한 노래 속에 부드러운 가락을 담고 있어 국문학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향가는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노래였으나, 특히 주원적(呪願的)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8∼9세기 경에는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에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상대등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체의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삼국유사』에는 14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이름난 것이 승려 융천사(融天師)의「혜성가(彗星歌)」, 재가승(在家僧) 광덕(廣德)의「원왕생가(願往生歌)」, 낭도 득오(得烏)의「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 승려 월명사(月明師)의「제망매가(祭亡妹歌)」, 승려 충담사(忠談師)의「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 처용(處容)의「처용가」등이다.
향가는 주로 승려나 화랑과 같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을 작가로 한 귀족사회의 소산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민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 국민 상하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은 종교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녔다.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의 전래를 계기로 크게 발달하였다. 본래 가야금은 대가야에서 만들어졌으나, 6세기 중엽에 악사 우륵(于勒)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마침내 대악(大樂, 일명 宮中樂)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우륵은 12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가야지방에서 유행한 노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노래는 비록 지방색이 강한 시골음악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대중의 속악(俗樂)은 아니었으며, 궁중이나 귀족들의 연회에 쓰일 만큼 세련된 음악이었다.
우륵의 제자 중에는 계고(階古)·법지(法知) 등이 유명했는데, 가야금에는 하림(河臨)·눈죽(嫩竹)의 2조(調)와 도합 180개나 되는 악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방아타령(碓樂)」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금 계통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기에도 가야금이 악기 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외에도 많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그 중 기본이 되는 악기는 가야금·거문고〔玄琴〕·향비파(鄕琵琶)의 3현(絃)과 대금(大笒)·중금(中笒)·소금(小笒)의 3죽(竹)이었으며, 여기에 박판(拍板)과 대고(大鼓)가 첨가되었다.
이 중 거문고는 본래 고구려의 악기였는데, 고구려가 망한 뒤 신라로 망명해온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전존되어 왔다. 이것을 옥보고(玉寶高)가 배워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고 하며, 뒤에 귀금선생(貴金先生)이 이를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한편, 향비파는 서역의 악기였는데, 그것이 향악(鄕樂) 합주에 쓰이게 됨에 따라 향비파라 불리게 된 듯하다. 이른바 3죽은 향악기였는데, 당악(唐樂)의 합주에도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곡조에 맞추어 추는 춤은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라시대의 음악은 악기와 노래에 춤이 가미된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여기에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축제 때에 징과 북 장단에 맞추어 요란스럽게 추는 군무가 성행했는데, 가야금이 전래됨에 따라 그 가무는 한층 세련되어갔다.
특히, 중국을 통해서 서역계통의 가면무용이 전해짐으로써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 등 이른바 신라 오기(五伎)가 성립되었다. 산예는 사자춤이었다. 이 밖에도 헌강왕 때에 처용무와 상염무(霜髥舞)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가면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시대의 미술은 크게 건축·조각·공예·회화·서예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사찰·탑파(塔婆) 등이 있다.
① 왕릉 :
삼국통일 이전 신라왕들은 생시의 지상의 주거생활을 그대로 지하의 무덤으로 옮긴다는 취지에서 고총(高塚)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현세의 생활도구가 고스란히 부장되어 있어 왕릉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예 혹은 회화를 살피는 데도 보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왕경 내의 평지에 수혈식(竪穴式) 적석총을 만들었다.
6세기 후반경에는 왕경의 주변지역으로 흩어져서 산 밑이나 언덕 위에 만들어졌고,
무덤의 양식 또한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통일 후에는 무덤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제도(護石制度)가 크게 발전하였다
. 그밖에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네 석사자, 방주석·난간을 배치하며,
무덤 앞에 석상(石床)을 놓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양쪽으로 문무석인(文武石人)과
석주를 배치하는 복잡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② 사찰 :
왕경 안에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영흥사(永興寺)·분황사(芬皇寺)·영묘사(靈廟寺)·
사천왕사(四天王寺)·황복사(皇福寺)·망덕사(望德寺)·봉덕사(奉德寺)·
창림사(昌林寺) 등 많은 거찰을 조영했다.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그 유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70년대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종래에는 황룡사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보아 가람배치 역시 백제계통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발굴결과 문·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 강당에서 회랑에 연결되는 것 등은
백제와 같으나, 금당만은 고구려계통의 삼금당식에 속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세 금당을 탑의 동서와 북쪽에 배치한 고구려와는 달리
이것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밖에도 황룡사는 중문 남쪽에 남문을 또 하나 세웠으며,
사찰의 경계에는 담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가람배치의 양식이 무척 다양해져,
사천왕사·망덕사·감은사·불국사 등은 금당 앞 양편에 두 개의 탑을 세워두는 이른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중앙지향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마치 당시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경덕왕 때에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석굴암에서도 엿볼 수 있다.
③ 탑파 :
탑파는 불교건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삼국통일 이전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 백제사람 아비지(阿非知)가 2백여 명의 공장(工匠)을 지휘해
건축했다고 하는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고려 때 몽고의 병란에 불타 없어졌다.
옛 기록에 의하면 목탑은 전체높이가 80m쯤 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탑의 기단에 배치된 거대한 심초석(心礎石)을 보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통일 이전 탑파의 모습은 분황사의 모전탑(模塼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석재를 전형(塼形)으로 잘라서 전축(塼築)의 수법으로 축조했으며, 탑의 구조자체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번안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대체로 기단부가 넓고 높아지며 탑신은 각층이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조성된 균형 잡힌 방형 3층탑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덕왕 때에 건립된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해 감은사터 삼층석탑, 고선사(高仙寺)터 삼층석탑, 원원사(遠願寺)터 삼층석탑, 갈항사(葛項寺)터 삼층석탑 등이 있다.
한편, 특수한 형태의 뛰어난 석탑으로는 석가탑(본래의 명칭은 무구정광탑)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불국사 다보탑과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화엄사(華嚴寺) 사자탑이 있다. 이밖에 독자적인 형식의 것으로 월성(月城) 정혜사(淨惠寺)터 십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조각으로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① 불상 :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분황사탑에 조각된 8구의 인왕상(仁王像), 남산 장창곡(長倉谷) 삼화령(三花嶺) 미륵존상,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속칭 上人巖) 석굴의 마애상 등 모두 석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진흥왕 35)경에 만들어진 황룡사의 금동장륙삼존상(金銅丈六三尊像)은 신라 최대의 거불이며 동시에 걸작으로 이른바 신라 3보(寶)의 하나로까지 손꼽혔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국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두 불상, 즉 탑형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78호)과 얕은 삼산관(三山冠, 일명 三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83호)을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통일 이전에는 조각가로 승려 양지(良志)가 있어서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비롯해 많은 불상과 와전(瓦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통일기의 불상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나, 김지성의 발원(發願)으로 조성한 감산사의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은 중국·인도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는 걸작이다. 이는 굴불사(堀佛寺) 사면석불을 거쳐 석굴암의 불상에 이르러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② 석등·석조·당간지주 : 통일기의 조각작품으로는 불상 외에 석등·석조(石槽)·당간지주·비석·호석 등 다양한 편이다. 석등은 중흥산성(中興山城) 쌍사자석등과 법주사 쌍사자석등을 꼽을 만하며, 석조는 경주 보문동석조와 법주사 석연지(石蓮池), 당간지주로는 공주 갑사·망덕사터, 부석사터, 공주 반죽동(斑竹洞), 금산사(金山寺)의 것이 유명하다.
비석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김인문묘비의 것으로 짐작되는 귀부가 남아 있다. 끝으로 원조(圓彫) 혹은 부조(浮彫)된 호석으로는 성덕왕릉 및 원성왕릉으로 짐작되는 괘릉(掛陵), 그리고 김유신묘가 대표적이다.
공예는 크게 금속공예와 도기·토기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왕릉은 구조상 도굴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많은 공예품을 남겨주고 있다. 대체로 5세기를 중심으로 이들 왕릉에서 나온 공예품들은 장신구·이기(利器)·마구 및 토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장신구 중에는 금관을 비롯해 금귀걸이·금띠·금가락지·금팔찌 등 순금제품이 많다. 이기에는 유리제품의 잔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고배(高杯)·은잔·숟가락, 금으로 만든 바리〔盌〕·구리항아리·구리솥 등이 있다. 마구에는 금동(金銅)으로 만든 발디딤〔鐙子〕등이 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불교의 융성 등 요인으로 공예기술이 더욱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범종과 사리구(舍利具)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오대산 상원사종과 특히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속칭 奉德寺鐘)은 큰 규모에 기법이 너무도 완벽하여 한국종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한, 감은사터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도 한껏 기교를 부린 뛰어난 것이다.
토기에 있어서도 모양이 다양해졌는데, 특히 유약을 바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끝으로 와당은 종래의 수막새와당 일변도에서 암막새와당·서까래기와·귀면와(鬼面瓦) 등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고, 무늬도 연화문 일변도에서 보상화(寶相華)·인동(忍冬)·포도·봉황·앵무·원앙 등 다채로워졌다.
황룡사「노송도(老松圖)」와 분황사「관음보살상」, 단속사(斷俗寺)「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을 그렸다고 하는 솔거(率居), 8세기말경 당나라에서 활동한 김충의(金忠義), 신라 말기의 승려 출신인 정화(靖和)·홍계(弘繼) 등 화가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내부구조상 현실(玄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1973년 천마총(天馬塚)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와 관모(冠帽)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환형(環形)의 화면에 그려진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발견되어 옛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 태장리(台庄里)의 한 석실묘에 연화도와 신장도(神將圖)가 일부 남아 있다. 통일기에는 불교회화 이외에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755년에 완성된『화엄경』사경(寫經)의 불보살상도가 있는데, 석굴암 보살상들과 비슷한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통일 이전의 서예는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금석문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졸(古拙)한 것이었다. 통일기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전해지면서 한결 수준이 높아졌다.
신라시대 최고의 명필은 8세기에 활약한 김생(金生)으로 왕희지체에 따르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서법(書法)은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와 서첩(書帖)인 전유암첩(田遊巖帖)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왕희지체의 대가로는 영업(靈業)이 유명한데, 그가 쓴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은 왕희지의 집자비로 오인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오면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해,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刹柱本記)」등을 쓴 요극일(姚克一)과 진감선사비문(眞鑒禪師碑文)을 쓴 최치원이 대표적인 명필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가 멸망한 뒤 그 왕조의 역사와 제도·전장(典章)·문물에 대한 첫 번째 정리사업은
고려왕조 초기에 시도되었다. 편찬시기와 편찬자를 잘 알 수 없는
소위『구삼국사』가 바로 그것인데, 다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전해오는 신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구삼국사』를 토대로 하여 여기에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한국 관련 자료를 크게 보충한 김부식의『삼국사기』(1145)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유교의 도덕주의 사관에 입각해 종래의
고기(古記) 기록에 필삭(筆削)을 가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 없으나,
불충분한 대로 신라의 역사와 지리·제도·문물 전반에 대한 일단의 집성으로 신라사 연구의 기본자료라 할만하다.
한편 이보다 140년쯤 뒤에 나온 일연선사의『삼국유사』는
삼국 중 특히 신라시대의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적 기술이 풍부해 이 방면의 연구에서 거의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각종 고기류와 사찰의 고문서, 금석문 자료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시대의 자료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동국사략』(일명 삼국사략)이 편찬되고,『삼국사절요』에 뒤이어 그 일단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동국통감』등의 관찬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하지만 주자학의 도덕적·교훈적 및 명분론적 윤리사관에 입각한 사료의 필삭과 사론(史論)이 행해졌을 뿐,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앞선 역사서의 불비(不備)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조선시대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흔히 실학의 시대라고 불리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옛 강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고대의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이에 신라의 북방 한계선이 논의되고,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함흥 북쪽의 황초령(일명 草坊院)과 단천 소재의 마운령비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데 있어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그 뒤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신경준이『강계고』(1756)에서 이 점에 대해 언급한 뒤 김정희는 1816년과 1817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그 때까지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진 북한산비가 실은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임을 확인하고, 이를 황초령비문과 대비하면서『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토대로 해 본격적으로 논한 것은 진정 신라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다.
현재 신라사 연구에서 금석문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임을 상기할 때, 김정희의『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阮堂先生全集 1)야말로 신라사 연구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밖에도『삼국사기』신라본기에 매우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록된 소위 박·석·김(朴·昔·金) 3성에 의한 왕실의 교립(交立)현상을 허목(許穆)이나 이종휘(李種徽)가 중국 삼대(三代)에도 없던 일이라고 예찬한 데 반해 정약용이 왕실 교체의 본질을 필경 권력에 의한 혁명으로 간파한 것은 초기 신라사의 실상에 근접한 해석으로 주목할 만했다.
실학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사 연구는 백년 이상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비로소 근대역사학의 성립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한국고대사 연구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으며 더욱이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가들은 삼국 중 고구려의 상무적(尙武的)·자주적 기상을 찬양한 나머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최고 지배층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자들이라 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 통치시대 신라사 연구에 종사한 것은 오히려 실증사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학자들의 연구활동에 맞서서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해 기관지를 발간하면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그 중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성과를 보면, 이병도(李丙燾)는「삼한문제의 신고찰」(1934∼1937)이란 장편 논문에서 신라를 포함한 백제·가야의 국가 형성기반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고찰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상기(金庠基)는「고대의 무역형태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대하여」(1934)에서 신라 통일기에 대외무역이 진행되는 가운데 9세기 전반 출현한 장보고의 해상왕국 청해진의 흥망사를 폭넓게 검토하였다.
또한 불교사 연구에서는 김영수(金映遂)가「오교 양종에 대하여」(1937) 및「조계선종에 대하여」(1938)에서 당에서 성립된 불교의 여러 종파가 신라에 전래된 뒤 교종의 5교, 선종의 9산으로 전개 발전해 간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것도 소중한 성과였다.
특히 최남선이 1929년 함남 이원군의 속칭 만덕산에서 조선 후기 이래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없었던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소위 마운령비를 답사하고,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한 것도 그 후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일본의 관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신라사 연구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식민지 지배기구를 독점한 상황에서의 연구였던 만큼 그 성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의해 추진된
금관총(1921),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 신라시대 초기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라든지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 등에 대한 조사 연구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건축사학자 후지시마(藤島亥治郞)에 의한 경주의 신라 왕경(王京) 유지에 대한 조사연구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헌사학 분야에서는 이마니시(今西龍)가 1906년 최초로 경주를 답사한 이래 신라시대의 유물·유적이라든지 금석문·고문서, 그리고 골품제도나 갈문왕제도 등에 대해 꾸준히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그가 죽은 직후 정리되어『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1933)로 간행되었다.
이 밖에도 이케우치(池內宏)는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역사지리 및 신라의 왕위계승과 무사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미시나(三品彰英)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주변 여러 나라 혹은 민족의 신화요소와 비교해 연구하는 한편 민속학 내지 민족학의 지식을 원용해 화랑에 대한 전문 연구서를 내놓았다.
역시 스에마츠(末松保和)는 신라의 6부제도라든지 군사제도를 비롯해 신라의 건국문제, 상고(上古) 및 중고(中古)시기의 세계(世系)문제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그 뒤 일본에서의 신라사 연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8·15 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비로소 한국사 연구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다만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한국사 연구를 위한 제반 여건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연구 인력은 부족했고, 연구를 위한 시설 및 자료 역시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는 신라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 이후 3년간의 혼란 끝에 정부가 수립되어 차분한 연구분위기가 조성되어 갈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젊은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학회가 결성되고 기관지로『역사학보』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장래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시대부터 한국고대사 연구에 종사해 왔던 기성 연구자들(이른바 제1세대)도 잇따라 역작들을 발표하면서 학계를 이끌어 갔다.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던 이병도는 신라시대의 원시집회소로부터 화백회의에 이르기까지 정치형태의 변화과정을 여러 방면에서 입증한「고대 남당고」(1954)를 비롯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해방 이전 시기의 업적을 토대로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총정리해 진단학회 한국사 총서의 하나로『한국사-고대편-』(1959)을 세상에 내놓았다. 씨는 뒤에도 신라사를 비롯해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이는『한국고대사연구』(1976)로 정리되었다.
또한 해방 전 고대 한·일관계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홍직(李弘稙)은『삼국사기』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과 더불어 신라시대의 각종 금석문자료 및 고문서에 대한 면밀한 고증을 꾀하는 등 매우 견실한 학풍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업적은 씨가 사망한 직후에 나온 논문집『한국고대사의 연구』(1971) 신라편과 통일신라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나온 연구업적으로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덕성(李德星)의 유고집 『조선고대사회연구』(1949)는 대학 강의안을 토대로 논문「신라왕계와 골품의 형성과정」(『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1, 1949)을 부록으로 싣고 있는 소품이지만 신라 초기의 왕위계승과 골품제도에 대해 흥미로운 견해가 엿보인다.
그러나 신라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업적들은 해방 직후 학계에 새로이 등장한 이른바 제2세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역사학회 창립에 관여했고, 주로 그 기관지를 통해서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기백(李基白)은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역사학보』6, 1954)를 통해 학계에 등장한 뒤「신라 사병고」(1957)·「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1958)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들을 일관성 있게 추구했는데, 이는 뒤에『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신라 지배세력의 변천과정과 더불어 국왕, 진골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상대등, 국왕 직속의 행정기관인 집사부 장관 시중을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뒤 씨는 신라사상사 연구에 착수해 유교사상 뿐 아니라 신라통일기의 정토신앙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는데, 그 성과는『신라사상사연구』(1986)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국가불교의 성립기로부터 민중불교의 대두에 이르기까지 신라불교사의 여러 양상이 전반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한편 김철준(金哲埈)은「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1952)을 발표한 이래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1956)·「신라시대의 친족집단」(1968) 등 인류학적 방법을 신라사회사 연구에 적용한 논문을 발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뒤에『한국고대사회연구』(1975)로 정리되었다. 이 논문집에는 신라 상고(上古)의 세계(世系)와 기년에 대한 조정이라든가 녹읍(祿邑) 경영에서 볼 수 있는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문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지배세력의 성격문제 등을 추구한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변태섭(邊太燮)은 뒤에 고려시대사 연구로 주전공을 바꿨지만「신라 관등의 성격」(1954)·「묘제(廟制)의 변천을 통하여 본 신라사회의 발전과정」(1964) 등의 논문을 발표해 신라 관등제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중위제(重位制) 문제라든지 골품제도의 사회적 변질 분화과정을 심도 있게 추구했다.
1970년을 전후해 이른바 제3세대 연구자들이 다수 등장해 앞선 시기의 연구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신라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것은 대학원 교육의 팽창 강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신라사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1988년 울진에서 봉평비가 발견되어 그 공동연구를 계기로 ‘한국고대사연구회’가 결성되고 머지 않아 한국고대사학회로 발전한 것은 당시의 제반 상황에 비춰볼 때 자연스런 추세였다.
이 같은 현상은 신라사 연구에서 세분화 내지 전문화 경향을 촉진했으며, 그 결과 1990년경을 전후해서 고도의 전문 주제를 선택해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이처럼 전문 연구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2003년신라사학회가 조직되어 그 이듬해부터 계간지『신라사학보(新羅史學報)』가 발간되는 등 현재 신라사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1970년경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 간의 연구성과를 개인별로 하나하나 검토해 볼 여유가 없으므로, 이를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몇 개 부문으로 나누어 각 주제별 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이랄까 연구 상황을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정치사 부문을 보면 해방 후 고고학계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신라국가의 형성 배경과 기원 후 5세기경까지의 상고시대 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점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주로 경주와 그 인근지역의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기초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1970년대부터 국내 학계에 소개된 미국 신진화주의 인류학자들의 국가(State)사회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서의 수장제(首長制, Chiefdom) 사회론이 던진 충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밖에도 천관우(千寬宇)가 삼한의 국가형성을 다룬 일련의 논문에서 제시한 성읍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의 국가발달 단계론이 논의를 한층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일부의 연구자들 사이에 『삼국사기』신라본기 초기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긍정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초기 연대기를 전면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이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것만을 가려내서 검토해야 한다는 수정론이 학계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치제도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성과를 거둔 것은 역시 왕경 6부의 성립과정과 그 변화, 관등제의 성립 그리고 지방통치체제의 확립과정에 대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8년경북 영천 청제비(菁堤碑, 536년 제작)의 발견에서부터 1970년 학계에 알려진 울산광역시 두동면 천전리의 서석명문(書石銘文, 525∼545년의 간지가 표시된 부분), 1978년 충북 단양 적성비(540년대 후반 건립)의 발견에 이어 1980년대 말에 잇따라 발견된 경북 울진 봉평리비(524년 건립), 경주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 551년 건립), 포항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비(503년 건립), 그리고 2009년 역시 포항 흥해읍에서 발견된 중성리비(501년 건립) 등 일련의 금석문 자료였다. 이들 동시대 자료의 발견으로 종래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520년(법흥왕 7)의 율령 반포를 전후한 시기의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대략 6세기 초 마립간시대로부터 대왕의 세기로 전환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형태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5세기 말까지의 집권체제에 대한 평가가 종전에 비해 저하되어 이른바 6부체제설이 보다 힘을 얻게 되었고, 경위와 외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관등제가 종전에 생각한 것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지방통치체제가 차츰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방세력가로서의 촌주가 차지하고 있던 독자적인 위상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도 큰 성과였다.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구체적인 정치과정을 다룬 연구도 적지 않다. 통일 후 100년 간의 중대(中代)는 신라의 전 역사에서 보면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볼 때도 가장 수준 높은 성취를 이룩한 황금시대였는데, 이 시대의 정치사 연구도 활발히 전행되었다. 일찍이 이기백은 이 시대의 정치형태를 전제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제3세대·제4세대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에 반론을 펴고 있어 논의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또한 종래 소홀하게 다루어져 온 하대(下代) 150여 년 간의 정치사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왕위계승의 문제라든지 지방세력가로서의 이른바 호족의 성장 문제가 깊이 있게 추구되고 있다. 특히 후삼국시대 동란기의 주역이었던 후고구려(일명 泰封) 궁예정권과 후백제 견훤정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가 나오고 있다.
정치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법당(法幢)군단이라든지 패강진(浿江鎭)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대해서도 이를 동아시아 역사의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파악하려는 참신한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다. 대외관계사 분야에서는 일찍이 신형식(申瀅植)이 숙위(宿衛)제도라든지 숙위학생 문제를 다루어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후속 연구자들은 근래 견당사(遣唐使)를 중심으로 한 한·중관계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재당(在唐) 신라인사회의 분석을 통해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심도 있게 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 사회사 부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골품제적 신분 편성에 대한 문제이다. 실제로 골품제도는 신라 신분제도의 대본(大本)으로 일찍부터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왕실의 혈족집단, 특히 상속과 혼인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근래 6부제도의 변화와 관련해서 새롭게 파악할 필요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러니까 왕권의 성장에 따라 6부제도가 재편성된 결과 제도화된 것이 골품제도라는 인식인데, 다만 최고 골품으로서의 성골은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실의 독존적인 혈연의식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장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또한 각각의 골품이 얻을 수 있는 최고 관등에 대한 법적 규제는 7세기 중엽 중국 율령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정비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나아가 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왕경 6부인만을 대상으로 경위 관등을 부여했을 것이라는 데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없는 듯하다.
경제사 부문에서 주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역시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신라 촌락 장적(帳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는 1950년대 초의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뒤 일본인 연구자 하타다 타카시(旗田巍)에 의해서 기초적인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제3세대 연구자들 사이에 이를 새롭게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김기흥(金基興)·이인철(李仁哲)·이희관(李喜寬)·윤선태(尹善泰) 등에 의해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하타다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수정 내지 보완되었을 뿐 아니라 정전제와 녹읍제를 중심으로 한 통일기 토지제도 전반에 걸친 연구로 크게 확대되었다.
나아가 통일기에 들어와 정전 지급에서 볼 수 있듯이 종전의 인신적(人身的) 지배에서 토지에 대한 수취체제로 바뀌어갔다는 점을 들어 신라통일기를 한국사에서 중세사회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대구분 논쟁도 제기되었다. 한편 토지제도 외에도 통일기의 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경제사 분야는 그 연구의 폭이 차츰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사 부문에서 가장 활기를 띠고 연구가 진행되는 분야는 미술인데, 이는 새로운 자료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1970년대 이른바 신라문화권 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곧이어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안압지에 대한 정화(淨化) 복원사업이 추진된 결과 많은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고분의 구조라든지 절터의 가람배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대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이 글의 문화편에서 간략하나마 기술했으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미술분야를 제외하면 문화사 부문에서 비교적 큰 연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신라불교는 일종의 황금어장이라고 할 만큼 많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역시 문화편에서 간단히 기술했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불교 교리를 중시하는 연구자와 불교사상 그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견해 차이에 대해서 조금 논의하고 싶다. 즉 이기백·안계현(安啓賢)·김두진(金杜珍) 등은 불교의 화엄사상이 중대의 전제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고 보는 반면 김상현(金相鉉)·김복순(金福順)·정병삼(鄭炳三)·남동신(南東信) 등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화엄사상이 왕권의 안정적인 유지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불교계가 한 것처럼 정치이념을 수식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한다.
신라 말기의 최치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물론 한문학이나 사상사 특히 불교사 분야에서 변함없이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역사학쪽에서는 6두품 출신의 중국 유학생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유교정치이념과 더불어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파고들고 있다. 그가 귀국한 뒤에 지은 불교 관계의 이른바 4산비문에 대해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이지관(李智冠)·이우성(李佑成)·최영성(崔英成) 등에 의해 교감 및 주석 번역이 이루어졌고,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집인『계원필경집』은 『고운집』과 함께 2009년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국역 출간되었다. 최근 그에 대해서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문 연구서가 나올 만큼 구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끝으로, 현재의 신라사 연구 상황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은 목간 자료를 활용하여 생활사 내지 심성사(心性史) 등 이른바 미시사(微視史) 분야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목간은 문서행정의 실무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문자 자료이므로, 아무런 가감없이 기록된 점이 특징이다. 금석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문이 대개 국왕 이하 지배층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송덕문(頌德文)의 성격을 띠고 있어 사실의 과장과 때로는 왜곡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것과 목간이 다른 점이다. 이처럼 당해(當該) 시대의 생생한 일차자료인 목간은 1975년 안압지 정화작업 때 처음 발견된 이래 월성 해자(垓子)를 비롯한 경주 시가지 여러 곳에서 출토된 바 있고, 1992년 이래 지금까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6세기 중엽 무렵의 물품 꼬리표[荷札] 목간이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2007년에는 목간의 연구 및 학술조사를 목적으로 한 한국목간학회가 창립되어 기관지『목간과 문자』를 발간하고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목간이 발견되고 또한 그 자체로 연구수준이 높아진다면 신라사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귀부 반대 저항한 칠원(漆原. 당시는 칠토 칠제국, 가야지역)의 자성이족
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칠원읍(漆原邑)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안군의 읍이다. 함안군의 동북에 위치하며,
북으로 칠서면, 칠북면과 접하고, 동남쪽으로 창원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끼고, 남쪽으로 창원시와 인접하고 있다.
칠서면, 칠북면과 함께
삼칠 (三漆, 칠원 (漆原), 칠서 (漆西), 칠북 (漆北)에서 칠 (漆) 자만 따서 만들어진 말)권을 이루고 있다.
칠원은 삼한시대에 변진 12개국의 하나인 접도국이었으며, 가야시대에 와서는 칠포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칠토현이라 하였으나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칠제현으로 개칭되었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칠원으로 칭하였으며, 1018년 현종 9년에 금주(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 함안군과 합병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칠원면이라 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칠북면 운서리 및 운곡리의 4개마을이 편입되었고, 2000년 9월 29일 무기리 무기마을을 무기1리, 무기2리 마을로 분동하였다.(10개리 26개마을)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
•「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고성군의 연혁
삼한시대에 변진12국 중의 고자미동국 또는 포상8국 중의 고자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6가야 중 소가야국이었으며, 그 유적으로 보이는 고분군이 고성읍과 동해면 등에 남아 있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고자군(또는 고자국)을 두었으며, 757년에는 고성군으로 고쳐 강주(진주)에 속했다. 이때 영현으로 사수현(사천시)·상선현(뒤에 영선현 지금의 영현면 일대)을 거느렸다. 고려에 들어 995년에 고주자사를 두었다가 1018년 현령으로 강등시켰다. 1266년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고성현은 현재의 통영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고성군보다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 또한 당시 남해안의 방어상 중요한 요지였음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입증되어, 1604년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이전했다가 두룡포가 1617년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으며 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0년 통제영이 있던 고성군 남쪽 지역을 분할하여 진남군을 신설함으로써 고성군의 영역이 대폭 줄어들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진주의 두입지였던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곡면·개주면 등이 편입되어 면적이 다소 넓어졌으나, 남양면(지금의 사천시 중심가)은 1912년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함안군 咸安郡
개관
동쪽은 창원시, 서쪽은 의령군·진주시,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군과 창녕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8°16′∼128°35′, 북위 35°09′∼35°23′에 위치한다. 면적은 416.64㎢이고, 인구는 6만 91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248개 행정리(88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있다.
역사
이 지역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함안면·칠원읍·군북면 등지의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으며, 그 분포 지역과 양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활발했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한시대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耶國)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라가야(阿羅加耶), 즉 6가야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력한 나라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가야읍 말산리·도항리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그들이 남긴 유적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군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라국(阿尸良國, 阿那加耶라고도 함)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郡)을 삼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법흥왕 때의 신라 세력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시량국은 경주에 가까운 지방의 이름과 혼동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라가야가 멸망한 시기에 대하여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신라가 창녕지방에 진출하였던 진흥왕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이곳을 함안군으로 개칭하고 현무(玄武)·의령(宜寧) 등 2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본래 현무현은 소삼현(召彡縣)이고 의령현은 장함현(獐含縣)인데, 이 때 각각 개칭한 것이다. 한편, 지금의 칠원지방은 본래 칠토현(漆吐縣)인데 이 때 칠제현(漆隄縣)으로 개칭하여 의안군(義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983년(성종 2)함주(咸州)로 개칭하여 자사(刺史)라는 지방관을 두었다가 1018년(현종 9)함안군으로 환원하여 금주(金州: 지금의 金海)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를 설치했다가 1373년(공민왕 22) 군으로 환원하였다. 칠제현은 고려 초에 칠원(漆原 또는 漆園)으로 개칭하고 1018년금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에 감무를 두었는데 이 때 금주의 영현이었던 구산현(龜山縣)이 칠원의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현무현은 소삼부곡(召彡部曲)으로 강등되었는데, 그 상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413년(태종 13)칠원현에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함안도호부(咸安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음 해 군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함안군 732호 3,266인, 칠원현 337호 1,330인, 구산현 104호 300인이었다.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명망이 높은 선비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이곳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곳 출신으로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은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3년(중종 38)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의 紹修書院)을 세웠다. 1587년(선조 20) 문명이 높았던 정구(鄭逑)는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방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그 때 사귄 인사와 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적지 않다. 『함주지(咸州誌)』는 그가 군수 재임 시 편찬한 읍지이다.
임진왜란 후 칠원현은 읍세가 약해져 1601년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병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창원시 삼진지방(진동면·진전면·진북면)은 1601년(선조 34)∼1617년, 1629년(인조 7)∼1639년의 2차에 걸쳐 함안군에 편입되었다가 창원부로 복귀하는 등의 복잡한 변동을 겪었다. 『함안군읍지』와 『칠원현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 수는 함안군 5,198호 2만 5362인, 칠원현 2,567호 1만 953인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칠원현이 군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칠원군은 함안군에 통합되고, 진주군의 상봉·하봉·사봉 등 3개 면을 편입하였으며, 구산면이 창원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군에서 편입된 3개 면이 다시 진주군으로 이관되고, 1933년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10개 면)되었다. 1944년여항면에 산서출장소를 설치하여 10개 면·1 출장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낙동강방어선의 최전선으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전란 후인 1954년 군청을 함안면에서 현 위치인 가야읍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 이후 낙동강 및 남강 상류에 다목적댐이 계속 건설되면서 지역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1977년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 지역 교통사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1971년 5월 10일여항면에 산서(山西)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대산면 산서리가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가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군북면에 월촌(月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2월 15일칠북면 운서리와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여항면 산서출장소가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진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9년군북면 월촌출장소 폐지하였고 2015년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8면의 행정구역으로 오늘날까지 이른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인 군북면 하림리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제159호)은 801년(애장왕 2)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어서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군북면 사촌리의 원효암칠성각(元曉庵七星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호), 함안면의 함안대산리석불(보물 제71호),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석조여래좌상(長春寺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장춘사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장춘사대웅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함안면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咸安主吏寺址獅子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들이다.
함안면 봉성리의 함안향교(咸安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와 칠원읍 용정리의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이 있다. 또한, 함안면 괴산리의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조려의 손자 참(參)이 은퇴 후 정자를 세우고 연당을 파서 꾸민 한국식 정원이다.
이 밖에도 대산면 장암리의 낙동강변에 반구정(伴鷗亭),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합강정(合江亭), 군북면 원북리에 채미정(菜薇亭) 등 유서 깊은 정자가 많이 있다. 산인면 운곡리에 오비각(五備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 대산면 서촌리에 악양루(岳陽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등이 있다.
함안면 봉성리·괴산리, 칠원읍 예곡리, 군북면 동촌리, 칠서면 회산리 등지에 지석묘들이 남아 있다. 가야시대의 유적은 가야읍의 함안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함안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가야리고분군 등이 있는데, 말산리 제3·4호분은 1917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 서원의 창설자인 주세붕을 모신 주세붕묘역(周世鵬墓域, 경상남도 기념물 제33호)은 칠서면 계내리에 있고, 주세붕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은 무릉리의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많은 전적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잡고책판 및 수구집·구봉집책판(武陵雜稿冊板·守口集龜峰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가야읍 신음리의(謹齋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대산면 장암리의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澗松文集冊板·金羅傳信錄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산인면 모곡리의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칠원읍 무기리의 국담문집책판(菊潭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등이 대표적이다.
칠북면 화천리와 검단리에는(咸安化川農樂,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 등이 전해 온다.
칠원읍에는 함안무기리연당(咸安舞沂里蓮塘, 중요민속자료 제208호)·함안무기리주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군북면 원북리에는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생가인 어계생가(漁溪生家,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하림리에는 그 일가 5대의 부부묘가 한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조안묘소(趙安墓所, 경상남도 기념물 제34호)와 동산정(東山亭)이 있다.
『함주지』에서는 아라가야의 옛 궁터를 가야읍의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다. 산성으로는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쳐 있는 함안성산산성(사적 제67호)을 비롯하여, 함안면 대산리의 동지산성(冬只山城), 가야읍 사내리의 봉산성(蓬山城),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산성 등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들이 있으며, 함안면의 함안읍성은 삼포왜란에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축성한 것이다.
가야읍 검암리에는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8호)가 있다. 군북면 명관리에는 도천재단서죽백(道川齋丹書竹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산인면 내인리에는 박진영장군유품(朴震英將軍遺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다.
또한 칠원읍 용산리에 있는 함안층의 새발자국화석(咸安層――化石, 천연기념물 제222호), 칠북면 영동리의 함안칠북면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9호), 법수면 대송리의 함안법수면의 늪지식물(천연기념물 제346호), 여항면의 함안외암리공룡발자국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68호)과 산인면 모곡리의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이다.
민속
이 고장에는 씨름·그네뛰기·소싸움·백중놀이·두레삼·유두놀이·달불놀이 등 농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민속놀이들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단옷날에는 씨름대회나 그네뛰기가 성대히 열리며, 특히 소싸움은 중부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기를 모으는 놀이이다. 백중은 이 지역에서 농부날·초연(草宴)·풋굿·호미씻기 등으로 불리며, 이 날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을 우두머리로 삼아 삿갓을 씌우고 황소를 태워 마을을 돌게 하고 주인은 주식을 푸짐하게 낸다.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두레삼의 양속은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드나 두레삼의 각종 민요는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다. 유두에는 유두연(流頭宴)이라 하여 이웃·친척들이 냇가나 계곡에 나가 술과 음식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대산면 대사리에서는 마을사람들이 정월 대보름날 안곡산성(安谷山城)에 모여 달불놀이를 즐긴다.
삼칠지역(칠원읍·칠서면·칠북면)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인 삼칠민속줄다리기는 윗줄과 아랫줄로 팀을 구성하여 3전2선승제로 진행되며, 윗줄은 구성·유원·장남·오곡·예곡·용정·무기리 주민으로 구성하고 아랫줄은 용산·운서·운곡리와 칠북면 및 칠서면 주민으로 구성된다.
이 고장에서는 음력 10월 10일이나 정월 보름날 주로 노거수를 중심으로 동제를 지낸다. 그 대표적인 예를 칠북면 영동리의 회화나무, 가야읍 검암리와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 칠서면 무릉리의 은행나무 등에 대한 동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함안면 봉성리의 느티나무는 수나무로서 득남의 영험이 있다 하여 이를 바라는 부녀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무릉리의 은행나무는 주세붕이 심은 것이라 전하며 위인전설과 습합되어 제사의 대상이 된다. 대산면 장암리 장포(長浦)마을의 왕버들나무는 이무기의 승천설화를 간직한 것으로, 가뭄이 계속되면 동민들이 이 나무를 중심으로 기우제를 올린다. 그 밖에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는 잎의 발아를 보고 농사의 길흉을 점칠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 옛말에 ‘울고 왔다 울고 가는 함안 원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임하는 도중에 험한 산세를 보고 낙심하지만 살아보면 순후한 풍속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이 고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도리어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함안군을 두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고들 한다. 즉, 이 고장은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은 까닭에 물줄기가 모두 남강이 있는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때문에 왕조시대에는 이 고장을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불경스런 땅인 ‘역수(逆水)의 고장’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무척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 고장에는 서부 경상남도처럼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는 구비전승보다 윤리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의 설화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가령 늙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삶아서 바쳤는데 나중에 보니 동자삼(童子蔘)이더라는 효도담이나, 병든 시어머니가 겨울에 전복을 원하자 하늘의 덕으로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유래담(鰒井由來譚)」(산인면), 늙은 어머니를 위해 효자가 심은 앵두나무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효자나무전설」(가야읍), 왜구가 겁탈하려고 달려들자 죽음으로 정조를 지킨 처녀의 화신이라는「절부목전설[節婦木(乳木)傳說]」(군북면) 등의 설화가 그 예이다.
또한 시화류에 자주 등장하는 장성기생 노아(蘆兒)의 이야기도 있는데, 고을 수령들이 노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나라에서 탄핵사를 파견, 치죄하려 했으나 오히려 노아의 꾐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이를 ‘함안차사’라고 하는 것은 ‘함흥차사’고사에서 음과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상남도 전역에 퍼져 있는 「재산을 아끼기 위하여 지세를 바꾸다 망한 이야기」가 산인면 입곡리의 하천과 연결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칠원읍의 「장사바위전설」은 두 장사의 힘겨루기 유형을 표본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운지복(開運之福), 파수(巴水)곶감에 얽힌 전설(傳說), 파산익삼(巴山翼蔘), 동자삼과 외아들, 부자공씨와 도사, 상사나무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에는 논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따라서 농업노동요가 발달하였는데, 이 고장에서는 모내기노래를 「정자」라고 한다. 점심참이 올 때가 되어 독촉하며 부르는 「모내기노래」를 들어 보면 “삼동이야 삼동이야 맛보느라 늦었는가/ 뒤축없는 신을신고 끄이느라 늦었는가……남산이라 저모롱이 점심이라 더디오네/ 미나리라 시금초라 맛보니라 더디온다/……늦었다오 늦었다오 점심참이 늦었다오……”처럼 부른다. “외와내자 외와내자 이모판을 외와내자/ 들어내자 들어내자 이모판을 들어내자……”는 「모찌기노래」이다.
「보리타작노래」는 구(句)마다 ‘에호’라는 뒷소리를 붙여 부르는데 “일꾼들/ 어이/ 도리깨 들게/ 어이/ 보리타작 우리하세/ 어이/ 에호에호 에호에호/ 에호/ 어깨가 지쑥/ 에호/ 오김이 주춤/ 에호/ 힘써 때거라/ 에호/ 넘어간다 보리도/ 에호/ 여기도 알보리/ 에호/ 저기도 알보리/ 에호/……뒤으로 물러서/ 에호/ 발로 골라라/ 에호/ 도리깨 돌려라/ 에호/ 에호에호 에호에호/ 자 우리 쉬어가지고 한잔 먹고 합시다.”처럼 한다. 앞소리꾼이 노동의 리듬에 맞추어 흥을 돋우기도 하고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면서 앞소리를 메긴다.
이 고장에서 불리는 「망께소리」를 들어보면 “어이여라차/ 천근망께는 공중에 놀고/ 어이여라차/ 망께소리를 잘도하면은/ 술을 많이 준단다……”처럼 부른다. 부녀자들의 「베틀노래」는 “바람은 솔솔 부는날 구름은 둥실 뜨는날/ 월궁에 노던선녀 옥황님께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와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하실일이 전혀없어 금사한필 짜자하고/ 월궁으로 치치달아……”처럼 부른다.
경상남도 일원에서 전승되는 「담바귀타령」이 이 고장에서도 불리는데 “귀야귀야 담바귀야/ 너국을랑 어디두고 조선국에 나왔노/ 조선국이 병이많아 약줄라고 내가왔다/ 그씨좋다 씨를받아 담장안에 모를 붓고/ 단장안에 웽기내여 애숭대숭 전잎따서/ 애양애양 엮어내어 쎄글안에 걸었다가……살림맛이 요만하면 패가할이 뉘있을고……”처럼 담배씨를 재배하여 피우기까지의 정황을 노래하고 있다.
읍·면
1. 가야읍(伽倻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2.21㎢, 인구 1만 940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말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여항산 바깥쪽이 되므로 산외면(山外面)이라 하여 말산리 등 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곡면(牛谷面)·산내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아라가야의 옛터가 되므로 가야면이라 하였다. 1954년 군청이 함안면에서 가야면 말산리로 이전되면서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73년대산면 산서리가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는 조남산(鳥南山, 139m), 북서부에는 천제봉(天祭峰, 225m)·계티고개·장고개, 동북부에는 배나무실고개가 있어 읍의 경계를 이룬다. 검안천이 읍의 동쪽으로 흐르고 광정천(廣井川)이 중앙을, 신음천(新音川)이 북서부를 각각 북류한다.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며 수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수도작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그 밖에 채소류와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 재배와 배·복숭아·사과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최근에는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등 시설원예 농업으로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수출에 활기를 띠고 있다. 교통은 읍의 북부를 남해고속도로가, 남부를 지방도 및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달리고 있다.
문화유적은 말산리와 가야리의 고분군, 광정리의 성산산성, 사내리의 봉산성, 검안리의 조순장군비·동산정, 신음리의 근재집책판 등이 있다.
말산(末山)·검암(儉巖)·광정(廣井)·도항(道項)·신음(新音)·설곡(舌谷)·춘곡(春谷)·사내(沙內)·가야(伽倻)·묘사(苗沙)·산서(山西) 등 11개 리가 있다.
2. 칠원읍(漆原邑)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0.61㎢, 인구 2만 10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성리이다. 본래 칠원군의 지역으로 칠원현청이 있었으므로 현상리면(縣上里面)이라 하여 용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원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 회문리·신산리의 각 일부와 내서면(內西面) 예곡리를 합하여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83년칠북면의 운서·운곡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지형상 면의 동부와 서부가 모두 산지이며 중부에 있는 약간의 평탄지역으로 광로천이 흘러간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산지에서는 고령토가 약간 산출될 뿐 특산물은 없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예곡리의 지석묘, 구성리의 성지·삼층석탑, 용산리의 사지, 무기리의 사지·석조부도·삼층석탑·연당·주씨고가·국담문집책판, 용정리의 덕연서원 등이 있으며, 용산리에 천연기념물인 새발자국 화석이 있다.
구성(龜城)·용산(龍山)·유원(柳原)·장암(藏巖)·오곡(梧谷)·예곡(禮谷)·용정(龍亭)·무기(舞沂)·운서(雲西)·운곡(雲谷) 등 10개 리, 26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3. 군북면(郡北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47㎢, 인구 6,79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안도면(安道面)이라 하여 중촌리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곡면(大谷面)의 신창리 등 7개 리와 남산면(南山面)의 봉남리 등 2개 리를 합하여 군북면이라 하였다. 1933년 죽남면(竹南面)의 10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0년 월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진주 경계인 남쪽에는 오봉산·괘방산(掛榜山, 451m) 등이 있어 대체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남강유역으로서 평야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지대의 최저지대가 유현리의 유전늪인데 지금은 이 늪도 매립하여 공장이 들어서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추·무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의령∼마산간 국가지원지방도 67호선, 지방도 1004호선등과 연계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문화유적은 동촌리의 지석묘군, 명관리의 지석묘군과 도천재단서죽백, 하림리의 방어산성·조안묘소·방어산마애불, 사촌리의 원효암 칠성각·심원사지·삼층석탑, 영운리의 송방사지(松放寺址)·송방사지오층석탑, 원북리의 어계생가·채미정 등이 있다.
덕대(德垈)·중암(中闇)·소포(小浦)·동촌(東村)·사촌(舍村)·오곡(烏谷)·명관(明館)·모로(慕老)·사도(沙道)·장지(長池)·유현(柳峴)·월촌(月村)·박곡(朴谷)·수곡(藪谷)·영운(迎運)·하림(下林)·원북(院北) 등 17개 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4. 대산면(代山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56㎢, 인구 3,94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림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내대산면(內代山面)이라 하여 평림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대산면(外代山面)의 산서리 등 6개 리를 합하여 대산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산서리가 가야읍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남쪽은 안국산(安國山, 338m) 등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에 면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토질이 사질 퇴적토로 이루어진 평야지대로서 수박하우스 재배지로는 천혜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655㏊ 수박하우스 집단재배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다. 교통은 칠원면∼의령군 부림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사리의 안곡산성(安谷山城), 서촌리의 아현사지(阿峴寺址)·악양루, 장암리의 합강정·반구정과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 등이 있다.
평림(平林)·부목(富木)·대사(大沙)·옥열(玉悅)·하기(下基)·서촌(西村)·구혜(九惠)·장암(長巖) 등 8개 리가 있다.
5. 법수면(法守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61㎢, 인구 3,19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대산면(大山面)이라고 하여 걸산리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면(馬侖面)의 내(內)·외(外)·주물(主勿)·우거(于巨) 등 4개 리를 합하여 법수산의 이름을 따서 법수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면의 남쪽에 천제봉 줄기의 산지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부를 남강이 둘러싸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의령군 정곡면 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강주리에 조려묘, 윤내리에 한극검(韓克儉)의 정려가 있으며, 대송리에 천연기념물인 늪지식물이 있다.
우거(于巨)·강주(江州)·윤내(輪內)·윤외(輪外)·주물(主勿)·대송(大松)·백산(白山)·사정(沙亭)·황사(篁沙) 등 9개 리가 있다.
6. 산인면(山仁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6.89㎢, 인구 2,888(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모곡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화개산 아래라 하여 산익면(山翼面)이라 하고 입곡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인면(安仁面)의 송정리 등 5개 리와 외대산면(外大山面)의 산서리와 옥지리 일부, 산외면(山外面)의 검암리 일부를 합하여 산익과 안인의 이름을 따서 산인면이라 하고 7개 리로 개편하였다. 대체로 동·남·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고, 서부는 약간의 평야지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농공병진된 지역으로 2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동부에는 1991년 산인특별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에는 수리시설이 용이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비닐하우스 시설을 통하여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있으며, 남해고속도로와 의령∼마산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내인리의 박진영장군유품, 신산리의 포덕산성(飽德山城), 모곡리의 백운래홍첩·고려동유적지·문암산성(門巖山城), 입곡리의 성점산성(城岾山城)·자미정(紫薇亭) 등이 있다.
모곡(茅谷)·입곡(入谷)·신산(新山)·송정(松汀)·내인(內仁)·부봉(釜峰)·운곡(雲谷) 등 7개 리가 있다.
7. 여항면(艅航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8.35㎢, 인구 9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암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두 골짜기의 물이 합친다 하여 병곡면(幷谷面)이라 하고 주동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곡면(比谷面)의 6개 리와 양전면(良田面)의 일부를 합하여 면 내의 산 이름을 딴 여항면이라 하고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 산서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 산서출장소가 의창군 진전면(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편입되었다. 동부에 광려산(匡廬山, 720m), 남부에 서북산(西北山, 739m)·봉화산, 북부에 여항산 등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주동리에서 발원한 쌍계천은 검암천의 상류로 남강의 지류가 된다. 여항산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던 요충지로 호국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성산이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이 고장은 농작물 수확이 다른 면에 비하여 뒤떨어지며 특산물도 없다. 수도작과 축산업이 주민의 주 소득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주서리의 주리사지(主吏寺址), 외암리의 조곡사지(朝谷寺址)·조곡사지삼층석탑 및 공룡발자국화석 등이 있다.
외암(外巖)·내곡(內谷)·주동(主東)·주서(主西) 등 4개 리가 있다.
8. 칠북면(漆北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2㎢, 인구 2,11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검단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봉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북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의 구포리 일부, 칠원면 죽청리와 영산군 길곡면(吉谷面)의 사촌리를 합하여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83년운서·운곡 등 2개 리가 칠원면으로 편입되었다. 동쪽과 남쪽은 작대산 등 산지가 많고 북쪽은 낙동강에 면하여 약간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서 흘러온 광로천이 칠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낮은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복숭아와 단감은 군내에서 생산량 제1위를 차지한다. 교통은 면내를 잇는 군도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남리의 성지, 영동리의 장춘사·장춘사석조여래좌상·장춘사오층석탑과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있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이령 연개장터 일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했던 곳으로 1976년 독립기념비를 세워 매년 기념, 문화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검단(檢丹)·화천(化川)·덕남(德南)·이령(二靈)·봉촌(鳳村)·가연(佳淵)·영동(榮東) 등 7개 리가 있다.
9. 칠서면(漆西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95㎢, 인구 6,1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계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서면(西面)이라고 하여 용중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서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남북으로 긴 모양으로 남쪽에 약간의 산지가 있고, 낙동강과 면한 지역은 평야지대를 이루어 농산물의 산출이 많다. 이 지역은 대치리, 계내리 일대 107만평 규모의 칠서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함안군을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특히 복숭아·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많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회산리의 지석묘, 구포리의 고분, 계내리의 주세붕묘역, 무릉리의 무릉산성·주세붕영정·무산사와 무릉잡고 및 수구집·구봉집책판 등이 있다.
천계(天界)·회산(會山)·무릉(武陵)·구포(龜浦)·태곡(泰谷)·대치(大峙)·계내(溪內)·용성(龍城)·이룡(二龍) 등 9개 리가 있다.
10. 함안면(咸安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8.92㎢, 인구 2,6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성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상리면(上里面)이라 하여 신교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내면(山內面)의 동촌리 등 5개 리를 합하여 읍내면(邑內面)이라고 하여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8년함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동부와 남부가 신지로서 여항산·광로산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봉성리를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 마늘의 생산이 많다. 그리고 주요 특산물은 파수곶감으로 이 고장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 파수농공단지 등에 29개 기업체가 입주하여 가동되고 있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함안읍성을 비롯하여 괴산리의 지석묘, 봉성리의 지석묘군, 대산리의 동지산성·사지·석불, 강명리의 영대암지(靈臺庵址),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봉성리의 함안향교, 괴산리의 무진정 등이 있다.
봉성(鳳城)·북촌(北村)·괴산(槐山)·대산(大山)·강명(康命)·파수(巴水) 등 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함안통계연보』(함안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함안군지』(함안군지편찬위원회, 1992)
•『아라의 얼과 향기』(함안군, 1988)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남교육사』(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0)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0)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함안군(www.㏊man.go.kr)
가야(加耶)의 멸망(滅亡)과 그 영토의 후속처리 문제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투항해왔다.
540년에 신라가 대병으로 아시랑국(阿羅加耶:咸安)을 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다음해인 16년(555)에 비화가야(非火加耶)인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561년에는 진흥왕이 하주(下州)인 창녕에 친행하였는데 현재에도 화왕산성과 목마산성 밑에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하였다.
정약용의 {강역고}에는 지증왕 6년(505)에 신라가 이사부를 보내 소가야를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천관우(千寬宇)는 이 년대가 잘못된 것으로 고성의 소가야는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할때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백제가 가야와 동맹관게를 구축하게 된것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왜에게 공격 당한 신라를 구하고 그들의 후원세력인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404년에는 일본의 구주와 본토를 공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야의 전기연맹이 무너지고 후기연맹이 성립되고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당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
그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신라는 내물왕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으며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 8년(424)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눌지왕 34년(450)에 고구려의 변장이 실직원에서 사냥하자 하슬라성주가 군사를 보내 그를 공격해 죽인이후 38년(454)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해 왔다.
이로서 여제동맹은 깨어지고 39년(455)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가 군원병을 보냄으로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성립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내물왕은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업고 귀국한 실성에게 피살되었는데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미사흔은 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도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는 실성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극복하려고 나제동맹을 결성하게된 것이다.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백제와 가야가 구원병을 보낸 사실을 보면 신라, 백제, 가야가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있음을 볼때
백제와 가야가 동맹관계 유지해 오다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나고자하는 신라가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난 신라는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동래)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조여들어왔다.
이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계속적으로 결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밀어낸후 백제의 한강 유역마저 빼았음으로서 나제동맹이 결렬되고 백제(百濟)의 성왕이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야, 왜의 구원병이 참전하고 있음을 볼때 가야(加耶)는 백제, 왜와 연결된 동맹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부터 562년 대가야가 멸망 당하기까지 신라가 가야의 서쪽을 조여왔는데 대가야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 변하게된다.백제의 무왕 3년에 신라의 아막산성(雲峰)을 공격하였고 17년에는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공격했다.
25년네 신라의 석함(咸陽) 등 6성을 쳐서 빼았았다.의자왕 2년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으며 8월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陜川)을 쳐서 성주 품석을 죽였다.
4년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5년 신라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7년 백제의 의직 장군이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에 밑에 진군하여 감물(금릉군 개녕면),동잠성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가야가 멸망한후 신라(新羅)는 합천, 거창, 고령, 함양, 고성, 함안, 창녕, 김해지방을
백제(百濟)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장수, 구례, 무주, 진주, 남해, 하동를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백제가 신라가 차지한 옛 가야 땅의 가장 깊숙히 침공해 들어간 것은 신라 40개의 성을 빼았은 후 합천에서 벌어진 대야성(大耶城) 전투였다. 이것은 이미 차지한 함양과 남쪽의 거점인 진주에서 공격한 것으로 40개의 성은 주로 이들 지역과 합천 중간에 위치한 거창과 산청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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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조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황(尹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칠원현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라 말기의 반란과 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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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부한 경순왕(敬順王. ? ~ 978년)
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1]
신라 김씨(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본관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초기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3]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강제적으로 목숨을 끊게 되고,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 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 효종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고려 귀순 후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1]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1]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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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귀부반대 경순왕 왕자(敬順王 王子) (마의태자)
, 912년? ~ ?)는 신라 하대의 왕족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方夫人)
소생의 첫째 왕자(王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왕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태자(太子) 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왕자(王子)가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그의 동생 덕지(德摯) 및 이순유(李純由) 등도 이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아래와 같이 말을 하며,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그는 통곡(痛哭)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도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었는데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에게 '왕자(王子)가 있었다'고 할 뿐, 그가 세칭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다만 왕자(王子)라 하며,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왕자 이름 대두[편집]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근기한 《김은열 묘지문》과 이를 원용하여 1785년 김사목(金思穆)이 경주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제1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한다.[1] [2]
이후부터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는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이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또 작금에 와서는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을 마의 태자(麻衣 太子)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시조로 표기해 놓고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자가 세칭 마의태자이신 분이고 둘째(막내)가 범공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서(史書)에 신라가 망할 때 태자(太子)가 몇 살이었고, 부인과 자식이 누구인가 하는 것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만약 그때 처자(妻子)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후손을 두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3]
김은열 묘지문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문》에 등장하는 경순왕 제1자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묘지명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일부 내용도 왜곡되어 있다.
또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죽은 해와 장례일, 형제와 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친(母親) 관계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제2자 '김황'과 제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유공지신(有功之臣)이어서 특사장지(特賜葬地)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 건립 때 각 성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에,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있으며, 여기에도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 조선조 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도 《김은열 묘지문》을 원용하여 추기하면서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을 별도 인물인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평가
왕자(王子)의 이름은 역사서에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태자(太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부왕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선의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金自粹)의 《상촌집(桑村集)》과 조선 중기 문인들인 신흠(申欽)· 윤증(尹拯)등은 그의 행적에 대해 읊었던 한시 작품에서 '초의(草衣)' 또는 '신라 왕자'로만 서술하고 칭찬하였을 뿐, '마의 태자'(麻衣 太子) 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운(吳澐)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왕자(王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78년(정조 2)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자(太子)가 없었더라면 천년의 군자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이후 '마의 태자'(麻衣 太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부흥 운동설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이외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 태자(麻衣 太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는데,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에 위패에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스스로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4]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로,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그 누이동생 덕주 공주(德主 公主)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 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 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5]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 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의태자가 등장한 작품//이광수, 「마의태자」(1930년)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09/2012020901977.html
나무위키 출처(2018.09.10)
신라 멸망 직후 부흥운동 소고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미 이런 일을 아주 일찍부터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2.2. 경주 별초군의 난 2.3. 동경의 반란(동경민란) 동경에서 6, 7차례에 걸쳐 일어난 반란으로 주도자는 이비, 패좌 등이 알려져 있다. 2.4. 김사미 · 효심의 난,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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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金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2]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3]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一目大王[4][5])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 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불교 세력,유학자들과 갈등하던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신라 제48대 국왕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즉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김궁예'다.[6]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경참문에 의하면 궁예는 丑년생인데 그러면 857년생, 혹은 869년생인걸 알수 있다. 궁예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 봉기에 참여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할때 869년생, 그러니까 경문왕의 서자인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음력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 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해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 했다.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그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전해, 견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예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했어도 그의 승려 시절의 모습과 이후 그가 출가해 혁명가로서 활동할때의 초반 행적들에 대해서만큼은 미흡하나마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는 궁예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한 지 7일만에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함께 주벌된 소판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7]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궁예는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8]
출사
진성여왕 5년(891년)부터 신라의 각지에서는 거듭되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도적이 된 자들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궁예도 절을 떠나서
죽주(竹州)의 적수(賊帥) 기훤(箕萱)을 찾아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오만하고 무례한 자세로 대하자 이에 반발해, 다시 죽주를 떠나
북원(北原)의 적수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삼국사기》는 이때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이 궁예를 따라 함께 북원으로 왔다고 적고 있다.
기훤과는 달리 양길은 궁예를 신임해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며 북원 동쪽 땅의 경략을 맡겼고,
궁예 자신은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에 머무르며 진성여왕 6년(892년)까지 주천(酒泉) · 내성(奈城) · 어진 등 명주 관내의 10여 군현(《삼국사기》 신라본기. 같은 책 궁예전에는 주천과 내성, 울오, 어진의 4개 군만이 기술되어 있으며 시점도 본기와 열전에 차이가 있다)을
공략하여 모두 항복시켰으며,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드디어 명주를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전은 이때 궁예가 거느린 무리가 3,500인(신라본기에는 600인)에 이르렀으며[9], 궁예는 이를 14대(隊)로 나누어 편재하고 김대(金大) · 검모(黔毛) · 흔장(昕長) · 귀평(貴平) · 장일(張一)[10] 등을 뽑아 사상(舍上), 즉 부장으로서 임명하여 지휘하였다고 적었다. 나아가 궁예는 명주에 들어간 뒤부터 장군(將軍)을 자칭하였는데, 하대 신라에서 반란의 지도자나 호족 세력이 장군을 자칭한 것은 궁예가 최초였다.[11]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라 자처했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지만,
궁예가 이때부터 자신을 미륵으로 여겼다는 학계 일부의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때의 궁예는 아직 양길의 부하로 있었던 시절이었고, 또 명주를 장악한 후
황제나 왕도 아닌 장군만 자처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미륵으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명주를 장악한 궁예는 진성여왕 9년(895년),
동해를 끼고 북상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즉위와 전쟁[편집]
후고구려 선포[편집]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浿西),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송악(松嶽)의 해상 호족이었던 왕륭 · 왕건 부자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궁예에게 투항해 오자
궁예는 세조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했다.
왕륭의 제의를 받아들인 궁예는 효공왕 2년(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淸州)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효공왕 3년(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거꾸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4]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효공왕 4년(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 국원경(충주) · 청주 · 당성(唐城) · 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여[4]
광주를 우선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 · 괴양의 적수 청길(淸吉) · 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효공왕 5년(901년) 7월에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연표에는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한 궁예의 발언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고,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효공왕 6년(902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 후백제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했고,
효공왕 7년(903년)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 지역)지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왕건은 금성 공략과 함께 양주(良州)의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등을 받았다.
마진[편집]
신라 효공왕 7년(904년) 7월에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해 관직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12] 으로 고쳤으며 연호를 정하여 무태(武泰)라 했다. 또한 공주(公州) 지역의 호족으로 장군을 칭하고 있던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했다.
이보다 앞선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1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무태 2년(905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13]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楓川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바뀌었다.
또한 평양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했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 ·
황의(黃衣)의 도적 명귀(明貴) 등이 복속해 왔는데,
《삼국사기》는 이때부터 궁예가 강성해졌다며 자만하고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에서부터 귀순해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고 적고 있다.
성책 2년(906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싸우게 했고
왕건의 군대는 견훤의 군대와 여러차례 치열하게 싸워 결국 크게 이겼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궁예 성책 5년(909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격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光州)의 진도(珍島)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했으며,
압해현의 해상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성책 6년(910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내어 나주를 포위 공격하자,
궁예는 포위 공격 10일 만에 수군을 내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남부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태봉[편집]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12]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직접 불교 경전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總)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고 혹평했고,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말았다.
이 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덕만세 3년(913년)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해[14]
수도로 불러들인지 1년만인 정개 원년(914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14]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14]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와 나주 지역의 해상 군소 해상 세력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해전과 해상 무역에 대한 계책들을 진언하자,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4]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개 2년(915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14]
정변과 죽음[편집]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과 반감을 느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의,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 세력들이 주동이 되어서
패서 지역(경기도 북부와 황해도,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지역의 옛 고구려계 지역) 호족들과
최응,송함홍,백탁,허원 등의 유학자 관료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15]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삼국사기》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고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15],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했지만,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궁예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은 처음에는 왕건의 정변에 적극 가담해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아내의 권고를 받고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아내의 권고를 받고
환선길이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왕건의 정변 성공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소외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그의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후 궁예 정권 말기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를 쳐서 차지하고 주둔하던
이흔암은 천수 원년(918년) 6월 왕건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고 정변을 일으킬 목적으로
부임지인 웅주를 무단이탈해 당시 수도인 철원으로 마음대로 돌아왔고,
이후 한찬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이었던 염장(閻萇) 등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음을 탐지해 밀고했다.
이에 이흔암은 시장 바닥에 끌려나가 공개 참형을 당했고,
2개월 뒤 공주는 운주(運州) 등 10여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해 버렸다.
9월에는 순군리였던 임춘길(林春吉)과 그의 일당들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했고
그 다음달인 10월달에는 청주의 진선과
선장 형제도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대부분 공주, 또는 청주 지역의 옛 백제계 지역 호족들이었다.
명주의 성주 김순식도 왕건이 즉위한 뒤로도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아,
왕건이 천수 4년(922년) 7월에 김순식의 아버지로 승려로서 출가해 있던 허월(許越)을 보내 타일렀을 때에도
장자 수원(守元)만 보내고 자신은 오지 않았다.
천수 9년(927년) 8월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장명(長命)만을 보내어
숙위하게 했을 뿐 김순식 자신은 오지 않다가,
이듬해 1월에야 직접 왕건을 찾아와 알현함으로서 완전히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전설[편집]
《삼국사기》 및 《고려사》는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 또는 그 텍스트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특히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의 전승에서는 궁예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유명한 것이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 전설로,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해서 산새들이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폈다는 망무봉의 지명 유래담이 내려오고 있다.[16]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한 고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평가[편집]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를 저본자료로 삼은 것이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그 쿠데타로 인해 추방된 궁예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였으며
의심을 많이 품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기존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신라 정책과 신라 출신 귀순자들의 학살[편집]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부터,
기존의 학설은 《삼국사기》 궁예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인 신격화[편집]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이라는 승려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 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석총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종파를 떠나서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정통 불교의 승려로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건과의 관계[편집]
《삼국사기》에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고,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지나갔고, 왕건은 곧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며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처자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청광과 신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나 광산 이씨도 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가계[편집]
헌안왕(憲安王)
경문왕)(景文王) 후궁 장씨
(後宮 張氏)[17]
궁예(태봉 1대)(弓裔) 강비(康氏)
김청광(金淸光) 김신광(金神光) 김순백(金順百)
발해, 대위해 (895년 - 907년)
대인선 (907년 - 926년)
신라 효공왕 (897년 - 912년)
신덕왕 (912년 - 917년)
경명왕 (917년 - 924년)
후백제 견훤 (900년 - 935년)
===========
후백제 견훤왕
後百濟 甄萱王
견훤(甄萱, 867년~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935년 음력 3월)은 후백제를 건국한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 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일으킨
거병으로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훙서하였다.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
조선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견훤의 거병을 기록하면서
「남해(南海)의 수졸(戍卒)인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고 적고,
견훤의 이름에서 「견(甄)의 음은 진(眞)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견, 질그릇장인 진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설이다.
출생 및 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하며,
견훤 자신의 성도 원래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甄氏)로 고쳤다고 한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왕비인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 夫人)이다. 셋째 아들은 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은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고, 선품의 아들은 각간(角干) 작진(酌珍)이다. 작진의 아내 왕교파리(王咬巴里)가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장자가 바로 상보(尙父) 훤(萱)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 諡曰白 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 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爲阿慈介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蓋 四子寶蓋 五子將軍小蓋 一女大主刀金
이같이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 대해 《이제가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계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아자개가 거병했다는 광계 연간은 서기로 885년에서 887년에 해당하며, 889년에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시기와 겹치며, 아자개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지배계층의 성씨로 호족의 일원(6촌성, 경주 이씨)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견훤이 아직 아기였을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는데, 그 사이 범이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여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상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고 기록해, 궁예와 마찬가지로 비록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적이어서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또 많은 부분들에서 사실과 달리 나쁜 쪽으로 조작하고 폄하했지만, 이 부분과 이후 견훤의 해적 토벌 부분만큼은 미흡하게나마 그의 영웅적인 면들을 인정했다.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아채) 마을로, 문경에는 오늘날에도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고 읊고 있는데, 실제로 견훤이 태어났을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주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생설화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 조에 다음과 같은 견훤의 출생담을 적고 있다.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어느 부호에게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의 방에 와서 동침하고 새벽이 되면 사라졌다. 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딸에게 밤에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남자의 옷에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두라고 당부했고,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아버지는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 보았는데,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밤마다 딸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는 바로 지렁이였던 것이다). 이후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이었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 당(唐)은 소종(昭宗) 경복(景福) 1년이었다.
이러한 류의 설화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까지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의 함경북도 회령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를 비롯해,
일본 《고사기》의 오호타나네코(意富多多泥古),
《일본서기》의 오오모노누시 신(大物主神) 신화, 서구의 에로스 프시케 신화가 대표적인 야래자형 설화로 꼽힌다.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이 지렁이의 자식으로 묘사한
《삼국유사》의 설화와 관련해서 금하굴(金霞窟)이라는 이름의 동굴이 남아 있다.
후백제 견훤에 관련 전설이나 설화 견훤구인생설화 문서 참고
신라군 생활
견훤은 장성하여 군을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서남해(西南海)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잘때도 창을 배고 적을 대비했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을 앞섰으므로."라고 적었고, 이후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고 적어서 그가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했을때 매우 뛰어난 군인의 자질을 보였다고 인정했고, 또 실제 전투에서도 뛰어난 공로들을 세웠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견훤이 임명된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거병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朴英規),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지금의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신라 시대에는 승평(昇平)이라고도 불리며 남단 내륙교통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으며, 광주 및 나주, 목포 지역과 지금의 경상남도 연안을 연결하는 위치로 무진주(광주)에서 서라벌(경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땅이기도 했다.
거병과 후백제 개창
견훤의 거병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에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900년이라고도 적고 있다. 이 해는 신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 때로, 이 기록을 따른다면 견훤은 원종과 애노의 난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군사적인 독립을 이룬뒤,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신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가 처음 거병한지 열흘 만에 5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를 칭하였다.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
후고구려와의 전쟁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 후고구려는 한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이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만든 용어에 불과할뿐, 실제로 당시 궁예가 처음으로 나라를 정식으로 건국하면서 정한 국호는 5세기때부터 고구려라는 국명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고구려를 부르던 용어인 '고려.'였고, 궁예의 멸망후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서 선포한 국호인 '고 려.'도 궁예의 고려와 같은 뜻이였다.)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후고구려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나주 지역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되어서 후고구려와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마음대로 확장할 수 없다는 것 이외에 자칫하면 후고구려에게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고, 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외교 교섭과 무역을 주고 받고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는 후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거래,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중계 무역까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태로서 후백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었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하기도 했다. 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사위였던 지훤에게 막혀 물러나야 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王建)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도주하였다고 한다. 궁예와 왕건의 이러한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은 고려 시대 당시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에게서 왕건의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으나, 실제로 이후의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쟁패 과정을 보면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우선, 후백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은 일이 없었고, 해상 봉쇄를 통한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과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 우려를 견훤에게 심어줘, 후백제의 신라 지역과 후고구려 지역 진출을 억제해 후백제의 국력을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 이외에, 기존의 후백제의 국력을 근본적으로 쇠퇴시키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는 궁예 시절과는 달리 중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에 성공했고, 심지어 중국뿐만이 아니라 북방의 거란과도 자유롭게 교역을 하는 모습을 보여, 애초의 나주 지역 점령의 가장 중대한 목적중 하나였던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여전히 나주 지역을 고려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궁예 시절보다 훨씬 국력이 강해져서 신라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해 결국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시켰고, 이 직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왕건의 친정군까지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전멸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 929년 후백제의 나주 지역 탈환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후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보였고, 후백제는 나주를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창 전투 대패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또 고려는 929년에 나주를 후백제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당시 신검의 쿠데타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을 구출해 고려로 데려올려는 목적으로 나주 지역을 공격해 탈환하기전까지 6년 동안 나주 지역을 탈환할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과, 936년,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해 신라의 낙동강 지역을 통한 최후의 후백제 공격때 1년 전에 점령한 나주 지역을 이용해 낙동강 지역과의 대규모 동시 협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점 등으로 봐서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군사적,경제적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한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중, 애선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양측이 서로 화친을 하기로 결정하고(여기서 누가 먼저 화친을 요청했는지는 기록들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건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오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국서를 주고 받은 문서에서는 이때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현재 한국 역사학사들 다수의 의견은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이 먼저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조차 견훤과 왕건이 서로 주고받은 국서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으로 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2]
고려와의 전쟁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고, 이에 왕건은 웃으며 견훤이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주었다고 역사 기록들에 전한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 전투
본문은 공산 동수 전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로 송환하였다. 3월에 고려는 다시 운주성주 긍준(兢俊)의 군을 격파하고 이로부터 사흘 뒤에 근암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죽령의 길뿐 아니라 계립령의 길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고 있다. 이 순행에서 또한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비롯해 흥달을 감시하기 위해 견훤이 현지에 파견했던 후백제 관리들까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사갈이성의 고려 귀부는 고려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수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적었다. 또한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태조)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의 표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되시는 분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니, 위태로운 나라가 다시 세워졌고 없던 임금이 다시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7]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승전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 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식들을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뒤 저자에서 참형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여명에 이르렀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이후로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8]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해 왕건은 그해 7월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모산성을 직접 공격해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켰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나온다. 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 위기에 몰리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을려고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명을 뽑아 운주로 진군했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해 승산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30년 고창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고, 후백제군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웅진 근처의 30여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2]
후사벌과의 전투
929년에는 박언창을 공격하여 후사벌국을 멸망시켰다. 917년 신라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후 사벌대군 박언창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워 자치 정권을 운영하였다.
생애 후반
신검의 정변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9]
고려 망명
4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6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이 해 4월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더 많다하여 견훤을 상부(尙父)로 부르고 별궁인 남궁을 주었으며 '정승.'으로 봉해 직위를 백관들은 물론 심지어 태자인 왕무보다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10]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한데 이어,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도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6월에는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태자 무(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3군을 이끌고 9월에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고려사》)이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과 견훤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본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투항한 후백제 장군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본심이 아닌 능환과 양검,용검 등의 협박(?)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하지만, 2000년~2002년까지 KBS 1TV에서 최고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마지막회의 나래이션에서도 나왔듯이 학계에서는 신검이 비록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는 하지만 동생들인 양검과 용검이 항복한 이후, 왕건에 의해 진주로 귀양갔다가 얼마뒤에 모두 처형된 점, 신검 자신도 왕건에게 투항해서 벼슬을 받은 이후의 행적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권위있는 역사서들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고려하면 신검 역시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지 얼마후 동생들과 같이 처형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죽음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의 경우 항우와 손권의 참모였던 범증과 육손의 경우를 비롯해 극도의 분노와 울분으로 인해 단기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사망한 사례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무신 정권기의 청렴하고 유능한 무신 권력자였던 두경승과 구한말의 이준 등의 경우들이 있어서 실제로 있었음직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견훤이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가족 관계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장남 견훤(甄萱) 외에도 능애(能哀),
용개(龍盖), 보개(寶盖), 소개(小盖)의 아들과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삼남 용개(龍盖)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이들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능애(能哀)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百濟)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高麗)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11]
《삼국유사》에는 10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12], 그리고 고려(高麗)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쇠복(哀福)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13]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10남 2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14].
아버지 : 아자개(阿慈介)
어머니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국왕 : 견훤(甄萱, 867~936) 재위:892?/900?~935)
왕비 : 왕비 박씨(王后 朴氏) 장남 : 견신검(神劍,885~936 재위:935~936)
차남 : 견양검(良劍, ? ~936)
3남 : 견용검(龍劍, ? ~936)
장녀 :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차녀 : 견애복(衰福),정령공주(貞逞公主)
사위 : 지훤(池萱)
후궁 : 고비(古比女)
4남 : 견금강(金剛, ? ~935)
막내 : 견능예(能乂)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가
현전하는 견훤 관련 기록 대부분은 그와 적대했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견훤을 가리켜 원래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관련 문화재[편집]
전 견훤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상주 견훤사당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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