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J. Estes, Job (Handbook on the Wisdom books and Psalms), Baker academic, 2005
번역 및 정리 선형수 2019.3.26.화 01:30경
본 개시 탄식에서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 (3:1-10). 출생시에 자기가 죽었더라면 하는 바램을 표현한다 (3:11-19). 그는 고난받는 자들에 인생의 가치가 있는지 질문한다 (3:20-26). 그의 고통을 드러내는 이 독백은 친구들과의 대화에 선행한 것이고, 이어지는 세 친구들의 반응을 촉발한다
욥의 고난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는 생각이 그를 당혹케 한 것이 분명하다 (3:1). 그는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의 영역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왜 욥 자신이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2:10에서 보여준 평정심이 이제 불안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변화는 많은 요인들로 설명할 수 있다. 이전에 그는 일종의 충격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가 입은 모든 손실을 그의 의식 속에서 차분하게 생각하는 과정에 이른다.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인 그의 모든 실감나는 증거가 벗겨져 나간 것을 반추하면서 그의 상태의 불의함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돤다. 더욱이 그의 긴 침묵 후에 그의 정직한 감정이 표면에 올라오게 된다. 욥은 스토아적 (stoical)인 사람이 아니다. 그의 믿음으로 쓰라린 체험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깊은 가정이 표현된다. 이런 특징을 갖고 그의 경건이 탄식과 저주 시에서 뚜렷하게 나누어진다. 이것을 언급하면서 D. Smith 는 “이런 비이성적 감정의 분출은 정화의 효과가 있다. 그의 인생의 증오를 쏟아 놓음으로써 그의 좌절과 분노를 방출하는 것이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그가 대처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감정때문이다.” 라고 한다.
사탄은 그 재난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의 얼굴에 대고 저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1:11; 2:5),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혹은 그의 인생이나 운명에 대한 일반적인 저주이다 . 병행 저주들인 예레미야 20:14-18과 애가 3:1-18은 이 말들이 불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마치 바른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반응에서 감정을 뽑아내 버리듯이, 신적인 경건이 열정에 대한 이성의 승리를 필수화 하는 것은 아니다. Anderson 은 통찰력있게 진술하기를 “욥은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한 지성을 좇는 스토아 학파가 아니다. 성경은 비인간화 철학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창백한 경건의 오랜 전통 안에 서 있다. 그것은 고상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이교적 윤리로 그리스도인의 도를 혼란케 했다.” 라고 한다.
“나의 생일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이라는 그의 울부짖음은 “아들이 잉태했다는 그 밤”으로 확장된다. 이 순간들은 그의 육체적 기원을 형성한다. 기쁨의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욥은 과거에 발생한 일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창 1:3의 창조 명령을 역전시키는 언어를 사용하여 욥은 4절에서 “그날이 어둠이 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 날에 빛을 비추는 것을 허락하시지 말았기를 소원하고 차라리 그의 생일이 혼돈의 어둠 속에 삼켜지기를 바란다.
3장에서 욥의 개시 탄식은 그의 이전의 신뢰를 크게 뒤흔든 그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욥은 그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그가 느끼는 것을 투명하게 표현하지만, 사탄이 예상한 바와 달리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욥이 그의 현재의 혼돈을 그를 감싸게 될 죽음과 비교하여, 죽음이 쉼을 주는 것으로 바라본다. 지금 그를 고문하는 고통보다 죽음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죽음을 긍정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그가 자살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자살은 그가 하나님께 댜한 모든 소망을 포기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Estes 글에 대한 소감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잘 요약한 책이요 글이다. 욥이 탄식을 하게 된 심리적 변화를 잘 간파했다. 혹자는 1,2장과 3장은 전혀 다른 사람의 글 혹은 전혀 다른 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에스테스는 욥이 1,2장에서는 재난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이고 3장은 7일 주야를 침묵하면서 조용히 재난으로 인한 자기 처지를 반추하고 상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말한 겻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처럼 금욕주의나 감정을 냉철하게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을 토해 낸다고 보는 것에 필자도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