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인데도 퇴출되는 한국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이제 우리도 저 어린 생명들이 입양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때다.
수십 번 보아왔다. 특히나 내가 북구국가에서 대사를 하면서 말이다. 내가 노르웨이 대사를 할 때인 95-97년 경이다. 출근하는 길로 동양아이가 하나 학교에 가고 있었다. 이 아이가 학교에 가는 시간하고 내가 출근하는 시간하고는 엇비슷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알아 본즉, 역시 그 아이는 1살도 되기 전 즉, 돌도 되기 전에 피붙이로 노르웨이 가정에 입양 온 아이였다. 이런 아이들이 노르웨이 1개 국에만 수만 명이 되었다. 공식적인 통계 숫자는 항시 8천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여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반가워서 웃었다. 말도 부쳐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눈빛이 문제였다. 그 아이는 웃는 나의 얼굴을 보자 마자, 자기 얼굴을 확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보고 비수를 내 가슴에 꽂는 것 같았다.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피 덩어리로 입양 온, 저 이이가 저렇게도 돌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그런 현실에 나는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는 국내에서도 어제 저녁 「박 칼린」 선생의 자서전을 보고, 흥분하여 또 읽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다지도 멋 모르는 국민이었던가? 선진국이고 뭐고 다, 뒤엎고 싶었다. 정말이지 박선생의 자서전은 심금을 울리었다. 그것은 박 선생의 어머님 고향이 리투아니아로 옛날 내가 덴마크 주재 대사 때, 맡았던 나의 겸임국 중 하나여서 그런 것 만도 아니었다. 현재 리투아니아는 옆 나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EU 국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과거 소련이 지배하던 냉전 시에는 고생도 많았던 나라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한 때는 유럽을 호령하던 큰 나라이기도 하였고, 양심을 중시하던 나라 중에 하나였다.
그런 나라인데 박 선생은 혈통이 한국인이라고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서, 부산에 정착함으로 인해서 그 예쁜 얼굴에도 자기의 나라, 한국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수 없이 나라를 방황했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박선생이 잘 못한 것도 아버지가 잘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관련, 비엔나에 송출하였던 간호요원들에게 지난 74년에 이야기하시던 김종필 전 총리의 말씀이 귀에 와 울리었다. “앞으로 중요한 건 국적보다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느냐에 있습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면 한국사람입니다” 라던 그 말씀 말이다. 박선생이 잘 못한 것도 그렇다고 아버지가 잘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한국인이란 개떡같아서 추천할 만한 인간들도 별로 없습니다” 라고 속 시원하게 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박 선생이나 나의 조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한국인이었다. 국적을 안 준 것은 한국까지 와서 정착하였는데 일부의 한국사람들이 폐쇄적이어서 문제였다.
그래도 박선생의 경우에는 덜하다. 백인이고 얼굴이 예쁜데다가 자기가 생각한 앞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흑인이었다든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국민이었다면 어떻겠는가? 아찔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잘사는 나라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고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겐 혹독한 것이 한국인의 특성이다. 그런데 그사이 우리는 OECD에 96년에 가입하였고 금년부터 동 기구의 핵심적인 소위원회인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함으로써 “주는 나라” 군에 억지로 끼였다. 그러면서 옳은 소리를 하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재임된 뒤인 최근에는 손가락 질이다. 안 보이는 책임이나 아이의 인권이라곤 불편하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는 말했다. 「당신은 호위 호식하던 대사를 지내서 국내는 잘 모른다고!」 그러나 검은 얼굴로 태어났다던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나는 해외에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다. 아니 해외에 입양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나 몰라라」 하고 내 팽게 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지금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에서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주는 나라」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어서 퍽이나 다행이다. 앞으로는 공존 공생하는 시대가 올 테고 남의 나라 땅을 넘보던 제국주의 외교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시대가 빨리 와서 이 땅에서도 정착이 돼서, 오래 가기만을 빌고 있을 뿐이다.
「박 칼린!」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 얼마나 소녀 시절에 눈물을 많이 흘렸으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목놓아 부르 짓고 있을까? 그리고 말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유색인종의 우리 딸들이나 아들이 얼마나 많으며, 해외에 내 평게 쳐진 우리의 자식과 딸들이 지금 얼마나 울고 있을까? 나는 이들의 “한” 생각하며 「박 칼린」을 다시 쳐다 본다. 「아~ 그렇게도 어렵단 말 인가!」, 끝.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교 초빙교수/전 주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대사, 애틀랜타 총영사/ 제주평화연구원장 대리, 외교정책실장 역임)
첫댓글 권영민 전 대사님 감사합니다.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cafe.daum.net/bergmann 카페로 퍼 옮깁니다.
다른 분들하고 같이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찌이잉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