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귀향
1993 내가 결석한 소풍날
1994 개 - 목탄 파스텔
1994 공놀이 - 칠판에 오일 파스텔
1994 이게 뭐야 - 칠판에 오일 파스텔
1995 큰 까치 수염 - 칠판에 오일 파스텔
1995 호랑이 - 목탄 파스텔 아크릴릭
1996 - 2002 꿈
1996 풍요한 부재 - 칠판에 오일 파스텔
1997 남북 UN 동시 가입 - 캔버스 오일 국회 소장
1999 사마라 칸트의 황금복숭아 - 칠판에 오일 파스텔
2000 김치 담그는 날
2000 도판 퍼즐
2001 보트피풀
2002 강요된 유전
2002 내가 결석한 소풍날
2003 마지막 학기
Dislocation의 역동성 ... 김명희 풍요한 부재(不在)의 땅 내평리에서 아이들이 떠나버린 초등학교 분교를 삶터로 삼은 지 벌써 만 7년이 되었다. 미국 뉴욕에서 내평리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올 때의 두려움과 설레임이 생각난다.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소로뿐이던 마지막 3km의 길을 이삿짐 운반을 위해 굴삭기로 넓혔던 것이 어제의 일 같다. 내년이면 학교 운동장 앞까지 바로 그 길이 포장된다니 내평리로서는 대변혁이나 다름없다. 국도임에도 불구하고 비포장이었던 춘천에서 원통까지의 길이 그 동안 모두 포장되었다. 지게가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던 주민들은 경운기를 사고, 우리 내평리 이장 아저씨는 면에서 조그만 트럭을 급여 받아 농산물을 운반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우리를 처음 맞이하였을 때의 이방인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이 소박한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이웃 희철이 어머니가, "밤에 불이 켜져 있는 학교 교실을 보면 안심이 되는데……"라는 덕담으로 우리가 마을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마음 든든했다. 나는 자리 매김과 뿌리 내림의 좌절과 극복을 반복하면서, 이 땅과 이 곳에 살고 있는 모든 것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인생과 작품의 '원시점(元始點)'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땅, 사람들, 그리고 나와의 역동적 변화를 체험한 7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작년에는 16년의 내 청춘기를 보낸 뉴욕에서 또 다른 세계를 조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뉴욕은 세계 여러 이방인들의 화쟁(和諍)터이다. 이 화쟁은 혼돈과 적대를 유발하기보다는 서로를 역학적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그 모순을 푸는 열쇠의 비밀이 바로 내평리에서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갈망'임을 깨달았다.한인 교포도 이 이방인의 구성원중 하나이다. 이들은 2세들을 한국 학교에 보내 우리 글과 문화를 가르치면서, 미국인이어야 한다는 과제와 맹목에 가까운 뿌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왜 이 생경한 땅에 살고 있는가? 왜 한민족은 제 나라 땅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만주, 사할린, 일본, 독일, 카자흐스탄, 월남, 중국, 미국 등으로 dislocate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지난 한 세기 우리의 역사는 가난 전쟁 정치적 폭력 문화적 뿌리 뽑힘으로 인한, 농경 사회의 붕괴로 인한, 또 배고픔으로 인한 dislocate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새 삶터에 던져진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뿌리 내림을 시도하면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 화폐에 그려진 한국 소녀의 모습이나,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광고물은 이런 역동성을 형상화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것이 허상이라고 할 지라도……. 이처럼 사회적 변화는 문화적 변화를 동반한다. 문화가 공동체 삶의 긍정적 드러냄이라면, 그것은 마치 울림과 같아서 각기 사람의 감성을 흔들어 줄 때 역동적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울림을 위해 오늘도 벽공(碧空)과의 씨름을 계속하고 있다.
●Dislocation : 사전적 정의로 탈구, 혼란(기간), 전위, 단층. 실향, 난민, 뿌리 뽑힘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추상적 개념으로 이 단어를 씀.
<월간미술> 1997. 6월호
김차섭·김명희 부부가.... 오 광 수(미술평론가) 김차섭·김명희 부부가 산골 벽촌인 강원도 춘천 내평리에 은거한지도 벌써 5년째에 접어든다. 뉴욕 맨하탄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이들 부부가 서울이나 그 근교가 아닌 외진 벽촌을 택하게 되었을 때부터 주변의 사람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태도를 보였다. 상황의 연출치고는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에 과연 연출자가 이를 지탱할 수 있을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벌써 옛말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들 나름의 터를 잡아가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독특한 정신세계의 축에 그들의 상황이 적절히 조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 네 개 짜리 분교를 가정집과 화실로 꾸미고는 공동의 공간 외에 각각 한 교실씩 개인화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부부의 작품은 서로 닮지 않았으면서도 정신의 항상성에선 서로 밀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얼핏 김명희의 작품은 치열한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상에로 접근해 가는 밀도가 느껴질 정도로 안으로 파고드는 내면성을 드러내 놓는다. 연필이나 목탄으로 하는 정밀묘사는 대상에 대한 냉정함, 이른바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지중해 여행, 멕시코 여행에서 얻은 인상들을 묘출한 일련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짙은 상황성에 대한 파악이 두드러진 편이었다. 그의 이 같은 상황에 대한 강한 의식의 틀이 내평리의 한 초등학교 분교라는 상황에서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예술가는 현장의 목격자, 체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모름지기 자신의 예술적 상황과 태도를 반영해 준 것일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떠나간 교실에서 서서 그들이 내뿜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은 누구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 이 자문에서 비롯된다. 버리고 간 태극기, 칠판, 각종 표어와 포스타 등을 하나하나 다시 수거하면서, 그 버려진 것에 대한 기억을 소급시킨다. 순하디 순한, 산골 아이들의 수줍은 듯 하면서도 금방이라도 풀 냄새가 묻어 나올 것 같은 풋풋한 표정을 재현시키고, 산나물을 한 소쿠리 캐오는 시골아주머니의 약간 멋쩍은 듯한 포즈를 재빨리 포착해 낸다. 길가 풀섶에 피어있는 들꽃을 한아름 옳겨 놓기도 한다. 그러므로서 벌써 떠나 가버린 아이들과 그들의 숨길이 베여있는 교실과 또 주변의 인물들과 자연을 다시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을 소중하게 담아냄으로서 화해의 장을 연출해 보인다. 아이들은 떠나가고 학교는 비었지만, 그들이 뛰놀던 운동장과 운동장 주변의 들녘과 산골을 이제 잡초만 자라나고 있지만, 작가는 결코 그들이 떠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느 곳에 가 있던 그들의 혼은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하나 화폭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 김명희가 주로 다루어 왔던 매재는 캔버스와 유채안료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이나 목탄이었으며 때로는 수채나 크레파스 같은 재료들을 다루어 왔다. 그러한 매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최근의 작품에까지 고스란히 지속되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재료개념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최근의 작품가운데 일련의 대형화폭이랄 수 있는 칠판 위의 작품도 그의 이 같은 재료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의 좋은 반영이라고 하겠다.칠판은 교과의 내용을 기술하는 바탕이다. 분필로 쓰고는 시간이 끝나면 지운다. 칠판은 언제나 비어있는 판이고 무언가 쓰여질 것을 기다리는 판이다. 김명희의 대형화폭으로 변형된 칠판은 쓰여지는 판이기 보다 그려지는 판이다. 그가 주로 칠판을 화폭으로 하고 그린 내용은 이 학교에 다니던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고, 이 산골학교 주변에 있던 주민들의 모습이다. 한말로, 칠판에 등장하는 내용물은 장소의 상황성을 강하게 반영해주는 모티브들이다. 옹기종기 모여선 아이들은 기념촬영이라도 하듯이 이쪽을 향하고 건강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때로 손에는 한아름 들꽃이 쥐어 있기도 한다. 아마도 그들은 분교가 폐쇄될 때 저렇게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이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명희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심히 걷잡혀 지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그려지는 대상이나 바라보는 인물이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기념비성을 띄고 있다. 바라보는 사람의 임의적인 선택에 의해 포착되어지는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대상물이 깊은 상관관계를 지님으로서 더욱 상황성에 밀도를 더해주고 있다. 상황 속에 뛰어든 작가의 강한 참여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점에 있다. 현실과 이미지의 갭을 극복하고 바로 현실이자 이미지이고자 하는 표현수법도 이 같은 강한 상황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칠판은 그대로 화폭으로 대신하고 그 위에 아이들이 사용하는 크레용과 유사한 오일파스텔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문맥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칠판이라는 거울에 반영된 아이들의, 또는 벽촌의 삶의 기록이다. 이미지이면서 부단히 현실로 되돌아간 세계로서의 기록이다. 작가는 그만큼 화면 깊숙이 들어가 있다. 상황의 충실한 증인이요 기록자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한 작은 공간과 시간의 기록을 담은 역사화로서의 의미를 마침내 획득하게 된다.작가는 <내 그림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 현실의 문제, 특히 Dislocation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다>고 자문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씨앗을 제자리에 심고 태양과 비를 기다리며 가꾸는 것은 내 몫이다.> 따라서, 그가 화면에 옮겨놓은 아이들의 또는 시골사람들의 모습은 잃어버린 옛날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지금도 어딘가에 서식되고 있는 우리들의 풋풋한 정감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을 꽃피게 하는 것, 그것이 김명희의 참다운 제작의 의의이다.
1949 서울출생 학력 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1975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1976-78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과정 수학(뉴욕) 1998 덕성여자대학교 대학원 출강 2002 강원대학교 출강
개인전 1972 괴테연구소 (서울) 1987 원화랑 (서울) 1995 원화랑 (서울) 2001 AD&A 갤러리, 오사까 2003 현대화랑
단체전 1971 한국미술대상전 (한국일보 주최, 서울) 1973 앙데팡당전 (서울) 1974-75 표현그룹전 신문회관, 미술회관 (서울)
1978 센터 스퀘어 갤러리 초대전 (앨버니) 1982 환기재단 수장전 (뉴욕) 1987 뉴욕거주 한국작가전 (가나화랑, 서울) / 국제 임팩트전 (교토) "서정적 선"기획전 (한국문화원, 뉴욕) / 한국작가전 (알파인 갤러리, 뉴욕) 1992 표현그룹 전국 순회전 (서울, 대구, 광주, 부산) 1993 환기재단 젊은 작가전 Ⅱ (환기미술관, 서울) 1994 "여성, 그 다름과 힘"기획전 (한국미술관, 서울, 용인) 1995 95 한국여성 미술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1996 남북 UN동시가입 기념 벽화 제작 (국회, 서울) 1997 한국모더니즘의 전개 (금호 미술관, 서울) 1998 '한국미술 9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원화랑 1978-1998' (원화랑, 서울) 인권선언 50주년 기념전시회 (예술의 전당, 서울) 1999 환기미술관 소장품 전시회 (환기미술관, 서울) Figurescape, (스페이스 언타이틀드, 뉴욕)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창회전 (플레이더스 화랑, 뉴욕)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예술의 전당, 서울)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호암미술관, 서울) 2000 한국, 베트남 평화 전시회 (가나 Forum Space) 5인전 (소호 갤러리, 서울) 2001 2인전 AD&A갤러리 오사카,일본
2002 또다른 미술사 : 여성성의 재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서울 회화의 이름으로 : Six Name of Painting, Canzi 화랑, 부산 제2회 여성미술제 "동아시아 여성과 역사" 서울 여성 플라자 여성사 전시관, 서울 2003 박수근을 기리는 작가들, 박수근 미술관, 양구 프린스 프린세스, 갤러리 현대, 서울 분단의 벽을 넘어,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강원의 자연, 그리고 삶, 박수근 미술관, 양구 Marking : 한국현대드로잉, Korea Society, 뉴욕 일상이 담긴 미술,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소장 유관순 기념관 (서울)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환기미술관 (서울) / 국회 (서울) 청강 문화산업대학, 경기도 이천 / 박수근 미술관, 양구 / 명지대학교, 서울 /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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