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생성하는 봄. 숲에서 잡은 개구리와 뱀, 물고기에게 돌을 매달아 괴롭히는 짓궂은 장난에 빠져 천진한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승은 잠든 아이의 등에 돌을 묶어둔다. 잠에서 깬 아이가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잘못을 되돌려놓지 못하면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 이른다
아이가 자라 17세 소년이 되었을 때, 산사에 동갑내기 소녀가 요양하러 들어온다. 소년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차오르고, 노승도 그들의 사랑을 감지한다. 소녀가 떠난 후 더욱 깊어가는 사랑의 집착을 떨치지 못한 소년은 산사를 떠나고...
절을 떠난 후 십여년 만에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 산사로 도피해 들어온 남자. 단풍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자 그를 모질게 매질하는 노승. 남자는 노승이 바닥에 써준 반야심경을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고... 남자를 떠나보낸 고요한 산사에서 노승은 다비식을 치른다.
중년의 나이로 폐허가 된 산사로 돌아온 남자.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불상을 만들고, 겨울 산사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나날을 보낸다. 절을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이 어린 아이만을 남겨둔 채 떠나고...
노인이 된 남자는 어느새 자라난 동자승과 함께 산사의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다. 동자승은 그 봄의 아이처럼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맹이를 집어넣는 장난을 치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 김기덕 】
<섬>과 <수취인불명>을 계기로 세계적 감독으로 부상한 김기덕 감독의 신작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프로덕션 준비단계부터 독일의 아트하우스 판도라필름이 공동제작사로, 유럽영화시장의 허브 바바리아필름이 배급사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초로 이루어진 이와 같은 사전 제휴는 해외영화계에 형성된 감독과 작품에 대한 신뢰 덕에 가능했던 것. 또한 역량있는 감독을 하나의 세계적 문화적 브랜드화하는 가능성 모색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해외제휴는 최근 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프랑스 MK2가 참여한 또 하나의 사례로 이어지면서 완성도 높은 작가영화의 제작-배급 방식에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순제작비 10억의 저예산 영화이지만, 사계절이 모두 담겨야 하는 작품. 이러한 작품의 특성을 고려해 김기덕 감독과 LJ필름은 전작 <해안선>과 이 작품을 동시에 기획하고 제작에 돌입했다. <해안선>을 촬영하기 전인 2002년 5월부터 봄 장면을 찍기 시작해서 <해안선> 촬영 종료 직후인 2002년 8월에 여름 장면을, 2002년 11월에 가을장면을 촬영하고, 2003년 1월에 눈이 오고 얼음이 꽁꽁 언 겨울 장면을 화면에 담은 뒤, 3월 말에 마지막 봄 장면을 촬영함으로써 1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저예산 전문의 김기덕 감독이지만, 이 영화에서 인간의 일생을 담는 주공간인 ‘부유하는 암자’는 양보할 수 없이 중요한 세트였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3억 5천만원이라는 거액이 세트비용으로 책정되었다. 그 장소는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의 산중에 자리잡은 연못 주산지. 3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전통예술장인들과 미술가 등으로 구성된 미술팀이 공을 들인 끝에 세트가 완성되었다. 약 68평의 바지선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물위를 부유하는 사찰’이 탄생된 것. 국립공원 내 최초의 영화세트이기도 하다.
물살과 바람을 타고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사찰은 주위의 비경과 맞물려 환상적이고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물속에 반쯤 몸을 담근 150년된 왕버들과 능수버들이 운치를 더한다.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선세계에 들어선 듯한 신비함을 자아낸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산지는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과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그러나 자연보존을 위해 6월 철거에 들어갔다. 결국, 주산지의 비경을 이루던 물위 암자의 모습은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