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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Ⅲ. 경제권 수호운동
2. 대한제국기의 상권 자주성 회복운동
1) 갑오이전의 상권(商權)문제
세계자본주의가 다원적인 축을 갖고 전개되던 시기인 1876년에 조선은 집권층의 주체적인 준비결여로 이미 구미 자본주의열강에 종속되어 있던 일본에 의해 불평등조약에 의한 개항이 강요되었다. 그리고 아편전쟁(阿片戰爭)이래 구미열강에 종속되어 있던 청국과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가 답습되고 있었다. 따라서 개항 당초 조선은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최저변의 종속적인 ‘주변’으로 편촉(編嘱)된 것이다.
개항후 조선은 일본과 청국의 직접적인 외압에 의해 ‘저개발의 위성화(衞星化)’가 강요된 조건하에서 근대화의 길을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국의 상권침탈은 자본주의 확립의 결과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 성립을 위한 폭력적인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1876년의 일련의 조·일간의 제조약에서 일본은 관세권의 전면적 박탈, 일본화폐의 유통권, 해운(海運)의 독점 아래 임의무역〔自由貿易〕의 강제 등의 특권을 규정하여 상권침탈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는 편무적 영사재판권의 행사 및 조계(租界)의 설정과 연안측량권 및 해도(海圖) 작성권 등을 규정하여 상호 보완하고 있었다. 이같은 ‘병자 불평등조약체제’는 특히 개항 초기 우리나라 대외관계의 매개 규범으로서 주권을 제한하고 대등한 대외관계의 전개와 국민경제의 형성을 저해하는 ‘외측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반면 일본은 이를 담보로 독점적인 조선침투를 획책했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은 재래의 종속관계로부터 상병(商兵)정책에 의한 실질적인 조선지배·종속관계를 획책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1882)에서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명시하고, 종가(從價) 5분세의 저율관세(低率關稅)와 한성개시(漢城開市) 및 내지채판권(內地採辦權)의 선례를 만드는 등, 상권침해와 새로운 불평등조약관계를 강요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대외통상과 해관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청국의 이같은 조선지배책동과도 관련하여 영국은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준해서 1882년 6월에 조인된 이른바 윌리스(Willes)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고, 일본은 이를 내세워 저율협정관세를 규정한 조·일통상장정 및 세칙(稅則;1883)의 조인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결국 1883년 11월에 개정 조인된 조·영수호통상조약(parkes 조약)에서 청국이 그 선례를 만든 한성개잔(漢城開棧)과 더불어 내지채판권을 확대시킨 ‘내륙통상권’의 강제규정과 저율협정관세의 규정 등으로 조선의 대외적 지위가 더욱 격하되고 반면 외국상인의 조선 국내침투와 상권침탈을 보장하는 ‘계미(癸未) 불평등조약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대체로 ‘병자 불평등조약체제’가 주로 일본상인의 개항장 조계를 거점으로 한 종속적인 무관세 ‘조계무역’을 보장하는 장치임에 대해서 ‘계미 불평등조약체제’는 외국상인의 국내농촌시장의 침투와 ‘내륙통상(內陸通商)’까지 보장하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갑신·갑오기에 청국과 일본의 국가권력에 비호된 청·일 상인들의 국내침투로 한상(韓商)들은 새로운 단계의 외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갑신·갑오기의 청·일 상인의 상권침해양상과 한상(韓商)의 대응과 상권회복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필자가 별고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주로 1900년 전후 대한제국시기의 제조건에 규정된 개항·개시장(開市場)의 확대와 외래상품 대량유입의 경제적 외압 특히 일(日)·청상(淸商)의 상권침해와 이에 대한 정부 및 한상(韓商)의 대응을 주제로 하였다.
1900년 전후시기 외압의 성격은 제국주의 이행기의 일본과 러시아의 정치·군사적 외압의 조건하에서, 특히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적 외압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 시기 외국상인의 국내상권침투도 한상(韓商)과의 대항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나갔다는 문제시각에서 정부의 경제정책과 더불어 한상의 상권 자주성 회복문제를 실증적으로 논증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2) 수입구조와 상권침해 양상
(1) 개항·개시의 확대와 수입상품 구성
개항 초기에 이미 부산·원산·인천의 3항이 개항되고 그후 수도 서울이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에는 목포(木浦)와 진남포(鎭南浦)가 새로이 개항되고 1899년에는 마산(馬山)·군산(群山)·성진(城津)의 개항에 이어 평양이 개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의주(義州)의 개시와 용암포(龍巖浦)가 개항되었다. 따라서 을사조약 이전 대한제국시기의 개항·개시장은 모두 9항·3시, 즉 12개처로 늘어나 대외통상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같은 개항·개시의 증설에 대해서 정부당국은 개항개시(開港開市) 상정(商情)의 이익창왕(利益暢旺)을 위(爲)인즉 민상(民商)으로 내외물품(內外物品)을 호상무역(互相貿易)야 영업(營業)을 발달(發達)케이 개설항시(開設港市) 본의(本意)라 하고 있고, 또는 “상업(商業)을 확장(擴張)하여 민국이익(民國利益)을 발달(發達)케 함이라”고 하고 있으나, 외세 특히 일본의 요구로 개방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가령 목포항의 개항도 청일전쟁기간에 일본측이 조선에 강요한 잠정합동조관(1894년 8월 20일)에서 ‘전라도 연안의 통상항(通商港) 개항요구’이래 계속 개항을 요구해왔다.
개항이래 대외통상이 이른바 ‘미(米)·면(綿) 거래형’의 교역체제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는 갑오경장때 실시되었던 일련의 경제개혁’ 즉 지세(地稅)의 금납화(金納化)와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으로 대표되는 은본위 화폐개혁, 재정관리체계의 일원화, 또한 육의전(六矣廛)의 폐지와 보부상(褓負商)의 혁파, 수세도고(收稅都賈)의 혁파, 지방관에 의한 방곡령(防穀令)의 금지 등에 힘입어 갑오경장 이후에 정착되어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세의 금납화는 직접생산 농민에게 납세를 위한 곡물반매를 강요하여 곡물수출의 증대를 가져왔고, 지방관의 방곡령 발포금지는 그 제어장치의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각종 특권상회와 수세도고의 혁파, 육의전 및 보부상의 혁파 등은 일본산의 면사(綿糸)와 영국제 및 일제 면포 수입의 증대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대한제국시기의 대외통상은 개항장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그 상품구성은 제1차 산품인 미·대두(大豆) 등 농산물의 수출과 면포·면사 등 면제품 수입의 농공분업에 기초한 ‘미면교역(米綿交易)’의 종속적인 저개발형 통상구조를 가지고, 주로 후발적인 일본 자본주의를 매개로 해서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연계되어 있었다.
청일전쟁후 수입품의 상품구성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국제 생금건(生金巾:洋木, Grey Shirting)이 여전히 수입면제품의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일본제의 소건목면(小巾木綿), 시팅(Sheeting;粗布 또는 廣木)과 특히 방적사의 수입이 급격하게 증대되고 있는 사실이다.
개항이래 수입면직품의 대종을 이루고 있던 영국제의 생금건(生金巾)은 겉모양이 아름답고 광택은 있었으나 내구력이 약해서 직접생산자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직물업에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제의 소건목면(小巾木綿)은 처음부터 한국직물시장을 겨냥하여 생산된 것이고 이른바 토포(土布)와 규격 및 품질이 유사하였으므로 점차로 국내토포시장을 잠식해 들어 왔다. 그리 고 시팅(Sheeting)은 금건과 소건목면의 중간에 위치하는 품질과 내구성을 갖고 있어 주로 도시의 직물시장에 침투해 왔다.
이같은 상황으로 국내의 토포생산도 일정한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한국의 소상품생산자는 값싼 반제품인 일본산 기계제 방적사(機械製紡績糸)를 수입하여, 이른바 방적토포(紡績土布)를 생산해서 이이제이(以夷制夷)로 대응하여 일본제 소건목면의 수입증대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일본방적사가 한국에 처음 수입된 것은 1890년경이지만 이 수입 방적사를 원료로 이용한 직포의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강화도민이며, 1894년부터이다. 그후 경기·황해 양 도내에서 성행되고 충청도에도 전해지고 점차 여러 지역으로 확대 전파되어 나갔다.
수입방적사를 원료로 한면사(韓綿糸)와 교직(交織)한 한국산 방적토포(紡績土布)는 겉모양도 아름답고 가격도 금건(金巾)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농가의 부업으로서 그 수용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청일전쟁 이후 일본방적사 수입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이다.
인천항의 경우, 1898년에서 1902년까지 일본방적사가 수입액의 제1위를 나타내고 있고 1900년에는 133만여원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항의 경우는, 일본방적사 수입이 1898년의 3,975담(擔) (124,178원)에 비해 1899년에는 9,175담(247,401원)으로 전년보다 그 수량 및 가격이 약 2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으나, 영제 생금건 및 일본목면에 이어 제3위를 나타내고 있다. 부산항은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영제 생금건이 계속 제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금건류(金巾類)도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해마다 감퇴되고 있고, 한상(韓商)들이 직접 상해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증가되고 있었다. 이 기간의 부산항 수입액의 제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목면은 경상·강원·함경도 등지의 수요로 부산에서 그 수입품의 일부가 다시 선편으로 원산·마산항으로 재수출되고 이들 개항장에서 그 배후 상업권으로 수송되는 것이 통례가 되고 있었고, 부산항에서 곧바로 육지로 운송되는 것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원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산 목면은 한국산 목면에 비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한인(韓人)들은 자국산 목면을 사용하고 외국제품을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고 있다.
원산항의 경우, 1900년 전후에 일본목면이 수입 제1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원래 함경도지방이 경상도산 등의 목면에 의존하고 있었고, 수입방적사를 이용한 직포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목면이 이 지역에 침투하여 국산목면과 대항관계에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함경도시장에의 일본목면의 침입은 경상도 및 전라도지방의 국내면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전라·경상도의 면업지대에서는 그 지역내부의 농촌시장의 협소로 상품생산의 발전에 있어서 함경도 시장이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산항에도 방적사가 수입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직포를 위한 것이 아나고 주로 봉사(縫糸) 및 어망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도서울의 경우, 1902년 내지 1903년의 수입중요품은 방적사와 일본제 금건(金巾) 및 영국제 금건 그리고 미국산 석유(Standard 상회의 松印)로서 모두 경인철도에 의해 수송되고 있는데, 영국제 금건의 수입은 청상(淸商)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1897년에 개항한 목포와 진남포의 경우, 목포는 전라남도의 미곡수출항으로서 미곡이 수출의 제1위를 차지하고 있고 수입상품은 금건류와 방적사가 그 제1위와 제2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도는 원래 목화의 주산지로서 백목면을 많이 산출하고 있었으나, 세로에 외국 방적사를 사용하고 가로에 국산수방사로 직조하는 방법이 유행함에 따라 일본방적사 특히 섭진(攝津)방적회사의 16수(手)의 수입이 해마다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목포항 수입 제1위의 금건류는 영국산이 일본산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1902년부터 일본산이 영국산을 압도하고 있다. 한편 전라남도의 면작(棉作)의 발전에 따라 그 품질의 우수성이 평가되어 원면이 일본방적업의 원료로 수출이 증대되서 결국 이 지역 직포업의 발전을 제해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진남포는 개항후 일본방적사가 일본으로부터 직접 수입된 것은 1899년부터이며, 1900년 10월에 일본제일은행이 영업을 시작하는 등, 이때부터 평안도의 상권도 일본무역권 안에 포괄되기 시작했다.
1899년에 개항한 마산·군산·성진(城津)과 개시장이 된 평양의 수입상품구성을 보면, 마산은 개항후 수입상품 제1위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제 방적사가 비교적 높은 가격을 계속 유지함에 따라 오히려 금건류의 수용이 증가하여 1902년부터 금건이 수입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주로 부산에서 재수입되고 있다.
군산은 1901, 2년에는 일본방적사가 수입상품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1903년에는 일본시팅이 제1위를 나타내고 있다. 1903년 제3계(季) 수입액의 경우 일본시팅이 13,826원임에 비해 일본방적사는 5,547원으로 나타나 있다.
성진의 수입상품은 영국산 생금건, 일본산의 목면 및 방적사로 되어 있으나, 일본목면은 한목면(韓木棉)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지만 지질(地質)이 약하고 실용적이 못되기 때문에 한목면(주로 경상도산)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양의 경우도 방적사·백목면(白木綿)·금건 등 면제품의 수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 자본이 있는 한상이 인천지역에 직접 거래처를 갖고 그 곳 상인과 직접 거래를 하는 등, 일상 및 청상에 대해 다른 지역에 비해 한상의 상권이 비교우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면제품 이외의 중요수입상품으로 견직물은 인천·부산·원산·서울·목포·마산 등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01년 인천항의 견직물 수입액이 95만 3천 268원으로, 그 전년에 비해 41만 6천 230원 증가로 나타나 있다. 1901년이 미곡의 흉작과 백동화 가격변동으로 구매력이 크게 감소되고 있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견직물의 수입이 격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일견 기이한 현상같지만 원래 견직물의 수요는 상류계층이며, 일반농민의 수요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01년의 불황도 일반농민에게 극심한 타격을 주었지만 상류계층에는 별로 영향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견직물의 수년래의 수입경향을 보면, 청국제가 더욱 증가세를 나타내고 일본제는 감소경향”에 있었고, 일본제 견직물 중에서도 한국인의 수요가 다소나마 있는 것은 갑비견(甲斐絹)의 일종이고 기타 일본견직물은 거류일본인의 수요에 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청상은 인천항에서 견직물뿐 아니라 청국의 하포(夏布:麻布)도 대량 수입하고 있었다.
부산항에서도 “청국산 견직물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한인의 기호에 맞아” 수입의 증가를 나타내고, 1901년 “청국 상해로부터 직수입 가격 10만 여원에 이르고, 일본상품을 압도하는 경향”에 있었다.
원산항에서도 1901년 청국견직물의 수입액이 14만 8천 275원으로 전년에 비해 9만 6천 962원 증가를 나타내고 있고, 마산항에서도 청상에 의해 청국 강소성(江蘇省)의 견직물이 수입되고 그 가격이 저렴함에 따라 수요가 많아 해마다 판로를 확대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목포항에서 1901년에 수입된 견직물은 6,811반(反) (2만 2천 451원)으로 모두 청국산이었다.
견직물의 경우, 청국산이 청상에 의해 수입이 급증하게 증대됨에 따라 한국의 재래 견직업을 쇠퇴시키게 되고, 인천항을 통해 대량 수입된 청국산 하포(夏布)도 서울시장을 배경으로 한 충청·전라도의 저(苧)·마포업(麻布業)과 함경도지방의 마포업에도 많은 타격을 주었다.
섬유제품 이외의 수입품으로 특기할만한 것은 미국산 석유이다. 일본산〔越後油〕도 다소 수입되고 있었으나 매연이 많아 그 품질에 있어서 미국산 특히 미국 스탠다드(Standard)상회의 솔표〔松印〕가 가장 호평이었고 서울의 경우 경인철도에 의해 공급되고 있었다. 부산항 1902년 제4계 무역에서 미국 직수입 석유 송인(松印)이 77만 9천 280카론, 가격으로 15만 8천 1원에 달하고 있고, 부산항에서 미국석유 송인(松印) 특약판매점(販賣店)이 12호(戶), 조합판매점이 38호, 도합 50호임에 비해서, 일본산 석유는 그 판매점이 단지 1호가 있을 뿐이었다. 이 때 미국석유가 부산에 대량 도입된 것은 미국 스탠다드상회가 한국전역에 공급하기 위해 부산에 동 상회소유 석유창고에 저장하기 위해서였다.
(2) 청·일 상인의 국내상권침해 양상
청·일 개전이 임박한 1894년 7월 19일에 조선의 내정 및 외교와 통상문제에도 간섭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가 급보를 받고 청국으로 귀국하자, 이 소식을 들은 청국의 거상 동순태(同順泰)·이태호(怡泰號)·안창호(安昌號)를 비롯하여 서울의 청상들은 그 다음날인 7월 20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침범과 민씨정부의 붕괴로 청 상들은 대거 귀국하고 원세개의 대리 당소의(唐紹儀)도 한때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 피신하다가 귀국하면서 영국총영사가 청국공관과 재한청국인을 보호키로 되었다.
한편 새로 출범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은 동년 7월 25일(음 6월 23일) 일본측의 종용에 따라 1882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하여 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과 길림무역장정(吉林貿易章程)등의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청국측에 정식으로 통고했다. 이에 따라 종래 청상들이 조선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특권도 폐기되었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1894년 11월 20일에 전문 9개조로 된 보호청상규칙(保護淸商規則)을 반포하여 그 제1조에서 “한성(漢城) 성내 및 인천·부산·원산 3항에서만 거주·영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다시 그 제5조에서는 청상의 내륙통상을 불허하였다.
따라서 1890년이래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월까지 조선의 수입무역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청상이 청·일 개전으로 그 대부분(99%)이 귀국함에 따라, 사실상 한때 조선에서의 상권이 저상(沮喪)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청상이 또다시 도한(渡韓)하기 시작하여 1895년 7월의 인천항의 금건 수입의 경우, 일상의 2만 6천여원에 비해 12만 3천여원으로 일상을 능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국내에서 을미사변 및 아관파천 등으로 반일기운이 고조된 틈을 이용하여 청상들이 이미 인천항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거상 동순태 (同順泰) 등의 지원으로 1896년 3월부터 대거 내륙행상을 재개하고 있다. 이것은 청국이 마관조약(馬關條約)에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고, 아직 “대한(大韓)이 청국(淸國)과 통섭을 끊고……약조(約條)가 없는 상태” 이므로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며 특히 ‘보호청상규칙’을 무시한 불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일관성이 결여된 대 청상정책으로 이러한 불법활동이 아무런 제약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인천항에 갑오 이전에 청인이 살던이 잇 이 은 대한정부에서 잠간 빌녀준 이요 청인이 당초에 아죠 차지이 아니라 갑오년에 일청이 전쟁을 열 대한과 청국이 화약을 싣은지라 청인들이 그 을 비녀 놋코 다라낫슨즉 그 이 청인과 상관이 없게 됨…… 그 빈에 들어가 집을 백(百)여가를 짓고 사 근년 이로 청인이 와서 그에 사는 대한사을 협박고 말이 이 이 우리 이니 세전을 던지 그럿치 안면 집을 헐겠다고 공갈하고 있고, 조선백성이 조선 땅에 집짓고 사는 것을 청상이 매월 몇백원씩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서울도성에 있어서 청상의 상권침해도
특히 남대문 큰길과 수표다리 건너와 정동과 그외 각처 요긴 자리에 청인쟝의 집이 날마다 늘어가니 내나라 도성에 내나라 셩이 용납치 못하게 될 일이라고 개탄하고 있을 정도로 한상의 상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청상의 상권침해는 개항장 및 개시장에서만 그치지 않고, 특히 내륙 행상과 국내에서의 불법적인 상설점포 개설이 자행되고 있었다. 가령 충청남북도의 경우, 청상들이 한국정부의 호조(護照)없이 행상하는 것이 비일비재였고 이를 금단한즉 청상들이 불복하여 분쟁을 야기시키고 있다. 공주군(公州郡)에서는 청상 23명이 모두 호조없이 상설 점포를 개설하고, 예산(禮山)에서는 청상 13명이 토지·가옥을 구입하고 상설 점포를 개설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관헌이 철거를 요구하자 집단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독립신문』도 청상의 내륙행상에 대해 타국쟝가 물건을 가지고 디에 들어가셔 뎐을 버리고 팔라 것은 됴약에 허락이 업거늘 지금 공주와 례산과 그외 다른 곳에서 청국 쟝들이 만히 들어가셔 뎐을 버리고 잇스며 례산에는 청인이 오십호나 된다니 이것은 됴약 밧긔 일이라 정부에서 정신을 차렷스면 엊지 이리요 라고 하여 정부외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1899년 9월 11일 새로이 한·청통상조약이 체 결되었다. 비록 쌍무적인 영사재판권울 규정하는 등 대등조약을 표방하였으나, 쌍방간의 최혜국조관의 적용으로 청상의 내륙행상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다만 내지정주를 불허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후 청국측의 집요한 요구로 사실상 실현되고 있다.
한·청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0년 3월의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 행상하고 있는 일상이 약 300명 안팎임에 비해서, 청국 행상은 황해도만으로도 100명이나 되고 “충청도방면은 그 수 실로 500명 내외”이며, 그 청상은 대개 거액의 자본을 갖고 전국 각 요시(要市)에 기포(碁布)활거하여 그 이름이 행상자라 하더라도 실제는 거류상(居留商)과 다름이 없다. 즉 충청도 예산(禮山)·강경(江景)·안성(安城) 등지에서는 유력한 청국상인의 상주하는 자가 5, 60명이나 되고, 그중에는 토지 가옥을 소유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1900년 7월의 기록에는 예산읍에만도 청상은 가호(家戶) 8호에 90명이 거류하면서 이 곳을 근거로 근군각시(近郡各市)에 행상을 하고 있다. 둔포(屯浦)에도 청상이 점포 3호에 48명이 거류하면서 방적사·석유·성냥·금건(金巾)·염분(染粉)·소잡화(小雜貨) 등을 인천항 청상 동순태(同順泰)로부터 구입하여 한선(韓船)으로 싣고 와서 각상인에 분배 판매하고 있는데, 이 둔포에 4호의 객주(客主)가 있어 한·일상의 수출입품을 취급하여 구전(口錢)을 받고 있으나, 청상은 객주에 의탁하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청상의 내륙행상이 일반 객상뿐 아니라 내륙객주와 도 대립관계에 서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청일전쟁이전과 기본적 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후 청상은 인천과 서울을 거점으로 하여 이와 가까우면서 한상 및 일상의 상권이 약한 서울이남의 경기·충청지역에서 그들의 내륙상권의 확대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도한(渡韓) 일상의 증가와 더불어 조선에 있어서의 상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서울에 있어서는 이현(泥峴)과 남대문(南大門)거리는 물론 그외 성내외 도처의 추요(樞要)한 장소를 택해 점포를 개설하고, 또한 지방에서도 경상·충청·경기·황해·평안 각도의 추요(樞要)한 곳에 설치된 일본병참부(兵站部)의 지원으로 일상의 내륙행상이 무척 증가하였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상의 내륙행상이 크게 증가한 것은 당시 개항·개시장인 3항(부산·인천·원산) 및 서울에서 수입물화를 판매하는 것보다 조선국내 각지방에 물화를 가져가면 4할 이상의 높은 이윤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국내 각지방의 객주 등 한상의 상권침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때 일본군이 식량 및 노동력 징발의 대가로 그 병참부가 지급한 일화를 각지방의 한인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간의 상거래에서 별로 통용되지 않는 일화 특히 그 지폐를 사장하고 있기보다 수입금건 등을 구매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구매력을 충동하여 살포(撒布)된 일화를 대량회수하기도 했다. 그 위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육의전의 혁파(1895년 3월)와 ‘흑의령(黑衣令)’의 발포(1895년 4월) 등이 일상들의 수입직물 특히 ‘무지색물(無地色物)’ 및 ‘색갑비견(色甲斐絹)’ 등의 판로확장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청일전쟁후 일상들의 내륙행상으로 조선의 내륙상권이 침해되고 그위에 “평양에 90여명, 개성(開城)에 40여명의 일상이 재류(在留)” 즉 정주(定住)하고 있었고, 아직 개항전의 “목포에도 2, 3명의 일상이 한인명의로 개점”을 하고 있는 등 불법적인 활동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10월의 민비시해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강행에 반대하여 각지방에서 반일 의병운동이 전개되고 그후 아관파천 등으로 국내에 반일기운이 고조되자, 내륙에 재류하던 일상들은 모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서울 및 각개항장으로 철수했다. 당시 일본인이 안전하게 내왕할 수 있는 지역은 경인간(京仁間)의 일가로(一街路)뿐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있어서도 일상들은 상세가 위축기미를 보이다가 그 위에 청상의 값싼 상품에 밀리어 1896년 9월중 잡화상만도 폐점한 것이 5, 6호나 나타나고 있었다.
적은 자금으로 일확천금의 요행만을 꿈꾸면서 내륙행상을 하다가 실패하고, 그때 마침 반일 의병운동의 발생으로 인천으로 철수한 일상의 한무리들은 1896년 4월, 인천에서 계림장업단(鷄林獎業團)이란 폭력적인 무장행상단체를 219명으로 조직했다. 5월 22일에는 일본영사의 허가를 얻고, 평양에 제1대구(大區;區員 37인)를 설치하고, 5월 24일에는 개성에 제2대구(區員 8인)를, 7월 10일에는 경성지부를, 7월 22일에는 강경(江景)에 제3대구(區員 4인)를 설치하였고, 그후 부산(8월 15일), 원산(8월 25일), 대구(1897년 5월)에 각기 지부를 설치하고, 1897년 10월에는 목포에 제 4대구를, 진남포에도 소구을 설치하고 있다. 1898년 1월 말 현재 단원이, 본부소속 798명, 지부인원을 합해서 도합 1,380명에 달했다.
이들은 일상의 내륙통상권의 회복을 위한 정당방위를 내세워 일본군복과 비슷한 단복(團服)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여 대상적(隊商的) 조직의 행상을 꾀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사기와 같은 방법으로 조악품을 강매하고 빈민들의 전품(錢品)을 약탈하는 무리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안팎의 반발로 1898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 계림장업단을 통해서 1896년 5월부터 1897년 12월까지 일본에 수송된 화물의 원가가 실로 6만 8천 311원이며, 그외 현금 수송이 24만 3천 10원에 달했다고 한다.
일상들의 무력에 의한 폭력적 상권침해의 사례는 삼포(蔘圃)의 창채(搶採)행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상의 잠삼(潛蔘)행위는 청일전쟁기에 가장 성행했고, 그후에도 일본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은 일상들은 무기를 휴대해서 개성지역의 삼포를 무단채거해가는 창채행위가 빈발하였다.
타국인이 양총(洋銃)과 큰 칼을 갖고 삼포(蔘圃)에 몰려와 겁탈을 자행하는데 삼의 성숙여부도 가리지 않고 모두 뽑아 간다. 그 총칼이 무서워 그저 도피할 지경이었으므로 정부로서도 군대와 순검(巡檢)으로 이를 보호코자 조처하여 40여명의 일상 창채자를 체포케 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이 편무적인 영사재판권을 내세워 일본영사관에게 인도하라는 강경태도로 위협하자, 정부는 범인을 일본측에 인도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대처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일본인 행상자의 경우 수출곡물의 매입에 종사하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반면 수입품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행상은 한상 및 청상에 밀리어 별로 많지 않았다. 1902년의 농상황시찰보고서(農商況視察報告書)에 의하면, 일본상인으로서 서울 일본영사관 관할지역에 행상하는 자는 매약상이 몇명 있을 뿐이었다고 하며, 철원(鐵原)의 일인 매약상은 한인복장을 하고 한인의 처를 두고 한인이름으로 의사행세를 하는 자도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안성군(安城郡) 정주(定住) 일본인 잡화상은 당초 방적사(紡績糸)·금건(金巾)·성냥·비누·담배 등을 서울의 일본상인으로부터 구입하였으나, 그후 서울의 청상으로부터 구입함이 편리함을 알게 되어 모든 상화를 청상으로부터 구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금융면에서의 타산에서도 청상과의 결제기한이 매 3개월로 되어 있음에 대해서 일상은 1개월로 되어 있고, 둘째로 상품의 가격 및 품질면에서도 청상쪽이 확실함으로 안심하고 상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1899년의 황해도 시찰보고서에도 일상(日商)으로서 내지를 행상하는 자는 대개 박자(薄資)로 그 업을 삼고 조제품(粗製品)으로 고객(顧客)을 만착(瞞着)하여 일시의 폭리를 탐하는 자가 많아……이 같은 방법으로 도저히 일본상품의 판로를 확장하고 신용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가령 해주(海州)의 경우, 일본항로의 편이 열려 장차 인천항과의 무역장으로 유망한 곳인데도 황해도 연안각지에는 일상을 찾아 볼 수 없고, 청상 밀매선(密賣船)에 의해 교역이 되고 있었다. 개성의 경우, 금건(金巾)·방적사·석유 등 한인의 수요품은 모두 인천 또는 서울로부터 한상 및 일상의 손을 거쳐 수입되고 있는데, 개성에 있어서의 상거래는 그 대부분이 한인으로서 일상은 잡화를 취급하는 자가 7, 8호 있을 뿐이며 일상이 도저히 한상에 못미치고 있다고 하고 있다.
1899년 평양개시와 군산개항 이후 종래 청상의 주요거점이 되고 있던 평양과 강경(江景)에 일상의 침투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특히 군산개항의 영향으로 미개항장인 강경에 일본행상자가 증가하여, 1902년 12월말 현재 일상이 약110명에 달하고 약60명의 청상을 제압하고 있다. 또한 군산조계외의 토지매수에 광분하여 1902년에 이미 알본인 소유지(영사관부지 제외)가 3만 6천 886평방미터가 되고 있다.
대체로 일상들은 비록 수입상품의 내륙행상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일본 국가권력에 비호되어 개항·개시장을 주요 거점으로 금융·해운의 지원에 의해 한국의 상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을미· 을사기(1895~1905)의 일본의 한국상권침해의 특징은 무장폭력에 의한 내륙상권 침해책동과 각 개항·개시장에서의 무역에 의한 상권 침해를 비롯하여, 한국의 은본위 및 금본위 화폐개혁의 틈을 이용한 금융적 침투에 의한 상권침해와 해운 및 철도 등 운수·교통수단을 통한 상권침해, 그리고 각종 이권에 의한 일상지원을 통한 상권침해로 나타나고 있다
3) 정부의 통상·금융정책과 상권문제
(1) 통상정책과 상권문제
갑오개혁때 개화파정부는 칙령 제48호로 농상공부(農商工部)관제를 개편하여 상공국(商工局)을 신설하는 한편, 칙령 제42호로 대외통상에 관한 사무를·관장하는 통상국을 외부산하에 신설하여 이른바 상업입국(商業立國)의 의지를 단적으로 나타냈다.
갑오개화파 정부의 주역의 하나인 유길준(兪吉濬)은 상업(商業)의 진흥과 무역의 흥왕(興旺)은 농업생산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며 또한 이것이 부국간병(富國强兵)을 위한 재원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유길준은 상업과 농업을 대등한 것으로 보고, “상고(商賈)는 역(亦) 국가(國家)의 대본(大本)이라”했다. 정부의 부요(富饒)와 인민의 번성은 상업으로 성취되며, 상업은 유무를 상자(相資)하며 귀천을 상역(相易)하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며 유익한 것을 상통(相通)하는 것이라 했다.
대체로 개화파는 상업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는 반대하고, 상업질서의 유지와 도로의 개량 그리고 상인의 도고행위(都賈行爲)금지 등에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유길준은 정부가 상업보호를 위해서 할 일은 상거래 확립을 위한 상법제정과 물화운송을 위한 도로 정비를 강조하고 있고, 박성효(朴泳孝)도 정부가 매매의 규칙을 정하고 도량형기를 일정하게 할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래의 특권적인 상업체계를 혁파하고 자유로운 상업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갑오개혁때 상업의 발달과 통상진흥을 위해 육의전의 폐지와 보부상의 임방(任房)의 혁파, 각종 특권회사와 수세도고(收稅都賈)의 혁파, 잡세철폐 등 종래의 특권적인 도고(都賈)상업체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자유주의적 상업체제를 수립코자 꾀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상의 근대적인 정책체계가 실질적으로 후진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체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봉건적인 지향과 더불어 반외세적인 지향이어야 했다. 당시 외세가 요구하는 개항·개시장의 확대와 외국상인의 내륙통상의 주장은 국내시장과 나아가서는 생산의 직접적 지배와 장악을 기도하는 외국자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1897년에 출범한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구래의 제도로서 근본을 삼고 새 제도를 참고한다는 이른바 구본신참(舊本新參) 내지 구주신보(舊主新輔)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일련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하였다. 주관적으로는 갑오개혁 등에 나타난 졸속과 외세의존적인 자세에 대한 일정한 반성을 바탕으로 하여 종래의 개혁 방향을 조정해서 근대화를 제도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 개혁이었으나, 객관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에 도시와 농촌의 자주민권운동을 압살하고 근대적 외형을 갖추는 일련의 조치와 황실권력의 강화와 황실재정의 충실화를 위한 국가주의가 시종 답습되고 있었다. 그 통상정책도 갑오개혁때의 통상진흥책을 답습하면서 교역의 확장과 식산흥업을 꾀하고 있지만, 그 추진주체가 개명관료였고 이들의 계급적 성격이 지주층이었다는 것과도 관련하여 관료자본 내지 특권상인을 오히려 비호하는 경향마저 나타냈다. 이틈을 타서 일부상인에 의한 도고체제가 부활되기도 하였으며, 기본적으로 황실재정수입의 증대를 위해 추진된 측면이 강하였다.
광무연간의 개항·개시장의 증가에 대해서 대한제국정부는 “통상을 확장하여 민국이익을 발달케 함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는 국내상업의 발달과는 모순관계에 있었다. 어쨌든 건양(建陽), 광무연간의 개항·개시는 그 이전의 부산·원산·인천항의 개항과 서울의 개시처럼 조약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국정부가 자의에 의한 개항·개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개항 및 개시를 선언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인천과 같이 조·영 수호통상조약에 의한 각국 공동조계제도를 답습하면서 조계에 대한 지조(地租) 및 연세(年稅) 등의 징수자주권을 확보하지 못했고, 경찰권을 비롯한 지방행정권도 신동공사(紳董公司:Municipal Council) 라는 ‘외국인거류지〔租界〕회’에 속하게 하였다. 1897년의 목포와 진남포의 개항을 러시아측이 일본세력의 한국침투 확장을 우려하여 개항장의 증설을 반대하였으나, 당시 총세무사 겸 탁지부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Brown)의 적극적인 권유로 한국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을 타개하는데 그 기초가 되는 관세수입의 증가와 통상확장이 미곡수출의 증대로 외화획득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개항장의 증설을 실행한 것이다.
『독립신문』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한성개시로 서울 도성안의 남촌(南村)은 모두 일본사람의 천지요, 정동(貞洞)은 서양사람의 거류지요, 남대문 큰길 좌우에 일본인과 청인의 가옥이 즐비하며 수표(水標)다리 근처에는 청인이 날마다 성하였다. 우리나라 상권이 침탈당하고 있는 실정을 생각해서라도, 비록 외국과 통상하여 유무(有無)를 교환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정부가 당시의 국제관계 즉 러시아의 개항반대를 주체적으로 적절하게 이용하여 최소한 신설되는 개항장 조계의 징세자주권과 행정권을 확보했어야 했다. 더구나 정부가 러·일관계 등도 다소 감안하여 자의에 의한 개항의 형식을 취하면서 조계의 징세자주권과 행정권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자주성이 결여된 통상정책의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부의 일관성이 결여된 통상정책은 대 청상(淸商)정책에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청일전쟁시기에 반포한 ‘보호청상규칙’에서 연고 있는 청상에 한하여 서울과 3개항장에서만 거류·영업의 자유를 인정하고 청상의 내륙행상을 불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이를 무시하고 내륙행상을 하는 청상을 규제하지 않았다. 1899년의 한·청통상조약에서도 청상의 내륙행상을 인정하고 내륙정주를 불허하였으나, 그후 청상의 내륙정주도 사실상 실현되고 있다. 그것이 결국 한상보호 결여와 청상의 국내상권 침해를 용인하는 것이 되고 있었다.
『황성신문』도 정부의 ‘상민(商民)보호’를 강조하면서 대한상민(大韓商民)은 비록 타국(他國)과 같이 몽혜(蒙惠)하기를 바라지 못하나 상업권(商業權)을 다 외인(外人)에게 견탈(見奪)하고 내국상인(內國商人)은 불과(不過) 그 나머지를 갖고 승두박리(蠅頭薄利)을 근득(僅得)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상민(大韓商民)이 부지(扶支)키 곤란할 뿐더러 장차 유리사방(流離四方)하야 타인의 노예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황성신문』은 각부군(各府郡) 조계외(租界外)에 거류(居留)하는 외국상민(外國商民)을 통상구안(通商口岸)으로 이송(移送)하옵고, 청인(淸人)이 토지점유(土地占有)하는 폐단(弊端)을 재금(裁禁)하여 본토인(本土人)으로 농상(農商)의 업(業)을 보존(保存)케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언론의 주장과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 및 독립협회 등이 정부에 대해서 조약을 위반한 외국상인의 불법적인 내륙정주(內陸定住)의 금지조치를 요청하자 대한제국정부는 이 주장을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정부는 1898년 10월 19일자로 각도 관찰사에게 훈령을 발하고, 조약에 위반하여 개항장 조계 10리밖에서 상설점포를 개설하거나 토지·가옥을 임구하고 있는 외국인을 통상구(通商口) 조계로 칠환(撤還)시킬 것을 훈령하고, 이듬해인 1899년 1월 10일에 이를 최촉(催促)하는 재훈령을 발하고 있다. 물론 이 정책은 외국상인의 불법적인 내륙에서의 토지 가옥의 구매와 상설점포의 개설만을 규제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당시의 민족적 과제를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인 상권 자주성 회복을 위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한편 대한제국정부의 통상정책이 황실재정수입의 증대를 우선적인 과제로 시행하고 있었음은 삼정사(蔘政社)의 인삼무역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제국 성립후 황실권벽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황실재정수입의 증대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서, 1899년 황실재정기구인 내장원(內藏院) 아래 홍삼전매회사로 발족한 삼정사는 삼포민(蔘圃民)으로부터 수삼(水蔘)을 매입하석 증조(蒸造)한 후 내장원을 통해서 수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황실은 삼포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외에 증조 수출에서의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황성신문』은 삼정론(삼政論)에서 만일 인삼(人蔘)을 다식 (多植)하여 매년 20만근 혹 30만근씩 외국에 수출하면 비록 세(稅)가 경(輕)하여도 국고에 소입(所入)은 석년(昔年)에 비하면 몇 배가 많을 것인데 가령 지금 16원세(元稅)을 감하여 3, 4원에 정하여도 10만근만 수출하면 3, 40만원이 되고 20만근 이상이면 7, 80만원에 이를 것인데도 현금(現今)에 수만근을 근성(僅成)하야 소민(小民:蔘圃民)과 이(利)를 상쟁하면서도 국고에는 거액을 수(收)치 못하고 있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삼세수입이 정부재정수입으로 귀속되지 않았고 황실재원 수입원의 하나과 되어 황실에 의해 1899년부터 홍삼전매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 당시 인삼이 주로 청국에 많이 수출되고 있었으므로, 대청무역의 수입초과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대한제국은 대외수출의 운송수단을 확보하여 보다 많은 수익이 보장되는 관삼(官蔘)의 직수출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안이하게 외국상사에 판매 또는 위탁판매를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899년에는 독일의 세창양행(世昌洋行)에 “관삼 2만 8천여근을 일화로 103만원”에 매도하였고, 1900년에는 일본 삼정물산상사(三井物產商社)와 내장원이 3개년 기간의 제1차 관삼위탁판매계약을 맺었고, 1902년에는 프랑스의 용동상사(龍東商社:Rondom, 일명 大昌洋行)와도 위탁판매계약을 맺고 있다. 그리고 삼정물산과는 1903년에 5개년간의 위탁판매를 다시 계약하고 있다. 이 관삼위탁판매를 통해서 황실재정수입의 증대를 기하고 있었다.
이같은 홍삼전매정책으로 직접생산자인 삼포민은 홍삼판매권을 잃게 되고 중세를 납부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삼업이 위축되어간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 상민보호가 결여된 황실주도의 통상의 확대와 인플레이션의 과정에서 민중의 궁핍이 심화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금융·화폐정책과 상권문제
갑오경제개혁의 하나인 신식화폐발행장정은 근대적인 은본위제 화폐제도의 수립이란 주관적인 지향과는 달리, 그 제7조에서 5냥본위화와 동질·동량(同量)·동가(同價)의 외국화폐의 통용 규정으로 사실상 일본화폐를 국내법화로 인정함으로써 청일전쟁으로 국내에 대량 살포된 일본화폐의 유통증대를 초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상품 화폐경제의 내륙침투가 증가하여 일본상권의 확대를 가져왔다.
은본위제 실시하에서 본위화의 주조없이 1891년의 폐제(幣制)개혁시도〔銀貨條例〕때 주조되어 사장되어 있던 2만원 미만의 5냥 은본위화가 소량 발행되었을 뿐이었고, 보조화인 2전(錢) 5푼(分)의 백동화(白銅貨)와 적동(赤銅) 5푼화만이 증주(增鑄)되어 이른바 ‘보조화(補助貨) 문제’를 야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급격한 폐제(幣制)개혁과 일본통화의 유통책이 신식화폐와 일본통화에 대한 불신을 조성시켜 보조화의 유통범위를 경인지역으로 국한시킴에 이르렀다.
신식화폐발행장정은 개화파정부에 의해 청일개전직후 발포되어 10일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화폐 교환소의 설치, 계몽 등의 준비 없이 1891년의 은화조례를 약간 수정하여 금납화와도 관련하여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수립하고자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기의 일본의 필요에 부응하여 은화조례와 달리 외국 은화의 국내통용을 허용한 문제점이 있었고, 더구나 통용을 허용한 외국화폐중에 지폐와 보조화가 포함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원은(圓銀)보다 두 배에 달하는 지폐를 내륙에 살포한 것은 불법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정부는 수차에 걸쳐 지방관이나 국민에게 은화외에 외국지폐나 보조화를 사용하지 말 것을 엄달하였으나, 일본의 압력 속에 지폐를 공납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시하면서 민간에서 상호 수수하는 것은 허용한다는 선으로 후퇴한 것이다. 청일전쟁시 거액의 일본지폐와 원은이 살포됨으로써 한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국민들이 일본지폐 및 원은과 엽전과의 교환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강요당하였다.
1897년 10월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됨에 따라 무역통화로서 유통된 일본 1원은화(圓銀貨)의 대용으로 일본측이 총세무사(總稅務司)의 동의를 얻어 ‘각인부은화(刻印付銀貨)’가 일시 무역통화로 유통되었으나 한국정부는 1898년 2월에 그 통용금지조치를 취하면서 신식화폐발행장정에 의거하여 ‘냥은(兩銀)주조’로 폐제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즉 정부는 1898년 5월에 전환국(典圜局)에서 10개월간에 5냥은(品位量目이 일본 1圓銀과 동일한 것) 50만개와 1냥은(일본 20錢 銀貨와 동일한 것) 500만개 주조예정으로 일본정부에 은지금(銀地金)의 매각을 제기하였으나, 일본측이 한국산 사금(砂金)과 은지금과의 교환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1899년 말 단계에서 한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던 제통화재고는 5냥 본위은화 및 1냥 보조은화 5만원, 백동화 110만원, 적동화 20만원, 엽전 및 황동화 700만원 등 835만원이며, 그외 일본 구원은(舊圓銀) 10만원(圓), 일본지폐 200~250만원 및 일본보조화 20~30만원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시기의 상권문제와도 관련해서 가장 두드러진 경제문제의 하나가 보조화인 백동화 남발로 인한 ‘백동화인플레이션’이었다. 특히 광무연간에 들어와서 1898년부터 백동화 주조가 본격화된 것은 통화의 공급이란 측면과 대한제국 특히 황실의 재정수입 증대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금납화 조치 이후의 증가된 화폐수요를 충족시키면서 특히 청일전쟁이후 국내에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던 일본화폐를 배척하고 또한 1897년의 일본의 금본위제 시행으로 급속히 환류(還流)하는 통화 축소과정에서 정부가 원활한 상품유통을 위해 취한 불가피한 조치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건전 통화를 발행하지 못하고 손쉬운 악화인 백동화를 대량 발행함으로써 심각한 폐해를 주었던 것이다. 후자의 경우, 백동화는 주조이익이 컸기 때문에 전환국(典圜局)에서 주조이익을 얻기 위해 발행되었지만, 황실에서 특허료를 받고 민간에 주조를 허가하기도 하였다. 그 위에 황실은 전환국의 주조 이익을 황실수입으로 환수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전환국이 장기간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하는 이용익(李容翊)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백동화 주조사업은 정부의 재정수입 증대방안이었을뿐 아니라 황실재정 강화책의 일환이었다.
백동화는 1898년 4월경까지는 대체로 일본화폐와 동일한 가격으로 통용되었으나, 같은 해 7월부터 하락경향을 나타내어 8, 9월경에는 일본화에 대해서 4전 내지 6전의 가제(加計)를 나타내고, 그후 저락(低落)을 거듭하여 1902년 3월에는 90전 내지 1원의 가계(加計)를 나타내어 약 절반값으로 하락하였다.
이것은 백동화를 소지한 한인의 구매력을 반감시킨 셈이 되는 것이다. 백동화 하락의 원인에 대해, 첫째로 수입초과, 둘째로 공급과다, 세째로 신용부족을 들고 있는데, 통상 백동화의 교환가격을 지배하는 것은 수출입무역의 소장(消長)에 기인되고도 있었다.
당시 수입품의 대금은 일화로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의 증가는 한편에 있어서는 일화의 수요를 증가시키고, 그 수입품은 한화로서 매각하게 됨에 따라 한편에 있어서는 한화의 공급을 증가시켜 일화의 등귀로 나타난다. 물론 일화의 등귀는 반면 한화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의 감소는 일화수요의 감소와 한화공급 감소로 일화의 하락, 즉 한화의 등귀로 나타난다. 한편 수출의 증가는 일화수요 증가와 한화공급 증가로 한화의 등귀로 나타나고, 수출의 감소는 일화수요 감소와 한화공급 감소로 한화 하락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백동화가 가장 많이 유통하는 지역인 경기 및 충청도에 있어서의 수출입무역의 관문인 인천항의 경우, 1898년부터 1903년 9월말까지의 수출입액을 보면 해마다 수입초과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백동화 유통지역에 있어서는 백동화의 공급과다로 일화의 수요는 언제나 그 공급에 초과되고 있기 때문에, 일화의 교환가격은 등귀경향을 나타내고 반면 백동화의 하락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1898년의 인천항의 수입초과가 가장 현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동화 가격이 비교적 높은 이유는 백동화의 유통액이 11만원에 불과하였고, 그 위에 경인지역의 시장에서 엽전의 유통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00년의 수입초과가 비교적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동화 가격이 비교적 하락한 것은 1900년에 이르러 일본 원은(圓銀)과 엽전이 이미 화폐시장에서 구축되고 그 대비조치로서 백동화가 증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위에 1/3 내지 1/2의 특허세 상납조건으로 민간에게 백동화 주조를 허용한 특주전(特鑄錢)과 황실재정수입 증대를 위해 상납전을 받고 ‘계(啓)’자를 날인한 특허장을 발부하여 사주(私鑄)를 묵인한 묵주전(默鑄錢) 등, 황실이 사주를 특허한 탓으로 악화가 시장에 범람하게 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일본인에 의한 위조 백동화의 밀반입과 치외법권이 보장된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금광내에서의 백동화의 사주, 그리고 프랑스 천주교당에서 비밀리에 사주전을 주조함에 따라, 사주전의 유통량이 관주전의 유통량에 육박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광무정권의 백동화 남주는 그레샴 법칙이 작용하는 가운데 일화를 배척하기도 하였고 한화의 일화에 대한 비가를 떨어뜨려 외세 특히 일본의 상품침투에 일정한 장벽을 만들게 되었다. 아로 인해 비록 소극적이고 개량적인 대응이었으나 국내상권의 자주성회복을 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1901년에 칙령 제5호로 제정 공포한 화폐조례는 당시의 세계적인 조류에 따라 금본위제도의 채택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화폐교구책(矯捄策)의 일환으로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일본화폐의 유통을 저지시키고 한국의 화폐주권과 상권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일정한 정책적인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1903년에 반포된 ‘중앙은행조례’ 및 ‘태환금권조례(兌換金券條例)’ 등을 좌절시킨 요인의 하나가 ‘식민지 통화’로서의 제1은행권〔一覽拂어음〕을 발행하고 있던 일본측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제1은행권의 발행이 한국의 식민지를 추진시키고자 하는 일본자본주의가 그 자본축적의 취약성을 보완코자 한 것이었고, 제1은행권 발행과 그 유통확대 과정의 불연속성은 한국 상민의 ‘식민지 통화’에 대한 반대운동에 의해서도 규정되고 있다.
을사오조약후 군사적 제압하에 재정고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메가다 슈다로)에 의한 이른바 재정·폐제개혁에 의해, 경제중추기구를 일본이 장악하고 제1은행이 전국적 지점망을 설치하여 한국의 중앙은행화하여 통화발행권과 더불어 한국의 금융적 지배를 확립시켜 나갔다.
목하전(目賀田)이 재정고문으로 한국부임에 앞서 시달된 일본정부와 내훈(內訓)에는,
[제 1] 일본화폐의 유통을 공인할 것.
[제 2]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키고 기(旣)발행 백동화의 처분은 재무고문이 자세히 연구해서 그 방법을 세울 것.
[제 3] 화폐는 일본에서 주조하고 한국 전환국(典圜局)은 폐쇄시킨다. 단, 이를 존치할 때에는 일본조폐국의 출장소로 하던지 혹은 그 감독하에 둔다.
[제 5] 제1은행 발행의 은행권은 당분간 현재대로 하고 이를 공납(公納)에서 수취토록 할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