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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9,700Km!!!
노금란권사
“여보세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잠시 시간이 흐르면 녀석의 모습이 화면에 뜬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아들은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하고 컴퓨터 화면 속에서 반가운 듯 웃고 있다. 아들과의 컴퓨터 화상통화는 오늘도 긴 시간동안 이어진다.
2008년! 아들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지구 반대편 먼 곳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 9,700Km!!!
어릴 적 녀석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참 즐겁게 놀곤 했다. 그 놀이터 한 켠에는 세계 여러 도시와의 거리를 적은 이정표가 여러 방향을 가리키며 팔을 벌리고 우뚝 서 있다. 그 중에도 항상 내 시선을 붙잡는 런던 9,700Km!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그 거리만큼 이렇게 멀리 떨어져 지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잠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녀석,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닐까?……’
4년 전, 아들은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 했다.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였고, 줄곧 ‘범생이’라는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며 지내던 아들의 자퇴는 우리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 안타까운 사연은 교육에 관한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설레임을 안고 맞이한 고등학교 입학식의 축사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이제 수능이 1,000일도 안 남았으니 열심히 공부만 생각해야 한다’, ‘좋은 대학교 못 가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 ‘토요일 일요일은 놀 생각하지 마라’, ‘이제 전쟁터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수능 앞으로!!!’였다. 전인교육은 허울 좋은 말잔치일 뿐, 아이들의 꿈과 소망이란 단어는 어른들의 근시안적인 발상 속에 생각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입학 다음 날부터 강제적으로 시작된 야간 자율 학습과 일부 교사들의 비인격적 언행은 부모인 우리 세대가 학생이었던 3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대부분의 학부모와 학생은 그 거대한 부조리함과 잘못된 관행에 대해, 주말과 휴일까지 붙잡아 놓고 공부를 많이 시키니 좋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정규 교과시간 이외는 집에 돌아 와서 자기 시간을 갖겠노라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들은 여가시간에 좋아하는 기타도 배우고, 영어방송을 선택해 듣고 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방송통신대학의 특강에도 참여했다. 또한 가끔씩 컴퓨터 게임도 즐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적절히 잘 활용해 나갔다. 그 결과 나름대로 보람된 성과들이 나타났다.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우리 가정이 유태인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말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이 다니는 학교 상황은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요즘도 그렇지만 한국의 교육 현장은 거대한 도박판과 같았다. 우승열패(優勝劣敗)! 그런 상황에서 아들은 2학년 수학여행 중에 목사님 아들이셨던 담임선생님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은 과연 아들에게 어떠한 교육환경을 제공해 줘야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당시 아들은 학교 영자신문의 편집장으로도 활약이 컸던 터라 선생님들의 만류와 설득도 만만치 않았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많은 고민과 기도가 필요한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의 보다 나은 장래와 행복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일의 진행 과정은 참으로 순탄했었던 것 같다. 자퇴 후, 우리는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곳인 영남신학대학교 도서관에서 차분히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남편의 후배가 일하고 있는 입시학원에서 자유롭게 주간과정만 공부할 수 있도록 편의도 제공받았다. 때로는 방송통신대학의 특강을 수강하기도 하면서 대학공부를 먼저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인문 사회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의 기초학문을 착실하게 맛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분명한 역사의식과 가치관의 정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아빠가 하는 강의에도 참석하여 학생의 입장에서 역사학자인 아빠강의를 듣기도 했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누었던 많은 대화의 시간은 부자지간을 더 친밀하게 그리고 더 많은 생각을 공유하게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좋은 추억이 되고 있다.
해가 바뀌어 목표가 하나씩 하나씩 정리되면서 막연했던 아들의 영국유학이 꿈에서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영국은 남편이 전공으로 연구하고 있는 나라였고, 우리 가족은 영국에 대해 막연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은 어릴 적부터 영국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녀석은 어릴 적부터 영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생후 18개월 아기였을 때가 첫 여행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의 영국여행은 녀석의 삶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때가 두 번째 영국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후 2,3일 정도가 지나고 시차도 웬만큼 적응되었을 무렵,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자기 방에 들어간 아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남편이 다가가 이유를 물었다. 너무 그립다고 했다. 며칠 전 떠나온 영국이 너무 그리워 잠이 안 오고 눈물이 계속 난다고 흐느끼는 것이었다. 아들의 마음은 간절함 그 이상이었다. 남편은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며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 꼭 다시 데리고 가겠노라 굳은 약속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들은 그 때부터 영어공부는 반드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여행을 다녀온 후 아들의 생활이나 사고에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 과정에 우리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개입하신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아빠를 따라 여행하곤 했었던 유럽 그 중에 영국이라는 나라.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 곳이 보고 보고 또 봐도, 가고 가고 또 가도 자꾸만 가고 싶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후로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쉴 시간도 없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결코 하루에 다녀오기에 만만찮은 거리인 강원도마저도 마다하지 않고 강의를 위해 열심히 달렸다. 아들이 6학년 여름방학을 맞았을 때, 남편은 드디어 아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이후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며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끼며 절약했다. 그 결과 거의 매년 여름방학이면 영국여행이라는 선물을 우리 아이들에게 안겨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비전을 품은 생각을 통하여도 소리없이 보여주시는 것 같다.
한편, 유학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런던의 높은 물가와 교육비 등 현실적인 문제도 감당하기 힘든 고민이었다. 기대보다는 인간적인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기도밖엔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 우선 인터넷으로 여러 대학에 입학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문제는 한국인 중개업자였다. 영국의 대학에 메일을 보내면 어김없이 중개업자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비용을 주면 모든 것을 대행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공부하는 대학의 지원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제의를 사양하면서 묵묵히 일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생후 만 18개월이었을 적 처음으로 영국에 갔을 때 방문했던 대학, 런던대학 중의 런던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 당시 Time지 평가 세계 대학 서열 5위)의 학부형이 되는 꿈을 진행했다. 반갑게도 그 곳으로부터 테스트를 해 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런던대학에 외국인이 입학하려면 인터넷으로 하는 시험을 먼저 통과해야 했다. 아들은 객관식 문제 가운데 몇 문제가 풀기 어렵다고 했다. 남편은 그냥 비워두고 보내라고 했다. 아들이 가진 실력 그대로를 판단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우리가 희망하던 바로 그 대학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해 보자는 것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20년 전 남편이 연구원으로 잠시 공부했던 바로 그 대학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의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 아들은 중학생 때만 해도 여행 중에 영어를 잘 말하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다른 문화권의 어른들이라 어린 마음에 무슨 말로 어떻게 대답할지를 생각하다보면 대답할 시간이 지나 있더라고 이제야 고백하곤 한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엔가 영어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에게 영어표현을 물어 볼 정도로 영어실력이 상당한 아이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집에 오면 자기의지로 BBC라디오를 매일 듣고, 미국 드라마를 계속 시청하며 즐기던 습관들이 아마도 그것을 가능케 한 것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어려서 영어를 잘 몰랐던 시절, 여행 중에 길을 묻거나 무엇을 사야하거나 주문할 일이 있으면 엄마였던 나는 비록 'Broken English' 투성이의 실력임에도, 한국엄마표 영어로 열심히 이야기했었다. 지금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아들 앞에서 짧은 영어로 말하기가 주저되지만 그 당시 무모하지만 용감했던 엄마의 도전이 아들에게 새끼손톱만큼의 영향력은 끼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자녀들이 큰 꿈을 가진 세계적인 인물로 커 가기를 소망하였던 남편의 힘이 컸었다. 힘들고 피곤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고자 했던 남편의 눈물어린 기도와 노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습득된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아들을 우뚝 성장시킨 것 같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검정고시도 무사히 끝내고, 비자 준비도 하면서 아들의 꿈이 있는 그 곳으로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부모 그늘에서 보살핌만 받던 아들을 이제는 그 준비 과정의 일부터 혼자 스스로 해결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만들어 주셨다. 서울에 있는 영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심사를 받는 일, 여러 관공서와 은행 등에서의 서류를 구비하는 일, 또 영국에 있는 대학에 직접 전화해서 이것 저것 알아보는 일도 모두 스스로 하게끔 일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 훈련을 통해 유학 가기 전부터 혼자 일어설 힘을 단련시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출국 며칠 전, 가슴 아프게도 친구와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먹었다던 스테이크가 잘못 되었는지 장염을 앓게 되었다.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아픈 상태로 유학길에 오르는 아들을 보면서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이것이 과연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길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아들을 두고 기도할 때 두 가지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힘을 주셨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1:9)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비행기로도 13시간 걸리는 나라. 우리와 9시간의 시차가 나는 나라. 머나먼 땅 영국에서 혼자 세상 속으로 던져 진 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셨는지 기특하게도 모든 일을 대체로 순조롭게 잘 해 냈다. 함께 입학한 외국 친구들이 탈락하여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속에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물론 기쁨도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이 유학시절 다녔던 교회에 출석해 주일을 잘 지켜 나갔고, 자기의 언어적 문화적 부족함을 좌충우돌 겪으면서 유학생활을 잘 감당해 나갔다. 여러 나라의 실력 있고 다양한 달란트를 가진 친구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 갔고, 동서양의 많은 좋은 친구들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선배 형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들과 함께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거리 전도도 하고, 찬양단 활동도 하고, 성경공부 모임도 가지는 등 다양하게 신앙을 키워가는 모습이 참 고맙기까지 했다. 어려운 전공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용케 알아듣고 시험까지 거뜬히 잘 치러내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 그 상황에 합당한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었다. 당시 아직 만 18세가 안되었던 아들은 현지인 가디언(Guardian, 보호자)이 반드시 필요했다. 공식적인 보수 월 100만원의 부담을 안고서라도 적합한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비용도 꽤 부담이 되었지만 참 난감했다. 아빠와 친분이 있던 분들이나 함께 공부하던 분들은 거의 한국에 들어와 있었거나 다른 나라 혹은 먼 도시에 살고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남편은 아들에게 20년 전 자신의 학위논문 지도 교수였던 로저(Roger. Richardson)에게 부탁해보라고 했다. 로저는 그 당시 윈체스터대학교(University of Winchester)의 대학원장으로 있었다. 자주 e-메일도 주고받고 여행 갈 때마다 만남을 가지기도 했으며,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우리 집에도 오셨던 분이었다. 아들이 가디언을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는데 참 감사하게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게다가 주말에는 언제든지 자기 집에 와서 쉬고, 밀린 빨래도 하고 내 집처럼 편히 지내라는 당부 아닌 당부까지 곁들이셨다.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사실 로저가 아들에게 해주는 배려는 각별했다. 런던에 나오면 꼭 아들을 만나고 함께 저녁을 먹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으면 즉시 우리에게 메일로 알려주었다. 로저 덕택에 우리는 만리타향에 있는 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손바닥 보듯이 훤히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들은 요즘도 그 곳에 자주 가서 로저와 함께 교회도 가고 말벗도 되고, 때로는 여행도 함께 한다. 가끔 전공을 살려 전기 제품도 손 봐 드리고 컴퓨터 A/S도 해 드리면서 나이를 뛰어넘어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로저는 원래 남편하고 친분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들과 더 절친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아들은 독신인 로저에게 요즘 자식 이상이다. 2010년 방학이 되었을 때도 윈체스터(Winchester)로 불러 인턴 과정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IBM 회사의 인턴과정을 알아본 것도 바로 로저였다. 또한 자신의 친구들을 아들에게 수시로 소개하여 아들이 영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대학교수, 기자 그리고 윈체스터 대주교 등 영국의 저명한 인맥과 접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작년에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보낸 인턴과정 또한 아들의 발전에 귀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하나님은 아들을 참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다. 전혀 일면식도 없던 로저를 통해 아들을 영국 사회에 잘 정착하게 만드시는 과정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은혜였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아들이 윈체스터에 가면 로저는 언제나 아들을 데리고 함께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다.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 크신 사랑을 감당할 길이 없다.
물론 아들의 영국 생활에도 위기는 있었다. 아들은 첫 1년간의 성적을 평가하여 본과진입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 어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세계 대학에서 차지하는 UCL의 위치가 계속 상승함에 따라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하루는 밤늦게 전화가 왔다. 박지성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도시, 맨체스터(Manchester)에서 아들에게 그 곳으로 오라는 제의가 왔다고 했다. 맨체스터대학(University of Manchester)은 세계 20대 안에 손꼽히는 대학이고, 별로 나쁘지 않는 조건이라 내심 잘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의 생각은 단호했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남편은 혼자 영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갓난 아기였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웬만큼 걸어다닐 정도로 자란 18개월 된 아들과 함께 내가 처음 영국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이 바로 그 대학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고민하는 아들에게 아무 염려 말고 무조건 주일이면 교회 예배에 착실히 출석 할 것을 당부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즈음 지방 특강 및 연구 프로젝트 등으로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아무 말 없이 인근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새벽이면 피곤에 부은 눈을 하고 여지없이 기도하러 가는 남편. 베란다 너머로 컴컴한 아파트 현관을 내려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엄마라는 이름의 내 자신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나는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으니…. 새벽잠이 많은 나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함께 해야만 했다.
남편의 기도에, 나의 통회하는 심령에, 아들의 소망에 하나님께서도 응답을 해 주셨다.
이제 내년 5월이면 아들은 석사 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서울의 강남도 아니고, 대구의 수성구도 아닌 변두리 지역 칠곡에서 특별한 사교육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놀며 올챙이 뜨러 다니고, 잠자리와 민달팽이의 친구가 되어 놀던 평범한 소년에게 하나님께서는 세계 각국의 인재들이 놀라운 실력을 자랑하며 경쟁해 나가는 곳으로 무대를 옮겨 주셨다. 인류의 참 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곳,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참 진리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
이제 곧 아들은 기말시험이 끝나게 된다. 시험이 끝나면 방학에는 또 다른 도전이 아들을 기다린다. 아들의 말처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평생 한번 열릴까 말까한 올림픽이 올해 여름 런던에서 개최된다. 그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통역봉사를 맡게 되었다. 또한 자기의 전공 분야를 살려 친환경사업을 하는 기업에서 인턴쉽도 가지게 된다.
이런 아들의 착실한 성장도 즐거운 일이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아들이 요즈음 UCL의 한국 학생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몸이 아픈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주일 예배에 꼭 참석했던 아들의 신앙이 무척 기대를 가지게 한다. 아들은 방학이면 늘 수련회에 참석을 했다. 교회에서 하는 수련회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남편은 개인적으로 별도의 프로그램을 물색하여 행사에 참여케 했다. 또한 영국 여행을 할 적에도 남편은 현지 한인교회와 영국인교회 그리고 신실한 영국인 가정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다. 흔히 유럽 교회가 극장이나 술집으로 망해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숫자적인 통계로 아니면 몇몇 사례만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진정한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음을 보았다. 말만이 아닌 행동과 함께 하는 믿음이 있었다. 야단스럽고 별스러운 꾸밈도 없었다. 형식이나 예배의 화려함보다 평범한 삶의 모습 그대로 그 속에서 찬양의 은혜가 넘치고 말씀이 살아있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교회 교육에 대한 각별한 관심들이 우리 아들을 부모가 전혀 간섭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기 신앙을 잘 지켜 나갈 수 있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품을 떠난 자녀들이 교회에 잘 출석하지 않아 부모의 속을 태우는 경우를 많이 보기도 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았던 믿음의 조상들처럼 아들이 가는 곳마다 스스로 교회를 찾아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 그런 신앙을 잘 지키고 가꿔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기대한다.
지금까지 부족하고 흠 많은 저희 가정을 지켜 주시며 이끌어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주님의 귀한 선물인 아들이 하나님의 이끄심대로 신앙적으로도 잘 다져지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보를 이루어 세상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