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7 / 주현절 둘째 주일(20190113)

우리는 영국의 시인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이 통찰한 바대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았던 때는 없었지만, 오늘날의 불안은 과거의 불안과 견주어보면 차원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자연재해나 부족 간의 전쟁이나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꼈다면, 오늘날에는 과학적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넘어 ‘정신적인 욕망’으로 인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불안의 근원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불안’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했습니다. 그는 현대적 불안현상을 ‘지위(status)로 인한 불안’으로 규정했는데,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갖게 되면 자동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인 부는 높은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 물질적인 소유에 집착하게 되고, 물질적인 소유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불안이 가증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자신의 지위를 비교하면서 지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무시당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쌓여 불안에 빠져 살아가기 때문에 늘 불안해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물질적인 부를 가진다 해도 해도 현대인의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모든 불안의 근원은 물질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므로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지적인 양심’에 해당하는 것을 회복할 때에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영역 중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내적인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며,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통해서 지위에 대한 욕망과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내려놓을 수 있으므로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
■ 본문분석(이사야서 43:1~7)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력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이사야서를 서로 보완해주는 한 권의 책으로 보지만, 1872년 독일신학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이 이사야서를 제1이사야(1~39), 제2이사야(40~55), 제3이사야(56~66)로 구분한 이래, 신학계에서는 100년이 넘도록 이 구분법에 따라서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이 구분법에 따라 공부했는데, 베른하르트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 중에서 가장 먼저 문서화된 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둠은 이사야서 40~55장을 바벨론에 형성된 포로민 촌에 살았던 선지자에 의해서 주전 538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둠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주전 538년 바벨론의 고레스 왕이 “포로민들은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선조들의 신을 섬길 수 있다.”는 일종의 종교자유 선포(고레스 칙령)가 있었는데,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민이긴 했지만, 곧 상당한 부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고, 많은 부분 바벨론화되었기 때문에 고레스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권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설득하고 독려하기 위해서 ‘제2이사야서’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55장에는 바렐론 유수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길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이며, 귀환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중심 테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포로민이긴 했지만, 그간 바벨론에서 이뤄놓은 지위를 다 내려놓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많게는 50여 년 동안 이국땅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불안’이라는 것과 상통하는 단어입니다. 현대인들이 상습적인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면, 당시 이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두려움의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가졌던 두려움을 현대인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해 보수화되고, 과거의 머물고, 아무리 장밋빛 청사진을 그린다 한들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므로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포로지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망설이며 두려워하는 이스라엘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노예와도 같은 삶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떠나라!’고 용기를 주시며 독려하는 말씀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정탐꾼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능히 올라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나머지 정탐꾼들은 입을 모아 ‘올라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보기에 ‘메뚜기’ 같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메뚜기 자아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자아상 때문에 그들은 지척에 가나안 땅을 앞두고도 38년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38년의 세월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이었으면, 모세 오경에서도 그 38년간의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출애굽하기 전후의 이야기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후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에게 ‘메뚜기 자아상’을 가지고 살았던 세월은 기록할만한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져야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너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를 구속하였으며, 너를 지명하여 불러 나의 것으로 삼았으며,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해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어디서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불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고백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주는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하여,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 거룩한 백성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카도쉬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뜻인데, 이사야서에서 이 단어는 29회나 사용됩니다. 이사야서 외의 성경에서는 7회가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카도쉬קֹדֶשׁ’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36회 사용되는데, 그중 29회가 이사야서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구별된다, 구분된다’는 뜻이므로‘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가지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만 구분되어 존재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은 조금 더 강조해서 표현한다면, “구분되시고, 구분되시고, 구분되시는 그분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지요. 지금껏 바벨론에서 쌓아온 지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했으므로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복된 말씀을 듣는 것은 이스라엘의 책임 있는 행동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며 때리다가 부모 자신의 마음이 상심되어 자녀를 끌어안고 자녀를 때렸던 매를 부수어버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물 가운데 지날 때에도, 강을 건널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길은 제2의 출애굽에 버금가는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스라엘, 그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은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너는 내 것이라!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것이라!”하신 하나님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너는 내것이라!”하시며 다가오십니다. 주현절에 이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 당당하여지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위를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구별된 방식의 빛나는 삶을 살아갔던 이들을 압니다. 성 프란체스코, 마더 테레사,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간디, 본 훼퍼, 마르틴 킹 목사…. 이런 분들은 이 세상의 지위와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에서 불안이나 두려움이라는 어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 풍성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지위를 다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음으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고자 하는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감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말한 대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풍조를 따라 살아가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제시해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살아가시어 모든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하는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라!”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