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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믿는가?
스코트 한 지음, 이창훈 옮김, 살림
자세한 소개 -> 인터파크: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dispNo=&sc.prdNo=203550222
p. 64
옳고 그름
행함과 거부
스코트 한 교수
장로교회목사였으나 1986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성서학자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해서 ‘돌아온 루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개종기는 [당신사랑 영원토록 노래하리다]로 국내에 출판)
모든 문화는 일반적 관점에서,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피하라는 데에 동의한다. 대다수의 문화에서는 살인과 절도 형태를 단죄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행위들이 오늘날에는 일반적이며 현대사회에서는 은연중에 승인되기도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속이며, 사무실 물품을 슬쩍하며, 납세신고서를 위조하고, 자신들의 태아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이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길까?
내 생각은 ‘그렇다’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간음을 저지른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바람둥이라도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세금 포탈자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기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어떤 낙태 시술자라도 자신의 시술도구로 그 자신의 사지와 주요장기가 절단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윤리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개인적인 혐오감이나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정의감으로 똑같은 계율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올바로 행동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만큼은 자기들에게 올바르게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
살인, 절도, 거짓말, 간음이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법의 핵심인 십계명에서 금하는 죄들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법들은 ‘유다인’ 또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특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법들은 보편적이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이사야와 아모스는 이방인들도 똑같은 기준으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방 민족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그들이 큰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보편적인 윤리규범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그들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진술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진술이지 않은가! 또는 “자신의 윤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윤리규범이 아닌가! 사람들은 윤리를 거부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정반대의 주장을 똑같이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당한 공포반응을 야기하는 행동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아동학대가 윤리와 무관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동학대를 두둔하는 이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온전한 정신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은 어떤 생각들은 자연스럽고 다른 생각들은 얼토당토않으며, 어떤 생각들은 인간적이고 다른 생각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동학대를 수용한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나 비르케나우 같은 죽음의 수용소들을 방문할 때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르완다의 인종학살에 관해 읽을 때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가해자들은 나와는 아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군. 이 세상은 놀랍게도 다양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은 악이다.” 어느 누구도 비용과 이익 여부를 계산하고 난후에야 대량학살과 가학성변태성욕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 희생자들의 피는 정의를 근거로 삼아 절규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선(善)은 인식하지 않을 때라도 악(惡)은 인식하는 법이다. 악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한 이상, 그들은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법으로 속박했다. 악은 선한 어떤 것의 왜곡, 선한 어떤 것의 정반대, 선한 어떤 것의 부인(否認)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단 어떤 것을 악이라고 판단한 이상, 그들은 선(善)의 초월적 기준을 인정한 것이다.
자연법은 보편적으로 인간적일 뿐 아니라 두드러지게 인간적이다. 자연법은 비인간계 피조물(동물, 식물, 광물...)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과 공명하지만 그 법칙과 동일하지는 않다. 다른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그 법칙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력은 거스를 수가 없다. 동물의 본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 능력을 가진다. 인간은 어떤 행동은 선택하고 다른 행동은 피한다. 자연법에 따라서 인간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
내 친구 러셀 히팅어는 자연법을 “첫 은총”이라고 부른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영원법에 대한 모든 인간의 직접적 참여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으레 따르는 기본 능력이다. 성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의로운 이방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한다.”고 말했다. 로마 2,14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에 내린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알지 못하지만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이 그들 마음에 쓰여 있다.” 2,15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사람들이 미덕(美德)이라는 동일한 기본 경향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악덕(惡德)이라는 동일한 기본 경향에는 혐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연법은 (선하신 분이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의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일종의 아름다운 실체다.
이에 따라 성 바오로는 이성만으로 하느님에 관해 알 수 있음을 제시한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20 하지만 그 확실한 지식으로 창조주를 찬양하고 섬겨야하는 당연한 의무가 따랐다. (쉽게 말하면 미덕을 따르고 악덕을 배격하는 삶을 실천해나가는 것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흠없는 어린양)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의무를 소홀히 했다. 이 잘못은 햇빛을 가리려고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선을 거부하고 악을 행하는 행위, 이를 확대하면 미덕을 배격하고 악덕을 추종하는 행위, 더욱 확대하면 하느님을 배척하고 사탄을 추종하는 행위가 된다)” 로마서 1, 20-22절
바오로는 계속해서 악순환의 심화를 묘사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지를 로마서 18절 이야기한다. 바오로가 볼 때에, 비도덕성과 불신앙은 상호의존적 성향들이다.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이린 행동들이 습관이 되면서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도 습관적이 된다.
바오로는 무신론을 지적인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안다고 여긴다.
바오로는 무신론을 마음과 의지의 문제로, (즉) 정신력의 실패로 본다. 사람들은 (자연법으로 이미 우리 내면 깊숙이 부여된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길을 원하며, 무신론은 그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는 데에 치르는 대가라는 것이다.
한번은, 교실에서 존이라고 하는 젊은 친구가 손을 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 교수님,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는 숨 돌릴 새도 없이 계속 말했다. “제 생각은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신을 만들어 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곤란한 질문을 했다. 결국 우리의 신관(神觀)을 한낱 유쾌한 공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불현듯이, 성 바오로의「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있는 대목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알았다.
“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가? 만일 하느님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신론을 만들어 냈으리라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지.”
존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놀란 것이다.
존은 현대 세계가 19세기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게서 배운 슬로건을 단지 되풀이했을 따름이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버팀목과 위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신을 만들어 냈다고 믿었다. 신은 인간에게 이성의 대체물,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비이성적 갈망의 투사(심리학적 용어- 投射)였다. 포이어바흐의 관점에서 보는 신이라는 존재는,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특히 유용했다. 그들은 신의 명령을 이용해 자신들의 의제議題를 정당화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하느님’은 무지하고 미신에 젖은 하층민들에게 계속해서 최고의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교활한 군주의 방책이었다.
포이어바흐의 관념이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은 그의 관념이 두 사상가, 칼 마르크스 Karl Marx와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신이 없다는 공산주의와 신이 죽었다는 나치즘,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주창한 선구자들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포이어바흐 덕분이었다. 포이어바흐는 그 두 사람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이어바흐와 동시대 인물인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행동이 용납된다.” 모든 행동이,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까지도 허용된다. 신이 없다는 주장은 독재자의 손에서는 신-포어어바흐가 상상한 공상 속의 ‘하느님’이라 할지라도-이 언제나 존재했다는 주장에 비해 훨씬 쓸모 있는 무기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이들은 첫째로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날조했다. 그 다음에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행동했다. 그들은 자연신학마저 부인함으로써 자연법을 아무 탈 없이 모욕할 수 있었다. 자연법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이제 신에게 향하는 이성의 자연스러운 통로를 막아버렸다.
하지만 자연은 창조주 하느님뿐만 아니라 입법자 하느님도 드러내 준다. 모든 인간은 이를 진지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결과에 직면해 살아야한다.
--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정한 자입니다.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28-32절」--
내 학생 존은 확실히 잘못된 관점을 가졌다. 하지만 그의 대담한 문제 제기 덕분에 나는 성 바오로의 논증이 내포한 심오한 논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사람들이 정말로 신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하느님은 너무나 무서운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그분에게서 도망쳐서 숨을 곳이 없다. 우리가 은밀하게 즐기는 악덕을 탐닉할 수 있는 곳이라곤 없다. 우리 마음의 컴컴한 구석에 처박혀서 그 악에 관해 몽상의 나래를 펴고자 하면 하느님은 이를 즉각 알아채신다.
그런 하느님은 자연법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것을 아주 언짢아 하신다. 고집스러운 죄인들이 그런 신관(神觀)을 없애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해방감을 느꼈을 것인가 상상해 보라.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나치 독일, 공산국인 중국과 캄보디아 그리고 소련 같은 20세기 무신론 체제를 신봉한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들과 대량학살의 역사를 읽어보라.
p. 79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고, 그것이 좋았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창세1장 하느님의 원래 계획에는 전혀 악이 섞여 있지 않았다. 하느님의 창조에는 흠이 없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혹은 그보다는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결정해야 한다.
악은 언제나 선한 그 무엇, 있어야 하는 어떤 것의 결여다. 악은 (善의) 감소, 결핍 또는 박탈이다.
우리는 나아가 악의 두 가지 형태, 곧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을 구별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악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발생한 것이다. 질병, 시각상실, 고통, 자연재난, 죽음 등이다. 이 모든 것은 박탈이다. 병은 건강이 없는 것이고, 시각상실은 시력이 없는 것이고, 죽음은 생명의 박탈이다.
윤리적 악은 행해진 어떤 것이다. 그것은 과실 있는 행위자의 행동이다. 윤리적 악은 의롭지 못함이며, 사악함이고, 죄(罪)다. 윤리적 악 또한 어떤 결여, 그러나 이제는 윤리적 선(善)의 결핍 또는 박탈을 나타낸다. 간음은 정절의 결여다. 거짓은 진실의 부재不在다. 살인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다.
(결국) 악은 하느님의 창조계에 대한 소외이다.
p. 84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용하시는지 의아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왜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고통을 허용하지 않으시는지 놀라게 된다. 우리는 부당하게 고난을 겪는 무죄한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자비의 바다에 흠뻑 젖은 세상이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다음 숨을 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는 고통을 영원의 관점에서 적용한다.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8,18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 원하신 사람들의 손에 친히 엄청난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까지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우리의 몫이라면 그리스도(이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자신의 몫이기를 원하셨다.
p. 85
자연 질서에서도 우리의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자연법은 다른 모든 실제적 법과 마찬가지로, 진짜 형벌을 선고한다.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신앙이 필요하지는 않다. 방탕한 생활양식은 삶을 와해시킨다. 죄인들은 비참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함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죄인의 삶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자연법은 인간에게 초자연적 은총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그 토대 위에 세워지며, 본성에서 결여된 모든 것들을 보상해 주고, 본성을 완전하게 하며 들어 높인다. 하느님은 우리의 본성을 선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가 본성의 선함을 더욱 많이 실현할수록 (완전하게 창조된 본래의 모상을 회복할수록), 은총도 더 많이 쌓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배우고 다시 숙고해야 할 좋은 교훈이다. 1940년대 중반에 세계 여러 나라가 유엔UN을 결성하기 위해 모였을 때에 처음에는 논의가 벽에 부딪혔다. 그들의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전망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민주당원들, 무슬림들, 공산주의자들... 어떻게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하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 각 나라들을 (또는 적어도 각 나라 대표들을) 이끌어 철학적 난국을 뛰어넘도록 한 사람은 자크 마리탱1882-1973 이라는 가톨릭 철학자였다. 그리고 자연법은 그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수단이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혐오하는) 우리의 공통된 본성이야말로 대화를 위한 공통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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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신부님 어록 중에서 -
오늘 우리 자신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시다.
"내 영혼아, 아직까지 못했던 좋은 일을 바로 시작하자."
하느님의 현존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바라보시고 나의 행위로 나를 판단하신다."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합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좋은 것만 보신다."
시간이 있을 때 시간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무덤들은 실현하지 못한 좋은 의도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내일 살아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양심의 소리와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입시다.
"오늘 주님의 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오직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을 소중히 여깁시다.
매순간 시간을 허비하지 맙시다.
다가오는 순간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시간을 허비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사랑과 관용에 맡기신 그 선물을.
형제여,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 착한 행위를 하기로.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아무 일도 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겸손하신 마음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신 이 말씀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듭시다.
실로 우리는 지금까지 거의 아무 일도 해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무엇을 고치고 더하고 빼야 할지
우리 자신에게 묻지도 아니한 채 한 해가 오고 갑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영원히 심판 날이 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모든 은총과 모든 거룩한 영감과 모든 선행의 기회에 대하여 정확히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법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들은 그때 고려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오, 나의 주님 http://m.blog.daum.net/santi230/1355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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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인들은 비참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함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죄인의 삶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