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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9:23~31, 11:25~26 바울에게 있어서 고향 다소는? 2022. 7. 3.
오늘이 2022년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첫 열매를 거두어서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첫 열매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도리어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라고 하면서 이 것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Healing이 대세인데 Healing이 무엇입니까? Healing은 치유하다와 회복이라는 뜻의 Heal을 동명사화 한 단어입니다. 세파에 찌들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받은 영혼과 몸을 치유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Healing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와 경제적 상황과 처처에 신음으로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삶과 믿음의 길에서 받은 상처들이 있고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 깊습니다. 그래서 Healing과 회복과 치유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주어진 일 없이 권태롭고 지루해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과 허송세월 같은 그런 세월을 살아야만 하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앞에 그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여기서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의 고향 다소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고향으로 돌아가는 때가 보통 언제입니까? 감사해서 가는 명절이나, 보통 성공인생이 되어서 보란 듯이 고향을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낙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가 아니고 강제로, 어찌 할 수 없고 떠 밀려서,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어린 시절, 성자하면서 정들고 마음에 그려지는 그의 출생지인 다소로 낙향을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다소는 어떤 곳입니까?
1. 다소는 바울에게 있어서 고향이었고 출생지 이었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처와 고향의 의미로 다소에 귀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찾은 다소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소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세계 전도여행을 세 차례나 다녔고, 성경을 13권이나 쓴 사도지만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부터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잡아 오려던 다메섹에서 오히려 각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렇게 그의 인생이 바뀐 사울을 유대교인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동료였지만 이제는 배신자가 된 사울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샅샅이 수색을 했습니다. 결국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고 그의 제자들이 피신을 시켰는데 이 때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 간 침묵의 시간을 갖고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아라비아 3년은 Healing의 장소였고 Healing의 시간 이었습니다. 감사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Healing을 받고 다시 세워짐으로 복음의 사역자로 등장을 하게 되지만 주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고난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난과 훈련의 아라비아 생활, 3년에서 스스로 직접 자신이 나서서 담대하게 주님의 제자들과 동등하게 세워지게 됩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이 사울이 예수를 만나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긴가민가해서 만나기를 꺼리는데 그때 바로 바나바가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 줍니다. 바나바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12사도와 거의 대등한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바나바를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됐고, 거기서도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열정적인 유대교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의 사울은 배반의 대가를 치루어야 할 배신자이었습니다. 그 열정적인 유대인들 때문에 할 수 없이 형제들이 사울을 데리고 항구도시 가이사랴로 이동을 시키고, 거기서 배를 태워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 갈라디아 1장을 보면 오늘의 정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사울이 베드로를 만나고 다소로 내려갈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고, 그 감격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시작한지 불과 보름 만에 사울은 본의 아니게 출생지인 다소로 낙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극적으로 삶이 변한 사람에게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사울 역시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계셨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이 앞에 계셨습니다. 별 말이 필요 없지요? 너무나 엄청난 증거가 옆에 있으니까 그냥 나사로만 봐도 그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도 그렇습니다. 당신들 저를 알지요? 가말리엘 문하생의 바리세인 중에 바리세인이고 내가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거 알지요? 스데반도 내가 죽였는데 그 증인인데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이 만나 주셨고 그 분은 정말 살아계시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 동포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복음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시작한지 겨우 보름 만에 꿈을 접고 감사가 아닌, 좌절의 심정으로 낙향해야 했으니까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말하자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 3년 세월에 이어 두 번째로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소로 가는 이번 낙향은 잠시 피해가는 일시적 낙향이 아닙니다. 이후에 사울은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하고, 거기서 1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갈2:1을 보면, 그 때가 낙향한 지 14년 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1년의 사역기간을 빼면 사울이 다소에 머물렀던 기간은 13년의 세월입니다. 그가 13년 동안 고향 다소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날이 창창한 청년 사울이 고향에서 13년 동안이나 칩거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감사해서가 아니고 도중하차해야 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한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정말 바라지 않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때와 시간이 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때와 시간이지만 우리가 맞이할 시간 중엔 그런 시간도 있습니다. 사울 역시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엘리트가 되고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출세가 보장된 청년이었는데 겨우 3년 만에 낙향을 했습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사역을 제지당하면서 낙향을 했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와는 완전 절연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새 피조물이 되었지만 지난 3년 동안 특별히 한 일도 없습니다. 자기의 기대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다 무산됐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도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일도 없습니다. 하는 일 없이 매일 시간만 소일하니 영락없는 실패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세월이 하루 이틀, 1년 2년도 아니고 기나 긴 13년의 세월입니다. 그 기간 동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처음에는 고향에 나타난 사울을 보고, 무슨 급한 용무가 있거나 아니면 잠시 쉬러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의 신상에 다른 일이 생긴 것을 알았겠지요. 알고 보니 그는 더 이상 자기들과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때를 맞춰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고향 사람이라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지만 고향 사람 모두가 사울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유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허구한 날 집만 지키고 있는 바울을 보고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고 경멸했습니다.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때 바울이 겪었을 모멸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여러분, 세상살이에 관한 한 사울은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니고 아주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기간이 13년입니다. 13년이란 세월은 누구에게나 긴 세월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처럼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청년에게 있어서 그 13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Tunnel의 시간입니다. 매일 태양이 뜨는 새 날을 맞는 것이 죽음 같은 고통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터널에서 의연하게 지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왜 사울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어야 했을까요? 거기가 그의 고향이었고 출생지이었고 Healing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소는 결코 작은 삶의 자리가 아니고 꼭 필요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버팀목으로 회복되기를 준비한 장소입니다. Healing의 장소이고 Healing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고 힘들고 지치셨습니까? 따가운 시선을 받으셔야만 합니까? 그럼에도 다른 곳을 생각하시기가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가 감사가 없지만 주님께서 어루만지시는 Healing의 자리가 되시고 믿음과 신앙을 지키고 회복하고 치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다소는 주님께서 친히 보내시고 거주하게 하신 그리고 거기서 회복과 다시 세워지는 감사의 장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사울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지요?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신 이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주님이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침체되어 있고 아무 복음도 전할 수 없었던 사울을 고향으로 보내신 이가 주님이셨다면, 고향에서 13년을 거주하고 또 고향을 떠나게 하실 분도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후에 주님의 다른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다소를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사울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은둔의 시간을 주신 것일까요? 사실 사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간이 다 있었습니다.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요한과 베드로와 사울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이런 은둔의 시간이 없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없었으면 훨씬 더 유익했을 것 같은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당사자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렇게 한 것입니까? 회복과 동시에 다시 세워지고 일어나야 하는 장소이고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쳤습니다. 40년이나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으니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 처량했던 40년 동안 그가 깨달은 것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구나! 오직 나의 시대는 주님의 손 안에 있구나!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구나! 이것을 깨달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요셉 역시 13 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지요? 종으로 팔려가서 총리가 되기까지 구덩이와 물품창고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요셉 역시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아무리 사람이 선하게 살고 삶을 위하여 별의별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감사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한 가지를 터득하는데 1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다윗 역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도 죽여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무려 10년 이상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둘람 동굴로 피신을 했지만 600명의 빚을 진 사람들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과 원통한 사람들과 한에 맺힌 사람들을 데리고 10년 이상을 방황 했는데, 그 시간을 통해서 다윗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나를 인정하고 이끌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믿고 오직 이끄어 주시고 길을 내실 분은 하나님뿐 이신 것을 터득합니다. 이것을 겨우 알게 되면서 사울 왕의 추적이 멈추게 됩니다.
사도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기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다니면서 전도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자기는 촌구석에서 늙은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를 자기에게 부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90세가 넘은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일을 끝내고 나니까 요한 역시 70세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에게 무엇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요한아! 세상살이는 대단해 보이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이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거야!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일생이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지요? 위대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과 요한 계시록을 남겼습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과 사울이 깨닫고 얻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소명이든지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과 다시 세움의 것들을 깊이 묵상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속성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인간은 얼마나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지, 그런가하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알고 그 껍데기를 벗겨내기를 바라십니다. 사울에게 다소에서의 칩거는 바로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회복과 다시 세움을 입고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에 히브리서 6장에 위대한 말을 남기는데, 한번 비침을 받고, 한번 은사를 맛보고, 한번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히6;14에서는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다시 세워 주시고 감사케 하신다고 열정을 토합니다. 여러분, 사실 사울이면서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의 고향 다소는 로마 제국의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렸던 곳입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들이 발달했고, 한 때 동방의 지배자였던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겨울을 같이 날 만큼 기후도 좋았습니다.하당시의 다소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소 출신이란 것을 대단한 긍지로 여겼습니다. 사울 역시 자기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 자이었고, 당시 세계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와 라틴어까지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세계인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고, 빌4;13,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 모든 깨달음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다소에서의 그 긴긴 칩거 시간 속에서 터득했습니다. 다소에서의 칩거기간은 회복이고, 다시 세움을 입는 장소이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후;11:23~27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는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타고 가던 배가 세 번이나 파선해서 일주일이나 표류하기도 했고, 강을 건너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강도와 동족들과 이방인, 그리고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등등 온갖 위험을 달고 다녔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얼굴에는 시무룩하거나 기죽은 표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가 서려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를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의 굳건한 믿음은 바로 다소에서의 그 세월 가운데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다소에서 다시 세움을 입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위험도 죽음도 바울을 다시 끌어 내리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바울이 됩니다. 예수님의 전부를 몸에 지니고 흔적을 지녔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알았습니다. 산상수훈을 터득했고 기적과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인간의 온갖 심정을 공유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멸시도 당하고, 좌절도 하고, 조그만 것에 기쁨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고상해 보인 세상학문과 세상 모습을 버리고 보다 평범하고 보다 수더분한 사람이 되었고, 자기 영혼의 더러운 찌끼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13년간의 칩거 생활 가운데 사울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을 주님이 쓰시기에 편리한 강한 도구로 만드셨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고 절대 신앙과 능력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움을 입고, 때가 차서 위대한 사도로 부름 받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실족함도 없이 주의 종으로서 사역했는데 바로 이 때의 13년간의 다소에서의 칩거가 그 모판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인생의 다소가 있습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도 없는 다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절망과 좌절이 아니고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배우고 몸에 익히고 흔적을 가지는 그래서 감사함으로 새로운 해석과 새로이 세워지고 일어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사도 바울이 다소에서 어떻게 세워집니까? 주님의 장기적인 계획과 준비한 사람을 통해서 세워지고 이끌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는 항상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에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고,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고 소소한 것 일지라도 거기에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교회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적용이 됩니다. 침묵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대로 되어 질 때에 건강하고 build up이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build up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바울에게 다소는 감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성장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의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감하는 이런 사울을 위하여 한 사람을 준비합니다. 그냥 아무나 데려다 놓지 않습니다. 장기적인 안목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람을 준비하고 보내십니다. 그러면 준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3-1. 바나바입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 구브로 출신입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으로,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며, 기름과 벌꿀의 유명산지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농장을 팔아서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바나바의 이 결단과 헌신으로 초대교회가 큰 위로를 얻었고, 가난하고 힘들게 홀로 사는 여인과 고아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도 않았던 바울을 격려하고 보증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있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울의 고향, 다소로 낙향한 바울을 찾아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바나바가 이런 일을 하게 될까요?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출발한 신앙인의 가는 길에 어려움과 수많은 환란과 멸시와 깜깜함이 있으나, 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가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언약의 여정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종착역은 로마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바나바가 등장을 합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적격자라고 생각하고 바울이 있는 다소로 갑니다.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는데 찾으러 뜻은 뒤져낸다는 표현입니다. hunt up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쫓겨서 고향 다소로 왔지만 다소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더 위대한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 할 수 있을까? 부활의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방인의 그릇으로 어떻게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을까? 난감하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다소의 사울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안디옥에서의 사역이 동역자 없이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복음적인 가르침의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보증을 섰던 다소의 사울을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찾는 것 중요한데 필요한 역할의 적임자를 찾는 것은 우선 어려운 일이고 찾아 가는 사람은 찾을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역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중요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모두 내려놓고 적합한 인물을 hunt up했습니다. 그래서 다소의 사울을 안디옥으로 모시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안디옥의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과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교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 때에 그들을 비로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붙여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사용을 했습니다. 기름부움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형제자매로 불렀습니다. 누가 붙여준 이름입니까? 이방인들과 안디옥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누가 바나바를 통해서 바울을 hunt up하도록 했을까요? 왜 바나바는 자신의 역할을 내려놓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나바를 사울에게 보내었기 때문이고 다소에서 hunt up하도록 했기 때문이고 바나바의 역할을 내려놓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고 힘들고 지치셨습니까? 따가운 시선을 받으셔야만 합니까? 그럼에도 다른 곳을 생각하시기가 그렇습니까? 반드시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예비 된 가장 적합한 사람을 준비하시고 보내셔서 현재의 문제에서 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주님의 장기적인계획과 작정입니다. 그 작정과 계획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build up이고, 안디옥 교회의 build up이고, 이방인을 위한 build up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함이고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야 하는 주님의 계획이고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장기적인 계획이고 작정입니까? 여러분, 바울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다메섹에서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택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속에서 다소로 귀향을 했습니다. 13년의 세월을 견디어 내야만 했습니다. 행22:3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 같이 나 또한 하나님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왜요?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고 오늘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난 일에 너무 메이지 않았고, 지나간 시간과 공간들을 너무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다소의 삶도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이유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과 공간과 사역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허락되어지고 내 안에 차려진 인생의 텃밭에 비와 바람이 불고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세상의 어두움과 고난이 전개 될지라도 신앙과 믿음 안에서 이런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고 약속의 주님이 비추시는 볕을 드리게 하여 주님의 약속과 기대에 넘치는 삶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선지자를 광야에 멀리 보내시기도 하시고, 회오리바람으로 데려 가기도 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빌립을 광야로 빨리 보내시기도 하시지만 사울은 기적이나 회오리바람이나 성령의 역사로 친히 구조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방법으로, 굴욕적인 방법으로 불명예스럽게 다소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왜요? 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주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build up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가야하는 훈련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루하시고 이제 나는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환경과 여건과 상황에서도 평안 가운데 먼저는 든든히 서가는 여러분이 되시고 또한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과 작정을 통해서 결국에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