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은 세 개의 다른 복음서들처럼(특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 다루는 기사에 있어 예수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즉, 예수의 탄생 예언, 탄생, 세례, 시험, 사역(말씀과 이적을 통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가 선택한 제자들과 함께 당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면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 승천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요한복음을 포함하여)과 다른 것은 누가복음이 무엇보다 그 후편(後篇)인 사도행전을 전제로 한 복음서라는 사실이다.1)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이 사도행전의 전편(前篇)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도행전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누가복음을 접근해야 할 것이다.2) 한편, 정경적 문맥에서 다른 복음서들(마태, 마가, 그리고 요한복음)과의 유사성과 상이성에 유의하면서 누가복음을 관찰할 가치가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이해에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우리 독자들이 무엇보다 누가복음을 그 텍스트 안에서 책임 있고 성실하게 잘 관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 이 글은 누가복음의 특정한 본문이나 신학적 주제를 논쟁적으로 서술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글은 누가복음의 전반적 이해를 돕기 위한 개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3) 이것을 위해 나는 누가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유익한 세 가지 관점을 활용하고자 한다. 이것은 또한 누가복음 텍스트 세계의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영역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에 적용할 경우 누가는 역사가, 문학예술가 , 신학자로 간주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4) II. 누가복음의 역사적 틀
1. 저자 19세기 중엽까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Luke)라는 것에 대해 폭넓게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비평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누가복음의 저자로 수용되었던 누가를 의문시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평적 견해들은 역사적/학문적 대안으로서 전통적 입장보다 결코 역사적이거나 학문적이라고 볼 수 없다.5) 즉, 세 번째 복음서의 저자가 누가라고 하는 입장은 무엇보다 일찍부터 초대교회 안에서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어,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 헬라어 사본 P75를 비롯해서 무라토리안 신약정경(170-180년 – 누가복음의 저자를 의사이면서 바울 선교여행의 동행자로 소개), 이레니우스(185년경의 Against Heresies 3.1.1. 및 3.1.4.1.), 터툴리안(208년경의 Against Marcion 4.2.2., 4.2.5., 4.5.3.) 그리고 그 이후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유세비우스 및 다른 초대교회 교부들은 한결같이 누가를 저자로 인정하고 있다. 내적 증거와 관련해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처음부터 목격자 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1:2 – 예수와 함께 했던 사도들과 그 직후의 제자들)과 구별하는 것을 우리는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서문(1:1-4)이 헬라식 역사서문 형식을 따르고 있음과 누가-행전 전반의 헬라어 문체의 화려함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내과의사 ἰατρόϛ - 골 4:14)6)이라는 점과 함께, 비록 그가 구약과 유대교 지식에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복음서 저자 가운데 유일한 비(非)유대인으로 추정 받고 있다(4:44; 6:14; 8:54; 22:42; 23:45, 51; 행 10:39; 13:5; 14:1; 17:1; 21:11 참조).7) 저자와 관련해서 또 하나 언급해야 될 것은 사도행전의 “우리-단 락”(we-sections - 행 16:10-17; 20:5-21:18; 27:1-28:16)으로 저자가 바울의 선교여행 중에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라는 어법이 항해여정에서 활용되는 수사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도행전 학자들은 누가-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하게 된 역사적 증거로 받아들인다.8)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바울과 직접 만나 선교에 동참했던 인물로 바울에 대한 직간접적 정보를 많이 소유한 자로서(몬 1:24; 딤후 4:11 참조) 바울의 사역을 자세하게 소개할 수 있는 적임자임이 분명하다. 2. 기록 시기와 장소 및 목적
누가복음의 기록 시기에 대한 이해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나누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누가복음(-사도행전)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 약 80-90년대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한다.9) 그러나 70년 이전(60년 초~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여전히 하나의 학문적 견해로 주장될 수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10) 70년 이전과 이후에 대한 입장 차이는 누가복음 19장 41-44절과 20장 20-24절에 대한 해석 견해(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예언인가, 아니면 이후의 사실묘사인가)와 함께 마가복음 기록 연대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저자 누가가 마가복음을 참조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1:1-4 참조). 한편 기록 장소는 그야말로 학자들 사이에서 추정일 뿐인데 대표적으로 안디옥, 가이샤랴, 로마, 아가야, 소아시아가 거론된 바 있다. 기록 장소의 불확실성에 대해 피츠마이어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기록 장소는 누구나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분명한 것은 누가-행전이 팔레스타인 밖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라고 했다.11)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해 볼 수 있다. (1) 목회적 차원: 누가복음의 내용을 확증시키기 위함(W. Van Unnik; D. E. Garland); 기독인들의 재확신(R. Maddox); 하나님의 신실성(R. Karris), (2) 복음적 차원: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한 구원의 선포와 확장(F. F. Bruce; J. C. O’Neill; D. Seccombe); (3) 논쟁적 차원: 영지주의자들에 반대하여(C. H. Talbert); 유대주의자들에 반대하여(J. T. Sanders); (4) 변증적 차원: 기독교 변증을 위하여(B. S. Easton; E. Haenchen; G. E. Sterling); 로마 제국을 변증하기 위하여(P. Walaskay); 기독교가 유대교의 회복이자 성취라는 변증을 위하여(R. N. Longenecker; R. Brawley); 바울을 변증하기 위하여(J. Jervell과 N. Dahl); 이방인과 식탁교제의 사회적 합법성(P. Esler); (5) 신학적 차원: 예수 재림의 지연(H. Conzelmann);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선포와 확장(I. H. Marshall); 구약 예언의 증명과 성취(P. Schubert).12) 이 가운데서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포 및 확장(복음/신학적 차원)과 함께 ‘예수운동’ 내지 초 기 기독교 복음을 위한 변증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복음의 서문(1:1-4)은 기록 목적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13) 특히 여기서 사용된 부사들 - ‘근원부터’(ἄνωθεν), ‘자세히’(ἀκριβῶϛ), ‘차례대로’(καθεξῆϛ)와 더불어 한 문장으로 구성된 헬라 어 서문의 맨 마지막 단어 ‘확실함’(ἀσϕάλεια – 영어성경 번역본들은 assurance, certainty, truth로 번역됨)은 누가의 기록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 전해진 목격자들과 증언자들 그리고 이미 선포되어 온 복음서들(또는 다른 주요 자료들)의 구전(oral) 및 문서(written) 자료를 치밀하고 자세하게 살핀 후 누가는 데오빌로와 독자들이 지금까지 들어 온 (또는 처음 듣게 될)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는 자신의 문서를 통해 ‘복음/신학적’ 동기와 함께 ‘목회적’ 돌봄의 목적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누가-행전을 통전적으로 고려할 경우 누가는 예수께로부터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어떻게 유대 땅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방인의 땅 안디옥, 갈라디아, 소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를 넘어 결국 로마까지 선포되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계획이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확장되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가-행전은 본질적으로 ‘신학적’(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드러냄)이요, ‘복음선교적’(하나님의 구원계시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나아가서 ‘목회적’(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III. 누가복음의 문학적 틀
1. 장르 누가복음(-사도행전) 장르(genre)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크게 네 가지 로 소개할 수 있다.
(1) 전기(傳記; biography - M. Hadas and M. Smith[aretalogy]; C. H. Talbert; P. S. Shuler; D. Barr and J. Wentling; R.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5.91.229.XXX at February 26, 2018 2:06 PM Burridge[그레코-로만 βίοϛ]) - 누가복음을 ‘예수의 생애’에 집중하는 장점이 있으나, 1세기 당시의 ‘전기’ 형식과 달리 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특히 예수의 생애가 맞이하는 비극적 죽음에 대한 마무리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과의 연속성을 고려할 경우 전기 장르의 한계는 더욱 치명적이다.
(2) 역사문헌 (historiography – M. Hengel; D. Aune, R. Maddox; G. E. Sterling; D. Garland) - 누가복음을 그리스 또는 유대적 역사문헌 형식으로 간주함으로써 히브리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당화하는 장점이 있다. 아쉬움은 1세기 역사문헌에 비해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3) 독자적 새 장르( sui generis – R. Bultmann; N. Perrin; H. Koester; H. Marshall) - 누가복음의 문학 양식을 세 개의 다른 복음서들과 함께 새로운 장르(‘복음서 ’)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단점은 그 당시 1세기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처음 접했을 때 이 새로운 장르를 어느 정도 의식했을까 하는 점이다.
(4) 혼합된 장르( genus mixtum – R. Karris; S. Sheeley) - 1세기 관례적 문헌 장르에 복음서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근거해서 복합적 장르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14)
누가복음의 장르는 위에서 언급한 학계의 네 가지 견해들의 각 특징을 고려하면서 복음서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당시 누가복음 문서를 읽었던 실제적인 독자들의 사회경제적 신분에 따라 장르 이해는 다양하게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런 독자들의 현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무엇보 다 누가복음의 서문(1:1)에서 언급된 저자의 헬라어 용어 διήγηοιϛ(디에게시스)를 주목하면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장르 이해를 좀 더 포괄적 개념인 역동적이면서도 성경적(구약성경) 글쓰기 전통을 따르는 ‘내러티브’(a dynamic biblical narrative)로 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15) 누가복음의 내러티브(이야기 서술형식) 이해는 앞에서 소개한 네 가지 장르들에 속한 특징들을 복음서 안에서 적절히 고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장르 이해와 관련해서도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된다. 2. 줄거리
누가복음(-사도행전)을 내러티브로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할 내용은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줄거리/플롯(plot)이다. 문학적 접근을 통해 복음 서 연구에 큰 공헌을 한 킹스베리(J. D. Kingsbury)는 누가복음의 줄거리를 아쉽게도 ‘갈등의 구조’로 단순하게 이해하였다.16) 사건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갈등은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갈등’ 자체 또는 ‘갈등 구조’를 플롯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줄거리는 “인과관계에 의해 정돈된 순서에 따라 진행되어짐으로써 독자에게 (자연스런) 감정적 또는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이야기의 흐름”(plot refers to a narrative-flow which is engendered by causality in orderly sequence, evoking an affective or emotional response in the reader)으로 누가-행전의 줄거리는 “예수와 그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성령의 능력과 인도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고 찾아나서는 증인의 길”(The plot of Luke-Acts is the way of witness, in seeking and saving God’s people, engendered by Jesus (in the Gospel) and his witness (in Acts), through the power and guidance of the Holy Spirit in accordance with the plan of God.)이라 제안할 수 있다.17) 누가복음에 국한시킨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고 찾아나서는 증인의 길”이다. 누가복음의 줄거리를 프랑스 기호학자 그레이마스(A. J. Greimas)의 내러티브 문법적 구조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아래의 내러티브 구조는 사도행전 안에서 발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수 및 성령은 ‘송신자 ’ 의 기능을, 예수의 제자들은 ‘수신자 ’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18) | | | |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줄거리는 위의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네 가지 특징을 드러내며 발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 증인의 길로서 줄거리는 구원을 위한 길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1:76-79; 2:30-32; 3:4-6; 5:32; 19:10; 행 16:17; 참조. 행 6:7; 9:31; 12:24; 16:5; 19:20), (2) 증인의 길은 하나님 나라(4:18, 43; 7:22; 8:1; 9:6; 10:11; 11:20-23; 16:16; 행 1:3; 8:12; 14:22; 19:8; 20:25; 28:23, 31)와 예수(1:32, 35, 43, 76; 2:11, 26, 30-32; 행 2:36; 5:42; 8:4, 5, 12; 9:20; 10:37, 42; 11:20; 17:18; 18:25; 19:13; 28:31)에 대한 선포로 진행되고 발전되며, (3) 이 줄거리는 지리적 확장으로 나타나며(복음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그리고 (4) 증인의 길은 무엇보다 주요 인물(복음서 – 예수; 사도행전 -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나바, 바울)들이 성령의 능력주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예수 – 3:22; 4:1, 14, 18; 행 1:2; 10:38; 제자들 - 24:49; 행 1:8)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19) 우리가 누가복음을 문학적으로 접근한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누가복음 1장부터 24장까지 전체 본문을 하나의 유기적 내러티브(누가-행전)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역사비평적 해석을 통해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최종 본문에 집중하지 못한 오류뿐 아니라 지나친 교리적 관심으로 인해 성경의 자연스런 문맥을 무시한 교의신학적 해석 경향에 경종을 줄 수 있다. 즉, 우리의 통전적 읽기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위한 바른 ‘역사적’ 지식과 ‘문학적’ 기법의 광맥(鑛脈) 아래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된 ‘신학적’ 주제들 을 잘 캐내어 오늘의 메시지 보석을 잘 뽑아내는 것을 지향한다. 3. 누가복음 구조에 따른 요약적 해설20)
1) 서문(1:1-4) 2)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1:5-2:52) (1) 요한 탄생에 대한 예언(1:5-25) (2) 예수 탄생에 대한 예언(1:26-38) (3)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1:39-56) (4) 요한의 탄생(1:57-80) (5) 예수의 탄생(2:1-20) (6)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위한 정결예식(2:21-39) (7)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성장(2:40-52)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서문(1:1-4)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할 뿐 아니라, 바로 이은 첫 두 장을 의미 있게 시작하고 있다. 일명 ‘탄생기사’라고 부른다. 여기서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각각 비교 서술하고 있는데, 요한을 엘리야처럼(1:17) 소개하는 반면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1:31-35).
이런 점에서 요한은 종말론적 새 시대의 마지막 예비자(forerunner)로, 예수는 종말의 새 시대를 열어주는 성취자(fulfiller)로 각각 묘사되는 가운데 요한은 옛 시대와 새 시대에 모두 중첩되는 구속사의 특별한 인물로 나타난다(16:16 참조). 아울러 누가복음 1-2장은 예언의 성취 가운데 나타나는 두 인물들을 설명해 주는 동시에 모든 점에서 요한보다 예수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요(즉, 메시아가 아니요), 예수가 바로 오실 그 분 메시아라는 선포이다. 한편, 마리아의 찬가(1:46-55), 사가랴의 노래(1:67-79), 시므온의 찬미(2:28-32)는 누가-행전의 중 심 주제를 예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이시 다’(2:30). 그러나 이 성취는 사람들의 수용과 핍박의 이중적 반응 가운데 성취되어 나타난다(2:34). 3) 예수의 메시아 사역을 위한 준비(3:1-4:13) (1) 요한의 사역(3:1-20) (2)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소개(3:21-4:13) 누가복음 3장 1-2절은 구약의 역사적 내러티브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누가복음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요한과 예수의 비교가 나타난다.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3:1-6; 사 40:3-5)이지만, 예수는 ‘주로서 오실 그 이’이다 (3:15-17). 비록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지만, 이 문맥의 초점은 오히려 하늘로서의 음성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 가 너를 기뻐하노라”(3:21-22; 참조. 9:28-36). 이 구절은 이사야 42장과 시편 2편이 혼합적으로 성취되는 종말론적 문맥으로 예수께서 왕적-선지자적 인물일 뿐 아니라 마지막 날의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임을 시사해 주는 본문이기도 하다. 이 문맥에 있어 누가복음에서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린다고 묘사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누가-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유기적 상관성은 매우 의미 있게 나타나고 있다.21)
누가의 예수 족보(3:23-38)는 (유대인이 기대하던) 다윗의 후손임을 밝히면서도(2:31) 궁극적으로 우주적인 차원에서 아담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임(2:38)을 설명해 준다.22) 이어서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는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실패와 달리 그 받으시는 (메시아적) 시험을 이겨내신다(4:1-13). 이 시험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4:3, 9)로서 당하는 메시아적 시험이다. 이 시험 기사에서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에 이끌리면서’ 시험을 이겨내는 점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의 강림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 받은 사실(3:21-22)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예수는 이제 성령으로 기름 부은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함께(말하자면, 분리됨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실제로 누가복음 4장 18-19절은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성령으로의 세례 받음’을 해석해 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4) 갈릴리에서의 예수 사역(4:14-9:50)
(1)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4:14-44) (2) 선교와 논쟁(5:1-6:11) (3) 제자들을 부르고 가르치시는 예수(6:12-49) (4) 예수의 동정어린 사역(7:1-50) (5)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선포(8:1-56) (6) 예수의 정체성과 제자도의 본질(9:1-50) 이 부분은 주로 예수의 가르침과 이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된 가르침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것(4:16-30)과 평지에서의 설교(6:17-49)에 잘 나타난다. 이 두 구절을 누가복음의 독특한 구절들이라 할 수 있는데, 회당 설교에서는 예수께서 메시아 사역에 대한 자기이해를 보여주고 있으며, 평지 설교는 유대인들의 전통과 구별되는 예수의 주요 (윤리적)가르침이 나타난다. 특히, 나사렛 회당 설교에서는 예수께서 메시아 사역의 의미를 이사야서 61장 1절과 58장 6절의 성취(“오늘날” – 4:21; 참조. 2:11; 5:26; 13:32-33; 19:5, 9; 19:42; 23:42-43)로 설명하고 있으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로 시작되는 이 구절은 세례 받은 것에 대한 예수의 자기해석인 셈이다. 누가복음 4-9장은 예수의 사역과 함께 제자들의 수용과 적대자들의 거절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예수께서 구원을 선포하며 구원을 가져오는 자로서 일련의 기적들을 행사하는 반면(4:31-44),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게 된다(5:1-11). 예수께 대한 본격적 반대는 예수의 죄 용서 선언과 함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사건과 관련되어 나타난다(5:17-26; 6:1-11).
이어서 소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과 함께 그의 가르침과 기적들이 연속적으로 소개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세례 요한도 (오실/오신 메시 아로서의) 예수의 사역에 대해 다소의 의문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치유와 선포를 통한 자신의 종말론적 사역을 재천명함으로써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증하시게 된다(7:18-35; 참조. 사 29:18; 35:5-6; 61:1). 씨 뿌리는 비유(8:4-15)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은닉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 주는데, 무엇보다 (하나님의 & 예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자연을 다스리고(8:22-25), 더러운 귀신을 제압하며(8:26-39), 병과 사망을 치유하고 이기시는(8:40-56) 예수의 권세는 옛 시대의 선지자들과는 다른, 즉 새 시대에 임한 하나님의 메시아임을 말해주는 메시아적 코드이다. 이제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신적 권세의 드러냄으로부터 예수께 향한 고백과 제자도로 이동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께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9:18-20), 이 고백 이후에 예수께서는 자신 이 고난 받아야 할 것(‘고난당하시는 인자/메시아 ’)을 드러내신다(9:22). 예수를 향한 하늘(하나님)의 음성(“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9:35; 참조. 신 18:15: 모세 같은/능가하는 선지자) 은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통해 두 번째로 소개된다(9:28-36). 이 하늘의 음성은 예수의 세례 때에 들렸던 소리에 대한(3:21-22) 또 한 번의 확증인 셈인데, 고난당하실 인자/메시아로서의 자기계시 직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고난당하게 될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말의 메시아임을 하늘(하나님)의 동일한 소리로 재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맞이하게 될 예수의 죽음을 ‘그의 별세’(th.n e'xodon auvtou/; his departure – 9:31)로 소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늘의 소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auvtou/ avkou,ete; listen to him – 9:35)와 일맥상통하는 메시지로서 예수께서는 모세와 같은/능가하는 선지자로서(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지도력 가운데 엑소도스 했듯이[이집트에서의 옛 생활방식을 떠났듯이], 새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의 지도력으로 엑소도스 해야 하며[유대교의 옛 가죽부대 생활방식을 벗어나야 함]) 예수께서 메시아적 지상사역을 마친 후 하늘성소로 들어가야 할 자(예수께서 먼저 하나님을 향해 이 세상으로부터 엑소도스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은 예수의 천상[天上]사역이라 할 수 있음)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도의 핵심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전에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그분의 삶의 가치(하나님 나라/통치)를 따르는 삶이다. 5) 예루살렘 여정에서의 예수 사역(9:51-19:44)
(1) 제자도 :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함(9:51-10:42) (2)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 (3) 거절당하는 예수(11:14-54) (4) 종말론적 위기에 대한 경계(12:1-13:9) (5) 누가 제자가 될 수 있는가(13:10-19:27) (6) 예루살렘 도착(19:28-44) 누가복음 9장 51절-19장 44절은 다른 공관복음서들과 비교할 때 누가복음의 가장 차별화된 구조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여행기사’ 이다.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내용이 약 44%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가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약 17개의 비유 중 15개의 비유가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서술되는 사건들이 대략적으로 시간적 순서를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건과 내용이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예. 10:38-42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에서 일어난 구절이지만, 10장 이후에 다시 예루살렘과 멀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음). 여기서 더 중시되는 것은 계속적이면서도 점진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묘사를 통해 예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계획이 반복적이면서 발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9:51; 13:22; 17:11; 18:31; 19:28, 44). 하나님의 뜻은 예수의 분명한 자기이해와 선언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1-35, 특히 33절).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의 길(ὁδόϛ)은 실제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새롭고 완전한 길을 열기 위한 ‘왕의 행진’이며 종말론적 성전의 가시화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 길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배타적일 뿐 아니라 적대적이다(9-13장; 특히 11:37-52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참 제자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도/진리(ὁδόϛ)가 펼쳐지는 길이기도 하다: 선교, 헌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헌신, 기도(9:51-11:13).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면서 구원(새 성전의 문)으로 그들을 초청하신다(12:49-14:24). 이 구원에 초청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절대적 헌신이 요구된다(14:25-35). 하나님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사명 역시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는 것이다(15:1-32; 참조. 9:1-6; 10:120; 24:46-49). 이런 제자도의 일상생활은 무엇보다 물질의 관대함과 물질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16:1-31). 형제에 대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주께 향한 믿음과 충성된 헌신 역시 주의 제자에게 요구된다(17:1-10). 한편, 주의 제자로 부름 받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17:11-19). 예수의 탄생과 사역으로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현재성)는 또한 인자(人子)가 나타나는 구원과 심판의 마지막 날(17:30)에 완전 히 임하게(미래성) 될 것이다(17:20-37). 이 같은 종말론적 삶을 대하는 제자들의 중요한 자세는 한결같은 주님께 나아가는 겸손한 기도의 삶이다(18:1-14).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요 또한 자기소유로부터 자유 하는 자들이다(18:15-30). 이제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천명하면서 자신의 고난/죽음을 예언하고 다윗의 자손으로서 질병을 치유하신다(18:31-43). 삭개오는 드라마틱하게 회심한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현실적으로 구원 얻기에 너무 힘든 ‘부자이자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이런 자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18:27) 분임을 보여준다(19:1-10). 이 일을 통해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사명을 의식 있게 선포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이어서 예수께서는 므나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왕적 권세를 상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한 시기에 온전한 그 나라의 임함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착하고 충성된 종)를 재차 교훈하고 있다(19:11-27). 이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달하게 되면서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심판적 예언을 하신다(19:41-44). 6)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수 사역(19:45-21:38) (1) 성전 청결/심판(19:45-48) (2)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갈등(20:1-21:4) (3) 종말의 징조(21:5-38) 7) 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1) 성만찬(22:1-38) (2) 감람산에서의 예수(22:39-46) (3) 체포되시는 예수(22:47-53) (4) 대제사장의 뜰에서의 예수와 베드로(22:54-65) (5) 예수의 심문(22:66-23:25) (6) 예수의 십자가 처형(23:26-49) (7) 예수의 장사(葬事)(23:50-56) 8) 예수의 부활과 승천(24:1-53) (1) 빈 무덤과 부활(24:1-12) (2) 엠마오 제자들과의 만남(24:13-35) (3) 제자들에게 나타나심(24:36-49) (4) 예수의 승천(24:50-53) 이제 예수께서는 목적지인 예루살렘,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에 임하심으로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사역(특히 성전에서의 가르침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집중하게 된다. 이 사역 가운데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유대인들과 집중적인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눅 11-13장 참조).
이 일의 시작이 성전 청결/심판인 셈이다(19:45-48). 이것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의 외식과 율법의 형식적 규례들에 대한 부정(否定)과 심판을 선포하는 예수의 몸말(body-language)인 셈이다. 이와 함께 계속되는 예수의 권세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은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하게 된다(20:1-8, 20-26, 27-40). 한편, 예수의 흉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드러낸다(20:9-18).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이 단순히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즉, 초월하는) 그리스도로서 다윗의 주(主)가 되심을 드러내고 있다(20:39-44). 그럼에도 자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의미 있는 종말의 징표를 제시한다(21:5-38). 그러나 이때가 결코 끝은 아니다. 인자가 권능 가운데 구름을 타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임하실 마지막 때가 있기 때문이다(21:27-28; 참조. 단 7:13-14). 따라서 제자들은 늘 깨어서 신실하게 기도에 힘써야 한다(21:34-38). 누가복음 22-23장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행보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예수는 배반당하여 체포되고 신문(訊問) 을 당하지만 결코 범죄자가 아님을 독자들은 복음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단번에 알게 된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계획 가운데(22:22) 새 언약의 길을 여는 통로가 된다(22:14-23). 이 문맥에서도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는데, 제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통한 긍정의 효과를 독자들은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리더십의 다툼(22:24-30),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수의 예언과 이것의 성취(22:31-34,54-62), 제자들이 기도에 실패하는 모습(21:39-46),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의 배반(21:47-53)이 그러하다. 산헤드린 공회 법정에 선 예수에 대한 기사는 예수께서 누구이신가에 다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ἐγώ έίμί)라고 말하고 있느니라”(22:69-70). 유대교 중간기에서 발전된 다차원적 이미지(‘그리스도’: 67절; ‘인자’: 69절; ‘하나님의 아들’: 70절; 참조. ‘다윗의 자손’ 눅 1-2장; 18:38-39; 20:41)가 유대인들의 1세기 메시아관으로 그 당시 폭넓게 이해되고 있었음을 이 문맥에서 보게 된다. (사형 언도권이 없었던)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유대인의 법적 치리자인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23:3)에 대해 예수께서는 짧지만 단 호하게 긍정으로 답변하신다(23:3). 예수께서 갈릴리 출신임을 알고 있는 빌라도는 마침 유월절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헤롯에게 예수를 넘기지만, 헤롯은 형식적 심사를 거친 후 다시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민의에 떠넘기고 만다. 이처럼 두 법적 치리자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주도하는 소송 건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빌라도는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신실하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의롭게 고난 받는 자’로서 인물화 된다(23:26-53; 참조. 시 22:8-9, 19; 69:22; 3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 은 정녕 의인이었도다”(23:47). 누가복음의 마지막 24장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당함이 결코 끝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 중에 말씀하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18:33; 참조. 13:32; 24:7)의 성 취를 이루는 부활기사가 묘사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 예수”(24:3; 참조. 24:34)로 소개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부활은 먼저 빈 무덤에 의해 증언 되었으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나타난 천사(24:4)는 지상사역 중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들에게 기억나게 하심으로(24:8) 누가복음 23장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다. 이 부활기사가 예수의 사도들이나 (남자)제자들이 아닌 여자들에게 먼저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사건이 사도/제자들에게 큰 충격과 낙담을 안겨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어서 누가는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예수를 바라보았던, 하지만 예수의 죽음 후 실망한 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신 기사를 소개한다(24:13-36). 이 때 부활하신 예수와 두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누가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고난이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뜻으로 (구약)성경을 성취하는 사건임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이 에피소드는 길(ὁδόϛ)에서 펼쳐진 예수의 ‘(구약)성경해석학 강의’라 할 수 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만)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4:25-27, 45). 이에 대한 엠마오 제자들의 반응은 실로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만으로는 결코 이루 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불타지) 아니하더냐 하고”(24:32). 누가복음 첫 1-2장이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성취될 것에 대한 소망으로 시작하고 있다면, 누가복음 마지막 24장 특히 36-53절은 메시아 되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한다. 즉, (구약)성경의 중심 주제가 메시아 예수로 인한 구원(회개와 죄용서)임을 그리고 이 예수로 인한 구원은 민족적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는 구원임을 밝히 증거 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만)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4-49).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과 “위로부터 능력”은 오순절 에 임할 성령(행 2장; 참조. 눅 3:15-17)을 의미하는데, 이런 점에서 누가의 성령은 예수 제자/증인들의 구원 증언사역에 가장 필수적인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누가복음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이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큰 기쁨 가운데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종결된다. 누가복음을 읽고 난 데오빌로(와 독자들) 역시 이 같은 기쁨의 반응에로 초청을 받는 셈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약속은 제자들의 기쁨 속의 기대와 더불어 제자들의 사명으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구원역사의 실패나 끝이 결코 아니다. 이제 이것은 예수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새 시대의 진정한 출발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의 저자는 자신이 받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상의 예수행전’(누가복음)으로 끝나는 것 이 아니라 ‘천상의 예수행전’(사도행전)으로 계속 발휘됨을 이어지는 후편을 통해 주도적으로 보여준다.
IV. 누가복음의 목회신학적 틀23)
1. 목회적 관심
누가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목회적 관심은 그의 서문(“…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 1:4)에서 밝힌 목회적 동기와 분리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목회적 관심은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이면서도 발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글의 성격상 누가복음에 국한하고자 한다. 다른 복음서들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서신들과 비교할 때에도 누가복음에는 기독교적 보편주의(Christian universalism) 내지 기독교적 인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사회적 약자 내지 소외된 자는 누가신학의 ‘잃어버린 자’의 중심을 차지한다(19:10; 15장 참조). 이것은 누가신학에서 나타나는 반전(reversal)의 주제(1:51-53; 13:30; 14:11; 17:33; 18:9-14 참조)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된다.24)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에 소개된 예수의 나사렛 회당 설교(4:16-27) 중 이사야서 61장 1-2절이 예수께 성취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메시아 사역이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 먼 자’/‘눌린 자’에게 희년(禧年)을 선포하는 자유-해방-구원의 사역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일차적으로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이다(6:20; 14:12-13; 16:19-31; 18:22; 참조. 12:16-21). 그러나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죄인으로서 이 세 상에서 소외된 모든 탕자(蕩子 즉, 문자적으로 ‘부자’도 포함)들을 지향한다(13:28-30; 15:11-32; 18:13; 19:2-10; 24:46-49). 따라서 누가복음의 ‘잃어버린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모든 ‘병자들’과 다름없다 (5:31-32). ‘가난한 자/잃어버린 자’는 누가복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세리와 죄 인(5:30; 7:34; 15:1), 여자,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누가복음이 예수를 통해 팔레스타인 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 팔레스타인과 그 너머 이방 지역 땅 끝까지 이르러 잃어버린 자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7:34)로서 그 당시 증오의 대상이었던 세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5:27)고 하면서 그를 제자로 불렀으며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5:29; 참조. 19:5). 누가복음에서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소개되는데 비유의 초점도 독자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내[예수]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4). 이와 유사하게 누가복음은 ‘죄를 지은 한 여자’의 회개(향유 담은 옥합을 예수께 부음)를 언급하면서 편견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의 교만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7:36-50). 결국 예수께서 죄용서, 즉 구원을 선포하는 대상은 ‘의로운 바리새인’이 아닌 ‘죄를 지은 한 여자’이다. 1세기 여성에 대한 종교사회적 권익이 매우 열악했던 그 당시를 고려할 때 여성에 대한 예수와 초대교회의 입장은 매우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사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누가복음이다. 복음서 초두(1-2장)부터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의 찬미와 증거는 누가-행전의 주요한 모티프를 제공해 주며, 사렙다 과부(4:26), 나인 성 과부(7:11), 마리아와 마르다(10:38), 가난한 과부(21:1-4), 부활을 증언하는 여인들(24:5, 10)도 주목받게 된다. 특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위해 자기들의 소유를 아끼지 않은 자들은 그 당시 주요 노동자들이었던 남성이 아닌 여인들(막달라인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들)이었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고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3; 참조. 행 9:36, 39; 12:12; 16:14; 18:2, 18, 26).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호의는 요한복음(요 4장)과 유사하게 나타난다(마 10:5-6 참조). 누가복음 9장 51-56절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던 중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소개한다. 이때 냉담한 반응을 보인 사마리안 주민에 대한 태도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제안하자,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대응하고자 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신다(9:54-55).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비유의 가르침을 통해 그 당시 유대문화를 깨트리며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신실한 이웃 사랑의 모델을 소개하신다(10:25-37).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의 신앙적 모범으로 제시된 것이다(“가서 너[유대인]도 이와 같이[사마리아인이 행했던 것과 같이] 하라” - 10:37). 사마리아인에게 나타난 신앙적 모범은 누가복음 17장에 소개된 열 명의 나병환자 치유 사건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말하자면, 예수께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오직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께 돌아온 것을 누가복음은 잊지 않고 이렇게 소개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7:15; 참조. 행 8:4-25).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잃어버린 자는 유대인 안에서 소외 받은 자를 넘어 비(非)유대인-이방인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며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복음서’라면, 누가복음은 ‘이방인의 복음서’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과 누가복음의 족보를 비교해 볼 때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의 족보가 다윗과 아브라함을 넘어 온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에게까지 다다르며 마침내 모든 열방의 창조주와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 종결된다(3:23-38).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 대한 예수의 구약성경 인용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구원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변증하기까지 한다(4:26-27; 참조. 2:30-32). 이방인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신앙이었다(7:9; 참조. 마 8:10; 15:28).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넣었으나, 로마의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23:47)고 고백하고 있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은 죄 용서-구원의 은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24:47)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것은 누가복음의 후편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예수의 증인들을 통하여 성취된다(행 13:46; 18:6; 28:28 참조). 2. 신학적 주제
누가복음의 신학적 주제 역시 ‘잃어버린 자’에 대한 목회적 관심에 서와 같이 여러 면에서 사도행전과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누가복음에 제한시키면서 다섯 가지로 특징적인 신학적 주제를 소개하고자 한다.25)
1) 하나님의 뜻/계획 앞에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줄거리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뜻/계획’은 누가복음 전체 내러티브의 발단-과정-결말의 모체(母體)가 된다.26) 이 말은 구약성경이 그러하듯이 누가복음에서 다루는 이 세상 역사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한글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ἡ βουλὴ τοῦ θεοῦ(헤 불레 투 쎄우)는 누가복음 7장 30절에 단 한 번 사용되고 있지만(참조. 행 2:23; 4:28; 5:38-39; 13:36; 20:27) 누가의 내러티브는 여러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뜻/계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사건과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드러내고자 누가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를 자주 사용한다: δεῖ(데이 – 눅 2:49; 4:43; 9:22; 13:33; 17:25; 21:9; 22:37; 24:7, 26, 44; 행 1:16, 1; 3:21; 4:12; 5:29; 9:6, 16; 14:22; 16:30; 17:3; 19:21; 20:35; 23:11; 24:19; 25:10), μέλλω(멜로 – 눅 9:31, 44; 22:23; 24:21; 행 17:31; 26:22, 23), πληρόω(플레로 – 눅 4:21; 9:31; 21:24; 22:16; 24:44; 행 1:16; 2:28; 3:18; 12:25; 13:25, 27, 52; 14:26; 19:21), τελέω(텔로 – 눅 12:50; 18:31; 22:37).2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장래 이루어질 것으로 예언된 것도 있지만 누가복음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오늘’(2:11; 4:21; 5:26 13:32-33; 19:5, 9, 42; 23:42-43)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오해하고 거절한 자들은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계획을 거부한 자가 된다.
2)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죄 용서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계획의 중심이다.28) 누가복음 내러티브에서 인물화 되는 예수는 일차적으로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그리스도’(ὁ χριστόϛ)이다 (1:31-33, 35, 69; 2:11; 4:41; 9:20; 20:41-44; 22:67-71; 23:2, 35, 39; 24:26, 46).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기름 부음을 받은) 사건(3:21-22)은 시편 2편과 이사야서 42장이 반향된 것으로 왕적-선지자적 이미지(2:30-35; 4:16-30; 7:16; 9:7-9, 19, 35; 참조. 신 18:15)를 또한 드러낸다. 예수의 ‘선지자’(ὁ προϕήτηϛ) 이미지는 다양하게 소개된다(4:16-30; 9:7-9, 19; 13:33; 24:19, 21 – 엘리야/엘리사/모세적 선지자). 실제로 예수께서는 구약의 참 선지자들이 걸어가고 맞이했던 그 길로 뚜벅뚜벅 나아가시는 분이다(11:47-51; 13:33). 누가복음은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ὁ υἱόϛ τοῦ θεοῦ)이심을 명시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1:31-32; 2:49; 3:22; 9:35; 행 9:20; 13:33). 이 용어는 다윗의 아들/후손의 왕적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개념과도 공유되는 의미로 소개되기도 한다(1:35; 4:3, 9; 4:41; 8:28; 참조. 22:70).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독특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그 사람의 아들’(ὁ υἱόϛ τοῦ ἄνθρωποῦ) 표현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사용된 용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인성(人性)적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 즉 자신이 천상(天上)의 인물임을 계시하고자 하는데 가장 적합했던 표현으로서 이해된다(21:27/단 7:13-14). 인자(人子) 용어는 예수의 현재 사역과 관련해서 묘사되기도 하며(5:24 – 죄를 사하는 권세; 6:5 – 안식일의 주인; 9:58 – 거절당하는 자; 19:10 –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자), 고난을 당하는 분으로(9:22, 44; 18:31; 22:22, 69; 24:7) 장래 묵시론적 사역을 설명할 때에도 활용되고 있다(6:22; 9:26; 12:8, 40; 17:22, 24, 26, 30; 18:8; 21:27, 36; 24:7; 행 7:56; 참조. 단 7:13-14; 출 34:5; 14:20; 민 10:34; 시 104:3). 이와 같은 복합적 또는 다차원적 메시아 이미지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 중간기 시기의 메시아 사상을 통합적으로 성취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메시아이자 고난 받는 ‘종’(παῖϛ)으로 인물화 됨으로써(9:20, 22; 24:25-27, 44-46; 참조. 13:33; 행 3:13, 18, 26; 4:27, 30; 사 42:1-7; 49:1-6; 50:4-9; 52:13-53:12) 고난의 메시아가 왕적-선지자적 이미지와 함께 중첩되며 통합되고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께서 (고난 받는 왕적-선지자적) 메시아(χρίστοϛ)일 뿐 아니라 주(κύριοϛj)로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20:41-44; 21:27; 22:69; 행 2:30-36; 10:36; 참조. 눅 1:43; 2:11; 롬 9:5; 히 1:8-9). 따라서 사도행전 2장 36절의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저자 누가에 의한 예수 인물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29) 예수의 주되심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존귀케 되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과 같은 신적 권세를 동등하게 누리고 행사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엘서 2장 32절이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인용된 ‘주의 이름’은 구약 문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행전에서 인용되고 성취되어진 ‘주의 이름’에 대한 베드로(그리고 누가)의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한다(롬 10:12-13 참조).30)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임재 하는 하나님의 통치임과 동시에 주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기도 하다(4:18, 43; 7:22; 8:1; 9:6; 10:11, 18-19; 11:20-23; 17:21; 19:14-15; 행 2:30-36; 8:12; 20:25; 28:23; 참조. 골 1:13).
3) 성령 누가복음(-사도행전)은 바울서신 및 요한문서와 함께 신약의 성령 이해에 지대한 자료를 제공한다.31) 바울 및 요한의 성령 이해가 많은 합의에 도달한 것과 달리 학자들은 누가의 성령 이해와 관련해서 여전히 분분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누가의 성령 이해에 있어 학자들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무엇보다 누가의 성령이 유대교에서 주도적으로 이해한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라는 점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의 기능과 의미는 한 마디로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집중된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예수의 수태고지 및 탄생과 관련됨으로써 성령과 연관된 인물(세례 요한, 마리아,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들이 직간접적으로 메시아 예수를 증언한다(1:15, 35, 41, 67; 2:25, 26, 27). 그리고 누가복음 3장 이후부터 성령은 메시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준하고 예수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증언되는데 결정적 동인이 된다(행 10:38 참조). 한편 누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래에 감당하게 될 증인 사역과 관련해서 성령이 능력과 지혜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11:13; 12:10, 12).32) 이것은 예수의 부활 이후 및 승천 직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당부에 서 더욱 확증된다. “볼지어다 내[예수]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9);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 [예수]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예수]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4, 5, 8 ).33) 주목할 것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성령 역시 누가복음(-사도행전) 안에서 하나님의 뜻/계획을 드러내고 인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면서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 예수의 뜻을 계시하고 지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누가-행전의 ‘성령’(행 16:6)은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예수의 영 ’(행 16:7)으로 묘사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령-기독론의 맥락에서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이해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해 준다.34)
4) 구원 사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경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계획 그리고 이를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준다. 이 점에서 하워드 마샬(I. H. Marshall)이 1970년에 이미 잘 논증했듯이,35) 누가복음(-사도행전)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주 ‘구원/구원하다’(σωτηρίᾶσώζω)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후 막스 터너(M. Turner)는 누가-행전에서 언급된 구원의 개념을 구약-유대교와의 관계 속에서 본질적이면서도 통합적으로 잘 분석함으로써 누가문서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주제를 더욱 발전적으로 탐구하였다.36) 그의 책에서 논증하듯이 구원은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회복되는 것으로 구원의 신분과 더불어 구원-윤리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구원은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신학적 그리고/또는 은유적) 용어들의 (각각의 강조점과 함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구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개인과 공동체) 상호 간의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데 누가복음은 이 회복이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긍정적이고도 필연적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와 주로 보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다(7:50; 8:12, 48; 17:19; 18:42; 행 3:16; 4:4; 1015:9, 11; 26:18). 이 구원은 또한 인간 차원에서의 회개(돌이킴) 및 하나님으로부터의 죄용서 개념과 더불어 이해된다(3:3; 5:32; 15:7, 10; 16:30-31; 24:47; 행 2:38; 3:19; 11:18; 17:30; 20:21).37)그리고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행 2:38-39; 10:44-47; 11:17; 15:8-9). 이로 인해 구원 받은 자(믿음-회개-죄용서-성령의 선물)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예. 재물에 대한 포기와 구제 – 16:9; 18:22; 19:8-10; 참조. 3:8; 행 26:20). 또한 이런 자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요(9:26; 12:8-9; 행 22:16), 십자가를 지면서(9:23; 14:27)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9:23, 57-62)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11:28; 행 5:31-32; 10:35).38) 구원의 개념이 하나님과 그 백성(개인/공동체)과의 인격적 관계회복으로써 이해되지 않고, 단순히 도식적인 또는 기계적인 개념이나 지식이 될 때, 누가복음(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교향곡적 울림과 떨림의 하모니(빌 2:12-14; 벧후 1:5-11 참조)는 우리 안에서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5) 제자의 삶 누가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 이해(기독론)와 구원 이해(구원론)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로서 구원 받은(회개-죄용서-성령의 선물) 자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이다.39) 우리는 이 주제를 제자도(discipleship)의 이름으로 다룰 수 있다. 실제로 각 복음서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소개되는데, 이 단락에서 나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1) 기도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 중에서 기도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성하다.40)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문맥에서 기도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복음의 첫 장은 사가랴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며(사도행전의 첫 장도 그렇다), 마지막 장은 승천하시는 예수의 축복기도로 종결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의 예수는 ‘기도의 사람’으로 인물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성령은 예수의 기도 중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된다(3:21). 예수는 메시아 사역의 피곤함 속에서도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 하시는 분으로(눅 5:16),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6:12) 하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의 철야기도 이후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도라 명하셨다(6:13-16). 이것은 열 두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수께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이 있기 직전에도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신 것을 보도해준다(9:18-20).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께서 변모되는 상황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였는데(9:28-29), 이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별세(ἓξοδοϛ – 31절)를 선언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신다(35절). 칠십 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행한 자신들의 성공적 사역을 예수께 보고하자, 예수께서는 주저함 없이 그 현장에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감사-찬양의 기도를 올리셨다(10:17-22). 한편,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주기도문’을 일러주신 것도 예수께서 기도를 끝마친 직후였다(11:1-4). 또한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과정에서 낙심할 수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당부하시기도 했다(18:1-8).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22:39-46).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처절한 상황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원수들(23:34)과 자신(23:46)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 증거와 함께 고별설교를 끝낸 후 승천하시면서 그는 제자들을 위한 축복기도를 베푸신다. 이처럼 누가복음의 예수는 ‘기도의 사람’일 뿐 아니라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기점마다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에 비해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기도의 실패자로 인물화 되고 있다. 그 당시 경건하고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졌던 바리새인은 기도는 하지만 위선의 기도자로 판명되고 있으며(18:9-14), 종교 지도자들은 ‘기도의 집’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이었다(19:45-48). 예수의 제자들 역시 안타깝게도 기도의 실패자로 묘사된다. 제자들은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지만(11:1-2) 정작 기도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졸고 만다(22:44-45).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제자들은 변하기 시작한다. 제자들의 첫 변화는 그들의 기도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2-14).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예수의 제자들은 살아생전 보여주었던 예수의 모범을 따라 ‘기도의 사람들’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임을 여실히 증언해 준다(행 2:42; 3:1; 4:24이하; 6:4, 6; 8:15; 9:11, 40; 10:9, 30; 11:5; 12:12; 13:3; 14:23; 16:25; 20:36; 21:5; 22:17; 28:8).
(2) 재물포기와 구제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이 자주 만나게 되는 주제는 재물에 대한 저자의 외침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오늘의 제자들 역시 반드시 답변해야 할 필연적 질문이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오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각오와 결단을 촉구하면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3)고 하였으며,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는 부자 관리에게 예수께서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 이에 대 부자 관리의 반응이 23절에 언급되어 있다 -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재물 포기는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할 구제로 이어진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12:33-34; 참조. 3:11; 6:34-35, 38; 11:41; 14:12-14).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설교 중에 소개된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 전승’은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이었다41) 이와 같은 예수 제자들의 재물포기와 구제의 삶은(7:5; 8:3; 10:34-35), 앞 단락에서 소개한 기도와 유사하게,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구원의) 표징과도 같다(행 2:43-47; 4:32-37; [5:1-1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제자답지 못한 삶을 대변해 준다]; 9:36, 39; 10:2, 4, 31; 24:17[참조. 고후 8-9장; 롬 15:25-28]).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재물포기와 구제가 예수 제자 됨(또는 구원 받음)의 수단이 아닌 예수 제자 됨의 참된 표식 또는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삭개오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깨달아야 할 본문이다.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가 예수를 극적으로 만난 후 그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 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19:9)고 구원을 선포하신다. 누가복음의 재물포기와 구제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한 예수의 의미는 삭개오가 단순히 재물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제한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의 심방에 마음이 열린 후 그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참으로 회개(구원)의 사람이 된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참조. 3:8-14에서 언급된 ‘회개의 합당한 열매 ’). 이것은 삭개오의 회개한 징표가 재물포기와 구제로 나타나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부자와 나사로 의 비유’(16:14-31)이기도 하다. 이 비유는 16장 13절(‘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직후에 소개되는 문맥 안에서 해석될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 즉 유대인 부자는 재물집착으로 인해 자기 집 앞에 늘 함께 했던 극심하게 가난한 동족 유대인 나사로를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부자는 회개의 참된 열매로서 재물포기와 구제가 부재한 ‘명목적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물포기와 구제가 불가능했던 ‘명목적 성도’는 ‘하나님이냐 재물이냐’에 있어 결국 재물을 섬긴 것이고, 재물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그 인생의 주(主)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6:24; 8:14; 12:13-21). V. 나가는 말
이 글은 누가복음에 대한 신약학계의 견해들을 고려하면서 신학생 및 목회자를 주된 독자로 간주하는 가운데 누가복음서의 개관을 나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세 가지의 틀, 즉 역사적-문학적-목회신학적 관점으로 이 글을 전개해 보았다. 누가복음은 그 당시 그리스 역사문헌의 서문 형식(1:1~4)과 함께 시작됨으로써 다른 복음서보다는 글쓰기 짜임새가 좀 더 체계적이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준다. 아울러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소개하는데 있어 예수의 지상(地上) 사역뿐 아니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의 천상(天上) 사역까지 다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뿌리, 가지, 열매를 처음부터 차례대로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상호 연계적으로 의식하면서 각각의 문서를 읽기에(그리고 설교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럴 경우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복음의 역사적 근거와 함께 기독교 신앙의 지리적 확장에 따른 복음의 우주성/보편성과 우월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같이 예수의 탄생을 필두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개한다. 또한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과 동일하게 예수의 메시아 사역이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종결되는 지리적 여행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도착하기까지 예수의 사역을 다루는 여행기사(9:51~19:44)는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누가복음의 특징적 단락이기도 하다. 이 단락은 특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主)가 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이 따라야 할 신앙 여정의 순례길에 모범(模範)이 되시는 분이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예수는 성령과 기도의 주제에 있어 제자들에게 큰 교훈을 보여주신다. 아울러 제자들의 삶에는 재물포기와 구제의 표징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킨(회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가복음 내러티브 흐름 전 과정의 모체(母體)가 되는 하나님의 뜻/계획의 중심축을 자리한다. 따라서 예수의 인물화는 곧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신저일 뿐 아니라(the messenger for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실체(the message of the Kingdom)가 된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을 확증하고(또는 드러내고) 메시아의 구원 사역에 권능을 부여해준다. 누가복음 4장에 소개된 나사렛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구원-해방-자유를 선포하는 영적 희년(禧年)의 종말론적 성취가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치유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회의 안정된 자들과 부자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이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모든 탕자(蕩子)들이다(15장; 19:9-10; 24:47-48; 행 1:8; 2:38-41).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주 실패하는 자들로 나타나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로서 모든 족속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해야 될 증인들로 다시 새롭게 부름을 받게 된다. 수의 증인/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될 제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중심이자 성취자가 되심을 깨달아야 하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위로부터의 능력 즉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 누가복음의 독자들도 사모해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자’를 찾고 발견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과 언어로 ‘잃어버린 자’를 찾았듯이 오늘의 누가복음 독자/설교자들 역시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우리의 몸과 언어로 살갑게 다가가야 할 때이다. ‘위로부터의 능력’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찾았다고 생각한 자들을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대가 오늘인지 모를 일이다. 각주)-------------------
1) 신약성경 27권은 모두 260장 7,967절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누가복음(24장 1,151절)과 사도행전(28장 1,007절)이 총 52장 2,158절을 차지함으로써 누가문서는 신약 성경 중 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가장 많은 분량인 셈이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1,071절, 마가복음은 678절, 요한문서(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는 2,032절, 바울서신은 2,032 절로 구성되어 있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유기적 관계성으로 인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히 1920년대 H. J. Cadbury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의 논문들을 통해 두 문서를 “누가행전”(Luke-Acts)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행전” 통일성에 대한 대다수의 합의와 함께 소수의 비판적 견해에 대해선 Ju Hur, A Dynamic Reading of the Holy Spirit in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1), 87 각주 2번과 Ju Hur, “The Unity, Genre & Purpose of Luke-Acts Revisited,”<고려신학> 3 (2000): 227-58을 참조하라. 최근에도 이 견해는 강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 대럴 벅, <누가신학>, 강대훈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67-74를 보라. 3) François Bovon은 자신의 1976년 책을 개정하여 출판함으로써 1950-2005년에 걸쳐 55년 동안 서구에서 연구된 주요한 누가신학의 견해를 문헌과 함께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Luke the Theologian: Fifty-five Years of Research (1950-2005) (Waco, Texas: Baylor University Press, 2006, 2nd revised edition). Carrol, John T., “Luke-Acts,” The New Testament Today M. A. Powell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9), 58-69도 참조해 보라. 4) I. H. Marshall은 1970년 초판과 1989년 개정증보판을 통해 누가를 역사가와 신학자로 소개한 바 있으나(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Grand Rapids: Zondervan, 1989, enlarged edition]), 1992년 발간한 책을 통해 사도행전을 ‘초대교회의 역사’(as simply an account of the history of the early church)로, 누가-행전을 포함해서 사도 행전을 ‘신학적 문서’(as primarily theological works)로, 그리고 동시에 누가-행전을 ‘문학적 작품’(as a literary work)으로 보아야 함을 주장하였다(이탤릭은 저자 Marshall의 강조 임) - The Acts of the Apostles (NTG, Sheffield: JSOT Press, 1992), 14-15. Marshall은 이 책의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There is general agreement that Luke was a careful writer. Some would characterize him as pre-eminently a littérateur. Therefore, the search for pattern, design and literary qualities in his work is likely to be a rewarding one.”(24). 5) J.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Anchor Bible 28; Garden City, N. Y.: Doubleday, 1981), 35-53;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rand Rapids: Eerdmans, 1978), 33-34; Darrell L. Bock, Luke volume 1: 1:1-9:50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1994), 4-7를 보라. “So Luke is Paul’s ‘sometime’ companion. He is likely to be a medical doctor, possibly from Antioch of Syria, who is not Jewish, though whether he is Syrian or a Greco-Roman is not clear. The tradition also indicates that he lived a long life.”(Bock: 7). 6) 19세기 말에 W. K. Hobart는 누가-행전에서 나타나는 의료 전문용어(4:38; 5:12, 18, 24, 31, 31; 6:18; 8:44; 10:34-35; 13:11, 32; 행 3:7; 5:5, 10; 9:33; 12:23; 28:8)를 통해 누가를 의사(ἰατρόϛ)로 주목한 바 있으나(The Medical Language of St. Luke [Dublin: Hodges, Figgis, & Co., 1882]), H. J. Cadbury는 누가문서에서 나타난 의료 용어들이 그 당시 의사들의 전문용어들로서만 볼 수 없음을 논증하기도 했다(The Style and Literary Method of Luk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0], 39-72). Cadbury의 입장은 누가가 의사가 아님을 주장한 것이기 보다는 누가문서의 언어만 가지고는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음을 절대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7) ‘반(反)말시온 서문’(Anti-Marcionite Prologue)에 따르면 누가는 시리아 출신의 안디옥 사람으로 내과의사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가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에 대한 상세한 정보(행 11:19-20; 13:1-4; 14:26-28; 15:1-3, 13-40; 18:22-23)가 사도행전에 잘 소개된 근거로 간주되기도 한다. Robert H. Stein, Luke (NAC, 24A; Nashville, Tennessee: Broadman Press, 1992), 21. 마크 A. 포웰, <복음서 개론> 허주 옮김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149 참조. 한편 Ellis는 누가가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일 것을 주장한 바 있으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 E. E. Ellis, The Gospel of Luke (NCB; Grand Rapids: Eerdmans, 1974, 2nd edition), 52-53. 8) C. J. Hemer, The Book of Acts in the Setting of Hellenistic History (Tübingen: J. C. B. Mohr, 1989), 308-64; J. A. Fitzmyer, Luke the Theologian (New York: Paulist, 1989), 17-32; 김득중, “제9장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김경희 외 12 인, <신약성서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257-259. 데이비드 드실바, <신약 개론>, 김경식 외 6인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412-23. Contra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23-24. 9)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53-57; F. F. Bruce, The Book of the Act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2nd edtion), 6-13; W. G. Kü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trans. H. C. Kee (Nashville: Abingdon, 1975, revised edition), 151; F. W.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A Commentary on St. Luke'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1988, revised edition), 17-18; R. Maddox, The Purpose of Luke-Acts (Edinburgh: T & T Clark, 1982), 6-9; P. F. Esler, Community and Gospel in Luke-Acts: The Social and Political Motivations of Lucan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27-29; C. A. Evans, Luke, NIBC, 3 (Peabody, Mass.: Hendrickson, 1990), 14; L. T. Johnson, The Gospel of Luke (SP, 3; Collegeville, Minn.: Liturgical Press, 1991), 2-3; David E. Garland, Luke,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2011), 31-34 : “It suggests that Luke-Acts would not have been written much later than AD 75 to 85 before the persecution of Christians presumably carried out under the emperors Domitian and Trajan.”(34). 마크 A. 포웰, <복음서 개론>, 150; 김득중, <신약성서개론> (2002), 259; 참조. 김경진, <누가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 가?: 누가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서울: 대서, 2013), 18-19. 김경진은 70년 이후로 간주하면서도 80년대까지 기록연대가 늦춰질 수 있다고 본다. 10) C. H. Dodd, More New Testament Studies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47), 49; C. J. Hemer, The Book of Acts in the Setting of Hellenistic History (ed.) C. H. Gempf (Tübingen: Mohr, 1989), 365-410. 헤머는 면밀 한 역사적 탐구 끝에 사도행전이 62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D. P. Moessner, Lord of the Banquet: The Literary and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Lukan Travel Narrative (Minneapolis: Fortress, 1989), 308-15; E. E. Ellis, The Gospel of Luke , 57;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 35; D. Bock, Luke vol 1: 1:1-9:50, BECNT, 3 (Grand Rapids: Baker, 1994), 18; 조병수, <신약성경 총론>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 판부, 2006), 121. 대럴 벅, <누가신학>, 38-49; W. Robert Shade, III & Bruce J. Nicholls, Acts (Singapore: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2007), 12-13. 참조. J. Nolland는 60년대 후반-70년대 후반을 제안한다 – Luke 1:1-9:20, WBC, 35A; Dallas (Word Books, 1989), xxxix. R. Stein은 70-90년 사이로 폭넓게 추정한다( Luke , 25). 11) “As for the place of composition of the Lucan Gospel, it is really anyone’s guess. The only thing that seems certain is that it was not written in Palestine.”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57). 12) Ju Hur, “The Unity, Genre & Purpose of Luke-Acts Revisited,” 227-58을 참조할 것. 13) 누가복음의 서문(1:1-4)은 마카비후서 2:19-32 및 요세푸스 Apion 1:1; 2:1과 비교할 가치가 있다. 14) Ju Hur, “The Genre and Plot of Luke-Acts,” ACTS Theological Journal 10 (2002): 217-39, 특히 각주 16번과 Dynamic Reading, 87 각주 2번을 참조하라. 15) 한글개역개정에서는 ‘내력’(來歷)으로, 새번역에서는 ‘이야기’로 번역되었으며, 영어성경에서는 ‘account’ 또는 ‘report’로 번역되었다. 참고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2005)에서 새롭게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야기’로, Eugene H. Peterson의 The Message 에서는 ‘story’로 번역되었다. διήγηοιϛ 용어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구전 또는 문서로 전달되는 이야기나 보고서로 사용되었다. 또는 그리스어 동사 διήγέομαι는 눅 8:39; 9:10; 행 8:33; 9:27; 12:17에서 사용되고 있다. Ju Hur, Dynamic Reading, 193 각주 38 번을 보라. 16) Jack D. Kingsbury, Conflict in Luke: Jesus, Authorities, Disciple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34. 국내에서 일군의 학자들이 누가복음을 문학적으로 접근하여 편집한 논문들을 참조해 보라 - 김영봉 · 오덕호 편, <누가복음 새로 읽기: 문학적 읽기의 이론과 실제> (신약연구시리즈 1권; 서울: 한들출판사, 2001). 17) 문학비평가들의 줄거리/플롯에 대한 정의를 포함한 나의 논증에 대해서는 Ju Hur, Dynamic Reading, 183-86을 보라. 18) Ju Hur, Dynamic Reading, 270-78을 참조하라. 19) Ju Hur, Dynamic Reading, 187-91; 허주, <신학의 종을 어떻게 울릴 것인가> (서울: 그리심, 2001), 68-69. 20) 하워드 마샬, “제5장 누가복음-사도행전: 전편”, <신약성서신학>, 박문재 · 정용신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156-188과 비교해 보라. 톰 라이트는 누가복음에 대한 구조분석을 생략한 채 89개 단락을 차례대로 따르면서 자신의 글쓰기 목적 을 따라 해설을 제시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이철민 옮김 (서울: IVP, 2011), 4-7. 21) 누가–행전에서 ‘성령과 기도’의 밀접한 관계는 상당한 관심을 끌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실한 기도에 뒤따른 성령의 역사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눅 11:13; 행 1:14; 2:11, 47; 4:29-31; 8:15-17; 9:11, 17; 10:1-4, 44-48; 13:2; 참조. 지혜서 7:7; 8:20-21; 9:4; 시락서 39:6-7).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에 대한 묘사도 참조하라(눅 3:21; [4:1-2]; 5:16; 6:12; 9:18, 28-29; 11:1; [21:34-36]; 22:39-46; 23:34, 46; 24:50-51). 허주, <신학의 종을 어떻게 울릴 것인가>, 71 각주 62번과 그곳에서 소개한 문헌을 참조 하라. 글의 후반부에서 다룬 “기도”를 보라. 22) 마태복음(1:1-17)과 누가복음(3:23-38)에서 제공하는 예수 족보의 상이성은 학 자들의 많은 관심과 주장을 낳았다. 두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조상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마 1:2-6과 눅 3:31-34), 다윗부터 예수까지의 족보에서는 동일한 이름이 세 개만 언급될 뿐이다. 즉, 다윗부터 예수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서로 다르다. 마태는 솔로몬의 후손을 따르고, 누가는 나단의 후손을 나열한다. 일군의 학자들은 마태를 요셉의 족보로,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로 주장한다(3:23의 헬리를 마리아의 부친으로 간주; NASB 참조). 또 다른 학자들은 마태와 누가 모두 요셉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마태복음의 야곱(1:15-16)과 누가복음의 헬리(3:23)를 이복형제로 해석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헬리가 죽은 후 야곱이 헬리의 아내와 혼인하여(신 25:5-10 참조) 계대가 이어진 후손 들인 셈이다. 즉, 마태는 요셉의 실제 부친(야곱)의 족보이고, 누가는 요셉의 법적 부친(헬리)의 족보로 간주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J. Nolland, Luke 1:1-9:20, 166-170; 조병수, “누가복음의 예수 계보”, <신약신학 열두 주제>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1), 97-125를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