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1.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창 9:24~27
*제목; 창세기 읽기(11) 존전 의식이 믿음이다.
프롤로그. 낙관회로를 가동하라.
심리학에서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수많은 도구들이 개발되어 왔다.
가장 먼저 각광을 받은 것은 IQ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고 삶을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EQ가 등장했다.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성공하고,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 발전하여 SQ가 개발되었다. 사회성지수가 높은 사람들인 성공과 행복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제 AQ(Adversity Quotient, 역경 지수)라는 것이 등장했다. ‘폴 스톨츠’가 개발한 것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AQ가 높더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성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 실패 속에서도 절대로 남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자기 탓도 하지 않는다. 셋째, 반드시 이길 수 있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요셉은 이 역경지수 100점의 사람이다(창 45:5))
인간은 하루에 약 6만 가지 정도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이전부터 해오던 생각이 95%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늘 똑같은 생각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삶의 도전이 나오지 않고, 문제에 대한 해답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의 전환이 그래서 우리에게 필수적이다. 이럴 때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새로운 해결책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생각의 전환은 행동의 전환을 통해서 더 가속도를 얻는다.
우리가 하는 지속적인 생각 중에 더 큰 문제는 그 중 80%는 다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잘 될 리가 없다. 이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산책’이다. 좋은 산책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들을 다 씻어내는 능력이 있다. ‘5분의 묵상과 산책’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은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 15km 반경 안에 긍정적이고 성공한 사람들이 2명이 있으면, 나도 성공하게 된다는 통계나 나와 있다.’
1. 말씀과 언약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실 때에 하나님의 계획(뜻, 말씀)대로 진행하신다. 그래서 말씀을 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
또한 그 완성을 위해서 꼭 “하나님의 동역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동역할 것인가? 이것이 믿음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키워드이다.
굳이 동역자를 찾으시는 것은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노아처럼 말이다.
오늘은 다시 첫 번째 명제로 돌아가 보자.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을 경험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말씀은 사탄이 더 잘 안다. 그래서 말씀으로 예수님을 유혹한다(눅 4:9~11).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눅 4:9~11)
그러나 사탄은 말씀의 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 말씀의 은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말씀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언약”으로 발전해야 한다.
“언약”이란 “계약”을 말한다. 즉, 상호이행이 효력의 전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려면, 하나님도 우리도 모두 그 말씀에 대한 상호이행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더 분명하게 들린다. ‘11절’이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1)
하나님께서 홍수로 땅을 심판하시고, 너무 속상하셨다. 그래서 노아에게 다시는 이렇게 너희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신다. 다시 말해 이는 상호이행의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은혜를 부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 의무를 이행하였는가? 그렇기에 이 “언약”은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불로 된 심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당신에게 말씀은 말씀 그대로인가? 아니면 “언약”으로 지켜지는가?
이는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언약”의 이해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는 동일하다.
말씀을 뜻하는 헬라어는 “로고스”와 “레마”이다. 로고스는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레마는 그 말씀의 “나의 말씀”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로고스의 능력이 나에게 레마의 고백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당신에게 레마가 있는가? 당신의 레마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사는 백성들의 특징이다.
2. 함이 지은 죄
‘언약’과 함께 다시 땅에 정착한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었다. 이스라엘에게 포도와 발효된 포도주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먹는 처방이었다.
그러나 발효된 포도는 사람을 취하게 했다. 포도주를 시음하던 노아는 그만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방에 쓰러지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 사건이다.
우연히 아버지의 방에 들어온 둘째 아들 ‘함’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22절’을 보자.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 9:22)
어떻게 보면 뭐 별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이 숨어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상황을 보고 처치를 하지 않고 나간 것이다. 둘째는 처치도 하지 않고 나와서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흉본 것이다.
바른 아들이었다면, 분명히 다음과 같이 해야 했다. ‘23절’이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3)
아버지를 향한 존경으로 아버지의 인격을 지켜드린 것이다. 아버지가 보든 보지 않든, 의식이 있든 없든, 아버지를 지켜드린 것이다.
이것이 믿음을 상징한다. 보시든 보시지 않든 하나님의 뜻(레마)를 따르는 것이다. 보기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규칙이다. 이런 자는 법을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호는 받을 수 없다.
그렇기에 ‘25절’과 같은 안타까운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창 9:25)
샘과 야벳을 전혀 다른 결과를 경험했다. ‘26~27절’이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9:26~27)
이러한 자세를 존전의식이라고 한다. 칼빈의 고백대로 “Coram Deo”인 것이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레마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이 설교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는 힘인 "역경 지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신뢰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현대인이 가진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믿음의 동료들과 교제할 것을 권장합니다. 특히 성경 속 요셉의 삶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설명합니다. 또한 노아의 아들들인 셈과 야벳의 사례를 들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데오(God Coram) 의식을 가질 때 진정한 신앙의 회복이 일어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말씀을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언약으로 붙잡아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축복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