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발굴은 전적으로 충주시의 큰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1ㆍ2차조사 뒤 정작 조사를 하고 싶었던 2지구대신에 발굴이 미진한 부분만을 조사하는 형식으로 되어서 마음껏 발굴장을 설정하지 못하면서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새로운 집터를 찾지는 못하였으나 화덕자리 20기와 움 5기를 찾는 성과를 올려 당시 조동리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배경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되었다.
더욱이 신석기층에서 찾은 볍씨에서 6,200년 전ㆍ6,140년 전의 연대측정치를 얻어 신석기시대 볍씨로는 가장 오랜 자료인 것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 사실로 신석기시대의 벼농사에 관한 더욱 확실한 고고학적 자료를 얻었다는 점은 한국농경사연구에 큰 획을 긋게 된 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얻은 3차발굴 현장발표회는 충주시를 대표하여 김동기 부시장(현 인천광역시 행정부시장)이 참여하여 연구 성과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지도위원(손보기ㆍ허문회ㆍ임효재 교수 등)을 비롯한 전공 학자들은 선사박물관이 조동리유적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한 목소리로 주장하였다.
이 내용은 각 언론사를 통하여 보도되었고, 특히 임병무 부국장(당시 중부매일)은 김부시장과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어서 부시장을 이해시키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필자는 문화관광부 본부에 가서 문화정책국장과 차관을 만나 조동리유적 박물관의 위치 복귀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여기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결과 어렵게 충주시의 동의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마침내 조동리유적에 박물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동리선사유적 박물관의 부지선정에 대한 논란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제1안으로 현재의 동량면사무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 건물을 보수하여 쓰는 방안, 그리고 제2안으로 1지구와 2지구 사이에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지점에 세우는 안을 충주시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시 당국은 1안에 대해서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점으로, 2안은 도시계획선상에 있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다.
그래서 조사팀들이 직접 면민들이나 도시행정심사위원들을 만나 설득해보겠다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결국 이 안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현 위치로 정하여지게 된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다.
우선 새로 세워질 곳에 대한 시굴조사가 선행되지 못하였고 유적의 길 건너편에 박물관이 위치하게 되어, 이후 유적이 복원되었을 때 박물관을 찾는 많은 단체손님들이 길을 가로지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만든 행정당국의 일 처리방식은 정말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하여 기공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더니 그 지역 주민들에게서 연락이 와서 불편한 입장이었던 적이 있다. 한참 뒤 박물관 설계가 되었다 하고 시공과 내부인테리어에 관한 사항들이 진행된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기만 하였다.
작년 4월 충주시 관계자들이 필자연구실을 방문하고 협조를 요청하여 우선 자문회구성을 제안하였더니 바로 이 안이 받아들여져 6월달에서야 첫 번째 자문회를 열 수 있었다. 여기서 필자가 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고 바로 뒤이어 그때까지 인테리어를 맡은 삼덕공사에서 준비한 시안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하였던 자문위원들은 한마디로 “이거 안 되겠는데요”라고 일축해버려 다시 진열 계획에 대한 준비를 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우선 필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웃 일본 규슈지방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야요이유적과 박물관의 전시방법을 견학하기로 하는 조사팀이 만들어져 인테리어담당자ㆍ행정담당자ㆍ전공자들이 같이 방문하여 토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얻어진 많은 아이디어는 새로운 인테리어 프로그램 작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또 담당회사인 삼덕에서도 열심히 하여 진열준비가 탄력을 받아 박물관 건립의 큰 틀이 대개 잡혀지게 되었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선사문화 연구원장 이융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