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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는 태어난 지 약 40년이 되면 고통스런 훈련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깃털을 사용하다보니 깃털이 너무 무거워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가 힘들게 된 것이지요 또한 부리와 발톱도 굽고 무디어져 사냥하기도 힘들어 합니다. 이런 상황이 오니까 솔개는 살기위해 높은 산으로 날아가 둥지를 틀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를 돌이나 나무에 부딪쳐 빠지게 하여 새 부리가 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후에 새로 돋은 부리로 자기 발톱을 쪼아 발톱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새 발톱이 돋아나면 이젠 날개의 깃털을 뽑아 새 깃털로 바꿉니다. 이런 일 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솔개는 다시 30년의 새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짧은 동영상 솔개의 생태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광야의 길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래도 감사 한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을 신뢰하며 믿음 안에 살고 있어도 왠지 몸과 의식이 생각보다 둔해지고 무겁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예배하는 나의 모습, 기도하는 나의 모습..... 찬양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신앙생활 해도 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경건한 채 하는 종교인은 아닌지!.......이런 생각 속에 자기를 가두어 놓고 두리 뭉실 하게 신앙생활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을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마치 솔개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가 자신을 위해 고통스런 연단이 필요했듯이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믿음도 새롭게..... 마음의 창을 열고 주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다윗하면 항상 따라 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 중에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하나님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목동이었을 때도 골리앗과 싸울 때도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습니다. 사울에게 억울하게 도망 다니면서까지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도 사울 집안에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울이 가졌던 재산을 모두 그 손자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오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윗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영적 탈선입니다. 기차를 가끔 탈 때 철로를 보면 똑바른 평행선입니다. 그런데 철로 평행선이 이탈하며 탈선이요 대형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생활 중에 언제나 하나님과 평행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평행선으로 가야합니다. 다윗도 그렇게 하나님과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갔지만 한 순간 곁눈질하다가 영적으로 탈선한 한 사건이 발생 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표제문에 기록하고 있듯이 “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과 암몬사이에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왕궁을 이리저리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은 이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고자 치밀한 계획이 이루어졌는데 심복인 우리야 장수를 적진 깊숙이 보내 죽게 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계략대로 우리아 장수는 죽게 되고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것입니다. 왕의 권력으로 완전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속내는 어느 누구도 몰라 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윗이 이런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참회 기도를 하기까지 표제문에서 시간의 갭(gap)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때” 란 아마 다윗이 범죄하고 1년 정도 지난 후 선지자 나단을 만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밧세바 와의 동침 사건 전후(前後) 하나님과 기도생활이 깨어졌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잘 묻는 사람입니다. 전쟁에 나가서도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를 지을 때에는 그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그런 대로 잘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예배가 뜸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왔어요 얼굴을 보니 영적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제 하는데도 엉뚱한 소리만 합니다. 산만합니다. 집중력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냄새가 납니다. 한마디로 기도의 자리, 은혜의 자리가 그 성도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런 영적탈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죄책감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사람은 몰라도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모르리 없습니다.
어느 날 모든 것 다 아신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 왕에게 보냅니다.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고자했습니다, 삼하12:1-7a을 보면 나단선지자가 다윗 왕께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미지 읽습니다.)
1-4절.......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절......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7절...상반절........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 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어떠했을까요?.... 모두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자신 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바로 당신이라고 하니까 다윗왕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당시 왕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기에 한 사람 죽이고 살리는 것은 다 왕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감히 어떤 자리라고 왕 앞에 떠 버리는거야 당장 부하들을 시켜 나단 선지자를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 앞에 한마디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순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과 나단 선지자 앞에 다윗의 영혼이 벌거벗겨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다윗은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통하여 다윗왕은 주님 앞에 어떻게 기도 했는가 살펴보며 우리의 부족한 기도를 채우고자 합니다.
먼저 10절.....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은 기도하기를 먼저!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참회의 시 시편 51편을 묵상하면 하나님이란 단어가 28번 등장하는 반면, ‘나’ ‘내’라는 1인칭이 무려 32번이나 등장합니다.
무엇을 생각할수 있습니까? 다윗은 주님 앞에 통회 자복할 때 죄인인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범죄 한 죄인이요, 죽일 놈이라고 강조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죄인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실 때 아담은 말이 많았습니다....... 변명들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일절 변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정결한 마음으로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고,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회개 속에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사용되었던 ‘창조’인데 히브리어로 “바라” 입니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여 부르며 통회하는 다윗은 자신이 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 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제 불능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십시오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핸드폰을 사용할 때 잘못되면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단순히 걸레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는 것은 마치 폰을 깨끗하게 초기화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끗이 창조되어 새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 진정성은 정한 마음을 창조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셔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을 때 여전히 엣 사람의 모습 그대로 입니까? 이시간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은 다음 11절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즉 성령님이 떠나시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성령님이 나에게서 떠난다면 우리는 고아와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예수님 빈자리를 보혜사 성령님께서 채워주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매순간 성령님!!~~~ 떠나시면 안 됩니다. 성령님을 항상 사모하며 내 안에 모셔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연결 통로인 성령님 떠나지 마시기를 간절하고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가장 무서운 징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방황하는 죄인을 보다 못해 성령님께서 그 사람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떠나면 그 사람은 버려진 상태가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아십니까?..... 그가 왕이 되기 전 베냐민 지파에서 뽑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모습은 성령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아 후회하실 때 어떠했나요? 성령님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그 자리에 악령이 사울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사울 왕을 하나님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나에게서 떠나면 사탄의 먹잇감이 되어 죄를 먹고 음란의 노예가 되고 향락에 빠져 죽어가는 영혼이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거나 탄식하시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있는 가운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는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2-13절.....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구원의 기쁨이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구원의 기쁨이 무디어 지고 오염된 세상에서 다양한 사건을 접하면서 구원의 기쁨이 점점 희미하여 집니다. 다윗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았을 때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은 하나님과 언제나 화목한 교제가 이루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구원의 기쁨 즉 구원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단절시키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막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함 받아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요새에서 블레셋에서 유리할 때 그를 붙드는 힘은 주님과 친밀한 속삭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때마다 구원의 하나님..... 피난처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 곁에 언제나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12a.....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12a)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즐거움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임을 믿습니다.
14-15...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피 흘린 죄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 덮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타락한 죄인인 나를 회복시켜주시고 정직한 영 성령님의 역사로 새롭게 하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오직 주님 앞에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십시오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주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찍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소뿔이나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더 기쁘다고 했습니다.(시69:30-31)
다윗은 입을 열어 찬양하는 열망이 한걸음 더 나아가 온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했습니다.
주향성도여러분!..... 누구나 십자가 앞에 내 모습 이대로 보여 질 때 다윗처럼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한 마음으로 창조되어 성령님 기름 부으심을 입고 새롭게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같은 성령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