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준신 분께서,어찌 그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8,32)
제1장
기도에 대한 계시
기도의 보편적 소명
2566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무 無에서 유 有로 불러내신다.“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인간은,천사들 다음으로,“온 땅에 주님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한지”알아볼 수 있다.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숫함을 잃어버린 뒤에도,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다.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추구를 입증해 준다.
2567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신다.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자신의 우상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살아 계신 참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기도에서,성실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는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드러내시고,인간에게 차츰 인간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심에 따라,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 상호 간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말과 행위를 통하여,이 계약의 드라마는 마음속으로 파고든다.이 드라마는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
제1절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
2568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계시는,인간의 타락과 그 속량 사이에서,하느님께서 당신의 첫 자녀에게 탄식조“너 어디 있느냐?....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3,9,13)하신 질문과,외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면서“하느님,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10,7)하신 대답 사이에서 이루어진다.이리하여 기도는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기에 이르렀고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창조-기도의 원천
2569기도는 먼저 창조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된다.창세기의 첫 아홉 장에는 아벨이 양 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봉헌한일,에노스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 일,“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과 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노아의 번제물은,그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이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고 청렴하며,그가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창세6,9) 때문이다.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
살아 있는 존재들과 맺으신 불변의 계약을 통하여,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할 것을 사람들에게 기도할 것을 끊임없이 호소 하셨다.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특히 우리의 성조 아브라함부터이다.
약속,믿음의 기도
2570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그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창세12,4)바로 길을 떠난다.그의 마음은 전적으로“말씀을 따랐으며”,그는 순종했다.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의 귀 기울임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며,말은 부수적인 요소이다.아브라함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된다.말이 없는 사람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다.나중에야 비로소 말로 표현된 그의 첫 기도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그 기도는 실현될 것 같지 않은 하느님의 약속을 그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은근한 탄식이다.이렇게 처음부터,기도의 극적인 일면, 곧 하느님의 성실성을 과연 믿어냐 하느냐 하는 믿음이 시련이 나타난다.
2571하느님을 믿으며,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살아가던 성조는 신비로운 손님을 자신의 천막에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마므레에서 한 이 훌륭한 접대는 바로 참된 ‘약속의 아들’의 탄생 예고에 대한 전조이다.이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셨으니,아브라함의 마음도 동정하시는 주님과 일치하였고,대담한 신뢰로써 그들을 위해 감히 전구한다.
2572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으로 정화하시고자,그에게 주시겠다고“약속을 받은”(히브11,17)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그러나 그의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아브라함은“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시고”(창세22,8),“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히브11,19)이리하여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은,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실 성부를 닮았다.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
2573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과 당신 약속을 갱신하신다.야곱은 그의 형 에사우와 맞서기 전에 신비로운 ‘어떤 분’과 밤새도록 싸웠는데,그분은 그 싸움에서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거절했다.그러나 동틀 무렵 그분은 떠나기 전에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교회의 영적 전승은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곧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로 이해해 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 하는 모든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
(시편14,4)
시인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한다.“깨닫지 못하는가?”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의 문제가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 있음을 지적한다.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백성에게 나쁜 짓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나쁜 짓 하는 자들”(시편28,3)은 다른 나라의 억업자들이라기보다 약자들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
“내 백성”은 뒤이어 나오는 “의인”(5절)과 “가련한 이”(6절)다.“빵 먹듯”이라는 말은 악인이 백성을 억누르는 것이 빵을 먹는 것만큼이나 일반적임을 말한다.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권위를 의식하지 못하며 약자를 억압하는 자들은 자신만을 섬기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시편 14편의 전체적 의미:시편14편은 종교적인 질문과 도덕적인 질문을 다룬다.특히 무신론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점을 취한다.이 시편에서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의식이 없고 타락과 악행을 일삼는다.또한 나쁜 일을 하면서 약자를 억압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밥 먹듯이 집어 삼키려고 한다.그들은 하느님을 무시하고 옳고 그른 일도 무시한다.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그것은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지 않고 자기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하느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무서워 떨 것이며 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심을 확신하면서 살도록 도전을 받는다.시인은 주님이 가련한 이들의 피신처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그는 이스라엘이 구원되어 백성의 운명이 되돌려질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기도한다.사도 바오로는 로마 3,10-12에서 시편 14,1-3을 인용하며 이 시인의 관점에서 인간성을 바라본다.그는 우리에게 인간성에 대해 희망하기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감사드리도록 권한다.전체적으로 이 시편은 지혜롭고 선한 삶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관여하고 계심을 인정하면서 선을 행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고대하는 것임을 제시한다.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이 세상에 관여하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런 행동은 약자에게 위협이 된다.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약하고,강한 자들로부터 억압받는 충실한 이들 가운데 자리하신다.이 시편의 독자는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하도록 초대된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바오로딸)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하나도 없다.
(로마3,10-12)
전설이 사실이 되고,예술이 된다.베네딕토 16세의 평어
서양의 역사는 전설이 곧 사실이 되고 예술이 되는 역사다.산티아고 순례에 관한 배경에는 이슬람군대의 위협으로부터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말 보루를 지키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으로 성 야고보(야곱)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스페인말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영어로는 웨이 어브 세인트 제임스 Way of St.James라고 한다.현 교황 이전의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말한다.“이 길은 열정과 참회와 친절과 예술과 문화의 표현으로 씨뿌려진 길이다.이 길은 있는 그대로 구대륙의 정신적 뿌리를 우리에게 웅변해주고 있다.”
(282쪽 발췌)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이육사)
주님의 은총과 함께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