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함[白惟咸]의 묘갈명(墓碣銘) 김집(金集)
승정원 좌부승지를 지낸 백공(白公) 유함(惟咸) 의 묘갈명
휴암(休菴) 백공(白公, 백인걸(白仁傑))의 둘째 아들이 유함(惟咸)이니, 가훈(家訓)을 인습(因襲)하고 미덕(美德)을 계승(繼承)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장차 그 가문에 대업(大業)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문이 불행하고 시대와 운명이 어긋남으로 관직이 승선(承宣,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에 그치고 전야(田野)로 물러나니, 나이가 이미 73세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 정월에 개성(開城)의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돌아가니 제류(儕流)들이 애석히 여겼다. 그해 모월 모일에 마전군(麻田郡) 화진(禾津)의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고,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도 부장(祔葬)하였는데, 새로 정한 곳이었다.
공의 자(字)는 중열(仲悅)이고,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원조(遠祖) 휘(諱) 천장(天藏)은 고려조(高麗朝)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고조(高祖) 휘(諱) 효참(效參)은 지평(持平)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曾祖) 휘 사수(思粹)는 참교(參校)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지낸 조(祖) 휘 익견(益堅)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다. 고(考) 휘 인걸(人傑)은 곧 휴암공이니 조 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 수업(受業)하고 당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휴암공은 참찬(參贊)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追贈)받았다. 비(妣)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니 만호(萬戶) 안찬(安璨)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재질(才質)과 기량(器量)이 숙성(夙成)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재랑(齋郞)에 천보(薦補)되었고,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가 곧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이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弘文館) 관원을 선임하는 기록)에 올라 정자(正字)ㆍ박사(博士)ㆍ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는데, 계속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고, 이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발탁되었으니,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과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의 일이다.
이때 문성공(文成公) 이 율곡(李栗谷, 이이(李珥))이 막 세상을 떠남에 조정(朝廷)이 점차 불안해졌다. 공이 불길(不吉)한 징조(徵兆)를 예측하여 곧 관직을 버리고 용안(龍安, 용인(龍仁))의 전사(田舍)로 퇴거(退居)하였다. 한가한 때에는 도솔산(兜率山) 백운암(白雲庵)에 가서 머무르며 날마다 학도(學徒)와 더불어 강습(講習)으로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역난(逆難,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말함)이 일어나자 공이 그대로 퇴거(退居)하고만 있을 수 없어 경사(京師)에 들어가니,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다. 상소(上疏)하여 시사(時事)를 아뢰니, 임금이 가납(嘉納)하며 말씀하시기를, “백경(白卿, 백인걸을 가리킴)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구나!” 하였다. 이로부터 여망(輿望)이 날로 더하여 다시 이조[天曹]에 들어가 정랑이 되고 이어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조정(朝廷) 공론(公論)이 분분하여 뭇 소인(小人)들이 화를 떠넘기므로,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잇따라 찬출(竄黜)되었는데, 공도 또한 경흥(慶興)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왜변(倭變)으로 은사(恩赦)를 입어 남쪽으로 돌아가는데, 적이 이미 북변(北邊)에 난입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니,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이어 열읍(列邑)에서 곡식을 거둬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에 군량미를 공급하였고, 얼마 안되어 광녕(廣寧)의 군문(軍門)에 가서 유정(劉綎)의 군대가 머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봄에 품계가 올라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전직(轉職)되었다가, 곧 체임되어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나갔는데,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 겨울에 해임되었다. 병신년(丙申年)에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는 호군(護軍)으로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를 접대하였는데, 마침 당시 그가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를 무고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정응태는 조선이 양 경리를 변론(辯論)하고 있다고 하여 화를 내고, 거짓 사실을 널리 펴면서 ≪해동기략1)(海東紀略)≫에 있는 사실과 거리가 먼 말을 날조하여 증거로 삼으니, 이이첨(李爾瞻) 등이 당론(黨論)을 옆에 끼고서 때를 틈타 죄를 꾸며 얽어매니, 공이 하마터면 뜻밖의 일을 당할 뻔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사실이 아님을 통찰하시어 풀어주고 부안(扶安)에 도배(徒配)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방환(放還)되어 용안의 옛집으로 와서 강호(江湖) 사이에서 노닐다가,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개성(開城)으로 옮겼으니, 양주(楊州)의 선영(先塋)이 가깝기 때문으로 여기서 여생(餘生)을 마치었다.
공은 천성이 돈후(敦厚)하면서 확고(確固)하여 겉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처리하여 앞뒤로 돌아보며 주저하지 않았다. 몸가짐은 검소하여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편안하였으니, 관직을 떠나 있은 20년 동안 농사를 짓거나 혹은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면서, 비록 거친 밥과 채소국으로 사람이 감내 못할 처지에서도 여유로왔다. 자식을 가르침에는 엄격하여 의리(義理)의 방도를 따르고, 사악(邪惡)한 것에 빠지지 않도록 힘썼다. 이상에서 공의 (인물됨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부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현감(縣監) 김굉(金鍧)의 따님이다. 공보다 24년 먼저 졸(卒)하였다. 장남(長男) 백해민(白海民)은 고재(高才)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다음은 백선민(白善民)으로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를 지냈으며, 다음은 백신민(白信民)으로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였고, 다음은 백현민(白賢民)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품계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갑산 부사(甲山府使)를 지냈으며, 다음은 백헌민(白憲民)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흥록(金興祿)에게 출가하였다. 또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로 백철민(白哲民)ㆍ백시민(白時民)ㆍ백계민(白季民)이 있었고, 딸은 도윤해(都允諧)에게 출가하였다. 백해민은 아들이 없어 백선민의 아들인 백홍기(白弘基)를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참봉(參奉) 목낙선(睦樂善)에게 출가하였다. 백선민은 백홍망(白弘望)ㆍ백홍기(白弘基)ㆍ백홍유(白弘猷) 세 아들을 두었고, 세 딸은 각각 유학(幼學) 권종(權悰)과 김장곤(金長坤), 생원(生員) 남궁우(南宮楀)에게 출가하였다. 백신민은 백홍규(白弘規)와 백홍겸(白弘兼) 두 아들을 두었고, 두 딸 가운데 큰딸은 유학 최치숭(崔致嵩)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아직 어리다. 또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백현민(白賢民)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백홍제(白弘濟)ㆍ백홍윤(白弘胤)ㆍ백홍임(白弘任)이고, 두 딸은 유학 남식녕(南式寧)과 송유광(宋有光)에게 출가하였다. 또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백헌민은 자녀가 없어 백현민의 아들 백홍윤을 후사로 들였다. 김흥록의 두 아들 김지(金址)와 김기(金圻)는 모두 일찍 죽었고, 딸은 광흥수(廣興守) 변제원(卞悌元)에게 출가하였다. 그 나머지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다 쓰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백씨(白氏)가 현성(顯姓)이 된 것은 진실로 하늘이 정하신 바라, 대대로 여경(餘慶)이 많았으나 휴암이 특히 우뚝하구나. 공이 그 뜻을 이어 받으니 부자가 함께 아름답도다. 오름과 가라앉음에 운수(運數)가 있어 극진(極盡)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네. 나이 이미 늙으막에 전원에 묻히어 농사를 지으니, 몸은 비색(否塞)하되 마음은 형통(亨通)하여 그 명성을 잃지 않았네. 나의 명(銘)에 아첨함이 없이 이 단단한 비석에 새기니, 영원토록 변치 않으리.
각주
1) 성종(成宗) 2년(1471) 신숙주(申叔舟)가 왕명에 의해 찬진(撰進)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말함. 일본 본국(本國)을 비롯하여 구주(九州) 및 대마(對馬)ㆍ일기(壹岐), 유구국(琉球國) 등 제국(諸國)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의 교빙 왕래(交聘往來)의 연혁과 사신 접대의 절목(節目)을 기록한 책. 이후 수차에 걸쳐 추록(追錄)이 있었음.
承政院左副承旨白公 墓碣銘
休庵白公有第二子曰惟咸。襲聞承休。早登于朝。將大業其家。不幸時命乖舛。官止承宣。坎軻田野。年已七十有三矣。迺以戊午正月。病卒于開城之寓舍。儕流惜之。用其年某月某甲。葬于麻田郡之禾津子坐之原。叔夫人金氏祔焉。新卜也。公字仲悅。水原人。遠祖天藏。仕麗朝爲政堂文學。入我國。世冕。有冠高祖諱效參。持平贈都承旨。曾祖諱思粹。參校贈禮曹參判。祖諱益堅。王子師傅贈吏曹判書。考諱仁傑。卽休庵公也。受業趙靜菴。爲世名臣。位參贊。以淸白贈左贊成。妣順興安氏。萬戶璨之女。嘉靖丙午生公。才器夙成。中庚午司馬。薦補齋郞。丙子。釋褐入槐院。尋拜承政院注書。錄選弘文。歷正字博士,副修撰。常帶知製敎。俄爲兵曹佐郞正郞。仍擢拜吏曹正郞。則癸未甲申歲也。時栗谷李文成公新棄世。朝著不靖。公見爻象不吉。卽去官退居于龍安田舍。乘閑往棲兜率山白雲庵。日與學徒講習。若將終身焉。己丑逆難作。公不敢退在。入京拜司諫院獻納。疏陳時事。上嘉納曰。白卿有後矣。自是輿望日重。復入天曹爲正郞。轉議政府檢詳舍人。辛卯。朝論携貳。群小嫁禍。其間一時名流。竄黜相望。公亦謫于慶興地。翌年。値倭變。蒙赦南還。賊已闌入北邊矣。間關得達義州行在。拜直提學。俄調度列邑。供餉李提督軍。未幾。往廣寧軍門。請留劉綎兵。甲午春。陞秩拜承政院同副承旨。轉至左副。尋遞出牧黃州。乙未冬遞。丙申。奉使往還京師。丁酉。以護軍接伴丁主事應泰。適當丁交構楊經理之日也。丁怒我國伸理。幷肆誣捏。以海東紀略不近似語爲證。爾瞻等挾黨論。乘時羅織。逮公幾不測。上察其無實釋之。徒配于扶安。壬寅。還龍安舊莊。倘徉江湖間。丁巳。移住開城。爲近楊州先壟。以終餘日焉。公天性敦確。不喜修飾邊幅。遇事敢爲。不肯顧前後。持身儉素。隨遇而安。去位二十年。服勤畎畝。或漁釣爲生。雖疏食菜羹。人所不堪而處之裕如。敎子以嚴。務遵義方。不納于邪。斯見公之槪也已。夫人籍慶州。縣監金鍧之女。先公二十四年卒。男長海民。有儁才早卒。次善民。宗親府典簿。次信民。儀賓府都事。次賢民。武科階通政。甲山府使。次憲民。女適士人金興祿。側室男哲民,時民,季民。女適都允諧。海民無子。子善民子弘基。女適參奉睦樂善。善民三子。弘望,弘基,弘猷。三女。幼學權悰。金長坤,生員南宮楀。信民二子。弘規,弘兼。二女。幼學崔致崇。次幼。側子二人女一人。賢民三子。弘濟,弘胤,弘任。二女。幼學南式寧,宋有光。側子二人女一人。憲民無子女。以賢民子弘胤爲後。金興祿二子。址,畿。皆早死。女廣興守卞悌元。餘曾玄未盡載。銘曰。
白爲顯姓。天固有定。世多餘慶。休庵特起。公遂繼志。父子竝美。升沈有數。飛不盡羽。歲旣遲暮。渾跡田氓。身否心亨。不隕其聲。我銘不諛。鐫此貞玞。永世罔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