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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05월 29일 출간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 > 철학 > 교양철학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의학과 공중 보건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다고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인간의 어떤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죽음이 모든 것을 이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죽어갈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
그 자신이 의사이기도 한 가완디는 우선 의료계의 변화를 촉구한다. 관절염, 심장질환 같은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주체의 삶을 전체적으로 관리해야하며,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삶의 마지막 단계를 환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의식 변화 외에 우리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도 있다. 바로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방식으로의 사고 전환이다. 결국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단순명료하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에 매달리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 죽음이 결국 삶의 이야기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평상시 죽음을 직시하고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품위 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성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여러 차례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삶에는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저자소개
저자 : 아툴 가완디
저자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는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버드 보건대학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교수,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외과의이며 『뉴요커The New Yorker』지 전속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첫 저서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ions』은 내셔널 북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고,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Better』는 2007년 아마존 10대 도서에 선정되었으며, 『체크! 체크리스트The Checklist Manifesto』 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라 저술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최고의 과학 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머스 상을 비롯해 내셔널 매거진 어워즈를 2회 수상했고, 사회에 가장 창조적인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맥아더 펠로십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타임Time』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2015년 영국 『프로스펙트Prospect』지가 선정한 ‘세계적인 사상가 50인’에 선정되었다. 역자 : 김희정 역자 김희정은 서울대 영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가족과 함께 영국에 살면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채식의 배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견인 도시 연대기』(전 4권) 『코드북』 『두 얼굴의 과학』 『우주에 남은 마지막 책』 『영장류의 평화 만들기』 『아인슈타인과 떠나는 블랙홀 여행』 『내가 사는 이유』 등이 있다.
목차
서문
추천사
1 독립적인 삶 _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2 무너짐 _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3 의존 _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다
4 도움 _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5 더 나은 삶 _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6 내려놓기 _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
7 어려운 대화 _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_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에필로그
책 속으로
라자로프는 마뜩잖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날 포기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라자로프에게서 서명을 받은 후 병실 밖으로 나오자 그의 아들이 따라 나오며 나를 잡았다. 어머니가 중환자실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임종했을 때 아버지 자신은 저렇게 죽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고 저렇게 고집을 피운다는 얘기였다.
당시 나는 라자로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술에 따르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도 그가 원하는 삶을 되찾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변 능력, 활력 등 병이 악화되기 전에 누렸던 생활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길고도 끔찍한 죽음을 경험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추구한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_ 본문 13쪽, ‘서문’ 중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더 자주 넘어졌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짐은 오늘날의 모든 가족들이 그러듯이 자연스러운 조치를 취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간 것이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할머니의 뼈가 약해졌다고 진단하고 칼슘 복용을 권했다. 또한 그는 할머니가 평소에 먹는 약들의 복용량을 조정하고, 몇 가지 새로운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의사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앨리스 할머니는 균형을 잘 잡지 못했고, 기억이 가끔씩 가물가물했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게 분명했다. 할머니가 독립적인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의사로서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조언을 해 줄 수도 없었다. _ 본문 45~46쪽, ‘독립적인 삶’ 중에서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 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_ 본문 119쪽, ‘의존’ 중에서
루 할아버지는 애원하는 눈길로 셸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일을 그만두고 내 옆에 있을 수는 없는 거니?’ 그 생각이 셸리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셸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아버지를 충분히 잘 돌보는 게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루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셸리를 따라 몇 군데 시설을 둘러보겠다고 승낙했다. 누구라도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 같았다. _ 본문 140쪽, ‘도움’ 중에서
의학은 아주 작은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바로 이 부분이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어 내는데?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_ 본문 200쪽, ‘더 나은 삶’ 중에서
나는 마르쿠 박사에게 폐암 말기 환자들을 처음 만날 때 그들을 위해 무얼 해내길 바라는지 물었다. “1~2년 정도 그럭저럭 잘 지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죠.” 그가 말했다. “그게 내가 갖고 있는 기대치입니다. 새라 같은 환자의 경우 운이 아주 좋아야 3~4년 정도예요.” 하지만 이는 환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다. “환자들은 10~20년을 생각하고 와요. 어떤 환자를 만나도 같은 얘기를 듣게 됩니다. 사실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_ 본문 257쪽, ‘내려놓기’ 중에서
완화치료 팀이 도착한 후 소량의 모르핀을 처방하자마자 새라의 호흡이 즉시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새라의 고통이 줄어드는 걸 본 가족들은 문득 그녀를 더 이상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제는 가족들이 의료진을 말리고 있었다.
“의료진이 새라에게 카테터를 삽입하고 이것저것 하려고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 돈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얘기했죠.
출판사 서평
세계적인 사상가 아툴 가완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과 의학의 한계를 고백하다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인구 구조의 직사각형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현재 50세 인구와 5세 인구가 비슷하며, 30년 후에는 80세 이상 인구와 5세 이하 인구가 맞먹을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급속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65세 이상 인구가 2030년에는 24.3%, 2060년에는 40.1%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툴 가완디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이러한 사회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동안 현대 의학은 생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집중해 왔다. 하지만 정작 길어진 노년의 삶과 노환 및 질병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하고 인간답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이를 성취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수상 내역
― 『뉴욕 타임스』, 아마존 베스트 1위
― 『뉴욕 타임스』 31주 연속 베스트셀러
― 『뉴욕 타임스 북 리뷰』 2014년 가장 주목할 만한 책
― 아마존, NPR(미국공영라디오) 2014년 최고의 책
―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Apple iBooks 2014년 10대 도서
생명 있는 것들은 언젠가 죽는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전혀 놀랍거나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잊는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이는 부분적으로 의학과 공중 보건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다는 사실과 연관돼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 살기를 꿈꾸며, 현대 의학은 바로 그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외과 수술, 화학요법, 방사능 치료 등으로 대변되는 의학적 처치들도 죽음을 미루고 생명을 연장하려는 노력과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종국에는 죽음이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Being Mortal’이라는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의학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지막에는 가족과 작별의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병실에서 죽어 간다. 그 모든 것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개월에서 1~2년 정도의 생명 연장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얻은 약간의 시간 동안 우리가 ‘남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혹독한 치료와 그에 따른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노쇠해지거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죽어 갈 때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만, 인간답게 죽어 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여긴 집이 아니지 않니,
어서 집에 데려가 줘.”
윌슨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 제시가 심한 뇌졸중을 겪었다. 당시 제시의 나이는 쉰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뇌졸중으로 그녀는 몸 한쪽이 완전히 마비돼서 걷거나 서지 못했으며, 팔도 들 수가 없었다. 또한 얼굴 한쪽이 축 처졌고, 말투도 어눌해졌다. 지능과 인지 능력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돈을 벌러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혼자서는 씻을 수도, 요리를 할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빨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학에 다니던 윌슨은 전혀 수입이 없었고, 좁은 아파트를 룸메이트와 함께 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머니를 돌볼 길이 없었다.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어머니를 맡길 곳은 요양원밖에 없었다. 윌슨은 자기 대학 근처에 있는 곳을 골랐다. 안전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요구했다. “집에 데려가 줘.” _ 본문 142쪽
더 이상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육체와 정신이 점점 쇠락해 가면서 더는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과 보건 체계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해결하려 해 왔다. 하나는 ‘요양원nursing home’이라는 보호 시설을 만들어 노인들을 안전하게 수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년에 직면하는 각종 질병들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이 방식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자녀들 입장에서 보면 노년에 이른 부모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질병이라도 의학이 최선을 다해 해결해 주리라는 전망은 꽤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양원이나 공격적 치료에는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 바로 ‘삶의 질’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요양원’의 경우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획일화된 시설에는 ‘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기 결정권과 자율성을 빼앗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규칙과 안전에만 집중하는 탓에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 때문에 시설에 수용된 노인들 상당수가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진다.(본문 113~124쪽) 저자는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다시 ‘가족과 가정’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하면서도 삶의 질을 희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케런 브라운 윌슨이 처음으로 도입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은 간단히 말해 기존 요양원과 같은 도움을 제공하면서도 ‘독립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개념의 시설이다. 잠글 수 있는 문과 자기만의 가구가 있고, 실내 온도나 조명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며, 자고 싶을 때 자고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보장된다.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이 작은 변화만으로도 노인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존 요양원을 변화시키는 실험도 있다. 요양원 내에 동식물을 들이기도 하고, 인근 학교와 연대해 아이들의 생명력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빌 토머스가 체이스 메모리얼 요양원에서 한 실험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개, 고양이, 새, 식물, 아이들을 요양원 내에 들이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본문 141~149쪽)
체이스 요양원 주민들은 비교 집단 주민들에 비해 복용하는 처방 약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할돌과 같이 불안 증세에 먹는 향정신성 제재의 처방이 특히 줄어들었다. 약 구입에 들어간 비용은 비교 집단에 비해 38%밖에 되지 않았다. 사망률도 15% 감소했다. _ 본문 193쪽
빌 토머스의 실험이 요양원 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해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수치상으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노인들이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노년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죽음을 유예시키는 데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마무리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의학의 공격적 치료는 더욱 큰 문제를 가져다준다.
“아뇨, 그 애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이 모든 걸 그만 멈춰 주세요!”
“의료진이 새라에게 카테터를 삽입하고 이것저것 하려고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 돈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얘기했죠.
‘아뇨, 그 애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침대에 소변을 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료진은 또 혈압과 혈당 측정 등 이런저런 검사들을 하려고 했죠. 하지만 이제 검사 결과 같은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수간호사에게 가서 이제 모든 걸 그만 멈추라고 말했죠.”
이전 3개월 동안 우리가 새라에게 한 것들?수많은 스캔, 검사, 방사능 치료, 화학요법 치료 등?은 아무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그녀의 상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면 새라는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는 맨 마지막 순간에나마 평화를 찾았다. _ 본문 289쪽
인공호흡기, 영양공급관, 심폐소생술, 중환자실…. 오늘날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더 끔찍한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화학요법과 방사능 치료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정신은 피폐해져 간다. 극심한 통증, 구역질, 섬망 등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렇듯 죽기까지의 과정을 의학적 경험으로 만드는 실험이 시작된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있는 듯하다고 일갈한다. 실패라고 단언하는 까닭은 우리가 이 ‘싸움’을 통해 얻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극히 짧은 시간을 더 얻기 위해 잔인한 싸움을 계속할 뿐이다. 현대 의학은 사실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붙잡고 싸워 왔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가 결국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자신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먼저 의료계의 변화를 촉구한다. 이 소모적인 의학적 싸움을 중단하려면 우선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의료계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선결 과제가 있다. 하나는 ‘노인병학geriatrics’에 대한 관심이다. 관절염, 당뇨병, 심장질환 등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본문 62~65쪽) 둘째, 환자들과의 의사결정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이런저런 정보를 나열하기보다 ‘해석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환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고 이를 해석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처가 무엇인지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를 환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본문 306~309쪽)
해석적 태도가 중요한 까닭은 마지막에 이른 환자들이 원하는 게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만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치료에 매달리는 건 자신이 뭘 원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환자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고통을 줄이고, 삶의 품위를 유지하고, 다 끝내지 못한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일상의 가치들을 실현하고 싶기 때문일 뿐이다. 남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은 것이다. 더 큰 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다면, 어떤 환자도 맹목적인 생명 연장을 원하지 않는다.
“아툴, 나는 두렵다.
하지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사지마비가 진행되면서 머지않아 아버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앗아 가려 하고 있었다. 사지마비가 오면 24시간 간호, 산소 흡입기, 영양 공급관이 필요해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절대 안 되지. 그냥 죽는 게 낫다.”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날 나는 내 평생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아버지에게 던졌다. 커다란 두려움을 안고 하나하나 물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분노, 혹은 우울, 아니면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뭔가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안도감이 들었고 뭔가 명확해졌다는 걸 느꼈다. _ 본문 324쪽
의료계의 의식 변화 외에 우리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방식으로의 사고 전환이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죽음과 마지막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직면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어려운 대화’가 가져다주는 혜택은 적지 않다. 저자는 악성 종양에 걸린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아버지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고,(본문 322~324쪽) 완화치료 전문가 수전 블록의 아버지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 있는 정도’라면 견딜 만할 것 같다고 말한다.(본문 280~281쪽) 결과적으로 이 대화는 중대한 수술에서 임종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환자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 준 것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미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국 위스콘신주 라 크로스 지역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1991년부터 의료진과 환자들로 하여금 삶의 마지막 시기에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도록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이 지역 주민들이 생의 마지막 6주 동안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종말기 의료비용은 전국 평균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기대 수명은 전국 평균에 비해 1년이나 길었다.(본문 273~275쪽)
가족 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쉽지 않다면 이를 이끌어 줄 호스피스 상담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 하면 떠올리는 것은 생을 포기하고 순전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와의 대화를 통해, 호스피스가 단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선택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환자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의식을 유지하며 고통을 최소화하고 존엄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본문 248쪽) 이것이 최근 수십 년 동안 발전해 온 이른바 ‘완화치료’ 분야다.
결국 죽음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한 과정이다. 삶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인 것이다. 죽음 자체에는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죽음이 특별하고 중대한 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안에 우리 개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 10분쯤 결국 마지막 순간이 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손주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기에 없었고, 나는 대신 아이패드에 있는 사진을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모든 사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아버지는 다시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호흡이 한 번에 20~30초씩 멈추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 끝인가 하면 호흡이 다시 시작되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 곁을 지키며 어머니와 여동생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책을 보고 있었다.
오후 6시 10분쯤 결국 마지막 순간이 왔다. 나는 아버지의 호흡이 이전보다 더 오래 멈춰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멈춘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_ 본문 393쪽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에 매달리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고 가슴 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이자 학자로서 일반 대중들에게 가르침과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세계 유력지에서 꼽은 ‘세계적인 사상가’라는 사실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우리 가족과 비슷한 이들이다. 젊은 시절 공장 직공이었던 사람, 간호사였던 사람, 가게를 운영했던 사람, 한두 명의 자녀를 키우며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 왔고, 이러저런 소소한 일상의 기쁨에 만족해 온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원하는 것 역시 너무나 소박한 것들이다. 가족 및 친구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고, 주말에 있을 친구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고 싶어 하고,(본문 359쪽) 사랑하는 제자에게 한 번이라도 더 피아노 레슨을 하고 싶어 한다.(본문 378쪽) 그리고 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일화도 담겨 있다. 저자 자신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도 의사였지만, 그들에게도 생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저자는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끝까지 질병과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며 치료에 매달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희망이다. 죽음이 결국 삶의 이야기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회원리뷰
어떻게 죽을 것인가 dm**l6195 | 2015-06-21 | 추천: 0 |
이 책은 의사가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생각한 것들을 에피소드와 함께 풀어놓은 책입니다.
노화와 얽힌, 혹은 노화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여러가지 마지막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독립적인 삶, 무너짐, 의존, 도움, 더 나은 삶, 내려놓기, 어려운 대화, 용기'라는 목차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감정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교적 건강하지만 몇년 전만 해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불안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러 병들이 정체를 감춘 채 차곡차곡 찾아오고 하나 나았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하나가 찾아오고...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마지막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하는 것인가 많은 고민을 했고
고민이 많은 만큼 무기력해지는 스스로를 보며 괴롭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이제는 괜찮아.'라고 인정한 듯 보였던 그 시간들에 대해
아직은 생각보다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무너짐, 의존, 도움' 장을 읽으며 그때 느꼈던 무서움과 슬픔, 분노 등이 되살아나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책을 덮고 펼치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은 '용기' 부분입니다.
앞에서 상기시켜버린 묻어놨던 기억들을 헤집어서 마주하게 되었다면
그동안 인정한다, 그 속에서 배우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잘 풀리지 않았던
응어리와 분노들이 어느 정도 풀린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약한 몸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상황이 생기면
다시 풀려나와서 저를 괴롭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그래도 눈 감기 전에는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꽤 괜찮은 마지막을 맞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책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전에 무너지고 독립적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뒤쳐져있다.'가 아니라
'그때 무너지고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우리의 가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삶'과 함께 언제나 같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분들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고,
아직 젊지만 언제든 마지막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간디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매일 밤잠이 들면 죽는다.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다시 태어난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루하루 후회없이 살려 노력하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 더 배려하면서 살자.'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다지게 된 생각입니다.
이번 학기에 교생실습, 폭풍과제, 폭풍 시험 등 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이제 방학을 하며 한 숨 돌리게 되자 뭔지 모를 불안감과 무기력함이 들었습니다.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록 더 쳐지고 짓누르는 느낌이라
이 상태를 어떻게 인정하고 다시 극복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고비는 이 책을 읽게 되어 무사히 넘어갈 듯 싶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my**3 | 2015-06-20 | 추천: 0 |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정말 귀하게 이 세상에 나왔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이다.
그 죽음을 앞두고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마지막 시점에서 어떻게 죽는 다는 것은 너무 중요한 명제이다.
따라서 책의 제목처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사전에 확실하게 미리 알고 준비한다면 그 만큼 더 멋진 생의 모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책을 통해서 자신만의 확실한 모습을 향해 힘차게 도전하고, 마무리 단계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이든, 아니면 갑자기 질병 등이나 사고 등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설 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한 번 점검해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리라 확신해본다.
닥친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서 슬기롭게 받아들이는 등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큰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결국 나이를 먹게 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지만 얼마든지 그 과정을 더 슬기롭게 준비할 수 있다면 더 멋진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의사였고, 부모님들도 의사였지만 솔직히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마지막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들이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큰 힘과 기를 갖게 한다.
내 자신 좋아하면서 자주 활용하는 글귀가 있다.
그것은 ‘활력인생 건강백세’이다.
활달하게 주어진 일들을 즐겁게 처리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100세에 도전해나가자는 뜻이다.
이 글을 메시지로 만들어서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메시지 선물을 하고 있는데 받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내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내 자신에게 이 책은 너무 좋은 선물이었다.
내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람의 최고 멋진 마무리 순간을 장식할 수 있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도에 달하는 의학기술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의학에서도 제대로 못해주고 있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는 멋진 선물을 이 책을 통해서 획득해내리라 확신한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서다. 죽음을 두렵게 볼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는 운명으로 인정한다면 삶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진리를 이 책을 통해서 확보하고, 주어진 삶을 확실히 행하고서 아름다운 죽음보다도 진정으로 인간다운 죽음으로 갈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의미 있는 책 일독을 권한다.
[서평]어떻게 죽을것인가 ui**ng92 | 2015-06-13 | 추천: 0 |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속 에서 볼 때 생과 사는 함께 공유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곳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죽음에 대한 비약적인 말 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죽음을 포함 하고 있다고 생각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 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로 생각 하고 싶기도 하다. 살아가는 중에도 가끔은 사지의 세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자신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야기로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선 그리 깊게 생각 하고 싶지가 않을 때가 많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막상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이웃에 잘 아는 분의 이야기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생각 되는 것도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토대로 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고, 또한 어떻게 죽음에 대하여 대처 할 것인가 에 대한 과제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으로 당장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분이나 그 가족들에게 용기를 낼 수 있는 필요한 내용이 있으며 건강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한번쯤은 이 책을 읽어 보고 자신의 죽음은 어떻게 맞이 할 것인가 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 되어 진다.
나이가 든다. 는 것은 즉 몸이 노화 한다는 것은 우리 몸의 각 부품들이 노쇠해진다는 의미 이며 자신을 지탱해온 목적의식도 혼자 설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에선 그 순간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어떠한 방법이 가장 좋을까 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자신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독립적인 자신의 삶을 잃어 가기도 하며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 가기도 한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과정 중에는 치료만이 모든 것을 좌우 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마지막 까지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방법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일부를 내려놓는 마음도 때론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서 두려워하거나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런 질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죽음도 어떻게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 라는 해답도 의학에만 의존 하면서 절박함을 호소하면서 아쉬움을 보내는 것 보다는 죽음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삶을 보다 더 뜻 깊게 보내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더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남을 배려하며 감사하는 인생이 주어진 자신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멋진 인생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좋은 죽음이 아닌 좋은 삶은 위하여 fn**vil | 2015-06-13 | 추천: 0 |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생각은 많아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는 아무래도 거북한 게 인지상정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에게는 '삶이 전부'이고, '죽음은 전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저자 역시 죽음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나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바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지속되는 변하지 않는다. 대체로 변덕스럽기 마련인 사람의 바람이 한결 같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 된다.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큰 마음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드러내지 않는 이 암묵적인 바람은 바로 인간답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젊음을 깎아 노년의 창고를 채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젊음이 지나간 후의 삶도 만족스러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거다.
우리는 죽음에 '이어간다'는 표현을 달지 않는다. 이어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삶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온통 삶을 향하는 그 이유 말이다.
이 책은 모두 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5장은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노년의 삶의 희극과 비극을 담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엇갈린 삶 가운데 가장 소중했을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 왜 우리가 '좋은 삶'을 희망해야 하는지, 약해질대로 약해진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삶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나머지 3장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과정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가 보냈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통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켜주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피해갈 수 없다면 부딪혀야 하고, 부딪혀 부술 수 없다면 넘어서야만 한다.
죽음에 극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적어도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건 더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더 좋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의식을 잃거나, 혼미한 상태로 무균 상태의 병실에서 무수한 선과 호스를 달고, 단지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삶보다는 더 좋은 삶이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70년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며, 부지런하고 또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분이다. 6년 전 할머니는 욕실에서 넘어지셨다. 왜 넘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결과는 무척 좋지 못했다. 뇌에 출혈이 있었고, 오른쪽 반신은 차디차게 변해서 전혀 쓰지 못하게 됐으며, 말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병원 생활이 시작됐고, 찾아갈 때면 늘 답답한듯 가슴을 치며 눈물지으셨다. 애처로움, 안타까움을 넘어 그건 너무나 비참하고 가혹해 보였다. 할머니는 퇴원해서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치료와 투약이 이유였지만 결국 저마다의 사정으로 할머니의 병원 생활이 시작된 거다. 이제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여전히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신다. 몇 번인가 병원을 옮겼고, 처음과 달리 음식을 거부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속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할머니에게 일어난 일은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_119쪽」
이 느낌에 조금이라도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갇힌 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 생활의 명목은 '안전'과 '보호'다. 하지만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건 아무도 없다. 당사자조차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 일이 허다하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삶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노화와 질병의 위협 속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지, 그 순간이 온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정해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술을 하고, 장치를 달고, 진정한 의미의 삶은 누리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만 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 혹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삶과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받아들일 거다. 그렇다면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만 한다. 단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상태를 두고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삶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멀게는 뉴스, 영화, 드라마에서 가깝게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술과 항암 치료가 삶을 어떻게 망치는지 익히 보고 들어왔을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막상 자기의 일이 되었을 때 그런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일인 것마냥 당황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거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두려움이 오래 지속되고 당황과 두려움 속에서 삶의 다음 단계를 선택했을 때의 위험은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다.
저자는 의사다.
저자의 아버지도 의사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환자에게 선고하는 일에는 익숙했을지 몰라도 선고를 받는 일에는 놀라고 당황해했으며 두려워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 그것이 죽음의 근원적 속성이기에 두려워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저자가 의사라는 사실을 거듭 적은 이유는 저자가 의학과 의술에 의지해서 삶을 지속시키는 일에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술과 화학치료, 약물치료가 최선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연구에서 오히려 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게 밝혀졌고, 그렇기에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다. 의학적 치료가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환자에 대한 치료와 의학적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지나치지 않은 의학적 치료와 함께 호스피스 케어와 가족의 관심과 같은 의학 외적인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잠꼬대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럴 수 있다면 벌써 그렇게 하고 있겠지!"하고 꼬집어 말할 지 모른다.
나부터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에 더더욱 뜬금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학적인 시술과 치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죽음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드는 것이기에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직 삶이다. 어떤 삶을 원하는지,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삶을 구해아 한다는 것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인 셈이다.
언제 죽음이 나를 찾을지, 혹은 어느 때 소중한 사람들에게 죽음이 들이닥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생각하려고 애쓸 거다. 무엇이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한 일인지, 그 소중한 사람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함께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거다.
이 책은 죽음이 개인의 일이지만, 동시에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깨닫게 했다. 삶은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삶을 위해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만이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가 아닐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그은 밑줄 fn**vil | 2015-06-13 | 추천: 0 |
전공 교재는 나이 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이 알고 있던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꺼져 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공 교재뿐 아니라 거의 어디에서도 나이들어 쇠약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이는 들었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어디에나 있다. 사람인 이상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걸 알지만 그 죽음이 찾아든 그 순간 이전까지는 죽음을 외면하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살고자 하는 게 사람인 거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를 미루기만 한 탓에 길지 않은 마지막이 더 짧아지거나 아예 사라진 것처럼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병원의 침대에 몸에 온갖 관과 바늘을 꽂고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누워있으니)로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정말 이상적인 결말인 걸까?
이 책의 우리나라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지만 실제로 이야기하는 건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난 후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역시 '그래도 삶'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18쪽
그때는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느꼈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자는 외과 의사다. 무수한 죽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손으로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될 여지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의사에게조차 죽음의 자연스러움은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될 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거라고 한다. 특히 그 죽음이 찾아들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죽음과 그들을 같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마는 거다.
'죽음은 실패다'는 생각은 의사에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암과의, 사고의 상처와의, 죽음과의 싸움에 실패해 이제 죽음에 의해 희생될 희생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고 슬퍼하는 거다.
20쪽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일,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상태가 성공인지 아니면 진정한 성공이 달리 있는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허하다.
20쪽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흔한 풍경일 거다. '깨어날 지조차 불분명한, 수술의 결과 '정말 삶이 연장되는지'조차 모호하며, 그렇게 연장된 삶 동안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와 육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요양원에서의 삶 또한 만족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삶이 자유라면 그 자유를 잃은 삶은 이미 삶이 아니지 않은가.
43쪽
인류 역사상 나이 드는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시대는 없었다. 세대 간 힘의 균형이 재편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누렸던 통제력과 지위를 일부 나눠 주었지만 완전히 잃은 게 아니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대 수명과 평균 수명이 크게 올라갔다. 이런 경향에 따라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일에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다. 물론,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는 더 필요해지게 될테니 말이다. 현대화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해체는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노인과 가족은 분리되었다. 때로는 누가 사는지, 혹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옆집의 사람들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 씩 찾아다니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후회하는 일(동시에 안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거다. 가족의 의미는 끊임 없이 변해왔지만 지금처럼 급격하고 또 극심하게 가족의 개념이 흐릿해진 동시에 그 지위가 강등된 시기가 있었을까 하게 된다.
44쪽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 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생각하기엔 이르다고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를 잃는다는 건 자유와 자아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며, 자유에는 신체적인 자유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와 의식의 자유가 포함된다.
단순히 '죽음'이 곧바로 찾아온다면 사실 걱정할 것이 없다. 마음껏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단순하지 않다. 죽음에도 '과정'이 있고 그 과정 가운데는 '독립의 상실'도 들어 있다는 거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오래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결과를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스운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아직 준비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아직 젊다는 걸로 독립이 불가능해지는 시기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73쪽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늙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일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불편함과 예전같지 않음은 느끼지만 적응하는 존재이기에 그런 상태에도 적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당장은 큰 불편이나 이상이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쇠락'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약해졌다니!"하는 식으로 말이다.
94쪽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다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저자는 굳이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나이를 떠나 명백히 죽음에 이르는 길에 서 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일 거다. 정말 슬픈 건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거다. 죽음 뒤에 또다른 삶이 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만 잃는다면 그렇게 두려움이 크지는 않을 거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에 두려워지는 거다.
116쪽
병원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의회는 1954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지을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바로 이것이 현대 요양원의 시초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nursing home', 즉 요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시초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단지 '나이든 것 뿐'인 환자들이 병원에 이익이 되지 않기에 병실을 비우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요양원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지금은 어떤 분야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노인 모시기'가 상품으로 나오는 일도 있지만 말이다. 요양원의 생활은 정신이 맑을수록, 신체의 부자유가 클수록 괴로울 것만 같다.
119쪽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 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우스개로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서 감금 생활을 계속할 리 있겠는가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면서도, 잃어버린 신체의 자유와 함께 정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일을 경험한다. 책 속의 할머니가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감금됐다고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이것이 최선이다"고 하는 결론에서 선택되는 이 결과는 사실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누구보다도 그 안에서 감금됐다고 느낄 그 사람이 느낄 불행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155쪽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내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우리는 행복조차 유예한다. 그 이유는 지금은 더 나중의 행복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괴롭고 힘겨워도 그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현재의 불행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당장 내일, 아니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준비에 너무 많은 걸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애초에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157쪽
연구 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흔히 나이는 사고의 척도로 여겨진다. '젊은 사람이' 혹은 '나이들었으니' 하는 식의 이야기가 무척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이가 아니라 관점이다. 무엇에 더 큰 가치와 삶의 비중을 부여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172쪽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이런 상태를 비유하자면 무인도에 홀로 던져지면서 완벽한 식사와 잠자리와 함께 부루마블 게임이 제공된 것에 가깝지 않을까. 얼핏 보면 완벽하다. 먹을 것도 얼마든지 있고, 잠자리도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부루마블은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는 그저 '혼자'인 거다.
'당사자를 위한' 선택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당사자를 돌봐야 할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안다.
돈을 낸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시설에 버려둔 소중했던 존재를 잊고 지내려 하는 삶 역시 시설 속의 당사자들만큼이나 텅 빈 삶을 사는 셈 아닌가.
198쪽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부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니며 부여된 의미가 옳은지 그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의미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안다. 죽음이 가져올 허무함, 의미 없음을 대체할 의미를 발견하는 건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에는 큰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남는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가 전해질 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의미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다 해도 그 때는 그것에 공포를 느낄 사람이 없기에 의미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 된다.
218쪽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데 따른 투쟁은 곧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 유지하고 싶은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만큼 너무 쇠약해지거나, 너무 소진되거나, 너무 종속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만으로도 이 투쟁은 충분히 힘겹다. 우리가 의지하는 전문가들과 시설들이 이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위한 일', 혹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라는 미명 하에 취해지는 조치들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단지 그들의 번거로움과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자'가 된 그들은 이끌려 다니는 수가 많다. 그렇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고 압박해오는 질병과 나이듦 뿐 아니라 전문가와 시설과도 투쟁해야 할테니 무엇이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말인가.
228쪽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요.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최선의 보험이 아닌가.
248쪽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가 모든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술과 집중적인 치료보다 더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효과의 근원은 '현재의 삶을 누리는 일'이었을 거다. 수술과 약물 치료로 인해 세상, 소중한 사람들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348쪽
나는 아버지가 일어서는 걸 도와 드렸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난 반년 동안 걸어 다닌 거라고는 거실을 가로지를 때뿐이었다. 그 이상 걷는 걸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농구 코트를 지나서 콘트리트 계단 20개를 올라가 관중석에 마련된 가족석에 앉았다. 그 광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전혀 다른 방식의 케어 ―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의 의학 ―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어려운 대화가 이뤄 낸 일이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저자도 의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머지 않아 전신이 마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다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와 가족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던 거다. 저자의 아버지에게는 수술이라는 선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수술을 유예한다. 그리고 '치료될 가능성'보다 현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저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의학을 발견한다. '어려운 대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355쪽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디가 끝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어떤 행동 혹은 선택을 취하는 게 그렇게 현명한 선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누리기 위한 선택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두려움은 때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뒷걸음질치는 결과를 만든다. 두려움은 무엇도, 누구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373쪽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결론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면서도 계속해서 삶, 더 나은 삶, 최선의 삶을 이야기하던 이유가 잘 담긴 결론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은 있을 수 없다. 그 죽음이 아무리 편안한 단계를 지나온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디에도 '편안한' 죽음은 없다. 결국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라는 거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Fati)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카르페디엠(Carpediem), 죽음을 알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좋은 삶으로 이끄는 최선인 셈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