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오랜 세월 고립된 섬이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제주를 방문하여 제주에 머물게 되는 사람들은 유배되어 오는 사람들처럼 대부분 타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로 들어오면서 외부의 문화를 묻혀 들어왔고, 그것들은 그렇게 세월에 따라 조금씩 또는 대대적으로 제주도의 문화와 제주도민의 정신을 변화 시켜 왔다.
현대의 제주도를 변화시킨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이 1954년 봄에 제주를 찾아왔다. 그는 땅 끝까지 찾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희망과 노력이라는, 그 전에는 제주에 없었던 귀한 것들을 복음에 묻혀왔고, 그것들을 제주에 퍼뜨렸다.
그의 이름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 아일랜드 태생으로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그가 대서양을 건너고 미국을 거쳐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피난민이 들끓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때 그는 25세였다. 처음에 그는 제주에 들어와 한림에 있는 신도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고, 그 조그만 초가집이 그의 성당이었고 그의 출발점이었다.
1901년에 제주에서는 천주교도들이 도륙 당하는 '이재수의 난'이 있었다. 당시 천주교도들의 횡포도 있었지만 이에 반감을 가진 토착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200여 명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다가 관덕정 마당에서 목을 베었다.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그 난리의 여파가 채 식지않아 천주교는 환영을 받지 못할 때였다.
전쟁과 4.3이 훑고 지나간 섬에서 그가 보았던 제주사람들은 정직하고 교육열이 높았지만 굶주렸고 가난했다. 그는 선교를 수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주도민의 구휼에도 힘을 기울였고, 그는 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다.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4H를 조직하고, 한림수직을 세우는 등 일자리를 만들고 제주도민의 자립심을 고양시키는 일에 맥그린치 신부는 땀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신부가 아끼는 신도였던 한 동네처녀가 돈을 벌기 위하여 눈물을 뿌리며 서울로 상경했고, 공장에 취직하였던 그 처녀는 얼마 후에 산재 사고를 당하여 차디찬 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신부는 그 처녀를 끝까지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고,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일자리라는 것을 절감했다. 4H나 한림수직 등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노력의 결과는 중산간에 거대한 목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바로 성 이시돌 목장이다.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도네골은 목축이 번성한 곳이었고 그는 목장을 보면서 자랐기에, 제주도의 넓은 중산간 지대를 본 맥그린치 신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장을 건설했다. 그것이 나중에 제주의 축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저 유명한 이시돌목장이다.
이시돌은 중세 스페인에서 태어난 농부 출신의 성자 이름으로, 1622년에 농부들과 시골 공동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인물이다. 이시돌 목장의 사무실 마당에는 쟁기질 하는 이시돌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앞에 서면 목장을 건설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맥그린치 신부의 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축산의 부흥을 위하여 송당목장을 건설하고 제주축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그러나 이시돌 목장은 성공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풀밭에 우마를 방목하는 제주의 재래식 방법을 버리고, 황량하게 버려진 벌판을 갈아엎고 목초를 가꾸어 거기에 우마를 방목하는 선진형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시돌 목장의 성공은 아마도 두 대통령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관계자들에게 송당목장의 실패에 대하여 이시돌 목장은 되는데 송당목장은 왜 안되는냐는 박정희의 진노도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시돌 목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주도를 거대하게 변화시킨 역사적인 두 인물의 만남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이것은 그후 제주축산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 외에도 이시돌 우유, 의원, 양로원, 피정의 집, 수녀원, 등 그가 제주에 뿌려놓은 사랑과 복음의 증거는 수없이 많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런 것들은 피상에 불과하다. 그가 새로운 사업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제주사람들은 항상 ‘해보나마나 안 됩니다’ ‘일본사람들도 실패했으니 불가능 합니다’ 이런 말로 반대를 했다.
사람들은 가난과 실패에 젖어 조그만 일에도 자포자기했고, 맥그린치 신부는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등을 떠밀어 노력하면 성취한다는 진리를 깨우쳐 줬다. 패배감에 잡혀 있던 제주사람들에게 자립과 도전의 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것이 맥그린치 신부의 진정한 공로이다. 그는 패배감에 젖어있는 제주의 정신을 깨우치는 개혁을 한 것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5.16민족상, 석탑산업훈장, 막사이사이상 등 다수의 시상을 하기도 했고, 제주도 명예도민으로 임피제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는 팔십 평생 중의 3분의 2 이상을 제주에서 보냈으면서도 한라산 구경을 한 번도 못했을 정도로 그는 제주도민을 위한 봉사에 일생을 헌신했다.
이제 그의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제주는 그의 고향이자 그의 어머니가 되어 버렸다. 제주를 바꿨던 제주 방문자들 중에 그는 몇 안 되는 제주의 지킴이였고, 진정한 개혁자이자 천사였다. 그와 헤어지면서 '저의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데 다음에는 같이 놀러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사투리를 구사한다. "같이 다니십서게". 그는 제주도 사람임이 틀림없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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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퍼온글/토론방-프론티어타임스
이시돌에 가면 그의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의 결과에 놀라울 뿐이다.
나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네, 지금은 딴 길을 가고있지만, 농대를 간 이유가 그 분을 존경하였고, 제주도가 너무 못살았기때문에,,덴마크처럼 농업강국을 이룩하는데 조끔이나마 기여하고자, 중학교 때부터 유달영박사도 무척이나 존경해왔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