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저의 경험을 좀 소개할까 합니다.
저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좀 뭐 합니다만 지금 자신의 자산관리를 계획하고 계신 분들에게 혹 도움이 될까 해서 감히 오픈 하도록 하겠습니다.
@ 20살, 독립선언!!
저는 20살이 되던 해에 뜻 한 바가 있어서 출가했습니다. (절대 가출이 아닙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길.) 학교 앞에 30만원 보증금에 3만원 사글세를 구했지요. 그리고 모든 의식주를 저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30만원은 어머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학교는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납금은 한 학기에 6천 원하는 학도호국단비(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한결 부담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사 볼 돈이 없어서 늘 책 없이 수업에 들어갔고 시험이 되면 친구들 책을 빌려보곤 했습니다.
그래도 학생의 신분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과외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롯데리아에서 시간당 450원을 받고 일하기도 하였고 아이템플이라고 하는 학습지를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학교 도서관 식당에서 빈 그릇을 날랐고 묵동 파출소에서 방범대원도 하였고 겨울이면 찹쌀떡을 팔기도 하였지요.
그래도 늘 돈이 모자라 배가 고팠습니다. 젊은 혈기에 선배들에게 밥 사달라는 말은 창피해서 못 하고 늘 막걸리를 사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 앞에는 막걸리 집이 많았고 그렇게 선배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 얻어 마시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깍두기 대신 파전 같은 안주라도 먹게 되면 제 위장은 매우 호사하는 편이었지요.
지금부터 사나이가 눈물을 흘린 사연인니다. ㅠ.ㅠ
@ 방범대원 때 흘린 눈물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묵동 파출소에서 방범대원 일을 할 때였습니다. 시간당 1천 원 정도를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면 하루에 6천원을 벌 수 있어서 없는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제가 있던 곳은 학교 근처였습니다.
새벽 4시에 버스가 다닐 리도 만무하고 택시를 이용하자니 하루 번 돈의 상당량이 날라가서 중고자전거를 5천원 주고 구입했습니다. 5천원밖에 안 한 이유는 브레이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브레이크가 없다보니 마음껏 속력을 낼 수 없었고 정지할 때는 제 긴 다리를 쭉 뻗어서 자전거를 세우곤 하였지요.
어느 날 자취방 근처에 다 와 가는데 택시가 갑자기 우회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택시는 차고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회전을 한 것이었지요. 저는 놀라서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했지만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관계로 할 수 없이 그냥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택시 기사는 놀라서 내려 저에게 어디 다친데 없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다친 데가 없다고 말을 하며 그냥 가시라고 했는데 그 때 갑자기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파서 운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제 삶이 서러워서 눈물이 펑펑 나왔습니다. 새벽 한 길에서 한참을 울다가 겨우 눈물을 멈추고 자전거를 끌면서 제 자취방으로 향하는데 왜 그렇게 산다는 것이 서글프던지요....ㅠ.ㅠ
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련하네요~
@ 자취방에서 흘린 눈물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자취를 처음 시작하면서 제대로 이불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연탄 살 돈이 없어서 그냥 냉방에서 잤습니다. 밤이 깊으니 몹시 춥더군요.
그 당시 제가 가진 이불은 분홍색 담요 한 장이었습니다. 이 담요를 깔려고 하니 덮을 이불이 없고 덮으려고 하니 바닥은 차고, 그래서 꾀를 내어 반을 접어서 반은 깔고 반은 덮었지요.
그런데 182센치나 되는 제 키가 그 담요로 모두 커버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도 추워서 중간에 일어나 양말을 두 개 껴 신고 오버에 입고 모자를 쓰고 그리고 웅크리고 잤습니다.
이 때도 눈물이 나더군요. 솔직히 이 때는 추워서 울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때의 일들이 저에겐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하고 돈이 얼마나 귀중한지 제 몸으로 체험을 하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은 바로 가난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사글세방에서 흘린 눈물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군에는 장교로 갔습니다. 장교로 가면 봉급을 받을 수 있다기에 자그마한 돈이라도 모을 량으로 장교로 갔었더랬습니다.
동료 장교들이 강원도 산골에서 외로움을 피하려고 술집에 갈 때에도 저는 독신장교숙소에서 그냥 지냈습니다. 술이라고 하는 것이 제가 한 번 얻어먹으면 또 한 번은 사야하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아예 술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학 때 하도 마신 술로 인해 위장이 헐어 속이 좋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 삭월세로 시작한 신혼 때 흘린 눈물
그리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저의 장인어른은 소위 재야인사라고 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가 그러하듯이 명망가이지만 돈은 없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 분이 그러시더군요.
“김서방, 내가 자네를 오래 보아왔는데 내 자네의 인격을 믿네. 내 우리 딸년 혼수를 못해 주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게.”
장인어른이 제가 결혼할 때 선물로 주신 것은 족자 한 개가 다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저와 저의 아내에게 당시 유행했던 갤럭시 시계를 사 주는 것에 그쳤습니다.
결국 저와 저의 아내는 빈손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장만한 신혼방은 보증금 50만원에 7만 원 짜리 사글세방이었습니다. 창동 역 근처에 있는 빌라의 방 한 칸을 세 들어 사는 것이라 부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란다에서 밥을 해 먹었습니다. 가스렌지도 없어서 부루스타로 밥을 해 먹었지요. 방은 얼마나 좁은지 아내와 제가 둘이 누우면 더 이상의 공간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아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더운 물이 나온다고 냉큼 머리를 감은 것이 화근이었지요. 그런데 그 더운 물은 주인집 아저씨가 샤워할 물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던 때여서 더운 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데워지려면 시간이 걸리는 그런 때였지요.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 셋방살이 하는 주제에 더운 물 쓴다고 타박을 맞고는 아내는 서럽게 울었습니다.
@ 16평 아파트에서 흘린 눈물
그 곳에서 1년을 있다가 16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서울에는 감히 집을 얻지 못하여 인천에 있는 서민아파트를 구했습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은 평당 1백만 원이 채 되지 않는 1,510만원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700만원은 20년 장기로 융자를 받고 350만원은 3년 짜리 융자를 받아 실입주금은 460만원이었습니다. 그나마 이 돈마저 모자라 은행적금을 담보로 잡아 또 융자를 받아 보충했지요.
당시의 판단으로 조금 무리가 가는 범위이지만 아내와 저의 봉급을 합치면 겨우 겨우 갚아나갈 수는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이사를 간 16평은 마치 학교 대운동장 같았습니다. 이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요리를 할 수 있었고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화장실이 있었고 작은 방에는 책상과 책들을 갖다 놓을 수 있었지요.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곳에서 저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지금 저의 아이는 강원도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가 벌써 18년 전이군요.
<오랜만에 옛날을 더듬으며 글을 쓰다보니...너무 길어지네요~
24평으로 옮긴 이야기는 다음 칼럼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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