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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주 슬리피홀로에서 시작되어 뉴욕 맨해튼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거리이며,
그 근처 지역을 뜻하는 지역명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제일 번화한 곳은 타임스 스퀘어와 그 부근 지역이다.
맨해튼(Manhattan)은
미국 뉴욕 주 뉴욕의 자치구 중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자치구로,
허드슨 강에 있는 섬을 포함하여 본토의 몇 블록을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맨해튼은 뉴욕 주의 뉴욕 군(New York County)과 동일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맨해튼 섬(Manhattan Island)을 비롯해
워즈 섬,
밀 록,
엘리스 섬 등을 포함하고 있다.
브롱크스와 밀접해있는 지역인 마블힐 역시 맨해튼의 일부이다.
맨해튼이라는 이름은
헨리 허드슨의 Halve Maen 호의 선원 로버트 주엣의 신분증에 적혀있던
Manna-hata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1610년 지도에는
허드슨 강의 옛 이름인 모리셔스 강 서쪽과 동쪽 지역을 각각
Manna와 Hata로 묘사하고 있다.
맨해튼이라는 단어는
레나페어로 "많은 언덕의 섬"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뉴욕 군은
유타 군처럼 주의 이름과 동일한 명칭이다.
맨해튼을 주소에 New York, NY 또는 Manhattan, NY라고 표기한다.
이 지역은 원래
레나페족이 살던 곳이였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부탁을 받은 탐험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땅을 발견하였다.
La Dauphine 호를 타고온 베라차노는
어퍼 뉴욕 만을 발견하였고,
이 지역의 이름을 뉴 엉글렘(New Angoulême, Nouvelle Angoulême)이라고 붙였다.
베라차노의 보고서에는
"매우 큰 강"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 후, 베라차노는 어퍼 뉴욕 만을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이름을 따서,
Upper New York Bay the Bay of Santa Margarita 라는 이름을 붙였다.
헨리 허드슨은 1609년 9월,
맨해튼 섬으로 갔으며,
그곳에는 여전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허드슨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올버니로 이동할 때까지
강을 허드슨 강이라고 불렀다.
1614년, 뉴네덜란드가 1614년 맨해튼 남단에 모피 무역을 위해 식민지를 세웠다.
1625년, 맨해튼 섬에는
포트 암스테르담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뉴암스테르담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뉴욕이 탄생한 연도는
포트 암스테르담이 건설된 연도인 1625년도로 인식되고 있다.
피터르 얀스준 샤겐의 ons Volck 라는 문서에 의하면
1626년
레나페족에서 맨해튼 섬을 현재로는 약 1000달러 정도인 60휠던 만큼의 물품과 교환했다고
적혀있다.
dyzm 1647년, 페터 스토이베산트가 뉴암스테르담의 마지막 총재로 임명되었다.
뉴암스테르담은
공식적으로 1653년 2월 2일 도시로 통합되었다.
166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잉글랜드가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였고,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뉴네덜란드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1674년 11월 이 지역을 잉글랜드에게 영구적으로 이양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네덜란드는 런 섬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 지배에 반대하여,
1765년 뉴욕에서 13개 식민지가 참여한 인지세법 회의가 열렸다.
영국의 인지세법에 반대하여
맨해튼에서 시위를 하였다.
자유의 아들들은 영국 관계자들과 대치를 하였으며,
1775년 뉴욕 주의회가 권력을 쥘 때까지 계속되었다.
맨해튼은
뉴욕 뉴저지 방면 전략의 중심지였으며,
미국 독립 전쟁의 크고 작은 전투가 맨해튼에서 발생하였다.
1776년 행해진
미군이 대패한 후,
맨해튼은 영국군의 북아메리카의 군사적, 정치적 거점이 되었다.
같은 해에, 대화재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1783년 11월 25일, 조지 워싱턴이 탈환하기 전까지
영국군의 점령은 계속되었다.
연합 회의가 뉴욕에서 열렸으며,
뉴욕은 미국의 수도가 되었다.
1790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미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상실하였으나,
뉴욕에서 제 1회 연방 의회가 열리고 권리 장전이 제정되었다.
이 무대가 된 것은 월 가의 페더럴 홀이었다.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정책으로
뉴욕은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819년에 이리 운하가 개통되어,
대서양의 항구와 북아메리카 내륙의 광대한 농업 시장이 연결되었다.
1854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태머니 홀은 수년간 정치계를 장악했다.
센트럴 파크도 1857년 개장되었으며,
미국의 도시 중 최초로 경관 디자인된 공원이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미국 남부 지역에서 크게 상업적으로 발전하였다.
독일계와 아일랜드계를 포함한 이민자들이 많아졌다.
또한, 미국 남북 전쟁 때의 징병제에 대한 불만으로,
1863년 뉴욕 징병거부 폭동이 발생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서 최악의 폭동의 하나가 되었다.
남북 전쟁 이후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었다.
맨해튼은 미국에서 새롭고 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수백만명의 첫 번째 장소가 되었으며,
1886년 자유의 여신상을 프랑스에게 선물받았다.
이민자들이 많아지자,
사회적으로 변동이 오기 시작하였다.
저임금 노동자가 가득한 나라에서,
맨해튼은 혁명의 온상, 생디칼리즘, 노동조합의 도시가 되었다.
1883년, 이스트 강을 가로지르는 브루클린 교가 개통되었다.
1874년, 브롱크스 군의 서쪽 지역이 뉴욕 군에 합병되었고,
1895년 현재의 브롱크스 군의 나머지 지역이 합병되었다.
맨해튼과 브롱크스 군은 여전히 같은 군이였으나,
1914년 브롱크스 군은 다시 분리가 되어 현재의 경계가 되었다.
뉴욕 지하철이 1904년 개통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대이동으로
남부에서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맨해튼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1916년까지 맨해튼에 사는 아프리카계 사람은
북아메리카에서 최다가 되었다.
금주법 시대에는 할렘 르네상스가 번성하고,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라 초고층 빌딩이 지어지기 시작하여
도시의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1925년,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1911년 3월 25일 ,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 화재로 인해,
146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이 결과, 소방서와 공장의 안전 기준이 대폭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대공황 시대에는
피오렐로 라가디아가 시장으로 선출되어
시정을 좌지우지해 온 이익 집단 태머니 홀은 80년에 걸친 정치적 지배를 잃었다.
1930년대,
GE 빌딩 등
초고층 건물들을 세우며
맨해튼은 대공황 시기에도 불구하고
라가디아의 정치를 받으며 도시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부흥이 시작되었다.
주택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 졌으며,
대표적으로 스타이베선트 타운 - 피터 쿠퍼 빌리지가 1947년 오픈하였다.
1951년,
국제 연합은 처음부터 맨해튼 동쪽에 본부를 이전하였다.
많은 미국의 주요 도시와 마찬가지로,
뉴욕은 1960년대에 인종 폭동이 많이 발생하였다.
1970년대까지,
경제 문제와 범죄율 상승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1975년,
도시 정부가 파산에 직면하고,
1975년 10월 30일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는
"Ford to City: Drop Dead"라고 헤드라인 뉴스를 내보냈다.
연방 대출과 채무 구조 조정을 통해 조금씩 상황이 진전되었고,
뉴욕 주의 금융 조사에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는 월 스트리트가 다시 탄생하였고,
세계 금융 산업의 중심의 역할을 다시 탈환하였다.
또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에이즈가 발생하였으며,
GMHC와 ACT UP이 설립되었다. 맨해튼의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민족인 백인은
1940년 83.5%였던 것이, 1990년 58.3%로 감소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살인 사건이 2,245건이나 발생하였으나,
2008년에는 537건으로 줄어들었다. 마약 관련 범죄에 대해서는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다.
다시 인구는 유입되기 시작하여,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월 스트리트는 낮은 금리와 부동산 시장의 성장을 가져왔다.
2001년 9월 11일,
2개의 항공기가 쌍둥이 빌딩인 세계 무역 센터에 충돌하여 건물이 무너졌다.
또한, 제 7 세계 무역 센터도 무너졌다.
건물의 붕괴는 고층 빌딩 주변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으며,
약 3000명이 사망하였으며,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그 이후, 로어맨해튼의 정상화가 시작됐다.
국립 9·11 테러 메모리얼 & 박물관의 기념관은 2011년 9월 11일 개관하였으며,
박물관은 2013년 개관할 예정이다.
세로 지어지는 신세계무역센터도 또한 건설중에 있어,
현재 7 세계 무역 센터와 4 세계 무역 센터는 개장했으며,
프리덤 타워라는 별칭이 있는 1 세계 무역 센터는 2014년 개장되었다.
맨해튼은 기반암이 맨해튼편암으로 알려진 운모 편암으로 되어있다.
변성암이 강하여, 맨해튼의 어디든 초고층 건물들을 짓기에 적합한 땅으로 되어있다.
센트럴 파크 내의 래트 락은 그 예의 하나이다.
맨해튼을 서쪽과 동쪽으로 나누며,
맨해튼은 크게 다운타운 (로어 맨해튼),
미드타운 (미드타운 맨해튼),
업타운 (어퍼 맨해튼)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해튼 섬은 서쪽에 흐르는 허드슨 강과
동쪽에 흐르는 이스트 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는 할렘 강이 흘러
브롱크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에 위치한 랜들스아일랜드, 워즈 섬, 루스벨트 섬과
남쪽에 위치한 거버너스 섬, 리버티 섬, 뉴욕 항을 포함한 작은 섬
또한 맨해튼의 일부이다.
섬 자체의 면적은 59㎢이고,
21.6km로 길며,
3.7km 너비이다.
뉴욕 군으로의 총면적은 87.5㎢이다.
이 중 육지면적은 섬 자체의 면적과 같은 59.5㎢이며,
수면 면적은 28㎢이다.
뉴욕 카운티 북쪽에는 브롱크스가 위치하고 있다.
마블힐은 섬 면적의 일부였지만,
1895년 운하를 만들면서 섬과 브롱크스 쪽 영토로 분리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전에 브롱크스 쪽의 마블힐은 맨해튼의 영토가 되었다.
마블힐은 사람들에 의해 맨해튼의 영토가 바뀐 예가 되었다.
뉴욕 자치구들은 네덜란드 통치시기부터 간척을 시작하여, 영토가 현재는 많이 바뀌었다.
19세기 초반,
로어맨해튼은 허드슨 해안에 있는 그리니치 스트리트부터 웨스트 스트리트까지
쓰레기 매립지로 확장하였다.
이 지역의 토사를 이용하여 지어졌다.
또한, 그 때의 토사를 이용하여 예부터 항구였던 방파제 사이를 매립하여
배터리 파크 시티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강쪽으로 210m가 확장되었으며,
37ha를 덮었으며, 1.9km의 강변 산책로와 12ha의 공원이 만들어졌다.
지질학적으로, 맨해튼의 지층의 주된 특징은
아래에 있는 기반암이 미드타운 근처는 올라와 있으며,
29번가와 커낼 가 사이의 지표면은 내려가있으며,
다시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지역으로 오면 올라와 있다.
이 덕분에 미드타운과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지역에는 초고층 건물이 밀집되어 있다.
맨해튼은
조지 워싱턴 다리의 고속도로 등으로
뉴저지 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동쪽에는 브롱크스,
동쪽에는 퀸스,
남쪽에는 브루클린과 롱아일랜드가 위치하고 있다.
스태튼아일랜드는 스태튼아일랜드 페리로 이동할 수 있다.
페리 터미널은 배터리 파크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811년 위원회 계획에 따라,
맨해튼은 격자식으로 도로가 되었다.
맨해튼에는 12개의 애버뉴(Avenue)가 있는데,
애버뉴는 허드슨 강 평행하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1자로 각각 30m 폭으로 된 도로이다.
1번 애버뉴는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갈수록 숫자는 높아져 간다.
즉, 가장 서쪽에 있는 도로는 12번 애버뉴이다.
1번 애버뉴 근처에는
추가적인 애버뉴들도 또 있는데,
그 애버뉴는 1번 애버뉴 동쪽으로 애버뉴 A, 애버뉴 B, 애버뉴 C, 애버뉴 D로 총 4개가 있다.
A부터 B까지의 지역이기 때문에 알파벳시티라고 불린다.
수많은 스트리트(Street)는 동에서 서를 잇는 스트리트들은 폭이 18m이고,
각각의 스트리트 사이의 거리가 약 61m이다.
거리와 블록을 합치면 79m가 되며,
1마일당 정확히 20개의 블록이 있다.
맨해튼의 전형적인 블록은
폭 250피트 (76m)이며, 길이는 600피트 (180m)이다.
원래의 계획에 따르면,
155개의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리로 만들려고 했었지만,
맨해튼 최북단의 코너 부분까지 하여 총 220개의 거리가 되었다.
맨해튼 북부의 브롱크스까지 거리 숫자 시스템이 적용되며,
맨해튼의 거리가 규칙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브롱크스에 263번가까지 이어져있다.
34번가, 42번가, 57번가, 125번가와 같은 15개의 거리는 30m 폭으로 지정되었다.
이 거리들은 교통이나 쇼핑에서 중요한 거리가 되었다.
제일 잘 알려진 일반적인 거리와 다른 예외의 경우이며,
브로드웨이는 맨해튼 북부의 볼링 그린부터 브롱크스까지 계속 이어져있다.
브로드웨이는 맨해튼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이어져 있다.
브로드웨이의 교차점으로는
유니언 스퀘어,
콜럼버스 서클이 있다.
맨해튼의 격자식 도로는
맨해튼헨지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현상은 5월 말과 7월 초에 발생하는데,
태양이 일몰하면서 거리와 태양이 나란히 놓여있어 햇빛이 바로 비치는 현상이다.
뉴욕 군은
미국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군이며,
세계에서도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201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1,585,873명이다.
또한, 미국의 군 중 가장 부유한 군으로,
2005년 기준으로 1인당 소득은 100,000달러를 넘었다.
맨해튼은 뉴욕의 자치구 중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으며,
면적으로는 제일 작다.
맨해튼은 미국에서 상업적, 재정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로어맨해튼에는
뉴스, 잡지, 책과 같은 여러 대중 매체의 출판업자들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한 라디오, 텔레비전, 통신 회사들이 이곳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맨해튼에는 유명한 랜드마크,
관광지, 박물관, 대학교가 많다.
또한 국제 연합 본부가 있는 곳이다.
맨해튼은
뉴욕과 뉴욕 대도시권의 중심지이며,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