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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인도의 모든 것이다
印度이야기/ 인도 기차와 ‘느림의 미학’
보드가야에서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도 델리에서 출발해 라자스탄, 우타르프라데시 그리고 비하르를 관통해 오리사 주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20일 동안의 북인도 유적지 답사가 일단락될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도 겪으며 계획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앓아서 며칠 동안 드러눕기도 했거니와 거치는 역마다 연착되기를 거듭했던 기차가 문제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델리에서 멀어질수록 연착 시간은 설상가상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괴롭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일종의 인도식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탈리(Thali) |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다 대합실에서 잠들다. |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1909년의 인도 철도망 |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인도 철도망 |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대륙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종단 기차 여행만한 게 없다. |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푸리의 자가나트 사원과 야다 라뜨라 축제 |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인도다운 해변 도시 '푸리' |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印度이야기/ 인도 기차와 ‘느림의 미학’
보드가야에서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도 델리에서 출발해 라자스탄, 우타르프라데시 그리고 비하르를 관통해 오리사 주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20일 동안의 북인도 유적지 답사가 일단락될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도 겪으며 계획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앓아서 며칠 동안 드러눕기도 했거니와 거치는 역마다 연착되기를 거듭했던 기차가 문제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델리에서 멀어질수록 연착 시간은 설상가상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괴롭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일종의 인도식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탈리(Thali) |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다 대합실에서 잠들다. |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1909년의 인도 철도망 |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인도 철도망 |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대륙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종단 기차 여행만한 게 없다. |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푸리의 자가나트 사원과 야다 라뜨라 축제 |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인도다운 해변 도시 '푸리' |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보드가야에서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도 델리에서 출발해 라자스탄, 우타르프라데시 그리고 비하르를 관통해 오리사 주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20일 동안의 북인도 유적지 답사가 일단락될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도 겪으며 계획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앓아서 며칠 동안 드러눕기도 했거니와 거치는 역마다 연착되기를 거듭했던 기차가 문제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델리에서 멀어질수록 연착 시간은 설상가상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괴롭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일종의 인도식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탈리(Thali) |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다 대합실에서 잠들다. |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1909년의 인도 철도망 |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인도 철도망 |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대륙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종단 기차 여행만한 게 없다. |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푸리의 자가나트 사원과 야다 라뜨라 축제 |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인도다운 해변 도시 '푸리' |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보드가야에서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도 델리에서 출발해 라자스탄, 우타르프라데시 그리고 비하르를 관통해 오리사 주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20일 동안의 북인도 유적지 답사가 일단락될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도 겪으며 계획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앓아서 며칠 동안 드러눕기도 했거니와 거치는 역마다 연착되기를 거듭했던 기차가 문제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델리에서 멀어질수록 연착 시간은 설상가상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괴롭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다.
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일종의 인도식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탈리(Thali) |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다 대합실에서 잠들다. |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1909년의 인도 철도망 |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인도 철도망 |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대륙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종단 기차 여행만한 게 없다. |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푸리의 자가나트 사원과 야다 라뜨라 축제 |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인도다운 해변 도시 '푸리' |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느림의 미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숙명 같은 인도의 느림에 반발하고 다투다가 끝내 지쳐버려 포기하고 나자 그 느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해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한국형 인간이 이젠 무한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느림 또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고 쓰다가 지치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좀 더 철학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느림은 인도에서 신화와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인도에 매료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특유의 느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리스인들도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맡긴 채 느리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며 위대한 예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날씨만 좀 덜 더웠더라면 인도도 그에 못지않다. 여행을 하든, 현지에서 지내든 인도는 거부하고 부정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주가 훨씬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편안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마련일 테지만 21세기의 야생 도시에서는 야생의 룰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자르(Bazaar)*를 오직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몇 시간을 헤맸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볼 일을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에서 곧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사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왼손잡이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다. *바자르(Bazaar)-시장을 의미한다. 여행 초반만 해도 어디서든 티슈를 베개 삼아 깔고 누워야 했는데 이젠 아무 곳에서나 편히 잠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印度주의적 面貌’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빠른 현지화를 거들었다. 스스로 거울에 비춰 보아도 인도 동북부의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인도 대륙 본토와는 달리 동북부 지방에서 한류(韓流)가 통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청바지 위에 인도 남자들이 잘 걸치는 펑퍼짐한 쿠르타(Kurta)*를 입었고, 이제 막 입에 붙기 시작한 힌디어로 내국인인 척 싼값에 유적지를 드나들기도 했다. 지방 인도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이목을 끌던 이방인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었다. 이곳저곳을 촬영하자 주위로 몰려들어 사진가냐며 질문 사례를 받던 일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쿠르타(Kurta)-인도 남성들이 즐겨입는 상의(上衣) 중 하나다. 하지만 인도인 흉내 내기의 절대 고수는 정작 따로 있었다. 또 다시 기차가 연착되고, 식빵을 사서 기차역의 플랫폼 구석에 주저앉았다. 마른 풀을 뜯어 먹듯 흰 식빵을 짜이(Chai)*와 함께 삼키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한국식 맛살라(Masala)**인 여행용 볶음 고추장을 꺼내어 잼처럼 식빵에 바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단출하고 소소한 끼니였지만 당시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별미였다. 그만큼 북인도 여행에서는 먹거리가 귀했다. *짜이(Chai)-홍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차(茶)다. 인도인들이 우리의 커피처럼 즐겨 마시는 생활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는 찻잎을 장시간 끓여 우려내는데 그 방법은 식민지 시대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홍찻잎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 직장의 경우 하루 일과 중 대여섯 잔 이상을 직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맛살라(Masala)-인도의 혼합 향신료다. 대도시를 벗어나니 그나마 야채 버거 외에 양고기 버거(지금은 닭고기 버거가 대부분이다)를 팔던 패스트푸드점 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식사를 탈리(Thali)*나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에 의지했다. 그 외에 화교 음식으로 인도에서도 대중화된 볶음밥과 볶음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배고픔을 경험했다면 다소 과장스럽다. 하지만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음식점이 많은 곳은 세계에서 드문 게 사실이다. 체질적으로 육식에 익숙한 부분도 크다. 누군가 인도로 간다면 미리 고기 많이 먹어두라는 덕담도 오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도에 머무르다 보면 인도 음식이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한 식감과 포만감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입가에 묻힌 고추장은 필시 단맛이었다. *탈리(Thali)-탈리는 일종의 백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힌디로 탈리의 뜻이 접시, 쟁반이다. 보통 큰 쟁반이나 식판에 여러 종류의 커리와 양파절임 등 야채를 담아오고, 드럼통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짜파티(Chapati)나 난(Naan) 등 밀가루 전병을 찍어 먹는다. 남인도식의 경우 짜파티와 난 대신 기름에 튀신 뿌리(Puri)를 먹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탈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추가할 수 있고, 탈리 대신 커리, 쌀밥, 짜파티, 난을 별도로 주문하기도 한다. 식당마다 가격은 차이가 있다. 저렴한 곳은 각 요리 당 10루피 미만인 경우도 있고, 보통 20~30루피(한화 300~500원) 수준인 곳이 많다. 반면 난 한 장에 30~50루피(한화 500~900원), 커리 하나에 200~400루피(한화 3500~7000원) 수준인 고급 음식점도 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인도식 양념 치킨이다. 탄두리는 화덕에 구운 음식을 총칭한다.
그때 멀리 긴 플랫폼 저편에서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웬 인도인 아녀자가 그리도 바삐 움직이는 걸까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에 작은 몸뚱이는 머리끝에서 발 끌까지 현지인의 차림새였다. 맨 발이 드러낸 슬리퍼는 화려한 문양으로 한껏 장식되어 딸깍거리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은데 원주민만큼 새까맣지는 않으니 동북부에서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지나치려니 했던 여자는 나를 향해 곧장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세요? 저기……’ 워낙 현지인처럼 보인 탓에 흠칫 놀라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여자의 시선은 반쯤 베어 문 채 손에 들고 있던 식빵에 멈췄다. 한국 사람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멀리 한국 사람이 튜브를 짜서 빵에 묻히며 먹는 모습에 서둘러 다가와 보니 역시 볶음 고추장이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의 기차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음에도 반갑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고추장을 든 한국 사람이라면 인기 만점이다. 차림새로 짐작했지만 벌써 몇 달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만약 인도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여간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변상련을 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껴둔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고, 인도 음식도 꽤 먹을만하다며 소식을 전하던 엽서의 내용도 이젠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드시라며 권하며 정말 인도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그 말을 기꺼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인도는 그런 말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고국에서는 어떤 분이었을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각자의 식빵을 고추장과 함께 비워가는 사이 여자의 여행담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때로 속이 터지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도 여행자였다. 나 또한 앞으로 향할 길에 궁금한 점이 많았고,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고추장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와는 반대의 경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평소 길을 묻지 않는 남자다. 어쩌면 상대방도 다른 곳이었다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우리는 향하는 곳이 달랐고 각자 서로 갈 길을 재촉했다. 식빵과 고추장치고는 좋은 거래였던 셈이다. 고추장에 대한 집착을 빼면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인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느 곳이든지 현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회가 있다면 되도록 현지인처럼 행동해보는 것도 좋다. 단순히 추억거리가 될 뿐만은 아니다. 현지 문화를 깊숙이 체험하면 할수록 실제 인도라는 나라와 마주할 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타지마할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인도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하지만 그 놀라운 다양함은 거꾸로 보면 시각에 따라 하나의 측면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한 몰이해와 실수, 실언 등이 생각보다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인도를 보는 시각에 융통성이 필요한 이유다. 외모가 닮아가고 옷차림새를 흉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아닐지 모른다. 융통성은 우리의 공격적이고 발빠른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꾸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령, 실제 인도인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일단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함께 짜이 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라마단의 긴 단식기간을 끝내고 이드(Eid)*에 접어든 뚱뚱한 무슬림 직원에게는 ‘알라 후 아크바르’**라며 농담을 건넸다. 무슬림 직원은 물론, 곁에서 듣던 힌두교 직원들마저도 배꼽을 잡고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종교와 계급을 떠나 서로 소통해야 했다. *이드(Eid)-무슬림 휴일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는 의미 그 밖에도 가족과 종교가 우선이고 일에는 수동적인 인도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했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두면 발전도 없다. 인센티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남발할 경우 부작용이 있었다. 지킬 수 없는 허언은 욱하기 쉬운 인도인들과 더욱 심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인도인들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상관은 따르지 않는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해법은 단순했다. 바로 인도인 코스프레다. 인도는 기차가 전부다 12시간 만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부바네스와르를 거쳐 갈 이유는 없었다. 부바네스와르는 단번에 남인도의 마드라스(現 첸나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교두보였다.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넘었고, 샤 자한은 야므나강 곁에 타지마할을 세웠으며,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은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인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사이 대륙의 거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그 대륙에 걸맞는 여정을 앞두게 되었다. 바로 남인도행이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마드라스까지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거리 기차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더스강, 야므나강, 갠지스강 등 인도를 흐르는 도도한 강물만큼이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인도의 길, 철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지린내 가득한 대합실에서 인도인들과 섞여 잠들었다. 그래도 오지 않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전혀 다른 플랫폼으로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 그럴 때면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플랫폼을 잇는 구름다리를 한달음에 건너야 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니 대단한 풍경이 연출된다. “오빠, 팔 아프다”는 이야기는 그 후로 믿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기차는 연결된 차량 간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좌석 등급에 따라 탑승객들을 구분하는 것이지만, 칸을 잘못 타면 정말이지 낭패다. 잘못 탔다고 인도인들처럼 외국인들도 내치겠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말하자면,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운 나쁘게 1등석이라도 타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검표원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지금 당장 몇 배에 가까운 값을 치르고 표를 사던가, 다음 정차역에 닿을 때까지 화장실 옆 탑승구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참담한 심경에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애원해보기도 했다. 다음 역까지 봐주는 검표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게 모두 정확하지 않는 철도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상에 타고 갈 시간만큼 연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인도라면? 말이 된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다. 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인도의 철로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재배된 목화, 홍차, 아편 등이 바로 이 철로를 통해 주요 항구로 이동되었다. 이 땅에 흐르던 젖과 꿀을 마음껏 거둬들이던 루트였다. 이후 열차 시스템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인도에서 모든 것이 일제히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발차한 열차가 도시들을 거치며 기상 악화라든지, 노후화된 선로의 문제 등으로 조금씩 연착되기를 거듭한다. 내려올수록 연착되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정표를 재확인하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지만,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의 역무원도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남인도의 방갈로르에 방문했을 때도 연착되는 사이 공항의 일정표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갑작스럽게 탑승구가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공항 탑승구인데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대도시의 시설은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공항이 이와 같은데 소도시의 기차역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는 의례 연착될 줄 알고 여유만만해졌다. 호텔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 바뀐 일정을 수차례 확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늦춰 역사로 향했으니 위험하긴 해도 나름대로 요령은 생긴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한편, 역사의 매표소나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일부 친절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아직 인도 사회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인구에 맡은 바 직무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관료주의 또한 불편한 부분이다. 이는 비단 기차표를 사는 일이나 역무원의 도움이 필요할 때의 일 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손님의 입장임에도 조심스럽게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온갖 정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내가 군림하면 상대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계급이 없는 한국이지만 실로 좋은 인생 수업이었다. 개중에는 기차가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역무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잠을 청하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발을 동동 굴리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인도를 소개하면, 기차 여행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만큼 기차 여행은 인도 여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철도의 역사 영국 식민지 시대는 육상이 아닌 해상 세력의 인도 지배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 캘커타(現 콜카타), 봄베이(現 뭄바이), 마드라스(現 첸나이)를 거점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 대륙의 동서남북을 기차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철도 건설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 국내 물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000킬로미터(중복 선로 포함*)에 이르고, 7172개의 역사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2000만 명 이상, 연간 80억 명이 이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철로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들이 동원되었고, GIPR(Great Indian Peninsula Railway)에 의해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1853년 개통하면서 인도의 철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후 1867년 EIR(East Indian Railway)에 의해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알라하바드(Allahabad)와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자발푸르 (Jabalpur)를 잇는 노선이 개통했고, GIPR과 EIR이 연결되어 총 6400킬로미터의 철로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중복 선로를 제외한 경로 간 총 길이는 6만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뭄바이와 타네를 잇는 인도 최초의 노선은 34킬로미터였다. 1870년에는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어 인도의 동서를 연결하게 되었고, 이후 콜카타, 뭄바이, 첸나이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철로망이 구축되어 인도의 선로는 총 1만4500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부터 인도는 자체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미 6만60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렀다. 1900년부터 GIPR이 정부에 귀속되기 시작해 1946년에는 통합이 완료되었다. 현재 인도의 노선은 북부, 중부, 동부, 남부, 북동 디비전(Division) 등 16개의 지역별 구획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세부적으로 68개의 서브 디비전(Sub division)으로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창기 열차는 철로 간격이 넓은 광궤(廣軌)*로 운행되었는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너비 1미터의 철로와 구릉지대에 적합한 협궤(狹軌)**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각기 달랐던 이들 철로의 단일화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38%(2만4891킬로미터) 가량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광궤(廣軌)-궤간이 1.435미터 이상이 되는 선로다. **협궤(狹軌)-궤간 1.435미터 미만의 선로다. ***2014년 3월 기준 이와 같은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에 그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인도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원자재가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운송이었다. 영국 본토 생산시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 수단이 필요해졌다. 영국 철도 기술의 총화가 투입되었음은 물론 수만 명 이상의 인도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을 관통해야 했고, 세계 최초로 지그재그 선로***가 선을 보였다. 24킬로미터 거리에 고도가 555미터 높아지는 급경사로가 있었고, 총 3.7킬로미터에 이르는 25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 이르러서야 인도 대륙의 철로 공사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00년 무렵 인도는 이미 세계 5위 규모의 철도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목화의 주요 産地였던 미국이 흉작과 더불어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섬유 공장은 대체 원자재 공급처로써 인도로 눈을 돌린다. ***스위치 백(Switch back)이라고도 불리 ‘乙’자형으로 설치된 철로이다. 1900년 이후 인도의 철도 시스템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인도는 차량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에서 가장 긴 플랫폼*도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미 깔린 철로의 단일화 작업은 흥미롭다. 철로가 생긴 지 150여 년 훨씬 지난 시대에 20년 넘도록 38% 가량만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이는 기술보다는 자본과 추진력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곧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책 추진의 한계도 있다. 인도의 다양성은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를 수용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주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팀워크 문제도 있다. *웨스트벵갈 주 카라그푸르의 플랫폼 길이는 833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철로만 보수하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전기부터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 시설을 구축하면 필수적으로 보조 발전기를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도의 철로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유산이다. 이는 인도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 간접 자본의 한계로 유선 전화 시대를 지나쳐 곧바로 무선 모바일의 시대로 접어든 곳이 인도지만, ‘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월반(越班)과 우회(迂廻)는 어려울 것이다. 고속도로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하늘 길은 벅차다. 워프(Warf)** 같은 상상력이 현실이 되지 않는 한 한 해 80억 명, 히말라야가 보이는 북, 아시아로 열린 동,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만나는 인도의 땅 끝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철로뿐이다. **워프(Warf)-공간을 왜곡시켜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가상 기술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 속에서도 선진 철도 기술이 전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단지 식민지 시대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인도 대륙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면 육로의 확보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90년대에 한창이던 델리의 메트로 공사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인도다. 무언가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 같지만 진척이 매우 더디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토목 공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최신의 대형 장비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대부분 순수 인력(人力)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2보 전진 후 1보 후퇴를 거듭한다. 곡괭이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에 동원되는 모습은 인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인도 메트로 관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백 킬로미터 무게의 역무(驛務) 자동화 장비를 아무런 도구 없이 순전히 인력만으로 지상에서 10여 미터 높이의 역사에 설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되어 테스트를 마친 기계가 온전할 리 없다. 설비를 납품했지만 개통이 미루어져 먼지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인데 이는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인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추진력의 문제로 돌아가 살펴본다. 인도의 독립은 단순히 식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는 산고(産苦)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통일 국가로써 인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만 인도는 원래부터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델리와 같은 도시가 모델이 되는 것은 맞지만 지방정부가 이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 지방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 방향과 노선이 있다. 통합과 효율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가령, 경제나 문화 산업 단지가 중복 조성되고,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대한 이해와 비전도 지역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인도만큼 국가 전체적인 통계자료를 뽑기 힘든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종이로 기록되어 전산화되지 못한 자료도 문제지만 주정부와 지방정부마다 통계의 주체가 분산된 경우도 있다. 때문에 당시 철로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이 아니더라도 철로는 필요하니 시간이 걸려서라도 갖춰졌을 것이다. 다만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영국이 사방으로 그어놓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핏줄이 되고, 없어선 안 될 인도 대륙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의 역사의식에 큰 착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수탈당했다. 우리에겐 평화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에도 바가트 싱(Bhagat Singh)*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젊은 독립투사는 한국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다. 그러고 보면 사실 간디나 네루도 결국 영국 유학파 아닌가. *바가트 싱(Bhagat Singh)-1907~1931년, 23살의 짧은 생을 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간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호소했으며 계급제를 타파한 평등 사회를 꿈꿨다. 식민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인도인들은 뜻밖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해가 잘 지게 된 나라 영국도 과거의 영광 때문인지, 인도가 세계 경제의 기대주이자 미래의 보고(寶庫)인 까닭인지 인도를 보는 시각이 매우 특별하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헤어진 연인 간의 애증 관계가 연상된다. 물론 적어도 과거에는 한쪽이 멋대로 행동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도를 기찻길로 둘러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버스보다는 더 멀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비행기로는 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 흔적은 현재 인도의 크나큰 자산 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의 흔적은 그것을 돌아볼 길이 되어준 셈이었다. 과거 중국에서도 산시성 신안(Xi’an)과 장쑤성 쑤저우를 잇는 장거리 횡단 열차를 탔었고,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를 잇는 종단 열차를 경험했지만, 역시 대륙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 그만한 방법은 없다. 특히 인도 기차는 다소 덜컹거리고 느린 만큼 인도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깥 풍경도 그렇지만 인도인들이 가득한 내부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다. 다만 누군가 주는 음식이나 짜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 섞은 탓에 잠이 든 사이 배낭이 통째로 없어져 고생했다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끼리 뭉쳐 서로 짐을 봐주며 불침번을 서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행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점차 가방을 베개 삼아 짐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시간적 제약이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인도는 기차로 다녀야 제 맛이다. 동인도의 끝자락, 푸리 남과 북을 잇는 연결점 부바네스와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장시간의 남행 열차에 올라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역에서 대기한 시간까지 벌써 스무 시간 이상 기차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바네스와르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행 중에도 휴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마침 벵갈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푸리(Puri)로 향했다.
벵갈만의 도시 푸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이자 휴양지로 유명하다. 자가나트(Jagannath) 사원이 유명한데 보통의 신상들이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십여 년마다 교체되는 의식이 거행된다. 또한 매년 6~7월 사이에 열리는 라다 야뜨라(Rath Yatra)* 축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자가나트 신이 전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전차 위에 신상을 세워 그 광경을 재현해낸다. *라다 야뜨라(Rath Yatra)-라트는 전차, 야뜨라는 여행을 의미한다. 물이 가까운 곳에 성지가 있고, 그곳에는 신들의 축제를 만끽하는 인도인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겨울철에 방문한 푸리는 특별한 축제가 없었고, 자가나트 사원 또한 힌두교도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 편히 쉬어가기에 좋다는 말로도 들렸다. 도시와 벵갈만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70년대 히피(Hippie)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동인도의 막다른 길에서 나침반을 건드리며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푸리는 잠시 재충전하며 마음을 정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푸리로 향하면서 이후 시간을 보낼 고아(Goa)에서의 흥(興)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소란스럽고 풍족한 고아의 매력과 비교해 당시 푸리의 장점은 여유롭다는 데 있었다. 고아가 인도 속의 외딴 섬과 같았다면 푸리는 다분히 인도다운 해변 도시였다. 하루 쉬면서 백사장을 걷고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며 좋은 음식으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행 중에 망중한(忙中閑)을 달랜 셈이었다.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22살의 스위스인 불교도와 한국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해변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몇몇 인도 어부들이 낚은 생선을 가져와 자리에 동참했다.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맛본 생선이었다. 당시 누군가 인도의 취약한 유통 인프라를 얘기하며 싱싱한 어류를 유통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한번 시도는 해보았을지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형 마트가 인도 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얼음을 땅바닥에 굴려 배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인도다. 이젠 내륙에서도 생선을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싱싱하지는 않다. 오래된 철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마냥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는 힌디어로 대화해볼 수 있었지만 푸리로 오니 지역어(오리야어)만 쓰는 인도인들이 많아졌다. 보이는 풍경 뿐 아니라 쓰이는 언어도 점차 바뀌어가는 것이다. 푸리에서 며칠 머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미 부바네스와르 역에서 마드라스행 기차표를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38시간의 남행열차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인도 기차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부바네스와르에서 오후 한 시 가량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열차는 9시간 연착 예정이라더니 이내 두 시간이 더 늘어나 결국 11시간10분이 연착되었고, 하루를 넘긴 새벽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초췌해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푸리에서 부바네스와르로 이동하는 사이 기차를 놓칠까봐 몹시 불안해했던 것이 한심스러워졌다. 여기서 다시 1박2일, 27시간 거리를 달린 후에야 비로소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야간에 출발한 기차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해가 뜬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환상적인 풍경화를 내보였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멀리 보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넓다’라는 단어의 이해를 재정의해야만 했다. 지나치는 역마다 눈에 띄게 문자가 달라지는 것 또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언어의 다양성이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철로를 덜컹이며 달리는 인도의 열차는 탑승구를 활짝 열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없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도의 또 다른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순간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팔랑이던 모자는 따라오는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 이미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 어딘가의 풀숲 안으로 사라져갔다. 뭐가 좋다고 그런 후에도 한참 신이 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모자를 현지화 할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0955&C_CC=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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