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되게 사는 자를 말한다. 또한 여기서 '복'은 보다 나아진 생활 형편을 지적하는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의 반역행위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더욱 구체화된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 여기서의 '방패'는 온몸을 다 방어할수 있는 길고 큰 방패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인간의 모든 면을 감싸주고 보호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시 30: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 여기서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킨다. 시온 산은 천혜의 요새지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중의 요새로서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여부스족속으로부터 이 산을 탈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이곳에 견고한 성벽을 건설하고 다윗 성을 세움으로써 대국으로서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견고하여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주의 엎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잠시 다윗을 떠나 계신 것이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만을 꺽으시기 위해 잠시 진노하신 것을 의미향다(13:1 주석 참조). 그 결과로 다윗에게 임한것은 평강 대신 `근심'이었으며 건강 대신 `죽음의 질병'이었다.
[시 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본절 전체는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 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특히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부분은 신 4-10장; 27-31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시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 '은혜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눈'은 성경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킬 때를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이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채무자의 부르짖음을 듣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서, 신자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가리킬 때 쓰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성품을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그리고 '의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는 '정당한', '바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당한 행동이나
올바른 처신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는데 창 38:26에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잉태한 것을 두고 유다가 그녀의 항변을 듣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 중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정당하고 올바른 통치가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은 평화와 안식의 나라이며 불만과 불평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세상의 불의와 정직하지 못한 것을 타파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 '자비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훔'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레헴'이란 명사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며, '라함'이란 동사는 '사랑하다', '동정심을 갖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을 감안하면 이 '라훔'이란 말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희노 애락에 함께 공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해 세심한 애정을 베푸시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요엘 선지자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며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누구를 기도 대상으로 섬기고 따라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자녀가 자기 부모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부르짖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쳐 두고 다른 어떤 것에 기도드린다는 것은 참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도의 대상은 은혜로우사 기도에 귀기울여 주는 분이 되어야 하며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 되어야 하고 또 자비로우사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자격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