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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계4동 일본어 공부방 원문보기 글쓴이: 앞으로
1.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1)고사기(古事記)는 어떤 책인가.
『고사기(古事記)』는 712년에 편찬된 일본 최고의 문헌으로 오오노야야스마로(태안만여:太安萬侶)가 천황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라시대의 元明천황의 칙령에 의해 히에다노아래(비전아례:裨田阿禮)가 외우고 있던 『제기(帝紀)』 및 선대의 「구사(舊辭)」를 찬록(撰錄)하여 화동(和銅)5년(712년)에 바친다는 내용이 서문에 실려 있다.
『고사기(古事記)』는 720년에 편찬된 최초의 관선(官撰)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1차적인 자료이다. 정통 역사성의 형식을 갖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고대사 연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면,『고사기(古事記)』는 고대일본의 건국신화, 문화, 문학의 연구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고사기(古事記)』라는 명칭이 고유명사로 굳어졌지만, 여러 문헌에 『다씨고사기(多氏古事記)』나 『일고사기(一古事記)』등의 용례가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보통명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 “옛날부터 전해져온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古事記)』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최초로 문제로 삼은 사람은 국학자 모토오리노리나가인데, 그는 ‘후루고토부미’라고 읽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코지키’로 읽히고 있다.
2.『고사기(古事記)』의 구성과 내용
『고사기(古事記)』는 상,중,하권의 세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의 첫머리에는 「서(序)」가 실려 있다.
서문에서는 야스마로가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천황에게 바치는 내용이 담겨있다. 상권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우가야후키아에 즈노미코토에 이르기까지의 기사를, 중권은 진무(神武)천황으로부터 오오진(應神)천황에 이르기 까지의 기사를 싣고 있다.
상권에서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까지 다룬 것은 일본의 국토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황실의 조상이 어떻게 일본에 강림하게 되었는가 하는 카미요(神代)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한 권으로 묶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상권은 독자적으로 완결성을 갖는 입체적인 신화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중권에서 진무천황을 제일 앞에 둔 것은 진무(神武)가 야마토 조정을 수립한지 제 1대의 천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권에서 닌토쿠 천황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닌토쿠가 「聖帝」로 칭송받은 천황이기 때문일 것이며, 또 천황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유교적인 천자라는 관념이 들어와서 종래의 「아마쯔카미노미코(天神御子)」라는 천황관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중권과 하권은 황위 계승의 순서에 따라 평면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권에는 신화적,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하권의 「인대(人代)」에는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지고 있다.
기사속에 있는 신화, 전설 그리고 수많은 가요가 담겨 있으며, 전체적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통일의 사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한자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미보다는 음에 따라 표기한 부분이 적지 않다. 일본에서 최초로 일본어로 표현된 문학작품으로서, 간결하고도 미묘한 일본어 표현이나 가요를 포함한 짧은 이야기들이 모여서 전체를 구성하는 형식은 후대 일본의 산문 문학의 원류가 되기도 했다.
3.『고사기(古事記)』의 여러 특성과 문제점
『고사기(古事記)』의 성립사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그 서문인데, 카모노마부찌(가무진연(駕茂眞淵)와 나카자와(중택견명:中澤見明)같은 사람은 서문을 후대 사람들의 위작(僞作)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모토오리노리나가는 야스마로의 작품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나카자와는 서문만이 아니고 본문까지 위작이라고 한다. 상세한 고증 끝에 『고사기(古事記)』는 헤이안(平安朝) 초기 천장(天長)․승화(承和)․ 무렵 일지(日枝)․송미(松尾)의 두가(杜家)와 관계있는 사람이 위작을 만들어 화동(和銅)의 칙찬(勅撰)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한다(『고사기론(古事記論)』.이외애도 위서설(僞書說)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위서설은 분명히 잘못 본 점도 있고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자료로 이용된 것은 히에다노아래(비전아례:裨田阿禮)기 외우고 있던 황제일계(皇帝一繼)와 선대구사(先代舊辭)였다. 『고사기(古事記)』서문에는 황제일계(皇帝一繼)에 대해서 「제기(帝紀)」「선기(先紀)」선대구사(先代舊辭)에 대해서는 「본사(本辭)」「구사(舊辭)」라는 단어가 보이는 데, 각각 같은 종류의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일본 자체의 문헌인지 아니면 중국의 문헌의 일부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고문서 등에 「일본제기(日本帝紀)」「제기2권(帝紀 二卷)」등의 용어가 보이는 걸로 보아 「제기(帝紀)」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독립된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고사기는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도 서문과 본문, 그리고 본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요는 각각 표기를 달리하고 있다. 서문은 순수한 한문체이고, 본문은 변형 한문체이며, 가요는 일음일자의 가명(一音一字의 假名)으로 표기되어있다.
4. 한국에서의 고사기(古事記) 연구
한국에서의 고사기(古事記)연구는 고사기(古事記) 자체의 연구라기보다는 일본 신화연구나 한일관계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고사기(古事記)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입문서조차도 아직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으며, 우리말로 번역된 것도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노성환이 역주한 고사기(古事記) 상․중․하(예전출판사)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상·하권이 절판이 되어 다 구해볼 수 없다. 온전한 우리말 번역이 하루 빨리 나와야 할 것이다.
일본 신화에 대한 관심은 1930년대 최남선 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육당은 1930년 4월 25일과 26일 이틀간에 걸친 방송을 통해 「조선의 신화와 일본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상호간의 유사성에 대해 지적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으로 동원론(同源論)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근거로는 나라를 세운 이들의 천손강림, 그리고 왕조교체 및 동쪽에 대한 흠구와 동경의 모티브에서 찾고 있다. 왕조교체란 이미 거주하고 있던 자들이 기이한 유서를 가진 후래자(後來者)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양도하고 있는 점을 가리킨다.
그 후 일본 신화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국문학자, 역사학자, 민속학자, 일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덕순은 고사기의 중권에 실려 있는 삼륜산 전설에 관심을 가지고 「야래자 전설고」「한국의 야래자 전설과 일본의 삼륜산 전설과의 비교연구」등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의 삼륜산 전설은 한국의 야래자설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어 생겨난 것이며, 그 전파시기는 일본의 삼륜산형 전설의 분포가 야요이 문화유적지와 일치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야요이(彌生) 문화의 전파와 때를 같이한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황패강은 「일본신화속의 한국」, 「신화의 역사적 문맥과 신화의 구조」, 「일본에 있어서의 신화의식의 전개과정연구, -- 오아권신화의 역사적 재현을 중심으로 --」, 「일본에 있어서 신화재현에 관한 연구----고천원(高天原)의 이미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순수한 일본 신화에 대한 연구분석과 아울러 신공황후전승에 나타난 허구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김열규도 신공황후 전승에 관심을 가지고 「신라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한국신화와 일본신화」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해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 신(神)들의 고향이 한국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및 천손강림신화에 집중되고 있다. 김정학은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의 허구」라는 논문에서 5세기초의 응신천황부터 실재 인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신공까지는 조작된 왕조로 보았다. 그의 연구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도 비교하면서 실증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강하다. 김성호, 문정창도 신공황후를 신라에서 건너간 여인으로, 천손강림신화의 주인공이 김수로왕의 손자인 김선(金仙)이라 했다.
이외에 김태정의 「일본서기에 나타난 한국관」,최재석의 「미시나쇼오에이의 한국 고대사회 신화론 비판」등이 있다.
민속학 내지 인류학에서의 접근은 현용준의 「한일신화의 비교」「일본신화와 한국」「한국 창조신화의 비교」등이 있다.
일문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고사기(古事記)의 번역과 주석을 한 노성환의 연구, 손대준․박정의․김순자․한재룡의 연구가 있다.
2.『일본서기(日本書紀)』은 어떤 책인가?
1.『일본서기(日本書紀)』의 성립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20년에 일본에서 편찬한 최초의 관찬(官撰) 역사서이며 일본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697년까지 다루고 있다. 7세기 이전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므로 일본 고대사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료가 되고 있다.『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된 이후『속일본기(續日本記』『일본후기(日本後記)』『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문덕실록(文德實錄)』『삼대실록(三代實錄)』드이 편찬되었으며, 함께 「육국사(六國史)」를 이루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명칭에 대해 『일본기(日本紀)』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명칭이 바른가 하는 점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혼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는 달리 중국에서 만들어진 정사(正史)의 체제를 취한 본격적인 역사서로서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역사서의 편찬에 깔려 있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및 천황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2.『일본서기(日本書紀)』의 구성과 내용
전체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과 땅의 생성 및 일본의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 카미요(神代)로부터 시작하여 지토오(持統) 天皇대까지(697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통사이다. 권 1,2는 神代상․하권이다. 여기서는 신들의 세계, 신들의 탄생, 국토의 생성 등이 서술되고 있다. 역사서의 첫머리에 신대(神代)를 설정한 예는 특이한 것이다. 권 3부터 30까지 전무(神武)천황으로부터 지토오(持統)천황에 이르기까지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다.
3.『일본서기(日本書紀)』의 여러 가지 특성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쓰는 데 있어 사용된 자료로는 백제 관계 서적이 많고, 그 외에 중국 사서로는 『위지(魏志)』『진기거주(晉起居住)』등이 있다. 그리고 神代편에 보이는 『一書』라고 표기된 것이 있다. 이외에 임신(壬神)의 난에 참가한 인물의 일기, 유당사(遺唐使)의 기록도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편찬자가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역법(曆法)을 사용하고 있던 나라시대 전기에 편찬되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신대(神代)로부터 시작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편찬자는 중국사서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정확한 일시를 기록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나라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역을 만들었다. 일정 시기 이상을 올라갈 기준이 일본측 사료에는 없기 때문에 참위설에 의한 “신유혁명론(辛酉革命論)”이다. 즉 신무(神武)천황 즉위 원년을 신유로 정하고 이를 1260년 혹은 1320년 이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텐진(天智) 천황의 즉위원년을 신유로 정하고 건국 이래의 기년을 역산해서 이에 따라 천황을 배열한 것이다.
그래서 천황의 연령, 재위년수, 한반도 관계의 등에서 연대가 맞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건국 이래의 기년을 미리 결정하고 역대의 천황을 배열했기 때문에 세부적으로는 모순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세부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각 권에 따라 특색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또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으며, 거기에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한 사람의 집필자가 아니라 몇 사람의 집필자가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4,일본 천황가의 가계
①일본서기(日本書紀)는 5세기 말의 백제계 성립을 숨기고, 백제계 왕조가 태초부터 일본 열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우진 등의 실제 천황에서 진무(神武)라는 가공의 초대 천황을 만들어 내어,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이라는 중국의 사실(史實)에 기반을 두고 그 즉위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했다.
②일본서기(日本書紀)는 초대 진무(神武)에서 제9대 카이카(開化)까지 9명의 가공의 천황을 만들어내고, 제10대 천황으로서 가야계 일본 왕조의 시조인 스진을 내세웠다. 스진의 연대는 실제보다 400년 이상이나 앞당겨졌다.
③일본서기(日本書紀)는 진구우(神功) 황후를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로 보이게 하였고, 오우진을 진구우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오우진의 출처를 숨김과 더불어 오우진 왕조를 야마타이국의 후예라고 생각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곤지=오우진의 재위 연대는 200년 정도 앞당겨졌다.
④일본서기(日本書紀)는 곤지=오우진 다음에 케이타이의 분신적 허상인 닌토쿠를 등장시키고, 또한 닌토쿠 이후도 리츄우에서 부레츠(武烈)까지 가공의 천황을 만들었다. 많은 학자들이 실재한 천황으로 여기는 유우라쿠(雄略)도 실은 가공의 천황이다.
“콘다산 고분(응신릉:応神陵)의 연대는 500년 전후, 다이센 고분(인덕릉:仁德陵)의 연대는 510년대 전후라고 추정된다. 고분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4세기 중반 무렵이다. 고분 시대 중기는 5세기 제3/4반기로 후기는 6세기 중반에 시작된다. 현대 일본인의 주류가 된 남한 사람이 가장 많이 도래한 시기는 고분 시대 중․후기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 전기 고분 문화가 한국의 가야 지역의 고분 문화와 비슷하다 결국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것은 고분 시대에 도래한 남한 사람이다. 전기 고분 문화를 일으킨 부류가 가야계 집단이고, 5세기 말 이후의 고분 문화를 일으킨 부류가 백제계 도래 집단이다. 콘다산 고분의 피장자는 백제계 도래인이고, 천황가의 시조다. (일본서기의 비밀, 모리히로미치 저, 심경호 옮김, 황소자리 출판사,2006년 18-19쪽)
서기 562년 신라가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高靈)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흠명(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군현(郡縣)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를 일본에선 미마나라고 불렀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정회(情懷)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가야와 백제가 망한 다음 대거 이주한 이들이 일본의 주류사회를 형성하면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한․일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일본서기는 일본이 한국에게 가지는 감정, 자기 고향을 망하게 한것에 대한 분노심을 엿볼 수 있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고대일본을 세운 主流세력이 가야에서 규슈를 거쳐 인근지방으로 건너간 가야인들임을 추축케 한다. 동시에 일본의 천황가가 가야계통 사람인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欽明천황은 유서에서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여 둔다.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다, 옛 가야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내용이다. 뼈속 깊이 사무친 원망과 회환이 담긴 내용이다.
한국측 자료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158)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가 바다가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혹은 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랏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말했다.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서기(日本書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小王)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랏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히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삼국유사,일연저 이재호 역,솔 출판사,1997년.129-130쪽)
5,일본서기(日本書紀)을 통해본 한국사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한국 관계 기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기록의 내용은 이른바 “임나일본설”을 구성하고 있다. 즉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야마토 왕권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외면해 온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百濟系 三書로 불리는 『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가 인용되어 있을 뿐 만 아니라 가야의 멸망과정, 백제와 왜의 교섭에 관한 기사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측의 가장 오래된 문헌 사료인 『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12세기 이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린 한반도 관계 기사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한국고대사 연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6. 『삼국사기』․『삼국유사』을 통해본 한일관계
박혁거세 8년(기원전 50)에 왜인(倭人)들이 군사를 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뛰어난 덕이 있음을 듣고 돌아갔다.(삼국사기 3권,김부식 저,이재호 역, 솔 출판사,2006년.34쪽)
남해 차차웅 11년(14)에 왜인이 병선(兵船) 1백여척을 보내어 바닷가의 민가를 약탈하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보내어 이를 막았다.(1권 40쪽)
나당 연합국에 의해 백제가 멸망된 용삭 3년 계해(663)에 백제의 여러 성들이 몰래 나라의 부흥을 꾀하여 그 우두머리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여 왜국에 군사를 청하여 원조를 삼았다.....우리 군사가 힘을 다하여 싸워 적군을 크게 패배시키니 백제군사와 왜인이 모두 항복했다. 대왕은 왜인들에게 일러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일찍이 서로 다투지 않고 다만 우호를 맺고 강화하여 서로 사신을 보내온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나쁜짓을 같이 하여 우리나라를 침공했느냐? 지금은 너희 군졸들은 나의 손아귀에 있지만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 국왕에게 이 말을 알리라.”그러고는 그들의 마음대로 가도록 하였다.(삼국사기 3권 299쪽)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왕위에 오른지 경인(390)에 왜왕(倭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 임금이 대왕의 신성함을 듣고 신(臣)들을 시켜 백제의 죄를 대왕에게 아뢰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왕자 한 분을 보내시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표하소서.”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또는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를 왜국(倭國)에 보내니 미해의 나이 열 살때였다......왜왕은 이들을 억류해두고 30년 동안이나 돌려보내지 않았다(삼국유사 1권,일연 저,이재호 역, 솔출판사,135-136쪽)
눌지왕 10년 을축(425)에 박(김)제상이 왜국(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미해를 구하기 위해 도일하게 된다. 왜국에서 거짓 항복을 한 제상은 미해를 구하고 자신이 인질로 잡히게 된다. 문초를 당하며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가 되고 싶지는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목도(木島)란 섬 안에서 불에 태워 죽은 형을 받게된다.(삼국유사 1권,135-136쪽)
7.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본 한일관계
임나인(任那人), 소나갈질지(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가,「나라에 돌아갑니다.」고 말하였다. 대개, 선황(先皇)의 시대에 내조(來朝)하여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소나갈질지(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즉 적견일백필(赤絹一百匹,붉은비단)을 가지고 가게 하여 임나(任那)의 王에게 주었다. 그러나 신라인(新羅人)이 길을 막고 그것을 탈취하여 버렸다. 이 양국(兩國)의 증오심은 이때 처음으로 시작 된것이다.(일본서기, 성은구 역 정음사,1987년,149쪽)
신라를 정벌하러 가는 날
동시월(冬十月)의 기해(己亥) 삭(朔) 신축(3일 辛丑) 화이율(외니노쓰:大馬上縣)에서 출발하였다. 그때 바람의 神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神은 파도를 일으키고, 바다속의 대어(大魚)는 빠짐없이 바다 위에 떠서 배(船)을 도왔다. 즉, 큰 바람이(추충:追風)이 되어서 불어 배는 파도의 흐름을 탔다. 노를 쓰지 않고 新羅에 이르렀다. 그때에 배를 태운 파도가 멀리 新羅의 나라 가운데까지 밀려들었다. 이 일로 인하여 천신지지(天神地祗)가 남김없이 조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신라의 왕은 전전긍긍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제인(諸人)을 모아놓고, 「신라는 나라를 세운 이래 지금까지 海水의 나라에 능멸당한 일을 아직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혹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로 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이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군선(軍船)이 바다에 가득차고, 정기(旌旗)가 햇빛에 빛났다. 고취(鼓吹)의 소리가 일어나 산천은 남김없이 진동하였다. 신라의 왕은 멀리에서 이를 바라보고, 돌연히 공습하여 온 군병은 장차 新羅를 격멸하려고 하는 줄로 일았다. 그러자 두려운 나머지 실신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나는 東方에 神國(신명의 가호가 있는 나라)이 있어 日本(야마도)이라 이르고 聖王이 있어 천황이라 이른다고 듣고 있다. 반드시 그 나라의 神兵임에 틀림이 없다. 어찌 병(兵)을 일으키어 막을 수가 있으리오」라고 말하고, 즉석에서 백기(白旗)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항복의 표로 흰(인)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토지의 도면과 백성의 적(籍)을 봉인하여 가지고 왕선(王船)의 앞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대고....다시 거듭거듭 맹서하여,「東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다시 西에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아리나레가와)가 역류(逆流)하고, 하(河)의 돌이 하늘로 올라가 별(星)이 되는 일이없는 한, 특히 춘추(春秋)의 조공(朝貢)을 결(缺)하고 게을리하며 소와 편(鞭)과의 조공(朝貢)을 중단하면 천신지지(天神地祗)는 특별히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느 사람이, 「신라의 왕을 주살(誅殺)합시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황후(皇后)는, 「처음에 神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금 금은(金銀)의 나라(新羅國)를 받들려고 하고 있다. 또 大軍에게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말하였다.(일본서기, 207쪽)
조공을 받치는 백제
백제(百濟)의 초고왕(肖古王)은 일본사신을 만나 「우리나라에는 많은 진귀한 보물이 있다. 귀한 나라에 공상(貢上)하려 생각하고 있으나 도로(道路)를 모른다. 마음만 있을 뿐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이번 사자(使者)에게 부탁하고 계속하여 공헌(貢獻)하겠다」(일본서기220쪽)고 말하였다.
천황이 즉위하여서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배반하고 속여 와 증물(贈物)을 헌상(獻上)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8년이 되었다. 더욱이 크게 中國(미가도) 日本의 마음을 두려워하여 고려(高麗)와 친선을 맺었다. 그래서 고려의 왕은(당시는 장수왕 재위 413-490) 정병(精兵) 백 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신라의 왕은 밤에 고려의 軍이 이곳저곳에서 가무(歌儛)를 한다는 말을 듣자 적(賊)의 전군(全軍)이 신라의 땅에 침입하여 온 것을 알고 사람을 임나(任那)의 왕에게 보내어, 「고려의 왕은 우리 나라를 정벌하려 하고 있다. 이제야 신라는 조(弔)에 거는 유기(旒旗)와 같이 고려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맡기고 있는 형편이며, 나라의 위태함은 누란(累卵)보다 위태롭고, 생명의 장단(長短)을 헤아리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사(行軍元師)들에게 엎드려 구원을 청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에 의하여 任那의 왕은.....선신(膳臣:가시하데노오미)등은 신라에 말하여,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 지극히 강한 나라에 맞부닥쳤다. 官軍(日本軍)이 만약 구원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격파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 위태롭게 他國의 영토가 될 뻔하였다. 이후로부터 결코 천조(天朝:日本)」에 배반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일본서기, 310-311쪽)
신라정벌 3월에 천황(天皇)은 스스로 신라를 정벌하려고 생각하였다. 신(神)은 천황(天皇)에게 戒(타이르다)하여 「가서는 아니 된다」말하였다. 天皇은 이에 의하여 가지 못하였다.(일본서기, 312쪽)
8월 춘이월(春二月) 신라와 임나(任那)와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천황(천황)은 임나(任那)를 구하려 생각하였다. 이 해 경부신(사가이베노오미:境部臣)을 대장군에 임(任)하고 호쯔미노오미를 부장군(副將軍)으로 하여 일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나를 도와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장군들은 직접 신라를 목표로 하고,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략하였다. 신라의 왕이 두려워하여 백기(白旗)를 들고 장군의 마하(摩下)에 와서....할양(割讓)하고 항복을 원하였다. 그래서 장군들은, 「신라는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항복하였으므로 공격하는 것은 과히 좋지 못하다」고 협의하고 그 사유를 진상(秦上)하였다.....장군들이 신라로부터 귀환하자 신라는 또 임나를 침략하였다.(일본서기, 336-337쪽) 신라는 늘 신의가 없는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반석(磐石)들이 항구에 모여서 배를 내리려 하고 풍파의 형편을 살피고 있을때 많은 군선이 바다에 가득 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신라․임나 양국의 사인(使人)은 그것을 멀리에서 바라보자 겁이 나서 나라에 되돌아가서는, 출발하려고 하지도 않고 감지대사(堪遲大舍,감지는 인명, 대사는 신라의 官位 17階12)를 대(代)로 임나의 조(調)사자로 하여 공상(貢上)하였다. 이에 반석(磐石)들은, 「이와 같은 정토(征討)의 군(軍)을 발(發)하는 것은 이전의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래서는 임나의 일은 이번에도 실패가 정하여진 것이다.」고 의논이 되어 배를 내어 귀국하였다. 장군들만은 임나에 도착하자 상의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국의 주(主)는 많은 군세가 왔다는 말을 듣고 싸우기도 전에 겁이 나서 항복하기를 청원하였다. 장군들은 협의하여 상표(上表)하였던바, 천황(天皇)도 이를 허(許)하였다.(일본서기, 356쪽)
3월의 경인(庚寅) 삭(朔) 계사(癸巳4일)에 백제왕(여풍장:余豊璋)에게 포 3백단(端)을 사(賜)하였다. 이 달 당인(唐人)과 신라인이 고려를 공격하였다. 고려가 우리 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장군을 파견하여...당인(唐人)은 고려 남쪽의 경계를 침략하지 못하고, 신라도 고려 서방(西方)의 성루(城壘)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하사월(夏四月)에 쥐(鼠)가 말의 꼬리에 새끼를 낳았다. 석도현(釋道顯)은 이것을 占하여, 「북쪽 나라의 사람이 남쪽 나라에 복속되려고 하고 있다. 반드시 고려가 패하고 일본에 복속될 것이다」고 말하였다.(일본서기, 441쪽)
국내학자들의 반응
이병수(李丙壽)씨의 『한국고대사 연구』
「日本史上에는 任那와 加羅를 혼동한 예가 많을뿐더러, 임나의 위치에 대해서도 매우 애매하여, 소위 ‘임나부(任那府 후일 倭館과 같은 것)」의 所在 이동에 따라 혹은 本加羅(김해)또는 安羅(咸安)를 단칭(單稱)하여 任那라 하고, 또 위와같이 가라(加羅) 등 십소국을 총칭하여 임나라고도 하였다. 소위 ‘임나부’라 하는 것도 본시 왜국이 가라제국과의 무역관계<가라 제국의 금철,곡물,견직물(絹織物) 등을 수요하는 교역관계>를 위하여, 마치 근조선의 왜관과 같은 류의 상관을 설치하였던 것인데, 후에 가라 제국이 신라의 압력에 못 이기어 왜인의 무력 원조를 구하기 때문에 임나부가 마치 가라 제국을 지배하였던 것과 같이 기록된 것은 모두 과장된 필치라고 보아야 하겠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러한 과장의 표현이 많다. 조공이니 헌상이니 하고 기타 삼한정벌, 할지(割地) 등의 설화가 모두 그러한 유에 속한다. 임나가 대가야인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흠명기 32년조(562)에 신라가 임나를 멸하였다는 것과, 『삼국사기(三國史記)』진흥왕 23년조(562)에 신라가 가야(대가야)를 쳐서 항복받았다는 연대가 서로 일치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가야의 중심지가 낙동강의 서지류의 하나인 대가천 유역, 지금 고령군 고령면 부근이었다.』
8.한국내 『일본서기(日本書紀)』연구
한국에서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연구는 이제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고 하겠다. 한일 고대관계사의 연구에 있어서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이용되기도 하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자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한국 고대사 연구 특히 가야사나 백제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가 많은 책이라고 하여 도외시 하는 것보다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철저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기초로 한 활용은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일본서기(日本書紀)』자체에 대한 연구와 완전한 우리말 번역이다.
첫댓글 '일본 신화에 대한 관심은 1930년대 최남선 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육당은 1930년 4월 25일과 26일 이틀간에 걸친 방송을 통해 「조선의 신화와 일본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육당 최남선으로부터 일본 신화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미정님 고마워요^^...좋은 밤 되시길...
굳나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