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는 아내와 상의도 없이 덜컥 집사람이 애끼는 피아노를 헌납했던 엉뚱이를 넘어 모지리였던 얘기를 했는데 엉뚱이의 결혼에도 사연이 좀 있었다.
맞선은 아마도 열번쯤 본 것같다. 열번 다 여자측에서 퇴짜를 맞았는데 막판에 가서는 갑자기 세 군데서 OK 해와서 고민에 빠지게 됐던 썰을 풀어보련다.
다른 분들은 결혼을 위해 구체적인 조건까지를 기도하였더니 주님께서 꼭 맞는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셨다는 간증도 들었지만은 내 경우는 자원병으로 나섰기에 힘든 선교지나 아골 골짜기라도 가라면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 이런 처지를 알고 따라주는 와이프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학력이나 외모 같은 것은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질 안했다.
그런대도 소개로 만난 여성들마다 툇짜를 놓아 아내감을 찾기 위해 강원도 철원과 전남 완도 약산 섬까지 가 본적이 있었다. 강원도에는 내가 목회를 하는시무장로이자 친구아버지가 자기 딸이 어떻겠냐고 해서 만나보라고 해서 철원까지 찾아갔고, 약산도는 기도원에서 만난 여자전도사님이 나를 좋게 여겼는지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갔으나 헛탕이었다. 부모들 보는 눈하고 젊은 사람 눈이 다른가 보다.
그러다가 78년도 겨울철이 시작되자 세곳에서 동시에 OK가 왔다. 첫번째 여성은 김제에서, 두번째는 청주에서, 세번째는 약산도 그 전도사님의 딸에게서. 쌍립이 서면 둘 다 안되다는 통설이 있다는데 동시에 세곳이라니... 미모로 보면 약산도 처녀가, 직장을 보면 청주 처녀가. 속 아는 곳은 김제 처녀였다.
행복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다고 아버지께 사정을 말하니 '나는 고향 가까운 여자가 좋겠구나' 그렇게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제 여자를 택했다
사실 집사람은 그 전에 같은 노회에 속해 있어서 안면이 있었던 차였다. 그런데 아내는 여중 1학년이였을 때 결핵성 척추염을 앓아 광주 제중병원(지금은 광주기독병원으로 개명)에서 수술한 뒤 다시 재발해 척추 2마디는 빼내고 옆에다 뼈를 이식하는 대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원장 겸 미국 의사선생님께서 부모에게 앞으로 이 아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을 알리고 수술했기에 집사람은 그걸 알고 아예 결혼 생각은 포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나는 아이가 없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차라리 아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말한 것에 나와 결혼한 이유가 됐던 것이다.
신경손상을 입어 아일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두 딸을 선물로 주셨다. 그 뒤 병원에 가면 의사들마다 아내의 척추 사진을 보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수술 전입니까? 수술 훕니까? 하고 물었고 물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요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퉁 거리며 걷는 것도 불편할 것인데 그러는 것이었다. 결혼후 10년쯤 지나 병원에서 장애 3급을 받았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생활하는데 아무 불편이 없는데도 말이다. 주님 솜씨를 어찌 의사들이 다 알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원병이었던 주님께서는 내게 딱 맞는 짝을 만나게 해주셨던 것이다. |
첫댓글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선택하여 크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저는 청년 시기에 교회의 청년회장을 맡고 있었고 회원은 30명 정도되었고 그 중에 여자가 70프로였습니다. 그 중에 경기여고를 졸업한 부회장과 연애를 시작하였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기적을 생각한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 필요하면 그렇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격은 엄청 깔끔하고 도도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 직장에서 쉬는 날이면 애인집에 가서 부모님이 계실 때에도 낮잠도 자고 오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가 우리가 서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여름성경학교를 교회에서 개최하였고 대부분 제가 주도하여 행사비를 마련하여 3일 동안 하루에 3회씩 예배하면서 65명의 어린이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여름 성경학교가 끝나고 저를 도와주었던 애인이자 주일학교 교사인 김00 자매가 피곤하다고 하면서 강단상 옆 휘장만 쳐 있는 기도실에서 잠시 자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잠을 자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라 옆에서 앉아서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더니 갑자기 저에게 어떻게 허락도 받지 않않고 들어와 앉아 있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그래서 자는 모습이 예뻐서 보고 있었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상당히 불쾌하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결혼까지 공개적으로 약속한 사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수년간 연애하면서 서로 손 한번 잡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서 노면이 미끄러울 때 넘어지지 말라고 손을 잡을 정도였습니다. 한번 끌어 안아 본적도 없고 키스를 한적도 없었습니다. 애인이 그 만큼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결혼하기까지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순결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애인은 조선시대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최대한 존중하여 주었습니다. 어느 목회자는 저에게 연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꼭 안아도 주고 키스도하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니 저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상대방 여자는 거리를 두더라고요. 저는 사랑했지만 짝사랑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조용히 은혜롭게 헤어졌습니다. 교회의 목회자와 애인의 절친인 청년회 총무인 안00자매도 우리가 성격이 너무 맞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과 교제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도 그렇게 권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총무와 어떤 행사를 같이 다녀도 이성적인 생각이 전혀들지 않았습니다. 성격도 좋고 성격도 저하고 비슷하고 믿음이 참 좋은 자매님였습니다. 안00자매님은 적극적으로 저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저는 그냥 교회에서 다정한 자매이고 성씨도 같아서 동생같은 느낌만 들고 이성적인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 자매가 현재 우리 카페 초기의 회원인데 제가 너무 바쁘게 살았고 핸드폰을 바꾼 것인지 현재는 연락도 되지 않습니다.
아참! 저하고 결혼을 약속했던 김00 자매님을 수년이 지난 후에 길 거리에서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습니다. 서로 결혼까지 약속했고 사랑했던 사이라 나쁜 감정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사과할 것까지 없다고 하면서 차후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더라고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 그 때 그 시절 우리 청년회어 형제님과 자매님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네요. 평소 불철주야 어디 여행도 자주 못 다니고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보니까 소중한 사람들과 연락도 두절되었습니다. 물론 전화번호 변경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성정이 결혼전에도 결혼후에도 그러셨군요
우리 하나님은 칼러풀하신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의 지문, 성문, 홍체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각각 다르게 지으신 분이시니까요
제가 전도할 때 하나님을 궁벵이도 구르는 재주를 주시고 두더지도 땅파는 재주를 주셔서 먹고 살게 하신다
인생들이 방황하며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며 만나질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찾아 만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땅에서 부터 저 세상까지 목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평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나지만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애인의 그런 행동에 약간 서운하기는 하였으나 미운 감정은 조금도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시에 무술도 배웠고 여자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보호 대상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앙도 최고 단계의 순결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이고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는 신앙과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술을 많이드셔서 취하셔도 절대로 부인이나 여자에게 술주정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평소에 저에게 하는 말씀은 오직 못났으면 자기 부인과 자녀에게 횡포를 하겠느냐고 하시면 설령 여자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행사하는 저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정교육 그래서 필요한 것인데 이제는 나라에서 교육하려고 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