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장 사
천장사는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에 자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 말사이다.
절이 위치한 곳은 고북농공단지에서 연암산으로 약 5km가량 올라간 곳에 있다.
천장사는 633년(백제 무왕34)담화가 그의 제자와 함께 수도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뒤의 연혁을 거의 전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우리나라 선종을 중흥시킨 경허(1849-1912)스님이
천장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한편 후학을 지도했다.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의 제자로 이곳에서 출가했다.
천장사 입구
고북면 천장사 입구에 있는 정원석
천장사 오르는 길
입구 부분은 산불에 피해가 없었으나 이곳 이후로는 큰 산불이 있었다.
천장사 입구
몇 년전 나이 드신 농부의 실수로 큰 산불이 있었다.
무섭게 타오르며 정상까지 올라오다가 천장사 입구에서 그 위력을 뒤로하고
불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영험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바위
연암산에 있는 바위로서 제비가 앉아있는 형상을 하여 제비바위라 부른다.
우리나라 유명한 소설가 최인호씨가 경허스님의 이야기를 쓴
“길없는 길”을 이곳에서 집필 하였다.
멀리 태안 바다를 바라보면서 경허 스님은 이곳에서 참선 수행한 장소입니다.
제자들과 법을 논하던 자리기도 합니다.
천장사 전경
관세음 보살상
인법당 내에 모셔진 관세음 보살상, 좌측에 만공스님 진영이 있고,
우측으로 경허스님 진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법당 내에 좌측에 자리한 지장보살상.
경허 선사의 일화
만공(滿空) 스님이 경허 선사에게 볼 일이 있어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누워 있는 경허 선사의 배 위에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었다. 만공 스님은 깜짝 놀랐다.
"스님, 이거 뱀 아닙니까?"
경허 선사가 말했다.
"가만 두어라. 내 배 위에서 실컷 놀다 가게."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서 49재(齋)가 있어 떡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때 경허 선사는 떡과 과일을 내다가 구경온 아이 어른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안 주지 스님은 노발대발했다.
"재를 지내고 난 뒤에 주어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주었느냐?"
그러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렇게 지내는 재가 진짜 재입니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등의 쌀 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길은 먼데 몹시 무겁고 피곤했다. 경허 선사가 말했다.
"무겁고 힘들지?" "예."
"그러면 빨리 가는 방법을 쓸 테이니 너도 따라와야 한다."
"어떻게 빨리 간단 말입니까?"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젊은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 경허 선사는 그 아낙네의 양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마을로 달려갔다. 이 소문이 곧 마을에 퍼지고 급기야는 몽둥이를 든 마을 사람들이 뛰어왔다.
"저놈들을 잡아라."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두 스님을 마을 사람들은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이윽고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쌀 자루가 무겁더냐?"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주지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먼 길을 단숨에 지나왔으니 말이다."
경허 선사가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경허 선사가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여러 안주를 들고 왔다. 이것을 맛있게 먹다가 만공 스님이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십니다. 파전도 굳이 먹을려 하지도 않지만,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스님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경허 선사가 대답했다.
"나는 술이 먹고 싶으면 밭을 갈아 밀을 심고 가꾸어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서 먹을 것이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하여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가꾸고 키워서 파전을 부쳐 먹겠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먼 길을 나섰다가 때마침 어느 고개에서 쉬고 있는 상여 행렬을 만났다. 경허 선사가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없습니다."
"술이든 고기든 아무거나 주십시오."
사람들은 별난 스님도 다 보겠다는 듯이 의아해 하면서도 망인(亡人)을 위해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상주는 부탁을 하나 했다.
"스님들의 자비로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경허 선사가 말했다.
"명당은 해서 무엇하는가, 죽으면 다 썩은 고깃덩이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느 날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과 길을 가고 있었다. 경허 선사가 만공 스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청불사(丹靑佛事) 권선(勸善)을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권선문을 만들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모은 후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만하면 단청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을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가 불사 시주금으로 술을 청했다. 만공 스님은 놀랐다.
"스님, 부처님을 팔아서 술을 마시다니 말이나 됩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술만 마시던 경허 선사의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겨울 추위 탓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경허 선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아, 이상 더 좋은 단청불사가 어디 있나!"
달마 선사 벽화
산신각
산신각 내의 탱화
ㄷ 자형으로 되어 있는 인법당 건물
좌측이 경허스님 방, 공양간 ,중앙이 인법당, 우측이 지장보살 모신 곳.
스님들의 기도처
관세음 보살상
인법당.
편핵
칠층석탑
인법당 앞에 위치한 높이 3M의 칠층석탑으로서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충남 문화재자료 제202호로 지정되어있다.
경허 선사 처소
동학사에서 천장사로 온 경허 선사는 지고 온 바랑에서 옷 한 벌을 내어 솜을 넣어
두툼한 누더기 한 벌을 손수 지어입고 곧바로 쪽방으로 들어가 이듬해 6월까지
꼬박 1년 동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보림에 들었다.
1년이 넘도록 세수도 않고, 몸도 씻지 않고 솜으로 누빈 누더기 한 벌 만 입은 채
보냈으므로 온 몸에 이가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들 끌었다고 한다.
선사는 1년 후 쪽방의 방문을 열고 깨침의 노래 가운데는 유래 없이 긴 오도송을
게송 하였다 한다.
경허 선사와 제자들
조선시대 말기에 선종을 중흥한 경허선사(鏡虛禪師)가 수도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기셨고 후학들을 지도하시던 곳. 경허스님의 수법제자로는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등이 손꼽히고 있으며 그 중 수월스님은 천수경(千手呪)를 통하여 견성을 하시어 세가지를 얻으셨다고 한다.그 첫째가 불망념지(不忘念智),둘째가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셋째가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은 밤낮으로 항상 천수경을 외웠는데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기를 배워 짚신을 삼거나 땔감을 하면서도 한시도 천수경을 외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이곳 천장암에 오신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14살의 어린 동자가 수행자가 되겠다며 천장암을 찾아왔는데, 이 동자가 바로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인연으로 훗날 큰 선지식이 된 만공(滿空)스님이었다. 만공은 그해 사미계를 받고 밥짓는 공양주가 되어 여러 해를 이곳에서 지냈으며 또한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난 혜월(慧月)스님도 그 무렵 천장암을 찾아와 밭일을 하면서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대의 고승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처음 출가하여 경허선사의 제자가 된 사찰도 이곳이었으며 경허선사와 만공선사의 수도처라는 점에서 많은 수도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육 바라밀 요사체
보시방,지계방,인욕방,정진방,선정방,지혜방으로 되어있음.
첫댓글 법우님과 정원법우님이 올려주시는 사진 덕분에 요즘 사이버상으로 순례를 잘하고 있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