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2)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非獨我曹罪
우리 죄뿐만 아니다.
새해가 밝았다. 긴 팬데믹 시기를 넘기고 3년 차인데 4월에는 총선이 있으니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게 될 거다.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는 사람이 모름지기 정원 300명의 5배에서 10배는 출사표를 던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무엇일까? 보지 않아도 뻔하다. 야당은 정부 여당이 잘못하였으니 자기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아가겠다고 할 것이고, 여당은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일을 못 하겠으니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달라고 할 것이다.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여도 야도 아닌 중간에서 조절하는 힘을 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냉혹한 전쟁 상황만 있을 뿐이다. 싸우고 경쟁하더라도 금도(襟度)가 있어야 하는데, 지난 한 해의 정치권에서 나온 행태를 보면 이성적(理性的)인 대화나 언론은 없었던 것 같았다.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작태(作態)가 범람(汎濫)하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비이성적인 작태는 양쪽을 다 망하게 하였을 뿐 승리자는 없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작태 가운데 우리 역사에서는 임란(壬亂)과 관련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더 커다란 예를 든다면 400년을 이어 온 한왕조(漢王朝)가 무너지고 삼국(三國)의 분열이다. 그 뒤에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이어지는 400년간의 분열 시대가 펼쳐졌으니 후한(後漢) 말 작태의 해독은 참으로 크다.
후한 말은 여느 왕조(王朝)의 말기처럼 부패가 만연하여 환관(宦官)이 발호(跋扈)하였다. 환관이 황제를 세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궁궐에서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여 둔 환관이 이렇게 기세를 부리자, 그들은 부패의 근원이고 혼란의 책임은 모두 환관에게 있다고 입을 모아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래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청의(淸議) 운동을 펼쳤지만, 도리어 금고(禁錮)되고 쫓겨났다.
사실 후한 말에 환관을 제압할 기회는 있었지만 실패한 것뿐이다. 영제(靈帝)가 죽고 영제의 하황후(何皇后)가 태후가 되어서 그 오라버니 하진(何進)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후임 황제를 선정하고 정사를 처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임 황제를 선발하고 정사를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장군이라면 군사도 움직일 수가 있으니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환관 세력을 끊어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기 힘으로 이 기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 젛오의 기회를 맞은 원소(袁紹)는 하진에게 환관을 다 쫓아내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도록 뒤에서 재촉하였는데, 하진도 환관의 해독은 짐작하고 있어서 되도록 원소의 말을 따르고자 하였다. 하진은 20여 세인 누이동생 하태후에게 가서 환관을 다 내쫓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하태후는 망설였다. 그렇게 한다면 환관이 없으니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젊은 태후가 정사를 맡은 관원과 직접 대면하고 논의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환관 제도는 그 나름대로 필요하여 둔 것인데 이를 없애는 것도 옳지 않게 생각되었다. 젊지만 하태후의 생각이 오히려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환관을 다 없애고 싶은 원소는 전국에서 호걸과 맹장(猛將)을 불러 모았다. 이들의 무력을 가지고 하태후와 환관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다. 이를 본 조조(曹操)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환관의 우두머리 몇 명만 처단하면 될 일을, 환관을 다 내쫓으려 하니 소문이 새 나가서 실패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조조의 말대로 환관 가운데 가장 악한 사람 한두 명을 법으로 처단하면 나머지야 자연스럽게 꼬리를 내릴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환관을 다 내쫓으려고 하더니 끝내 서부지역의 군사 강자인 동탁(董卓)까지 불러들이려고 하였다.
하진은 환관들을 불러서 ‘군사들이 낙양으로 속속 들어오니 빨리 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하였다. 환관의 우두머리 장양(張讓)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하더니 그날 밤 궁궐에서 하태후를 만나고 나오는 하진을 불러 세우고 말하였다. ‘지금 천하가 흉흉하게 된 것은 우리들만의 죄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바로 상방검(尙方劍)으로 하진의 목을 베게 하였다. 환관은 죄를 지었지만 모두 다 죽을죄를 진 것은 아닌데, 죄 없는 사람까지 쫓아내려 한 것에 대한 항의이며 앙갚음이었다. 환관이 밉다고 하여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감정으로 쫓아내려고 하다가 모든 것을 그르친 것이다.
사실 이렇게 환관을 다 죽이려다 실패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환제(桓帝)가 죽고 그 황후 두씨(竇氏)가 황태후가 되어 그 아버지 두무(竇武)를 대장군으로 삼고 영제(靈帝)를 데려다 황제로 세우고 두무에게 정사를 맡기니 청렴한 진번(陳蕃)과 함께 새 정치를 하고자 했던 일이 그 앞에도 있었다. 두무는 계획을 세우고 내일 아침에 환관을 다 죽이자고 딸인 두황후에게 상주문을 전하게 하고 나왔다.
이 문서를 전달하는 환관이 살짝 그 내용을 보고 불만이었다. ‘죄지은 사람이야 죽여도 좋지만, 죄 없는 사람이라도 환관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즉시 환관들은 모여서 칼을 들고 ‘두무가 황제를 바꾸려는 반역을 저질렀다.’고 거짓말을 하고 진번을 죽이니 두무는 자살해야 했다.
진번같이 당시에 가장 존경받는 청렴한 사람도 두무와 함께 비이성적으로 하다 일을 그르친 것이다. 환관이 아무리 죄를 짓고 미워도 환관이 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환관을 처리하는 방법도 이성적이어야 했지만 감정을 앞 세웠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는 하진이나 두무 혹은 진번이나 원소 같은 개인의 실패로 끝난 일은 아니다. 왕조를 무너지게 하고 길고 긴 전쟁과 혼란, 분열 속으로 밀어 넣은 죄를 지은 것이다. 진번이나 원소가 개인으로 깨끗하였다고 해도 두무니 하진에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한 죄가 없다는 말인가? 죄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하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고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한 조조(曹操)는 난국(難局) 속에서 중심을 잡아갔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한(漢)의 헌제(獻帝)에게 선양을 받고 위(魏)를 건설한다. 난세 속에서도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조조의 이성(理性)이 빛난 셈이다.
여야가 극한 대립에 빠져 있는 정치 상황에서 조조처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판세(判勢)를 정확히 읽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이 주도권을 잡겠지만 상대가 아무리 나쁜 집단이라고 생각되어도 전부 나쁜 것은 아니니 옥석(玉石)을 구분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우리의 희망이다.
첫댓글 좋은 역사평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