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중랑천을 걸으며/靑石 전성훈
다시는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추위이다. 추위도 그냥 추위가 아니라 저 멀고 먼 동토의 나라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북극의 찬 기운이라고 한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대단한 추위이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잠시 눈을 감고 옛일을 떠오려 보니 이토록 추운 겨울을 처음 맞이한 것도 아니다. 젊은 날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정상에서 지냈을 때는 영하 20도 전후의 매서운 날씨가 오랫동안 계속된 적이 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글로 표현하기 쑥스러운 일도 생각난다. 두껍게 몇 겹 껴입은 군복을 풀어헤치고 간신히 소변을 보면 거짓말처럼 몸에서 나간 소변 줄기가 땅에 닿고 나면 금세 얼어버린다.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일이 무시로 일어나는 끔찍이 추운 곳에서 살거나,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아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가면 기억도 가물가물하다가 어느 틈에는 지난 일의 고통도 즐거움도 쓰라린 경험도 차츰차츰 변해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흐르는 세월 속에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잊으려 애쓰면서 사는 게 인간의 삶이 아닐까. 악몽 같았던 추위 속에 1월이 지나고 2월에 들어서 입춘을 넘어서니 날씨가 조금씩 변해간다. 이제는 걸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어 창동교 다리 밑 중랑천으로 나간다. 해가 중천에 오르고 햇볕이 온 세상을 따듯하게 비추는 오후 1시 무렵에 집을 나선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쓰거나 벗거나 본인이 알아서 하므로 중랑천에 들어서면 마스크를 벗는다. 안경을 낀 탓에 마스크를 쓰고 걸으면 금방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차가운 하천에서 유유히 먹이를 찾는 오리가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물에 몸을 맡기고 그냥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속에서는 물갈퀴를 한시도 쉬지 않고 젓는다. 오리가족을 지나가니 흰색의 백조 한 마리,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는 잿빛이 확연한 왜가리가 혼자서 먹이를 찾으려고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친구도 없이 혼자서 먹이를 구하는 그 모습을 보니 왜 그런지 찡한 느낌이 든다. 천천히 800m를 걸어 녹천교에 다다르자 건너편에 야외 눈썰매장, 스케이트장, 눈놀이동산 등이 보인다. 이곳은 이웃 노원구에서 관리하는 곳이다. 그동안 자전거 연습장과 인라인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올겨울 들어 노원구에서 새로운 놀이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겨울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12월 말에서 2월 초까지 약 40일간 운영하고 철거를 하고 있다.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배려하는 노원구청의 자세가 돋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입장료이다. 노원구민은 무료이지만 다른 지역 주민들은 2천원이다. 노원구 이외 지역 사람들에게도 무료입장을 허락할지를 고민하다가 이렇게 정한 듯하다. 제방 밑 둔치에 있던 파크골프연습장은 겨울 동안 휴장이다. 겨울철 잔디 보호를 위해서 1월에서 3월까지 3개월간 휴장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걸으니 어느덧 월계교를 지나 경춘 철교 다리 밑이다. 이제는 되돌아서 집으로 가야 한다. 집까지 왕복 5km 정도 걷고 녹천교 아래 있는 운동기구를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오랜만에 나온 탓에 무리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운동기구를 사용한다. 주위에는 몇몇 사람이 운동기구에 매달리거나 좌우로 몸을 움직이면서 몸을 풀고 있다. 미세먼지도 보이지 않아서 하늘이 맑고 푸르다. 푸른 하늘에서 봄이 온다고 신호를 보내는 듯이 뭉게구름이 반갑다고 빙그레 웃는 것 같다. 겨우내 무너져버린 육신이 따사로운 봄의 정기를 받아 기운을 차리고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 봄이 익어가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즐겨 찾았던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싶다. (202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