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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청주] 어린이 마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여호 24, 14 - 29
† 복음 : 마태 19, 13 - 15
★ 여호수아는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주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민족들의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그들의 서약을 듣고 숨을 거둔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당신께 다가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이르신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도대체 어린이들의 어떤 특성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들은 어른들처럼 죄를 짓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의탁할 줄 알아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약함’입니다.
오늘날과 달리 예수님 시대에는 유아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고, 충분한 영양 섭취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린이야말로 그 사회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이들의 차지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우리는 교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곧 교회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가 되어야 합니다. 강자의
처지에서 약자를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약자가 되어
약자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약함’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어린이 마음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8월17일 연중 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19,13-15)
어린이의 마음
구역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3-5살 박이 미카엘라, 젬마, 새랑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하느님 아버지의 품은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도저히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가출을 한 것이지요.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버지는 슬퍼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기로 했습니다.
“나의 아들 마태오야, 제발 집으로 돌아오너라. 나는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는데, 네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구나. 이 광고를 보거든 모 성당 앞에 있는 큰 나무 아래로 오너라.
내가 거기서 너를 기다리겠다. 나는 너의 사랑하는 아버지다.”
그런데 글쎄 아버지가 실수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정정 기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이 낸 것이라고 아들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기다리기로 한 날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잔뜩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면서 약속된 나무 밑으로 갔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나무 밑에는 마태오라는 세례명을 가진 500여명의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실제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 즉 보호를 받지 못하며 사는 세상이 얼마나
힘들은 지를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 광고를 보는 순간, 보호해
줄 아버지를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 없다면서 주님의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으로 인해 아버지의 곁에
있으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곁을
떠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 안에서 참된 행복을 얻으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는 절대로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자신의 자녀를 지켜주십니다. 왜냐하면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자신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 안에 머물기 위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교만과 이기심들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들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품은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한 명의 왕자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개구리들과 키스해야 한다.(김병완)
평온한 강줄기. 주님의 품이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품으로
갑시다~~~
자신의 모델을 찾는 시기
언젠가 책을 보니 12~13세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하더군요.
즉, 바로 이때가 자신의 모델을 찾을 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델을
평생 마음에 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 모델을 엉뚱한데서 찾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찾습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삶이 자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델을
쫓아서 갑니다.
바로 이 시기에 평생 자신의 롤모델이 될 분을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평생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모님들은
어떤가요? 이때 특히 공부를 강조하시지요. 학원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
성당 갈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성당 갈 때가 아니라
공부할 때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델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자랄 수 있도록....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나는 어린이들이 좋아 (J''aime les enfants)”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013년 다해 8월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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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난 5월21일에 올린 묵상 중 일부를 옮겨본다.)
어린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들을 몇 개만 떠올려보자.
순수(純粹), 천진(天眞), 나약(懦弱), 의존성(依存性), 순응성(順應性)이
있을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해 눈물이 많다는 이야기다.
천진하다는 것은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자신을 다 드러낸다는 말이다.
나약하다는 것은 쉽게 쓰러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의존성이란 무서움이 많아 누군가 기댈 존재를 찾는다는 말일 게다.
순응성이란 계산하지 않고 마음으로 잘 따른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 하느님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린이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가 깨어나 캄캄한 공간 안에서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던 기억이 없는가?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에 온갖 상상을 하면서 좋아하고 슬퍼하고
심각해지고 정의감을 분출하던 기억이 없는가?
아무 것도 아닌 잘못에 조마조마 가슴을 조이던 기억이 없는가?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린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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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복음이 말하는 어린이의 의미를 잘 표현해준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는 1997년에 작고한 프랑스 미쉘 꽈스트
(Michel Quoist; 1918,6,18-1997,12,18) 신부님의 시이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아 (J'aime les enfants)”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아.
모두가 어린이들처럼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어린이가 되지 못한 어른들을 싫어해.
내 왕국은 오직 어린이들만을 원하고 있어.
그것은 시간이 시작된 때부터 정해진 법이야.
꼬부라진 어린이, 등이 굽은 어린이, 주름살진 어린이,
흰 수염의 어린이. 어떤 모습이던 어린이면 돼.
이는 바뀔 수 없는 결정이야.
어린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방은 없어.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작은 어린이들이 좋아.
어린이들 안에는 내 모습이 아직 무디어지지 않았고,
내 모습을 망가뜨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야.
그들은 새롭고 순수하며, 더럽혀지거나 얼룩지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그들을 부드럽게 바라볼 때, 그들 안에 내가 있음을
알게 되지.
내가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직도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야. 다 큰 어른들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발전도 없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지 된 것이지.
자신들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그것은 불행한 일이야.
나는 늙은 어린이들을 좋아해.
갈등 속에 힘들어하고,
죄를 아직 짓고 있지.
하지만 어린이들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야.
나는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아.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은 누구에게 해를 끼친 일이 결코 없고,
자신들이 비난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용서할 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는 거야. 문제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기에 안타깝다는 것이지.
무엇보다도 내가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눈빛 때문이야.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나이를 알 수 있어.
내 나라에는 다섯 살 난 어린이들의 눈 밖에는 없어.
어린이들 눈만큼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어린이들 안에 산다는 것과 그들의 눈을 통해서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야.
네가 순수한 눈들을 만났을 때, 너에게 미소를 짓는 것은 바로 나야.
하지만, 어린이의 얼굴에 삶이 없는 눈처럼 슬픈 것은 없어.
창문들은 열려있는데 집은 비어있어.
두 눈은 있지만 빛이 없어.
나는 슬픈 마음으로 문 앞에 서서 추위 속에 문을 두드린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해.
그 안의 어린이는 혼자야.
살찌고 굳어지고 메말라져 결국 늙어간다.
아, 불쌍한 늙은이.
알렐루야, 알렐루야!
열어다오, 너희 모든 어린 늙은이들아.
너희 안에 어린이를 부활시키고자 온,
영원하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너희의 하느님인 나다.
서둘러라. 지금이 바로 그 때다.
나는 너희에게 다시 어린이의 아름다운 얼굴을 주려 한다.
나는 어린이들을 사랑한다.
그러니 모두가 어린이들처럼 되기를 바란다.
(번역 소나무신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013년 다해 8월17일
어제 교구인사이동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2월에 이곳 용문
청소년 수련장으로 왔는데 이번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6개월 짧은 시간에 어린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어른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용문에 있으면서
맛 집도 여러 곳 다녔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식사대접을 하기
때문입니다. 갈비찜은 서정, 막국수는 장원 막국수, 쌈밥은 쌈밥마을,
토속음식은 황해식당, 두부는 손 두부 집, 해장국은 양평해장국,
설렁탕은 고바우 설렁탕, 만두는 회령만두 그리고 막걸리는
지평막걸리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맛 집도 많이 다녔습니다.
이곳에서 토끼가 새끼를 낳은 것을 두 번 보았고,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은 한번 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새끼들은 참 귀엽고, 예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새끼들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창조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잘 돌보게 만드셨나봅니다. 아침마다
다섯 마리의 새끼 토끼를 보는 것, 연못의 물고기를 만나는 것,
오리와 닭 그리고 칠면조의 알을 먹는 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저녁이면 수련장 앞의 개울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밤이면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는 것도 즐거움이요,
새들과 만나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이곳에서
너무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 샘이 나셨나 봅니다. 그래서 저를 교구
성소국으로 가도록 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성소국에서도
학생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아니지만 예비신학생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되려고 하는 예비신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제게는 또 다른 기쁨이요, 설렘입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하신 ‘성소후원회’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제게는 큰 위로와 도움입니다. 다행인 것은 10년
전에 교구청 사목국에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명동하면 떠오른 것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물결, 길거리에서 파는 맛있는 먹을거리,
청계천의 산보길, 남산의 산책길이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 뮤지컬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습니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
광야에서 정화시켜주신 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분, 이민족들로
부터 지켜 주신 분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백합니다. “우리도 당신이 믿고
따르는 야훼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사제들도, 신앙인들도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산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굿뉴스 가족 여러분!
새로운 곳에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학교라는 위험성 뛰어넘기 위해
2013년 다해 8월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복음 : 마태 19,13-15
< 학교라는 위험성 뛰어넘기 위해>
거북이와 오리와 캥거루가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치타였습니다.
거북이는 수영을 잘하고 오리는 수영과 날기를 캥거루는 높이뛰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달리는 것이니까
달리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북이는 손과 발이 다 갈라지면서까지 연습을 했지만 빨리 달릴
수가 없었고 무능력한 열등아로 남았습니다. 오리는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여 날지도 못하게 되었고 다리 근육이 붙어 조금 빨리 뛸 수 있게
되었으나 물갈퀴가 찢어져 수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캥거루는 높이
뛰지 못하고 달리는 것만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높이 뛰면서 달리면
더 빠르다는 것을 잊고 뒤뚱뒤뚱 달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조금 빠른
편이라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각자는 자신들의 독특한 능력을
잃고 적당히 빨리 달리는 칭찬받는 학생들이 되거나 영원한 열등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각자의 개성과 능력이 있음에도 획일화된 교육제도
하에서 인정받기 위해 우리 고유의 그런 것들을 잃어버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할 것입니다.
사실 천재들이 학교에서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아이라고 평을 받은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다섯 살 때 오리의 알을 품에 넣고 부화를 시도한 몽상가가 바로
토마스 에디슨입니다. 그는 열세 살 때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조각가 로댕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습니다. 예술학교 입학을 세
번이나 거부당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는가”라며 통탄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 때까지 전혀 말을 할 수 없었고, 일곱 살 때 겨우
책을 읽었으며, 수학성적은 항상 낙제점이었고, 담인 선생님은
‘정신발달이 느리고 사교성이 없으며 환상에 사로잡힌 아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수들이 그를 평가하기를 ‘배우기를 포기한 젊은이’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학교라는 곳이 아이들을 맡기기에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받는 정식교육을 그대로
받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 집에 가장 완전한 지혜의 교사인
성모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모는 아이들을 그 많은 시간동안 학교라는 곳에 맡겨두는
것이 잘 하는 일일까요? 우리나라 아이들은 왜 행복지수가 세계
꼴찌고 자살도 가장 많이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교육하고 교육비도 세계 최고 수준인데도 왜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을 타는 인물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독일이나 핀란드식으로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되 자신이
협동하지 않으면 함께 망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처럼 교육과 신앙이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교육을 통해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소수민족임에도 하버드의 30%, 노벨상의 40% 이상을 휩쓰는
유다인들의 교육의 뿌리는 다름 아닌 ‘종교교육’에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종교부터 가르칠 수 있는 그들의 저력이 가장 부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
줄 것을 청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막 떠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빠지는 것을 허락할 부모님들이 많이 있을까요? 현 교육의
문제점들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먼저 그리스도께 다가갈
줄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의 딸은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문을
내다보며 아빠를 통해 밖의 눈이 녹아가가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그저 윌포드라는 사람 때문에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윌포드만을 찬양합니다.
저는 매일 가정기도를 하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신앙으로
착하게 크고 공부도 잘하고 말썽도 부리지 않습니다. TV와 컴퓨터를
끄고 저녁에 다만 몇 분이라도 하느님 앞에 앉게 하는 부모들, 바로
오는 예수님께 아이들을 안고 온 모범적인 부모들과 닮은 것입니다.
학교 속에서만 헤매게 하지 말고 먼저 예수님께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부모님들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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