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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이차 호르몬의 작용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수염이 나지만 아름답고 탐스러운 수염을 가진 이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수염을 묘사하는 단어가 갖가지인 것만 봐도 그렇다. 염소수염이니 구렛나룻이니 카이젤 수염이니 하여간 내가 아는 수염의 종류는 여기서 그치지만 수염을 길게 기르기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닌 모양이다. 헌데 도사들, 현인들은 한결같이 탐스러운 수염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수염은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삼국지>의 관우는 아름다운 수염으로 유명했다. 관우가 조조의 꾐에 넘어가 한에 항복했던 시절, 헌제를 배알하러 간 적이 있다. 헌제는 유비의 의형제란 말만 들어도 그립고 좋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출중한 장수임에랴. 관우의 외모는 유명하다. 헌제는 그 관우를 눈부신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수염에 관해 물었다. 그때 관우가 한 말이 겨울에는 수염이 얼지 않도록 주머니로 싸둔다고 했다. 헌제는 그에게 '미염공'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비단주머니를 하사했다.
그 관우는 죽은 뒤에도 죽지 않아 우리나라에까지 와 수호신이 되었다. 소위 관제 신앙이다. 그 관우를 모신 사당이 동묘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쪽으로 얼마쯤 걷다보면 신설동 로타리 미치기 전, 오른쪽에 동묘가 있다. 그 때, 이십 팔년전 사당은 어두웠고 그곳에서 관우의 초상화를 보았다. 관우가 우리 나라에까지 온 것은 임진왜란때 일이다. 명나라 장수 진인은 관우 숭배자로 울산에서 싸움을 하다가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었는데 그때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관우의 음덕이라 하여 관우의 소상을 받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확대되어 동묘가 되었는데(정식 명칭은 동관왕묘. 관우를 받드는 사당은 남관왕묘, 북묘, 서묘, 동묘 네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동묘만 남아있다) 그 섬김이 민속신앙으로 발전했다.
<수호지>에도 미염공이 나온다. 주동이라는 인물이다. 그 역시 수염이 한 자나 되고 아름답다 해서 얻은 별명이다. 이 주동 역시 의리를 지키는 인물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시대가 그를 알아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양산박에 들어가 103인 중의 한명이 되었다. 이처럼 동양인은 길고 탐스러운 수염에 가치를 두었는데 이는 수염이 털의 일종으로 인종의 특성상 털이 많지 않으므로 그 희귀성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들이 별명을 얻은 것은 수염때문이기는 해도 그 별명이 살아남은 것은 수염 주인공의 인간적 가치, 그의 삶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완용은 명필이었지만 그의 글씨를 간직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그의 삶이 오욕으로 점철되어서가 아니었던가.
서양인은 체질상 동양인과는 다르다. 그 유명한 민화 '푸른 수염'이나 유명인물의 초상화에서 보면 길고 탐스러운 수염은 없다. 대신 구렛나룻 무성하거나 콧수염 턱수염을 함께 길러 잘 다듬은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데 아마 다들 털이 많이 나는 체질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헨리 8세나 루이 십사세의 초상화를 보라. 무척 활동적으로 보이는 뚱뚱한 몸집의 헨리 8세는 턱수염을 잘 다듬었고 머리에 커다란 가발을 얹은 루이 십사세는 수염을 모두 깎아버렸다. 물론 유행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다르다. 이들은 잘 다듬은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동양의 미염공처럼.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은 긴 은빛 수염을 배까지 드리우고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사 간달프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수염이야 말로 추울 때면 수염주머니로 싸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충고하는 이들이며 현명한 이들이다. 실제 역사 속 주인공들이 턱수염을 짧게 혹은 가슴께까지 기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둠의 핵심>에 나오는 한 남자도 수염이 허리께까지 드리워져 있다. 배 수리공인 그는 이 열대에서 비둘기 날리기라는 취미에 미쳐 있으며 기선을 수리하러 배밑바닥에 미끄러져 들어가야 할 때면 수염을 묶어 손수건으로 감싼다. 바닥이 진흙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염 손질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을 마친 저녁이면 그 천을 대단히 공들여 빤 다음 덤불에 널어 말린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는 보일러 메이커로 현자와는 거리가 멀다.
보기 좋은 것을 따라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 심리속에는 나도 저렇게 하면 근사해보이리라는 희망이 숨어있고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모방 심리가 숨어 있다. 요즘 등장하는 유명 인물들 중 튀는 사람 누군가도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의 수염은 그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만 보통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저 미염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야말로 염소수염인 그는 무척 행복해 보이는데. 흰옷 입고 '하악하악' 피겨스케이트를 타면서 '행복해' 하고 소리 지르다 못해 외쳐대는 그의 모습을 보면 못내 불편한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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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염공.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관우가 우리 민속신앙에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맞는가 봅니다. '하악하악'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분들이 보면 언짢아할 테지만 저도 별롭니다.^^
^^ 아마 그 사람의 첫 소설이 좋아서가 아닐까요. 이후 그의 행태는 관심을 끌기 위한 퍼포먼스 같았구요.
지난밤 고우영의 수호지 만화에서 주동을 만났었는데~~~~
ㅎㅎ 어떻던가요. 그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수염에 의리는 최고........이규를 미워하는 마음 넘 이해가 되어요....
미염에 대한 평론 잘 읽었습니다. 저두 기르면 안 되겠군요. 몇 가닥 되지 않으니 늙은 염소수염 될 게 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