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이담명(李聃命) 1646년(인조 24)∼1701년(숙종 27). 칠곡 석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공조참의 석담 윤우(潤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교 낙촌 도장(道長)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귀암 원정(元禎)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좌부승지 완석정 언영(彦英)의 딸이다.
미수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갔다. 경신옥사로 파직되어 아버지 원정의 유배지 초산에 따라갔다.
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진정(賑政 : 재해를 구제하는 정책)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
외직에 있을 때에 견문한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 많은 잡저를 남겼고, 저서로는 ≪정재문집≫ 8권이 있다.
갈암집
이이로(李耳老) 담명(聃命) 에 대한 만사
난초 향기처럼 맑은 그 지조 / 馥郁芳蘭操
온화하고 순수한 옥 같은 자태 / 溫淳美玉姿
고난의 세월을 얼마나 겪었던고 / 艱虞幾經歷
그러나 처신은 흠 하나 없었어라 / 處理絶瑕疵
좋은 시대 와서 조정에 진출했고 / 道泰彙征日
궁한 운수 만나 서로 만나지 못했지 / 途窮契闊時
고향에 돌아오자 세상을 떠났으니 / 歸來遽乘化
국가와 우정 생각하며 길게 통곡하오 / 長慟爲公私
서(書)
이이로(李耳老) 담명(聃命) 에게 답함 경오년(1690)
보내신 편지를 받고 추운 겨울에 기후가 편안하시며 관찰사의 임무를 수행하시는 데 신의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감격과 위안이 함께합니다. 현일은 소장을 올려 진정을 호소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다시 호소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처분이 내려질지 모르겠습니다. 초야의 천한 신하가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누차 성상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한결같이 황공할 따름입니다. 기근(饑饉)의 처참한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내년 봄까지 간다면 경신년(庚辛年)과 다름이 없을 것인데, 묘당의 뜻이 아직도 이와 같으니 어찌 이른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일이 아니겠습니까. 목동이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주인에게 넘겨주고 떠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것이니, 대감의 계문(啓聞)은 이 뜻에 맞습니다. 성상께서는 총명하고 자애로우시니 결코 대감의 말씀을 지나치다고 하지 않겠지만, 묘당에서는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낱낱이 말씀드리자니 한탄만 나옵니다.
[주1]이른바 …… 일 :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밖으로는 흉노가 강성하여 변경을 침범하고, 안으로는 제도의 소홀로 제후왕이 참람하여 회남왕(淮南王)과 북제왕(北齊王)이 역모로 처형되었다. 이때 가의(賈誼)가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당금의 형세를 보건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이고,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이고,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그 내용을 진달하였다. 여기에서 통곡할 일이란 천자의 권위가 약하고 종친이 대권을 쥐고 있음을 말하고,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란, 첫째, 흉노가 오만하게 구는데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 자기에게 흉노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데도 천자가 기용하지 않아 도성에서 수백 리 밖조차도 천자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2]목동이 …… 것 : 맹자(孟子)가 평륙(平陸)에 가서 그곳 수령 공거심(孔距心)에게 흉년에 백성이 굶어 죽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목민관의 죄라고 하면서 비유한 말로, 예를 들어 남의 소와 양을 받아서 기르는 자가 목장과 꼴을 구하지 못하였을 경우, 그 소와 양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옳은지, 아니면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여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있어야 옳은지를 물으니, 공거심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인정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答李耳老 聃命 ○庚午
承眷惠手翰。仍審冬寒。軒帷靜謐。旬宣有相。感與慰幷。玄逸上章陳懇。不得蒙允。方謀再煩哀籲。未知處分果何如也。草莽賤臣。不量涯分。屢干天威。一味惶恐而已。饑饉之慘。日甚一日。若至明春則想無異庚辛。而廟堂之意尙如此。豈非所謂痛哭流涕者邪。求牧與芻而不得則去。事理當然。台監之啓。得此意矣。上聖聰明仁恕。必不以台言爲過。而其如廟論不能相悉何。節節言之。爲之吁歎。
이이로에게 보냄 경오년(1690)
한 해가 저물어 추위가 한창 심한데 시봉(侍奉)하시고 관직 생활하시는 대감의 정황은 어떠하신지요? 우러러 그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현일은 원래 앓던 병이 추위를 만나 더욱 심하여 두문불출하고 신음하고 있으니 매우 괴롭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관이 이미 명을 받아 올라갔고 맡고 있는 직명(職名)이 성은으로 해면되어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점차 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백성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여러 가지 건의는 과연 바라는 대로 되고 있는지요? 처리하고 시행하는 과정에 반드시 정신이 많이 소모될 것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그중에 영해(寧海)의 죄인 신상근(申尙謹)의 일은 전에 도성에 있을 때 그 사건의 대강을 대략 진달했었는데, 이제 들으니 신상근이 이미 사면의 은전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일이 비록 관대하고 인자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집사(執事)의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좌우에서 번갈아 다급하게 하소연하여 그 곡절을 혹 자세히 조사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요? 사람의 도리는 삼강(三綱)보다 큰 것이 없고,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는 은혜와 사랑이 더욱 절실하기 때문에 오형(五刑)에 속하는 3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큰 죄가 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자식이 그 아비의 일을 공경히 하지 않으면 그 아비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우리 정치하는 사람에게 죄를 얻지 않으면 하늘이 우리 백성에게 주신 이륜(彝倫)이 크게 혼란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실로 벼슬하고 있는 군자가 삼가고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주자가 송(宋)나라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인륜과 풍화(風化)에 관련된 옥사가 있을 경우, 비록 확실치 않다는 염려가 있더라도 옥안(獄案)을 결단하는 의견을 올릴 때에는 대뜸 용서해 주는 예를 적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로 보건대, 이런 옥사는 대뜸 관대하게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영해부가 비록 매우 작지만 포의(布衣)의 선비도 있고 관로(官路)의 사대부도 있는데, 100여 인이 글을 올려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것이 어찌 모두 혐의로 인하여 사람을 무함하는 무리라서 그러하겠습니까. 금수 같은 자가 사람을 핍박하는 것을 보고 함께 살려고 하지 않을까 참으로 염려됩니다.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인 것만 보고도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는데, 더구나 악역(惡逆)한 자와 한고을에 살면서 미워할 줄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상근이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고 버젓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다면, 앞으로 모자(母子)간에는 은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장차 뒷걸음질치고 그 고을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다시 생각하시어 간특하고 흉악한 사람이 시일을 끌면서 요행히 형벌을 면하여 편히 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뭇사람을 흥기시키고 풍화를 도와 이루는 데 실로 보탬이 될 것이니, 집사께서는 유념해 주십시오. 이번 옥사의 전말을 별지(別紙)에 갖추 써서 올리고, 주자의 〈논아량차자(論阿梁箚子)〉와 〈형옥주의(刑獄奏議)〉도 함께 써서 올리니 아울러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집사를 흠모하는 마음이 깊어 혹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집사의 총명을 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번거롭고 외람됨을 꺼리지 않고 숨김없이 곧바로 말씀드렸으니, 양찰하여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철따라 더욱 보중하시어 한 도(道)의 바람에 부응해 주십시오.
[주1]다행스러운 …… 것입니다 : 1690년(숙종16) 9월 23일에 소를 올리고 나서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하향하였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 유시하고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가, 10월 12일에 사관이 선생의 병이 깊음을 아뢰자 먼저 올라오게 하였다. 11월 6일에 본직에서 해임되었고, 28일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고 겸직도 그대로였다. 이 편지는 아마도 11월 6일에서 28일 사이에 쓴 듯하다.
[주2]마을 …… 않았는데 : 추양(鄒陽)의 〈어옥상서자명(於獄上書自明)〉에, “현(縣) 이름이 승모(勝母)인 것을 보고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고, 읍호(邑號)가 조가(朝歌)인 것을 보고 묵자(墨子)가 수레를 돌렸다.”라는 글이 있는데, 이에 대한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에, “《회남자(淮南子)》와 《염철론(鹽鐵論)》에는 모두 ‘마을 이름〔里名〕이 승모인 것을 보고 증자가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름이 불순(不順)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주3]논아량차자(論阿梁箚子) : 당시에 아량(阿梁)이라는 여자가 간부(姦夫) 섭승(葉勝)이라는 자와 짜고 자기 남편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주자(朱子)가 이는 인륜을 저버린 극악한 일이므로 참수해서 간악한 자가 시일을 끌면서 요행히 형벌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뭇사람을 흥기시키고 교화를 도와 이룰 수 있게 하라는 뜻으로 올린 차자이다. 《晦庵集 卷20 論阿梁獄情箚子》
與李耳老 庚午
歲律將窮。栗寒方酷。不審台侍奉政履何似。不任區區懸仰之至。玄逸賤疾。遇寒增谻。方在杜門呻吟中。殊以爲苦。所幸史官已承命上去。所帶職名。又得蒙恩鐫免。暫釋憂畏之忱爾。歲且改矣。民事漸艱。未知凡百申請。果副所望否。料理施設之間。必大勞費神觀。仰慮萬萬。就恐寧海罪人申尙謹事。前在洛下。略陳其槩。今聞尙謹者已蒙肆赦之典。雖出執事寬仁好生之德。無乃左右者之迭陳膚受之愬。而或不能致詳其曲折邪。夫人道莫大於三綱。而子之於父母。恩愛尤切。故五刑之屬三千。不孝爲大。書不云乎。子不祗服厥父事。大傷厥考心。惟弔茲。不于我政。人得罪。天惟與我民彝大泯亂。此實有官君子所當惕念處。而朱子之告宋孝宗曰。有涉人倫風化之獄者。雖有疑慮可悶。而至於奏讞。亦不許輒用擬貸之例。由此觀之。此等獄事。其不可遽從寬貸也決矣。況念海邦雖甚僻陋。有韋布焉。有衣冠焉。百餘人呈文請討者。豈皆因嫌陷人之倫邪。誠悶見禽獸逼人而不欲與之同群也。里名勝母。曾子猶且不入。況與惡逆之人同居一邑。而曾不知其可惡乎。若尙謹不損毛髮。而晏然得齒平民。則自此少知有母子恩愛者。將却步而不入其鄕矣。豈不大可寒心也哉。伏願閤下更入思議。使奸凶之人。不得遷延幸免。假息安居。則實爲聳動群聽。弼成風化之助。惟執事之留意也。獄事顚末。別紙具呈。朱子論阿梁箚子及刑獄奏議。因謾錄呈。幷乞參照。慕用之深。或恐因此一事。有傷執事之明。故不憚煩猥。直陳無隱。諒蒙識察。餘祝對時加護。以副一道之望。
이이로에게 답함 신미년(1691, 숙종17)
지난해 말에 인편을 통해 문안 편지를 부치면서 속내의 진정을 말씀드렸는데, 보내신 답장을 받아 보고 군자께서 새해에 많은 복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았으니, 감격하고 위안되어 더욱 기쁘면서도 송구스럽습니다. 현일은 올린 사면(辭免) 상소가 아직까지 비답을 받지 못하여 한결같이 황공할 따름입니다. 봄이 이미 이르러 주린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여 날마다 보이는 것이 눈에 가득 처참한데, 묘당에서는 오히려 품의(稟議)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차 문비(問備)를 청하였다고 하니, 정협(鄭俠)이 멋대로 마체(馬遞)를 발동했다가 당시에 죄를 지은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일마다 한탄스러워 천장만 쳐다볼 뿐입니다. 어물과 과일을 보내 주셨으니 후의(厚誼)에 대해 매우 감사드립니다. 다만 생각건대, 옛사람은 아무리 존모하고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 하더라도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감히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제가 의견을 올린 것 때문에 하집사(下執事)께 비판을 받았는데, 마치 제가 사림(士林)을 충동질하여 법을 두려워하고 몸을 단속해야 하는 의리를 범한 것처럼 의심하셨습니다. 현일이 비록 천박하고 용렬하지만 일찍이 장자(長者)의 유풍(遺風)을 들었으니 결코 감히 이런 종용하고 유인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는 전혀 뜻밖의 일인데 집사께서 이미 의심을 하셨으니, 현일이 어찌 감히 보내신 선물 받기를 지난날 저를 이해해 주시고 후대해 주시던 때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웃 고을의 사림들이 어찌 현일이 권하고 금하는 데 따라 행동하려 하겠습니까. 이는 집사께서 이곳의 실정을 매우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보내신 물품을 돌려드리는 것은 사세(事勢)가 참으로 그러해서이니, 의아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1]문비(問備) : 죄과가 있는 벼슬아치에 대하여 사헌부의 관원이 서면으로 심문하는 일을 이른다.
[주2]정협(鄭俠)이 …… 것 : 송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고 가뭄이 들었는데 왕안석의 권세에 눌려 아무도 이를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정협이 소장(疏章)과 함께 백성들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려 합문(閤門)에 나아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밀스럽고 급한 일이라고 칭탁하여 마체(馬遞)를 발동시켜 곧바로 승정원에 올렸다. 신종이 그 그림을 보고 깊이 깨달아 다음 날 신법을 정지시키고 빈민을 구제하니 큰비가 내렸다. 그러나 정협은 간당(姦黨)들의 미움을 받아 멋대로 마체를 발동시켰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다. 《宋史 卷321 鄭俠列傳》
答李耳老 辛未
歲前因便附問起居。且致中誠悃愊。眷惠手翰還答。仍審君子履端多納福祐。感慰之餘。益增忻悚。玄逸所上辭免之章。尙未承批。一味惶恐而已。春已屆矣。顚連載路。逐日所見。滿目傷慘。而廟堂猶以不經稟議。再請問備。亦無怪乎鄭俠之以擅自發遞。得罪當時也。節節吁歎。只自仰屋而已。惠貺魚果。極荷厚誼。但念古之人。雖尊慕厚善之間。言不見信。則不敢受其賜。今者不佞以獻愚之故。見非於下執事。若疑不佞鼓起士林而失畏法飭躬之義。玄逸雖譾劣。亦嘗聞長者遺風矣。必不敢爲此從臾誘脅之態。此實萬萬情外。而執事者旣已見疑。玄逸何敢拜受盛饋。如曩時知照見遇之日乎。且旁邑士林。豈肯以玄逸之勸禁而爲作止前却也哉。是則執事者殊不諒此間情實也。所惠物件。還爲呈納。事勢固然。幸勿見訝。
이이로에게 답함
연달아 보내신 답장을 받고서 아직은 추운 봄에 시봉하시고 관직 생활하시는 대감의 정황이 신의 도움으로 만복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위안되고 감격스러움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일은 사면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황공하여 마음을 추스를 수 없습니다. 부득이 또 봉장(封章)을 올리고 아울러 소회(所懷)를 진달하였는데 처분이 어떻게 내려질지 모르겠고, 묘당의 의론은 또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저의 의문을 말씀드린 것은 사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집사께서 허물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였는데, 보내신 답장을 받아 보니 제 뜻을 충분히 이해해 주시지 않은 듯하여 마음속으로 석연치 않아 감히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보내신 답장을 받아 보니 말씀하신 뜻이 정중하였고, 또 본부(本府)에서 낸 보장(報狀)의 제사(題辭)를 삼가 보니 ‘스스로 안으로 반성하면 되는 것이지 어찌 남을 허물하겠는가.’라는 말이 있었으니, 대군자(大君子)가 겸허히 수용하는 도량은 참으로 소인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산(子産)이 향교(鄕校)를 헐지 않은 의리가 전대(前代)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니,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다만 자산이 이른 바 ‘그들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행하고, 악하다고 하는 것은 고친다.’라는 도리에 있어서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집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별지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삼가 말씀하신 뜻을 잘 알았습니다. 주 부자(朱夫子)께서 당일에 청강(淸江)에서 염려하신 뜻이 마음에 몹시 절실하여 침식(寢食)이 편치 못합니다.
[주]자산(子産)이 …… 의리 : 정(鄭)나라 사람들이 향교(鄕校)에 가서 놀면서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논하자, 연명(然明)이 자산에게 말하기를, “향교를 헐어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자산이 말하기를,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일을 마치고 그곳에 가서 정치의 선악을 논하니, 그들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대로 행하고, 그들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고치고 있다. 그들은 나의 스승인데 어찌 향교를 헌단 말인가.”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
答李耳老
續奉辱復書。就審春寒。台侍奉政履神相萬福。仰慰且感。無以云喩。玄逸辭免之章。未得蒙允。惶恐悶蹙。不知所以爲心。不免又貢封章。兼陳所懷。未知處分如何。而廟堂之議又如何也。前所獻疑。出於見慕之誠。實欲致執事於無過之地。及承來喩。似有不相悉者。故私竊介然。敢有所云云矣。今承辱復。辭意鄭重。旣又伏覩本府報狀題辭。有但自內省。何用尤人之語。乃知大君子謙虛容受之量。果非小人之腹所能料也。子產不毀鄕校之義。不得專美於前矣。歎服不已。但於子產所謂其所善者則行之。其所惡者則改之之道。少有所歉。未知執事以爲如何。別紙所喩。謹悉示意。殊切朱夫子淸江當日之慮。寢食不能安也。
이이로에게 답함
대감께서 이장(移葬)하신다는 말을 듣고 나서 마땅히 편지를 보내 위문했어야 했는데, 사는 곳이 외져서 성의를 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편지를 보내 주시니 감격스럽고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편지를 통하여 큰일을 잘 치르시어 효성을 다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매우 위안이 됩니다. 현일은 병으로 초췌하여 엎드려 있는 데다 편안키 어려운 상황인데 빨리 올라오라는 명이 연달아 답지하고 있으니, 감히 계속해서 물러나 있음으로써 오만하게 버티는 죄를 더할 수 없습니다. 장차 병을 무릅쓰고 길을 나서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계획인데 도중에 쓰러짐을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조금 있던 재물마저 이미 바닥이 나서 장차 조석 끼니를 잇지 못할까 염려되니, 대감께서 곤궁한 벗을 불쌍히 여겨 양식을 조금 보태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영남 70개 주(州)에 주린 백성이 한둘이 아니니, 생각할 때마다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들의 배척을 받았다는 말씀은 참으로 염려되고 한탄스러우나, 스스로 마음이 편하고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비난하는 글을 백 대의 수레로 싣고 온다 하더라도 무슨 꾸짖을 것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주(聖主)께서 이미 온화한 비답을 내리셨으니, 이 또한 불행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혹시라도 다친 백성이 있지는 않은가 염려하신 문왕(文王)의 인정(仁政)에 더욱 돈독히 힘쓰시어, 온 도의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혀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마침 떨어졌는데 보내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答李耳老
自聞台監經營遷奉。合致一書問慰。居在僻隅。未得遂誠。辱書先及。感愧無量。就審大事克完。獲伸情事。豈勝仰慰。玄逸病悴塊伏。兼有難安之勢。而促召之命。節次重沓。不敢一向退伏。以重偃蹇之罪。將力疾就途。爲寸寸前進計。恐不免中路顚越之患也。涸轍已極。將不免朝不食夕不食。幸蒙台慈俯軫窮交。割淸俸以賙。厚幸厚幸。但念嶺南七十州饑餓之人。不可一二數。每念之。食不能下咽也。喩及逢彼之斥。誠爲悶歎。然自靖無愧。則雖百車何詬。且聖主旣下溫批。亦未爲不幸也。只願益篤如傷之念。以澤一道之民。千萬千萬。四友方乏。惠貺珍謝。
이이로 (李耳老) 남기(南紀) 한명(漢命) 를 위문하다 임술년(1682, 숙종8)
현일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말합니다. 존가(尊家)의 화변(禍變)은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이 놀라고 뼛속이 아파 말을 하면 목이 메고 붓을 잡으면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더구나 지극한 효성으로 이러한 화변을 당하였고 보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 비통한 심정을 어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세월은 덧없이 훌쩍 흘러 어느덧 재기(再朞)가 다가왔으니, 애통하고 망극한 심정을 또 어찌하겠습니까. 고인(古人)이 이러한 변고를 당한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닌데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순사(殉死)하는 것으로 효성을 삼지는 않았습니다. 부디 문호(門戶)를 맡아야 하는 책임을 생각하고 예제(禮制)에 따라 몸을 보살펴 멀리서 걱정하는 저의 정성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일은 당초 변고를 들었을 때에는 마침 친상(親喪) 중에 있던 터라 달려가 문상(問喪)하지도 못하였으며 위문의 서찰을 보내는 것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으니, 분의(分義)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늘 몹시 부끄럽고 미안하였습니다. 이달 초에 친상의 재기(再朞)를 지내자마자 또 계부(季父)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큰 슬픔을 겪은 뒤에 거듭 상화(喪禍)를 당하니 쇠병(衰病)으로 초췌하여 위로하러 갈 엄두도 낼 수 없기에 대략 서찰로 저의 정성을 진달합니다만 비통한 회포를 다 진달하지 못합니다.
이이로에게 답함 경오년(1690 숙종 16)
현일은 말합니다. 저의 집안이 불행하여 거듭 상화(喪禍)를 겪으니 가슴을 찢는 듯 비통한 심정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멀리서 위문의 어진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마음속에 매우 감사하는 한편 효성의 감응으로 친환(親患)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현일은 노경에 이르러 집안의 상화를 거듭 당하니 정신이 소모되어 매사에 기억력이 아득할 뿐 아니라 질병마저 뒤이었으니, 실로 다시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 띠고 있는 직명(職名)을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는 터라 답답하여 서성이며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차례 소장을 올려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마침내 어떠한 처분이 내릴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감께서 조정에 돌아가실 날이 필시 머지않을 것으로 생각되니, 재신(宰臣)들을 만나시면 저의 형세로는 다시 출사(出仕)하기 극히 어렵다는 뜻을 전달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대계(臺啓)가 끝내 수습될 기약이 없어 이렇게 점점 시일이 흘러가다 보면 유야무야될지도 모르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화령(和令)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꿋꿋이 수립(樹立)한 바가 이와 같으니, 가상하고 가상합니다. 유이능(柳以能)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꺾이지 않는 뜻과 고결한 조행(操行)을 보면 세상에 어찌 이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우리들의 사사로운 정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이로에게 답함 임신년
접때 남쪽으로 내려온 뒤로 궁산(窮山)에 칩거하느라 안부를 묻는 서찰도 보낼 수 없었기에 늘 마음에 한스러웠는데 지난번 오천(烏川)의 김생(金甥)으로부터 보내신 서찰을 전해 받고서 근래 더운 날씨에 어버이를 모시는 정황이 좋으시다는 것을 알았기에 감격과 위안의 정이 한량없습니다.
현일은 집에 돌아와 칩거하며 여전히 병고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니, 별로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내려왔던 사관(史官)이 어명을 받고 먼저 돌아가 그동안의 근심이 조금 풀린 것입니다. 지난번 화백(花伯 안동 부사(安東府使))을 통하여 대감의 소본(疏本)을 얻어 보고는 삼가 읽으며 저를 보살펴 주시는 뜻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매양 허투(虛套)가 되고 마니 말하자면 기가 막힙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저는 용렬하고 무능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비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그저 문을 닫고 칩거하며 자신의 허물을 반성할 뿐입니다.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조보(朝報)를 보니 대사헌을 겨우 체면(遞免)하자마자 또 옥서(玉署)의 장관에 임명하는 것이었으니, 저의 거취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려되기 그지없습니다.
함께 한 도(道)에 있으면서도 길이 멀어 아득히 만날 기약이 없으니, 많고 많은 소회는 어찌 편지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풍편에 답장을 보내니 편지를 앞에 놓고 더욱 서글플 뿐입니다.
이이로에게 답함 무인년(1698 숙종 24)
양호(兩湖) 사이의 거리는 영북(嶺北)과 관서(關西)에 비하면 사분의 일도 안 되지만 길이 어긋나고 인편을 못 만나 서신을 통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운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어저께 성산(星山)의 인편을 통하여 대감께서 3월 3일에 부치신 서찰을 받고서 겨울을 지나고 여름에 접어드는 동안 면식(眠食)이 그럭저럭 괜찮으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리운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되었습니다.
죄인의 몸인 저는 질병으로 초췌한 몰골이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한 데다 두질(痘疾)에 핍박받고 양식이 궁핍하여 동서로 경황없이 다니느라 온갖 고생을 겪고 있으니, 매우 답답하고 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모두 저의 운명이 궁하여 이렇게 된 것이니, 그저 순순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말씀하신 뜻은 전혀 저의 실상에 맞지 않습니다. 무릇 험난한 역경을 겪고도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제가 총명하지 못하고 우둔하여 세상의 영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난겨울에 답서(答書)를 보내셨다고 하셨으나 아직도 받아 보지 못하였으니, 어디에서 유실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먼 곳에서 보내는 서찰은 통상 이렇게 될 우려가 많으니, 탄식할 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