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추고한마비 秋高寒馬肥
추고한 마비. 秋高寒馬肥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쌀쌀하다. 말들은 가슴과 엉덩이에 살이 붙었다.
추운 고원 高原의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건초 乾草가 풍부한 가을철에 열심히 먹고 살을 찌워야만 한다.
먹거리가 풍부한 이 시기가 암말을 비롯하여 초식 草食 육식 肉食 가리지 아니하고,
대부분의 동물들이 발정 發情하여, 새끼를 잉태 孕胎하는 중요한 계절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천고마비 天高馬肥의 시기다.
중국에서는 추고한마비 秋高寒馬肥라 표현한다.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하늘은 높고 차가운데, 말은 살이 찐다’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 추고마비 秋高馬肥라고 가을이란 단어를 직접 언급하는 직유법 直喩法을 사용한다.
하화족들은 만만 漫漫디 성격으로 표현도 은유법 隱喩法을 즐겨 쓴다.
소중화 小中華에 물든 우리 선배 중에는 이러한 은유법에 매료된 유생 儒生들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만만디 성격은 여유가 있어 형성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를 죽 훑어보면, 반란의 역사다.
역성혁명 易姓革命도 자주 일어난다.
그러니 ‘왕후장상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냐?’라는 말도 있다.
王侯將相 寧有種乎! 왕후장상 영유종호!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
누구나 왕과 제후, 장군과 재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의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은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에게 반란 反亂을 일으킨 진승이다.
반란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도 한다.
물론 성공의 가능성은 실패할 확률에 비해 상당히 낮다.
그러니 초기 반란이나, 군중들이 들고일어나 세 勢를 과시할 때,
‘과연 어느 쪽을 지지할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반란군 叛亂軍이 유리하였는데, 오늘은 황궁의 지원군을 등에 업은 관군 官軍이 다시 위세를 부린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만약, 자신이 지지하거나 속한 무리가 상대에게 패한다면,
패가망신 敗家亡身은 물론, 일족 一族이 모조리 처단 處斷 당한다.
수백,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어느 쪽 손을 함부로 들어주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영부영 이쪽저쪽 눈치만 보고 있다.
철저하게 기회주의 機會主義에 물 들은 회색 灰色 인간들이다.
좀처럼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무채색 無彩色 인간처럼 행동한다.
누가 물어봐도 직설적 直說的으로 바로 답을 하지 않는다.
빙 둘러서 우회 迂回하며, 천천히 물에 물 탄 듯이, 술에 술 탄 듯이 흐리멍텅하게 표현하고 만다.
그런데 ‘추고 秋高’라며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방증 傍證이다.
천고 天高든 추고한 秋高寒이든 간에 하여튼, 농경민들에겐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가을 찬바람이 불고 말들이 살이 찌면, 북방 北方의 야인 野人들이 들이닥친다.
가축과 재물을 노략 擄掠질하고 살인과 방화를 예사로이 여기며,
마을부녀자들까지 납치해 가는 흉악스러운 흉노족들이 나타날 시기라는 것이다.
이제 출정 出征이다.
묵황야차 소왕 이중부는 4 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막남 漠南으로 출전 出戰하였다.
사정 수련원 쪽으로 행군 行軍하니, 호도 선우의 푸른 늑대 깃발과 묵황도의 깃발을 본
부족민들이 양 떼를 몰면서 실실 멀찌감치 피한다.
아마도 남 흉노와 가까운 부족들인 모양이다.
같은 흉노족인데 동족을 보고 도망을 가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무시하고
음산 산맥 동쪽으로 우회하여 남하 南下하였다.
북 흉노의 병사들을 피하는 부족이 있는 반면에 몇몇 부족은 선우의 부대를 보고,
지지 支持하고 호의 好意를 보이는 부족도 있고, 병사를 자원 自願하는 자들도 있었다.
남벌 南伐은 오랜만이다.
흉노의 남벌은 왕소군과 혼인한 호한야 선우 이후로는 대규모 원정 遠征은 없었다.
만리장성 이남으로 좀도둑 수준의 약탈은 몇 번 있었지만,
4천 명이 넘는 인원이 원정하는 것은 거의 70년이 지났다.
무력 武力으로 만리장성을 넘지 않은 세대가 3세대 世代를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후세 사가 後世 史家들은 왕소군 王昭君이 자신의 삶을 희생 犧牲하면서,
양국 兩國 간의 우호 友好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덕택 德澤이라 여긴다.
그러나 후한군이 흉노의 선우를 자신들의 조정으로 불러들어 충성을 맹세 盟誓 받고,
새로이 벼슬을 주며, 초원에 후한 後漢의 사신 使臣을 상주 常住시켜 이것저것 간섭하며 지시를 한다.
그러자 초원의 북방에 거주하던 피 끓는 용사 勇士들은 내정간섭 內政干涉이라며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동시다발 同時多發적으로 궐기 蹶起하여 북 흉노 선우를 새로이 선출한 후,
남 흉노를 무찔러 장성 이남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북 흉노 무리는 초원의 자존심을 되찾아,
다시 하나로 뭉치며 넘치는 기개 氣槪를 주적 主敵을 향해 발산 發散시키려 한다.
병력이 4천 명이면 전쟁이다.
5년 전, 헨티산맥 남쪽 지역 울란바토르 제1차 전투에서 포노 선우가 전사하는 등,
치욕적인 대 패배를 당한 그 앙갚음을 해야 한다.
이제 선배 先輩들의 치욕을 씻고 복수할 때가 된 것이다.
당시, 연합군 중 남 흉노 측은 지난 울란바토르 전투에서 패퇴시켜 어느 정도 설욕 雪辱하였으니
이제, 뒤에 숨어 남 흉노를 지원하고 북 흉노를 질시 疾視하는 후한 군을 징벌 懲罰해야 한다.
또, 남벌에 성공하면 많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다.
음산산맥 인근에서 자원한 신병 新兵 2백여 명은 후군 後軍에 편입시켜,
부군사 副 軍師 박지형이 관리하고 훈련을 시켰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신병과 나이 많은 병사들은 후미 後尾에서 성벽을 사수하여야 한다.
도주로 逃走路를 미리 확보해 놓지 않으면 큰 불상사 不祥事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최소한 사방 삼십 리 이상은 적군이 얼씬도 못 하도록 튼튼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니 최소한 3개 산 정상 頂上의 보루 堡壘를 확보하여야만 안전한 퇴로 退路를 보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성을 넘어갈 때는 무기와 말만 넘어가지만, 돌아올 때는 갖가지 전리품을 챙겨와야만 한다.
전리품 戰利品 없는 전쟁은 하나 마나다.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데, 전리품이 없다면 무의미한 전쟁이다.
전리품 없는 초원의 차가운 겨울나기는 상상하기도 싫다.
그때는 게르 한쪽에 걸어둔 눈에 띄는 전리품이 참전 參戰하였던 용사에게는 좋은 화제 話題거리가 되기도 한다.
“저기 저 비단을 내가 발견하고 손으로 쥐는 순간, 옆에서 적군이 이 날카로운 창날로 찔러 오더군, 그때 내가 얼른 옆으로 피하며, ...”
전리품 중의 하나인 비단과 창날이 자신의 무용 武勇을 과시 誇示할 절호의 소도구 小道具로 활용된다.
어린 조카들은 삼촌의 무용담에 하루해가 가는 줄도 모른다.
그러니 장성을 넘어올 때는 갈 때와 비교하여 시간이 서너 배는 더 걸린다.
회군 回軍할 때 시간이 오래 소요 된다면, 그만큼 전리품이 풍부하고 수입이 많다는 이야기다.
수입이 많은 만큼 위험부담도 커진다.
그러니 넘어오는 장성 長城의 길목은 전후좌우로 최소한 삼십 리 정도는 확보하여야만 한다.
그것도 산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진 출입로를 확보하여야 안전하다.
그리고 선봉 공격군이 선두 先頭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동안, 후군은 성벽을 추가로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야만 퇴각 退却시 재빨리 철수할 수 있는 것이다.
넓이는 삼장 三丈에서 사장 四丈 정도가 적당하다. 말 다섯 필이 동시에 달릴 수 있는 폭이다.
또, 무너뜨린 성벽의 잔재물 殘在物 중, 굵은 통나무나 큰 돌과 벽돌의 반은 성벽 양쪽 위에 쌓아 놓아야 한다.
아군이 다 넘어오면 추격병들이 빨리 못 넘어오도록 다시 메꾸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바쁘다.
선봉대와 전군 前軍은 적과 싸워가며 진로 進路를 개척하여야 하고,
중군 中軍은 생필품이나 가축을 약탈하고 그 전리품을 옮겨야 하며,
후군 後軍은 안전한 도피로 逃避路를 확보하고 적의 추격병을 막아야만 한다.
군사 탁발규와 부군사 박지형, 손우지는 이틀 전부터 장성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만리장성의 성곽 城郭은 대부분 그 주위의 가장 높은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하여 쌓았으며,
산 정상 頂上 쪽으로 연결 되어있다.
그중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산허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일차적인 목표는 산의 정상에 자리 잡은 성 城 마루다.
산마루에 있는 성책 城柵은 공격하기가 까다롭다.
그 지역의 요충지 要衝地로서 전황 戰況을 관망 觀望하기에 적절하며,
필요에 따라 각 전투지점으로 재빨리 병사나 무기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석궁 石弓이나 노쇠 등의 전술적인 대형 大形 인마살상용 人馬 殺傷用 무기들도 잘 갖추어 놓았다.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 산마루를 먼저 공략 攻略하여야 뒷일이 수월하다.
그 이유는 산 정상은 점령하기가 어렵고, 오고 가기가 힘이 들어도,
일단 확보 確保해 놓으면 적의 반격 反擊을 받을 시 방어하기가 쉽다.
골짜기는 오가기는 쉬워도 지형이 낮다 보니 양쪽에서 공격받기가 쉽다.
그러니 산마루 성책을 중심으로하여 산허리 양쪽을 확보해 놓으면 즉,
높은 한 곳만 점령해버리면 그 아래쪽은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공격지점에는 정예병을 배치하고, 신병과 나이 많은 병사들은 이십 리 서쪽과
시오리 동쪽의 성마루 두 곳을 공격하였다. 적의 이목 耳目을 속이기 위해서다.
이는 주공격 목표인 산 정상 보루의 군사를 분산시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차피 점령해야 할 전술적으로 필요한 위치이기도 하다.
퇴각 退却시에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안전거리 확보의 경계선 境界線 한계 限界지점이 된다.
드디어,
어둠이 내리자 출병한다.
주공격 목적지로 향하는 공격진은 말에게 모두 재갈을 물렸다.
말은 특이하게도 앞니와 어금니 사이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공간이 있다.
그래서 그곳에 재갈을 물린다.
이빨 사이의 공간 덕분에 말은 소처럼 코를 뚫리는 고통은 면할 수 있었다.
말에게 소처럼 코뚜레를 한다면,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대신 목과 머리에 튼튼한 밧줄을 엮어 굴레를 씌운다.
밤 술시 戌時가 되자 성벽에 조용히 접근한 날쌘 병사들이 산마루 망루 이십여 곳에
갈고리를 던져 성벽에 고정시키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비병이 먼저 전투가 시작된 서쪽과 동쪽 망루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 군 수비병들은 여기저기 봉홧불을 피우고 화살과 투석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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