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영적인 '앎'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지요?
답 : 새로운 정보를 얻는 방식에 있어서 영(spirit)이 가는 길과 마음이 가는 길은 아주 다릅니다.
에고(ego).마음(mind)은 공격적이고 묻고 따지는 방식을 취합니다.
에고(ego).마음(mind)은 자료들을 잡아채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지배합니다.
그것은 자료들을 범주별로 나누고 한정하고 평가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보존하고 등급을 메기고
심사한 뒤 그것들을 흡수하고 동화하기 위해 느낌들과 추상적인 의미의 색깔로 물들입니다.
모든 새 자료들도 역시 그것들의 잠재적인 유용성과 습득 가치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집니다.
'얻고자 하는' 마음의 굶주림과 탐욕에는 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오로 하여금 교묘하게 꾸며진 통계적 분석과 컴퓨터 조작 등을 포함하여
실로 엄청난 양의 정보들과 그에 수반되는 다양한 세목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을 배우고 기억하고 축적하고 지배하라고 강요합니다.
이 무수히 많은 자료들은 도표와 그림으로 서술되고 근사하게 포장될 경우
더 나은 것들로 여겨집니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기능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따져 볼 경우
마음은 실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렇게 복잡하고 다면적인 처리 과정이 불과 몇 분의 일 초 동안에 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런 인상은 한층 더 커질 것입니다.
거기에는 현재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처리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그와 동시에 지금의 순간을 기억 속에 저장된 다른 순간들의 파일들과 대조하면서
그와 유사한 다른 모든 순간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마음은 지금 보고 있는 얼룩말을
과거에 읽고 듣고 이야기하고 텔레비전에서 보고 농담의 대상으로 삼곤했던
모든 얼룩말들과 비교해보고 그와 더불어 진화론적인 위장이론을 포함해서
얼룩말과 관련된 다른 모든 내용들도 함께 떠올립니다.
마음은 이런 모든 복잡하고 다원적인 작용들을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수행하곤합니다.
주의집중을 통한 선택에 의해 사람들은 탐구할 만한 선택지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들이 대단히 많긴 합니다만 그것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요컨대 마음은 진리와 깨달음을 획득하거나 성취하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으로 봅니다.
그럴 때 깨달음은 기껏해야 노력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 정도가 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 모든 시도는 마음의 기능들이 뭔가를 학습하는 방식으로서 작용하고,
그런 처리방식들이 이원성의 영역 속에서 과거와 다름없이 새 주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마음이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유효한 것이 되리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시도들은 이원적인 것들을 다루기 위해 발전된 기능들을
비인원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치가 않습니다.
향상과 발전을 이루는 데 있어서 의지할 만한, 시험을 통해 믿을 만한 방법으로 여거지던 것이
이제는 는 진실을 발견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됩니다.
평상적인 정신 작용은 끊임없이 '얻으려는'노력을 뜻하는 반면에
영적인 깨달음은 수동적인 상태에서 전혀 아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리가 멈추면 침묵이 저절로 드러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은 노력이나 시도에 의해서는 얻을 수 가 없습니다.
사고 작용에는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지만
영적인 드러남에는 그 어떤 통제 기능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통제할 것이 없는 곳에서는 통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설사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형상없는 것은 조작할수가 없는 법인니다.
깨달음에 이른 앎은
일종의 상태나 조건, 영역이나 차원으로서 서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드러나며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합니다.
그런 앎은 사고 작용을 대신해서 들어서고 그로 인해 사고 작용은 완전히 빛을 잃고 맙니다.
사고 작용은 이제 불필요한 것이되고,
그런 앎을 방해하거나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보입니다.
그 앎의 드러남은 미묘하고 강력하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더없이 아름다우며 모든 것을 두루 아우릅니다.
감각들은 무시되고 '아것'이나 '저것'에 대한 모든 지각은 사라집니다.
그런 앎은 그 동안에도 내내드러나고 있엇으며
다만 체험되지 못하고 관찰되지못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역시 분명해집니다.
'있는 ' 그것의 전체성의 전모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인 참나에 의해서 완전히 '알려'집니다.
동일성(identity)이 절대적 앎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관찰자, 관찰되는 바, 관찰의 과정은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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