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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묵상글 들 ( 성모 성심 축일 - 간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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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모 성심 축일 - 간직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 성심 축일을 저는 오늘
<간직 축일>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 복음 끝에 성전에서 있었던
일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말에서 비롯된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제 예수님 마음에 이어 오늘 성모님 마음을 기리는 우리가
주님 마음에서는 무엇을 본받고 성모님 마음에서는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우리는 성찰해야 하는데 간직하는 마음을 우리도 본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간직하다'는 말은 '품다'거나 '지니다'는 말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뜻이 있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고,
가지거나 품거나 지니는 것은 욕심으로 그럴 수 있는 데 비해
간직하는 것은 욕심이 배제된 사랑으로 간직하는 거 같습니다.
실로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간직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간직한다는 말에는 보통 '소중히'라는 말이 앞에 붙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무엇을 간직한다면 그것이 그에게 소중하기에 간직하는 것인데
그러나 무엇을 소중히 간직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수집한 수석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여행지의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선물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존경하는 분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직한다는 것은 소중히 간직할 뿐 아니라 고이 간직합니다.
무엇이 소중하다면 그것을 당연히 고이 간직하려고 할 터인데
고이 간직한다는 것은 손상되지 않게 잘 간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소중하다면 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사실 무엇이 소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오래 간직할 것이고,
영원히 간직한다면 영원히 간직할 만큼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겠지요?
이렇듯이 간직하는 것에는 무엇을 소중히, 사랑으로, 고이, 오래
간직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인데 간직함의 모범인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씀과 주님 말씀을 태중에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성모 영보 축일과 함께 오늘 성모 성심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성모 성심뿐 아니라 안나 성심이니 레오나르도 성심도 있다는 말입니다.
단 마음속에 다른 것을 지니지 않고 주님 말씀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도 성모님 마음처럼 성심이 되고
욕심으로 이것저것 소유하지 않고 사랑으로 주님 말씀만 간직해야
성모님 마음처럼 티 없이 깨끗한 성심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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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피아트’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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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많은 전문가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을 토닥이면서 “괜찮아. 잘 될 거야. 힘내!”라면 될까요? 사랑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재료들을 제공하지 않으면 가냘픈 정신 승리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무언가가 되어야 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노력의 기억이 모이고 모여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작은 성취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실제로 이 작은 성취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상벨에 맞춰서 벌떡 일어나기, 계획대로 하루 살기, 운동하기, 나의 발전을 위한 공부하기,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기….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삶 자체가 자기 성취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나를 사랑할 이유가 자기 주변에 너무 많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사랑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나의 자존감은 누구보다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에 관련된 기념일이 참 많지요. 또 5월 성모의 달, 10월 로사리오 성월. 이렇게 1년 중에 두 달이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성모님께 높은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 하나만의 이유를 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예수님을 낳자마자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피신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고생해서 겨우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로부터 ‘왜 자기를 찾느냐’는 무정한 말도 듣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자, 미쳤다는 소식도 듣게 되고요.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들의 모습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작은 성취를 이뤄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처럼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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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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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입니다.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삶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얼굴이 못생겼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다.
내가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기회조차 없이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누군가는 하루살이처럼 힘들게 살아간다.
내가 부모가 밉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부모조차 모르며 외롭게 살아간다.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한시도 자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의 아이는 교통사고나 자살로 영영 이별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과, 먹을 수 있는 입이 있다는 것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과,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의 힘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가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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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모 성심의 매력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옵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믿으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성모님으로서 공경하면서 첫 번째 그리스도인으로서도 모십니다.
그래서 성모 신심은 마리아를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우선 마리아께서는 믿음에 투철하셨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려온 아나빔의 가문 출신답게 마리아의 믿음은 얄팍하지 않고
깊고 그윽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가브리엘 천사가
가져온 전갈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처녀로서 임신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막연하고 긴장스러우며 위험하기까지
할 터이지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그 전갈을 태연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믿음은 때론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며
사색과 묵상으로 그 뜻을 새겨서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천사의 방문에서 알게 되었던 바, 구세주를 기르고 있다는
자각이 당신 자신에게 생겨난 것입니다. 믿음은 필요할 때마다 집중을 요구합니다.
셋째로, 마리아께는 센스와 배짱이 보입니다.
카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가난한 혼주에게
난처한 일이 생겼음을 눈치있게 짐작하시고는 넌지시 예수님께 알리셨습니다.
보통 아무리 가난해도 혼주는 빚을 내서라도 잔치 음식이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져가고 있음을 눈치채신 마리아는
센스있게 예수님을 통해 혼주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혼인 잔치에
온 사람들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막 부르셨던 제자 네 사람을 대동하셨기 때문에, 장정 다섯 사람이
마셔대는 통에 준비된 포도주가 동이 나버리는 사태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한 성모 마리아의 요청을 들으시고도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버티셨습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사양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의 배짱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일꾼들에게 이르신 겁니다: “무엇이든지 저 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
결자해지라는 격언처럼 원인을 제공한 쪽에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투로 보입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전구자가 되어 주시는 근거가 된 배경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들의 처한 곤경을 눈치챌 줄 아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고
때론 배짱있게 밀어붙이기도 해야 하는 것인 줄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마리아께서는 치마폭에 당신 아들을
감싸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성하시기 전에 남편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텐데도 다소 마음이 맞지 않는 친척 조카들에게
의탁하실지언정 때가 되어 출가하려는 아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든 이들을 당신 어머니요
당신 가족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으셨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연대입니다.
다섯째로 마리아께서는 세상에서 좋은 일을 다 하고 다니신
당신 아들이 온갖 모함과 중상을 받고 신성 모독과 성전 모독이라는 혐의에다가
유다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터무니 없는 죄목으로 그토록 참혹하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죽어갈 때에도 비록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셨겠지만 처음에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대로, 당신 아들이 수행하는
하느님의 뜻과 일을 믿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의 제자들이 허망해 하며
믿음을 상실하고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묵묵히 기도하며
예루살렘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발현하시는 스승을 뵙고 믿음을 회복한
제자들이 마리아 주위에 모여들 수 있었고, 마침내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사도들의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결론은 기다림입니다.
이상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믿음을 모험, 센스와 배짱, 집중력, 연대 그리고
기다림으로 간추려 보았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에수 성심을 본받자면 필요한
성모 성심의 덕목들입니다. 요즘 우리 믿는 이들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천사들의 존재와 활약을 믿지도 않거니와 설사 천사의
전갈을 받는다 하더라도 모험심으로 맡기기보다는 현실적인 타산이 앞섭니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손해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움직입니다. 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센스는 둔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는 조금만 어려워도 포기하는 편입니다.
배짱 대신 비겁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집중하는 데 서툰 편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면 그 의미를 캐내는 데 집요하기는커녕 스쳐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또한 넉넉한 마음으로 연대할 줄 모르고 편 가르기에 익숙합니다.
내 편, 우리 편이 아니면 하느님의 일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일하시기까지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뜻도 모아져야 하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흩어지고 쉽게 상처받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일은 예수 성심을 본받는 일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리아의 이 거룩한 매력이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서도 발산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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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 + Story'로 나누어서 '그의 이야기’ 남자들의 이야기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본뜻은 진실을 탐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historia’입니다. 그 어근인 ‘histor’는 '증인' 혹은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과 관련됩니다. ‘Diet'라는 말도 우리는 체중조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 뜻은 ‘식단, 식이요법’입니다. 성서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롯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정성껏 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했던 롯을 사랑하셔서 축복을 주셨습니다. 롯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였습니다. 수산나는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 욕망의 빠진 노인들의 덫에 걸린 수산나는 수치를 당하는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정결함을 다니엘을 통해서 지켜주셨습니다. 에스테르는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였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 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 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을 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를 했고,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들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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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속에 간직 하였다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소위 미신행위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삶의 여정에 예기치 못한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살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날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엉뚱한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간직한다는 것의 의미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항상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이 순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 상황은 하느님 말씀과 대조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이지 찾는 작업입니다. 이는 삶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삶에서 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프란치스코교황).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함에도 내 일의 성공과 업적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시간을 꼭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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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모 성심
- 하느님 중심의 삶 -
6월 예수성심성월중 어제의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흡사 9월 순교자성월중 성 십자가 현양 축일(9.14)에 이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15)의 배치와 흡사합니다. 아드님 예수와 어머님 마리아가 얼마나 깊은 사랑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침 며칠전 읽었던 일간신문 컬럼 일부도 생각납니다. ‘초록이 넘쳐나는 6월이면 한국전쟁의 상흔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 계절에는 잊고 지내던 군가들이 생각난다. 군대 경험이 있는 이 땅의 사내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군가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 마음’이다. 고된 훈련 중간의 휴식 시간에 조교들이 ‘노래 일발 장전’을 외치며 이 노래를 시켰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에 이르면 모든 훈련병들이 통곡을 하였다. 그야말로 모든 사나이를 울리던 노래였다.’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관계는 그대로 우리와 또 다른 성모님이신 우리 어머니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한생을 주님 위해’ 라는 성모 성가(248장)도 생각납니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성모님의 삶을 보고 배우셨음이 분명합니다. 오로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통한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 성심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하셨던 성모님이셨고 아드님 예수님도 타고난 하느님 사랑에 더해 성모님의 하느님 사랑을 보고 배우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의 우선적 자질이 열정과 순수입니다. 열정이 있을 때 순수요,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은 사랑의 열정입니다. 참으로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하기보다는 더욱 주님을 사랑함이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찬미로 표현됩니다. 끊임없는 바치는 사랑의 찬미가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게 합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평생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찬미요, 이 하느님 찬미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줍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아름다운 고백은 성모님은 물론 우리 모두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위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찬미하는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인 사무엘 상권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는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바로 찬미의 기쁨이, 찬미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소년시절 예화를 대하면서도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으로 일치를 이룬 성가정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대로 일상화된 신앙의 성가정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복음의 첫 구절입니다. 이어 잃어 버렸던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찾아낸 성모님과 예수님의 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았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미 아버지의 집인 성전은 예수님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가시적 성전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모님은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던 듯 합니다. 두분은 모자지간이지만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서 참 좋은 영적도반이기도 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참 아름다운 성가정의 분위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진위는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성모님 역시 순종과 인내의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깊이 새겼음이 분명합니다. 위대한 영혼의 특징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순종으로 끝까지 담아 두고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내면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깨닫습니다. 이런 마음은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을 합니다. 이렇게 담아두고 되새길 때, 부패인생이 아니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됩니다.
문득 어제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은 ‘바위와 흐르는 물’같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내면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이며 우리 또한 이렇게 된다면 참 이상적이라 생각됩니다. 아픈 상처의 부정적 추억들은 즉시 흐르는 물에 새기고, 고맙고 좋은 아름다운 긍정적 추억들은 마음의 바위에 새겨 두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건강, 몸의 건강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현실은 대부분 이와 반대로 전개되는 듯 보입니다. 감사의 좋은 긍정적 추억들은 흐르는 물에 새겨 말끔히 잊어 버리고, 아픈 상처의 추억들은 마음의 바위에 새겨 끊임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모 성심의 마음으로 바꿔주시고, 부정적 추억들은 흐르는 물같은 마음에 새기고 좋고 아름다운 추억들은 바위같은 마음에 새기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름다운 본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 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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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했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했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 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배 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 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ᄂ)라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라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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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실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십니다. 어머니의 모범적 모습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소리 없이 협력하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차지하는 어머니의 큰 역할에 비하여, 복음서에 어머니의 말씀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고’(루카 1,29 참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셨다’(루카 2,19; 2,51 참조)고 하십니다.
이렇듯 성모님께서는 좋은 일이든, 섭섭한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님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품어 내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 부르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바라보며, ‘천주의 성모님’, ‘하늘의 여왕’,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등 영광스러운 호칭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움을 가능하게 하셨던 성모님의 밑바탕에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시고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의 육화는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공경합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공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곰곰이 생각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음을 닮고자 노력한다면, 티 없이 깨끗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기념하는 좋은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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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알려 두십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으셨다가 찾은 일은 의미심장합니다. 구원자의 잉태부터 소년 시기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아오며 마음에 차곡차곡 품어온 신비를 예수님 입으로 직접, 명확하게 듣는 순간을 비로소 맞이한 겁니다.
"제 아버지의 집"
어린 예수의 표현은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심점인 성전이 바로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니, 그곳이 곧 성자의 거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
복음사가는 요셉과 마리아의 상태를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는 알아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지요. 여기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무지는 부끄러움이나 약점이 아니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에 협력한 신앙을 증거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늼의 구원 역사가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마음속 크기와 깊이, 넓이와 길이를 누구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지요. 그 놀라운 구원경륜의 신비가 모두 들어차 들어있으니 말입니다.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경청하고 품고 믿고 따르는 겸손하고 충실한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1독서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의 원형이 되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구원자를 반기는 이 환성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개인과 민족에게 이루어짐을 환호하듯 들려주고 있지요.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이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훗날 마리아의 목소리로 복음에 새겨집니다.
"주님 안에서 ...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에 관한 신비를 모두 마음 속에 간직한 동시에 그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존재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감정 이나 기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이의 영적 기쁨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루카 1,46-55)과 오늘 미사 독서의 화답송에도 잘 드러나 있으니 함께 머무르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이는 아무리 세상이 할퀴고 짓누르고 무시해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으로 인해 겪은 "칼에 꿰찔리는 고통"(루카 2,35 참조)도 이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하였지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현실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으십니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삶이 힘겹고 버거우십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세상 것에 좌우되지 않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을 그분께 청하십시오. 어느 것도 구원받은 이로서 주님과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을 수 없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의 길 한복판에 있더라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마음에 기대어, 그분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에서 고개를 돌려 기쁨을 선택한 순간, 성모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또 말씀의 벗인 우리 모두 함께 서로를 응원하며 기도할 것이니 힘 내십시오. 화답송이 노래하듯 모든 것은 주님 손에 달려 있답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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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하느님을 간직하신 어머니!'
어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곧 '아들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결정적인 순종으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간직하셨습니다. 그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가톨릭 성가 248번 '한 생을 주님 위해' 라는 성가가 이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이것이 바로,
마리아 어머니의 위대함이며,
우리가 마리아 어머니를 좋아하고 공경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신앙의 모범이신 마리아 어머니를 닮으려고 애쓰는 이유입니다.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도 마리아 어머니를 본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마리아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리아 어머니의 자녀들이 됩시다!
많이 부족하지만 마리아 어머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늘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본기도)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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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우리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계셨다.
우리가 기쁘면
어머니께서도
기쁘시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마음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란
끊임없는 사랑의
연속이다.
절절한
어머니의
삶이며
마음이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살피고
마음이 마음을
씻어준다.
마음은 실천을
먹으며 살아간다.
티 없이 깨끗하신
기도의 삶이 있다.
어머니의
마음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깨끗하신 마음은
깨끗한 실천을
낳으신다.
마음은 말씀을
실천할 때
거룩한 마음이
된다.
말씀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티 없이 깨끗한
어머니의 아침이다.
너와 나의
관계안에
애타게 찾는
마음이 있었다.
마음자리는
말씀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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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모님의 날들이 기쁨보다는 슬픔의 날들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많은 법이지요. 주님의 십자가와 성모님의 칠고가1)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심 기념일입니다.
구약의 표현 중에 극치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나’라는 인칭으로 바꾸어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은 ‘시온’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구원받은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적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시온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을 통하여 영광과 기쁨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
61,10)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시온을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생명과 의로움으로 뭇 민족 앞에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방문 때에 하셨던 노래는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을 위한 노래와 서로 내용이 통합니다.
성모님의 노래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성모님의 일생은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태중의 아드님 때문에 여인들 중에 복 되시면서도 또한 아드님 때문에 극도의 고통의 받으셔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과 함께 세상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시고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에 올림을 받으시고 천상의 관을 쓰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루카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성가정은 축제 관습에 따라 나자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데 부모들은 그것도 모르고 친척들과 함께 가려니 하며 나자렛으로 향했습니다.
하룻길을 가다가 친척들 사이에도 아들 예수님이 없는 것을 알고 부모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부모님은 사흘을 헤매다가 성전에 있는 아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율법교사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무척 놀라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다.”라고 하자 아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8)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의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명하며 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루카가 전해주는 짧은 이 말씀은 성모님에게는 인간적인 갈등을 알려줍니다. 인간적인 아들의 모습과 하느님으로서의 아들의 모습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하지 못하는 갈등도 있었던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렀던 말이 다시 회상되는 것입니다.2) 오늘 날 세상은 작은 일이라도 떠벌리고 알리려 합니다. 특히 매스 매디아에는 조그마한 기사거리라도 있을라치면 사실을 부풀려서라도 표현하기에 바쁩니다. 기뻐하는 모습도 있겠지만 자기 자랑. 또 불평하는 모습 등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비록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슴에 새기며 침묵하십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을 잉태하고 나서부터 나자렛에서 목수의 아내로 또 어머니로 나자렛 한 가정이 한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드님이 집을 떠나 공생활을 하실 때 그 제자들이 또한 어머니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도들에게 가십니다.(요한 19,27)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시고 시공간을 초월시어 박해와 이단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셨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세기와 세기의 어머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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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모님의 칠고는 다 당신 아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받으시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어머니로서의 모습이다. 므온 예언자의 예언 (루가 2,34~35), 성가정 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15).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심 (루가 2,41~51),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루가 23,27~31).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심 (요한 19,25~30).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심 (마르 15,42~47), 예수님 돌무덤에 묻히심 (루가 23,50~56).
2)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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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며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를 받기로 했어요.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도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정말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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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습니다!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티없이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티없이 깨끗함이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깨끗하게 살아갈 희망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우리 본당이나 우리 공동체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히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인간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티없이 깨끗하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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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2.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김 로마노 형제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독서 (이사61,9-11)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땅이 새순을 돋게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서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10-11)
10절에서 '나는' 의 1인칭 단수는 1-3절에 화자로 제시된 메시아를 지칭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 단수로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님은 그의 종 메시아를 구원의 주로, 의로움의 성취자로 세우셨으며, 그의 백성에게는 메시아께서 이루신 구원과 의로움을 소유케 한다.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메시아의 활동과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게 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 곧 그 하느님으로 인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부사절을 통해 설명된다. 중요한 사실은 7절 하반절('자기네 땅에서 재산을 갑절로 차지하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을 통해 제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가져오신 일, 특히 구원의 행사는 그것과 관계된 모든 자들에게 완전한 기쁨,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기뻐하는 주체도 '내 영혼'(napshi ; my soul)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이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닌, 그 존재의 심연까지도 파고드는 참되고 온전한 기쁨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이유 접소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 이하는 왜 하느님의 백성이 자신의 영혼으로 크게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느님은 친히 정의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를 쓰시는 분으로(이사59,17), 그의 메시아의 구속 사업이라는 중재적 수단을 반드시 거쳐,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입혀 주시는 분이다.
구원의 옷과 의로움의 겉옷이라는 표현은 구원과 의로움(義)를 지칭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 구원과 의로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원래 의롭지 못한 자들을 불의한 상태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그분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신 성품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죄인들, 불의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의로운 자들, 거룩한 자들로 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종 메시아의 대속을 기반으로, 메시아의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자들을 의로운 자로 변화시키시며 이것을 근거로 구원을 이루신다.
"모든 삶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3,23.24)
이것은 의로움과 구원의 근거 모두 하느님의 백성 당사자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업과 이를 계획하시며 주도하신 주 하느님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본문을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신랑이 화관을 쓰고 사제 직분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리고 신부가 자기 보물로 장식하는 것처럼' 이 된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본문은 앞 문장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신랑'과 '신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직유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여기에서 '관을 쓰고' 에 해당하는 '예카헨 페예르'(ekahen peer)는 '화관(혹은 사제의 관)을 쓰고 사제직을 수행한다' 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페예르'(peer)는 본장 3절에서 메시아가 '재'를 쓰고 있는 자에게 그것을 대신해서 씌워주는 '화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재 대신 화관), 탈출기 39장 28절과 에제키엘서 44장 18절에서는 '사제가 머리에 쓰는 관'(priestly turban)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예카헨' 의 원형 '카한'(kahan)은 '사제'를 의미하는 명사 '코헨'(kohen)이 어근이 되는 동사로서 '사제직을 수행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탈출28,1 ; 민수3,4)
그런데 사제의 두건을 쓰고 그 직분을 수행하는 일은 사제가 하는 일이지 결혼식장의 신랑이 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은 마치 사제가 사제 복장을 하고 머리에 사제의 관을 쓰고 그 직을 수행하듯, 신랑이 성스러운 결혼식때 입는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신부와 함께 결혼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께서는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가 특별한 예복, 정결한 의복을 착용하는 것처럼, 인류 구원의 중재자로 오실 메시아에게 당신의 의로움과 구원을 입혀 주셔서 그 일을 성취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의로움(義), 그가 완성한 구원을 의지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한 의로움과 구원을 입혀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입혀 주시는 구원과 의로움의 예복은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때 가장 아름답고 정결한 예복을 착용할 때와 같이, 그것을 입는 모든 이들을 복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줄 것이다.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본절은 주 하느님께서 그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신 결과를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움돋게 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본문에서 '새순' 에 해당하는 단어와 '싹을 솟아나게 하듯' 및 '솟아나게 하시리라' 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일한 어근 '차마흐'(tsamach)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이 단어는 이사야 4장 2절과 예레미야 33장 15절에서 하느님께서 다윗의 뿌리로부터 의로운 싹 메시아를 나오게 하신다는 사실을 예언하는 데서도 사용된 바 있다. 이러현 표현상의 유사성은 본문의 '의로움'과 '찬미'가 곧 메시아를 지칭하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전적으로 의로운 분이시며, 자기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며(이사53,11),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분으로(마르코1,11),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신다.
결국 메시아는 모든 민족들 앞에서 움돋움으로 세상 만민을 향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증거하실 것이며, 그 구원에 참여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메시아 사역의 궁극적 목표는 마지막 절의 '하느님의 공의 구현과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개구리소리 이젠 그만냅시다.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 숫자 열둘(12)은 12아들, 12지파 곧 교회의 완성의 숫자이지요.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분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피로 완성되는 것으로 생명의 완성인 것입니다.(사도20,28참조) 그런데 그 완성의 때에도 사람의 관습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인 것이죠.
(마르7,7)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ㄱ 찾아내지 못하였다.
= 하느님의 뜻을 담고 오신 예수님을 곧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 가운데에서 찾으려니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45ㄴ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 사람의 길에서 하늘의 길로 돌아가는 , 곧 메타노이아(회개)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모습인 것입니다.
46ㄱ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 사흘 뒤의 성전, 곧 사흗날(3)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성전을 뜻합니다.
사람의 길, 사람의 뜻을 위한 성전이 돼버린 그 성전을 정화 하실 때~
(요한2,19-21)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3으로)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46ㄴ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 율법교사 그 유다인들과 성전에 관한 질문을 하셨을 것이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 왜 저(12-완성)를 생명, 구원의 완성을 사람들(길, 방법) 사이에서 찾으셨나요? 구원은 하느님(성전)께 있음을 모르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ㄱ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 하늘이신 분께서 땅의 존재들에게 순종하시는 모습,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구원자의 모습이지요.
(루가1,78-79) 78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79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51ㄴ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드릴 때, 위와 같은 의미를 모르고~ 자신의 뜻을 위해 입으로만 되풀이 한다면 빈말(바톨로게오)- 바트라코스, (개구리)가 될 것입니다. <개굴 개굴 개굴~~ㅎㅎ~>
(마태6,7-8)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 8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아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복음(루카2,41~51)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49ㄴ~51)
율법에는 13세 이상의 유다 남자들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과월절), 초막절(장막절), 오순절(추수감사절)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야 할 것이 명시되어 있다(탈출23,14~17; 신명16,17).
하지만 포로 시대 이후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다인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경건한 유다인들은 적어도 유월절(과월절) 행사만큼은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율법의 의하면 유다인 남자들만 성전을 방문했지만(탈출23,17), 후기에는 여자들도 이 행사에 참여했으며, 예수님의 부모 역시 매년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방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유다 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들은 '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는 '율법의 아들'이 되어 회당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탈무드나 미쉬나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행동들을 배웠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12살에 성전에 올라간 것은 다음 해에 있을 종교 의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 2장 43절의 '축제 기간'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니산월 14~21일의 일주일간의 규정들(탈출12,15; 레위23,8; 신명16,3)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가족들은 이 축제 기간을 다 준수했던 경건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축제 기간이 끝나고 소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고 나오는데, '남았다'에 해당하는 '휘페메이넨'(hypemeinen; stayed behind)은 '휘포메노'(hypomen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실수로 남았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당시 유월절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무리를 지어 내려갔고,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쪽 가운데 한 편을 따라갔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 일행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마리아는 요셉 일행에 있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루카 복음 2장 44절의 '찾아보았지만'에 해당하는 '아네제툰'(anezetoun; they sought; they began looking for)의 원형 '아나제테오'(anazeteo)는 '반복'이라는 개념이 있는 접두어 '아나'(ana)와 '찾다'를 뜻하는 동사 '제테오'(zeteo)의 합성어로서 반복해서 찾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이 동사는 여기서 미완료 과거로 사용되어 부모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힘들게 두루 찾아다녔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룻길이 되는 노중 숙소에서 서로 만나 예수님이 없음을 확인했을 것이고, 그제서야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고 또 찾기 시작했다.
한편, 루카 복음 2장 45절의 '찾아내지'에 해당하는 '아나제툰테스'(anazetountes; seeking)는 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잠시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는 루카 복음 2장 46절 이하에서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 가운데서 앉아 그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부모가 무척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 소년 예수님과 함께 토론을 한 율법 교사들은 유다 랍비로서 당시 고령이었던 할렐, 삼마이, 그리고 가므리엘을 비롯한 유명하고 해박한 율법 박사들이었던 것이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당시 성전 안에 있었던 회당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관한 것으로 토론했다.
루카 복음 2장 47절의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해당하는 '에피 테 쉬네세이 카이 타이스 아포크리세신 아우투'(epi te synesei kai tais apokrisesin autou;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에서 '슬기', '지혜'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 '쉬네세이'(synesei)의 기본형 '쉬네시스'(synesis)는 '이해력', '통찰력', '추리력' 등을 뜻하는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지혜와 내적 통찰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삶의 경륜이나 경험에서 얻는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 (sophia)와는 다른, 하느님의 지혜로 그들과 토론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율법 교사들은 경탄하였는데, 루카 복음 2장 47절의 '경탄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시스탄토'(eksistanto; were astonished; were amaze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제 정신이 아니다', '넋을 잃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자신들보다 한 수 위의 예수님의 깊은 통찰력과 답변에 대해 계속적으로 경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루카 복음 2장 48절에서 아기의 부모도 당시 성전에서 석학들과 토론하는 아들 예수님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고, '얘야'라고 부른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이라는 호격 안에서 '안도', '놀람', '기쁨', '책망'등의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교차된다.
특히 어머니가 애타게 찾았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애타게'에 해당하는 '오뒤노메노이'(odynomenoi; anxiously; sorrowfully)는 '매우 걱정하여'라는 뜻으로 아주 강한 느낌을 주는 단어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이 남달리 깊었고,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간적인 성장 과정을 밟아가시는 예수님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하는 소명 의식 때문에, 그만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아들 예수님께 대한 근심이 컸을 것이다.
'제 아버지의 집에'
루카 복음 2장 49절의 '제 아버지의 집에'로 번역된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en tois tou patros mou; in my Father's house)에서 '집'으로 번역된 '토이스'(tois)는 관사 '호'(ho)의 여격 복수로서 '것들'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래서 '제 아버지의 집에'는 '제 아버지의 것들에'라는 의미라서, '제 아버지의 집의 일들에', '제 아버지의 사람들 가운데' 또는 '제 아버지의 집들에'라는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리고 '저는 ~ 있어야 하는 줄'로 번역된 '데이 에이나이 메'(tei einai me; I had to be)에서 '데이'(dei)는 비인칭 동사로서 '~이 필요하다', '~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의무를 말하기 보다는, 구세주 혹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에게 맡겨진 구원 사업과 관계된 일을 말한 것이다.
루카 복음 2장 49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는 장면인데, 소년 예수님은 이렇게 이미 육적인 부모의 관계를 초월하여 감당해야 할,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구원 사업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카 복음 2장 48절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부모를 책망한 듯이 보이며, 마리아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로 말한 데 대해 예수님 자신은 성부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제 루카 복음 2장 51절에서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곳은 하느님의 집이며, 그가 관계해야 할 진정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지만,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세로 그들과 함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에 해당하는 '판타 타 레마타'(panta ta remata; all these things)는 루카 복음 2장 49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탄생을 알린 천사의 말(루카1,27~37)과 천사들의 말을 전한 목자들의 말(루카2,17), 그리고 시메온과 안나의 말(루카2,29~35.38), 소년 예수님 및 아기 예수님과 관련되어 일어난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음속에 간직하였다'에 해당하는 '디에테레이~엔 테 카르디아 아우테스'(dieterei~en te kardia autes; kept~in her heart)에서 '간직하였다'로 번역된 '디에테레이'(dieterei)는 미완료 과거로서 과거 시점에서의 '진행', '끝나지 않음'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계속하여 간직하여 지키는 것을 보여 주며, 성령께서 깨우쳐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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