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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 (42) 고난의 의미
고난은 차라리 희망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지만, “살기 힘들다”는 소리는 더 잦아졌다. 팬데믹이 오래 이어지면서 물질적으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람이 많은 데다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누적된 탓이겠다. 인류사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던 것 같다. 인간이므로 사유를 통해 연역적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인류는 그렇게 시대마다 새로운 길을 헤쳐나갔다.
현인들의 지혜는 언제나 등불이 된다. 기원전 카이사르의 시대를 살아간 키케로는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라고 했다.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2000년이 넘도록 난관에 처한 숱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성자’인 슈바이처 박사는 ‘혼자만의 고통’이라는 착각에서 우리를 구해냈다. 그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에는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라”며 인류를 달랬다.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는 정호승 시인의 외마디는 곱씹을수록 힘이 된다.
해결책을 찾으려면 어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어려움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뉘앙스에 따라 다양하다. ‘고통’은 사전적으로는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 인간에게 고통이란 없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수고(고통을 받아들임)’를 해야 했고, 그것이 곧 ‘노동(labor)’이다. 고통은 죄를 씻는 도구이자 성인으로 가는 관문인 셈이다.
예수와 싯다르타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상황을 거쳐야 했다. ‘수난(passion)’은 특별히 예수가 인류 구원을 위해 받으신 고통을 지칭한다. 예정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이 강하다. 불교도와 힌두교도에게는 ‘고행(ascetic practices)’이란 단어를 더 자주 활용한다. 고행에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성이 있고, 스스로 육체를 견디기 힘들도록 만든다. 이 전통의 뿌리는 심신이원론을 펼친 플라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신을 맑게 하는데 감각(육체)은 방해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감각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이데아 또는 본질, 이상향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서구인에게는 신념이 됐다.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모습과 의미가 다르겠다. 죽음의 사신쯤으로 보고 공포에 떨고 있을 수 있고, 인류를 새로운 길로 몰아주는 채찍으로 보며 도약의 카이로스(Kairos)를 노리고 있을 수 있다. “고통 없이는 배울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직관과 “고통받은 사람 때문에 세계는 더욱 전진했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은 지금의 우리에게 유용하다.
하물며, 나무에게도 고난은 행복이다. 품격을 바꿔 주는 약속 같은 것이다. 포도나무는 타들어 가는 듯한 혹독한 가뭄을 겪은 해에야 그레이트 빈티지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물을 찾기 위해 뿌리가 40~50m 깊숙하게 내려가 영양분과 미네랄을 끌어올린 덕분이다. 가뭄 속에서 당도가 더욱 높은 포도알이 맺어지고, 따라서 도수가 높고 강건한 와인으로 변모해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된다. 커피나무도 해발 2000m에서 밤마다 얼어 죽을 것 같은 혹한을 이겨내야 씨앗이 깨끗한 산미와 풍성한 단맛을 품을 수 있다. 김장철 대관령 고랭지 배추를 찾는 이유와 같은 이치이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라는 인사말이 운동처럼 번졌으면 좋겠다. “나는 희망한다. 당신도 희망하라.” 고난은 차라리 희망이다.
[사유하는 커피] (43) 커피에서는 무엇이 부활일까
부활, 의심이 아니라 믿음인 이유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활용하다가 영영 본뜻에서 멀어진 단어들이 제법 많다. 남에게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는 ‘마누라’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이르는 극존칭어였다. 상대보다 낮출 때 쓰던 ‘족하(足下)’는 이젠 형제자매의 자식을 부르는 ‘조카’가 됐다. ‘서방님’도 벼슬하지 못하고 책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에서 남편을 일컫다가 남편의 동생을 이르는 호칭으로 쓰임이 바뀌었다.
말이라는 것이 많이 사용하는 쪽으로 의미가 바뀌는 속성이 있다. 그럼에도 언어 구사에 신경을 써서 왜곡되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하는 단어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이다. 대중 매체와 인터넷 공간에서의 ‘부활’의 오용과 남용은 심각하다. ‘공매도 부활’ ‘비트코인 부활’ ‘트럼프 부활’ 등이 재치 있는 표현인 양 자주 사용되는데, 이때 ‘부활’이라는 표현을 해야 하는지 따지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버젓이 ‘악의 부활’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는 지경이다.
‘부활’은 성경에 적힌 예수 부활에서 그것과는 본질이 다르다. 인터넷 공간에 등장하는 ‘부활(賦活)’은 예수님의 ‘부활(復活)’과 한글 표기와 발음이 같을 뿐 다른 말이다. 많은 사람이 부활이라고 하면 으레 ‘죽은 뒤 다시 살아남’으로 간주한다. 더 큰 문제는 사용하는 측도 그다지 분별 있게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악의 부활’에서, 부활은 영어로는 ‘액티베이션(activation)’, 활력을 준다거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주체가 ‘악’이기 때문에 부활보다는 ‘함부로 날뛴다’는 뜻으로 ‘악의 발호’라고 적는 게 적절하다. ‘예수 부활’에서 부활은 ‘리서렉션(resurrection)’,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라는 의미이다.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 활동하는 액티베이션을 예수 부활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순 없다.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라는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직관은 깊은 사유로 이끈다.
“과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그것이 타당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활 신비’라는 말로 답할 수 있다. 신비는 한마디로 ‘하느님이 계시한 진리’이다. 신비란 하느님의 표현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질문은 “예수께서 부활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향해야 한다. 부활은 한 생명체가 일궈낸 개별적인 기적이 아니라 섭리를 생생하게 증명한 사건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부당함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응이다. 예수 부활은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보여줬다. 나아가 부활한 예수는 단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듭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부활 사상’을 깨우쳐 준다. 부활은 현실 너머 이데아를 바라보도록 안목도 키워줬다. 그것은 곧 인간 정신의 재구성이자 인간의 재탄생이다.
고로, 부활의 정신은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커피에서는 무엇이 부활일까? 밋밋한 커피 생두는 섭씨 200도를 넘나드는 혹독한 환경을 거쳐 비로소 향미를 얻는다. 물질적으로는 변형됐을 뿐 똑같지만, 커피는 볶임으로써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간다. 커피 애호가들이 잿더미가 될 것 같은 환경에 과감하게 커피 생두를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타지 않고 향기를 얻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수 부활은 의심이 아니라는 믿음을 준다.
[사유하는 커피] (44) 겨울 있어 커피나무도 꽃을 피운다
사순절에 광야를 생각한다
3월이면 광야를 생각하게 된다.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해 40일간 이어지는 사순절이 예수께서 겪은 ‘광야의 유혹(Temptation of Christ)’을 떠오르게 하는 까닭이다. 사실 역사적 시기를 따진다면, 광야에서 40일간의 단식이 바로 부활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예수께서 가정생활(私生活)에서 떠나 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3년간의 공생활(公生活)이 있다. 그럼에도 부활의 신비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 수난’만큼이나 ‘광야의 유혹’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 때문이겠다.
광야는 라틴어로 데세르툼(deser tum)에서 유래했으며, 영어로는 사막을 뜻하는 ‘데저트(desert)’로 표기한다. 사전적으로 데세르툼은 ‘버려진 곳’ 또는 ‘지나갈 수 없는 곳’으로 풀이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광야의 개념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바싹 마르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사막에 비해, 광야는 감성적으로 보다 희망적인 곳으로 다가온다.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이집트 추적대를 따돌릴 은신처가 됐고, 엘리야에게 광야는 위기에서 목숨을 구하는 반전의 장소가 돼 주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 사도 바오로의 진정한 삶 역시 광야에서 시작됐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공간이다. 한국인의 정서에도 광야는 훗날 초인이 백마를 타고 올, 그리움 같은 희망이다.
구약성경에 히브리어로 적혀 있는 광야는 ‘미드바르’이다. ‘~로부터’라는 전치사 ‘미’와 ‘말하다’는 뜻을 지닌 ‘다바르’가 합쳐졌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광야는 단지 장소가 아니다. 말씀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거룩한 존재 자체, 곧 하느님을 의미한다. 광야의 이런 추상성은 현실에도 활용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아이비리그로 손꼽히는 다트머스대학교의 라틴어 모토이다. 이 학교의 심벌에는 “복스 크라만티스 인 데세르토(VOX CLAMANTIS IN DESERTO)”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목소리”라는 뜻이다.
‘광야’는 정서적으로 ‘황야’와는 다르다. 황야는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거나 ‘인적없이 삭막한 벌판’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이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1964년 작 영화 제목만 봐도 그렇다. 미국 작가 잭 런던의 소설 ‘황야의 부르짖음’에서, 황야는 배신과 복수가 난무하는 세상을 은유한다. 황야나 사막이 광야가 되기 위해선 생텍쥐페리가 사유한 것처럼 어딘 가에 샘(희망)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광야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홀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의 고난과 역경만이 감도는 곳이라면 광야가 아니다. 스스로 골방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자로 하여금 홀연히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게 만드는 공간이어야 한다. 광야는 초인의 영역이요, 인간에게는 신에게 의탁하는 회개의 시공간이다.
모든 생명이 사라진 듯 보였던 잿빛 동토에도 3월이면 어김없이 파릇파릇 생명이 움튼다. 우리의 의지로 겨울을 물리고 봄을 부를 수 없지만, 누구도 불안에 떨지 않는다. 신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계절처럼 광야의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따른다. 예수께 광야와 부활은 동치(同値)이다. 광야가 없으면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으면 광야도 없다.
광야는 모든 생명에게 같은 의미일 성싶다. 커피나무에게 겨울 같은 기온 하강이나 사막 같은 건조기가 없으며 꽃을 피우지 못한다. 냉혹한 환경이 커피나무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도록 자극을 주어야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커피나무에게 이러한 고난이 극복 여부와 상관없이 완성을 이루기 위한 축복인 셈이다. 우리에게도 광야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사유하는 커피] (45) 인간의 본성과 커피의 본성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모두 신에게서 왔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본성(nature)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1000년이 지나도록 인간의 정신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본성과 관련이 있다. 본성은 사물이 처음부터 갖는 보편적이면서도 고유한 특성이다. 인간에게 본성은 그것을 빼면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무엇’이다.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것으로 곧 천성(天性)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은 영혼(soul)에 반영된다고 했다. 영혼 안에는 욕구와 격정, 이성이라는 속성(attribute)이 들어 있는데, 그는 이성이 격정과 욕구를 다스리기 어려움을 우려했다. 진실은 감각에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사유를 통해서만 이데아(본질)를 만날 수 있다고 봤다. 인간은 본래 이데아에서 왔으므로 본성을 기억해낼 수 있다는 게 플라톤의 강변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선한 이데아에 비유한 포인트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봤을 때,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 그는 ‘추론적 사고능력과 지성’이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본성이라고 설파했다. 과연 학문을 닦아 지성을 키우면 진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본성에 관한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보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관점은 예수의 시대를 거치면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받았다.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인간의 원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문에 빠지면서, 신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죄가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받아야만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대속(代贖)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켜 준 역사적 사실이고, 부활과 승천은 ‘신의 본성’을 드러낸 섭리의 실현이다.
로마제국 몰락 시기인 5~6세기에는 플라톤을 계승한 그리스계 철학자들이 신앙을 이성과 동등한 수준에서 상호 보완하는 관계로 보고 신플라톤학파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인간의 본성을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지식인이 늘어났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서 신앙은 이성을 한 단계 고양시켜 주는 속성으로서 앞서 갔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차용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마침내 “만물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신의 속성’이 스며들어 있다는 깨우침이었다. “신으로서의 예수, 인간으로서의 예수’라는 담론은 이 연장선에 있다.
중세를 마감할 때쯤 교회보다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자 본성을 탐구하는 도구로서 이성이 신앙을 누르고 부각됐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16세기 ‘본유관념(idea innate)’을 들고 나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넣어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의 이러한 직관은 과학혁명과 인지혁명 시대를 거쳐 21세기까지도 진리의 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정신을 잇는 촘스키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통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무엇’이 있음을 수학적으로 풀어냈다. 만들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에게서 왔다. 아이들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언어를 깨우치고 무한하게 문장을 생성할 줄 아는 것은 신의 본성을 이루는 한 속성이 부여된 덕분일 수 있다.
커피의 본성은 무엇일까? 망치의 본성이 못을 박는 데 있는 것처럼 커피도 쓰임에서 찾을 수 있겠다. 커피는 우리를 사유로 이끌면서 묵상을 선물한다. 어쩌면 커피는 본디 인류를 절대자에게 안내하기 위해 내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하는 커피] (46) 색과 본성
흰색 부활 제의의 의미는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풍경을 떠올려본다. 색채가 사라지는 아쉬움보다 싱그런 아침을 맞이하는 정결한 기쁨이 차오른다. 브룬펠지아 꽃은 보라에서 하양으로 변모하며 자신의 향기를 완성시킨다. 재스민향이 어찌나 선명하고 풍성한지 화려한 꽃들의 천국인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도 한동안 꽃 앞에 머물게 만든다.
16세기 독일의 식물학자 브룬펠스가 유럽인으로서 처음 이 꽃을 발견했을 때 ‘아마존의 재스민’이라고 경탄했을 법하다. 브룬펠지아의 꽃, 뿌리, 잎, 줄기 등 모든 부위가 해독, 관절염, 기관지염, 열병 및 결핵 치료 등에 유익하다. 아마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이 꽃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마나카(manaca)’라는 이름을 붙여 보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브룬펠지아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비친다. 사순절 동안 보라색 제의를 입던 사제들이 부활을 맞아 흰색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색의 변화는 브룬펠지아처럼 ‘완성’을 은유한다.
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은 뮤렉스(Murex)라는 조개를 칭하는 라틴어 퍼퓨라(Purpura)에서 유래했다. 고대 서양에서 퍼플은 최고의 지위를 상징했다. 보라색 직물 1㎡를 지으려면 퍼퓨라 2만 개가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자들만이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중세에는 고위 성직자를 상징하는 색깔이 됐다. “레이즈드 투 더 퍼플(Raised to the purple)”이 “~추기경이 되다”는 관용구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라색은 신앙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색채의 예술’을 집필한 요하네스 이텐은 “보라색은 사랑을 의미하는 빨강과 신뢰를 나타내는 파랑이 합쳐진 색으로 신앙심을 표현한다”고 했다.
보라색이 사순절과 연결되는 것은 ‘죽음(또는 왕가의 상복)’도 상징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보라색 눈물(purple tears)’에 비유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이(Odyssey) 공연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오디세우스를 표현할 때 보라색 옷을 입혔다.
죽음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낸 부활을 흰색이 상징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흰색 상복은 단지 슬픔을 표현하는 게 아니다. 가장 밝은색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주술적 의미가 들어 있다. 왕을 태양의 아들과 동일시한 이집트인들은 흰색을 숭배했고, 북방 기마 민족들은 흰색 말을 신의 축복이라 반겼다. 일본인들은 흰색 고양이를 복을 부르는 상서로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빛(흰색)이 어둠(검은색)을 달래며 세상의 모든 색이 만들어진다고 직관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흰색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빛깔을 품고 있는 ‘근원’이라고 봤다. 이런 인식에서 교황청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성모 마리아의 의상을 흰색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런 인식은 일상에 퍼져 속옷의 색깔이 탐욕적 육체를 덮고 순결한 정신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흰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수 탄생과 부활에 사제가 흰색 제의를 입는 것은 “하늘엔 영광이 가득하고 땅에는 환희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성은 이처럼 색에도 스며든다.
커피도 마찬가지이다. “씨앗을 먹는 것인데 열매가 빨갛게 잘 익었는지 알 수 있겠냐”며 덜 익은 푸른 열매를 마구 수확했다가는 반드시 한 잔에 담긴 커피의 향미에서 들통이 난다. 밍밍한 맛이 우리를 허망하게 하고 쓰고, 떫은 뒷맛이 관능을 괴롭힌다. 색은 가도 본성은 남는 법. 보라색과 흰색에 담긴 절대자의 섭리가 두고두고 우리를 사유로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