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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장 27~37절
예수님의 눈물
먼저 번에 우리는 마르다에 대해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마르다는 인간적 믿음에서 부활 믿음으로 변화했습니다. 처음 마르다가 가졌던 믿음은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인간의 지식과 정보에 근거한 합리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다’라고 하기보다 ‘안다’는 것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화중에 마르다의 믿음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인간의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을 믿는 것입니다. 25~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네가 아느냐가 아니라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도전, 사랑, 격려의 말씀에 힘입어 자신의 믿음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믿음에서 성령에 기초한 믿음으로 바꾸기를 축원합니다.
마르다는 말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면 먼저 말이 바뀝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으로, 비판적인 사람은 칭찬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이전과 확연히 다릅니다. 그녀의 말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마르다의 믿음이 ‘아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이다.”라는 말은 동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아멘’이란 ‘그렇습니다, 동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거나 기도할 때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아멘’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마르다의 믿음은 신앙고백으로 변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식사할 때 그릇을 먹지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그릇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음식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셋째, 마르다는 더 이상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과 생명과 예수님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참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르다와 같은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28절에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8절 말씀에서 마르다가 변한 모습을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마르다는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며 개방적인 반면, 마리아는 수동적이고 수줍어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변한 사실을 누가복음 10장 38~42절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밑에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느라 청소하고 음식 만드느라 분주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던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40절 말씀에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지나치게 예수님을 사랑한 나머지 아예 이래라 저래라 지시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계획에 맞춰 자신의 방법대로 응답해 달라는 식입니다. 물론 마르다는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약간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28절에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선생님이 너만 예뻐하셔서 찾으신다.’ 라는 시기나 질투가 섞인 말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둘째, 마르다는 조용히 마리아를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크게 떠들며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일대일로 만나 인격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동생 마리아를 배려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전에 직선적이던 마르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셋째,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라고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메시지는 늦게 전할 수도 있고 약간 과장해 전할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나면 아예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빠르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27~28절 말씀을 통해 마르다의 인간적 믿음이 부활의 믿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믿음으로 변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할 때 직접적으로 하실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하실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이렇게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직접 초청하신 말씀은 없고 간접으로 초청하십니다. 마르다의 말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속히 마리아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예수님께서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하신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오라버니의 일로 인해 혼자서 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모른 척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통해 마리아를 초청하시듯, 오늘 주님께서 저의 설교나 주위 환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고 너의 눈물과 슬픔을 알고 있다.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도 알고 있다. 너를 만나 위로해 주고 싶다’며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서 배울 것이 하나씩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의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가서 동생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메시지 전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의 사명을 말합니다.
마태복음28장 19~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하십니다.
사도행전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명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위탁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주저함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나귀에 땔감 나무를 싣고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함 없이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팽개치지 말고 신속하게 내용대로 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경우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지를 듣고 곧바로 행동했습니다.
29절에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마리아는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집에서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와서 ‘선생님께서 너를 찾으신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자마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고민하지 말고 속히 일어나 달려가십시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아멘’ 하고 뛰어가십시오. 모든 것을 버리고 곧장 달려가야 합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급히 일어나 뛰어갔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축복의 시작이고 기적의 시작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마리아가 황급히 달려 나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30~31절에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르다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32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 말씀을 언뜻 보면 마르다의 고백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굉장한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마리아가 속히 달려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예배’입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만나 ‘여기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약간 투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에게는 예배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예배할 때 기적과 표적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과 그냥 찬양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이 예수님을 맞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만큼 차이입니다.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인간적 믿음과 부활 믿음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마르다와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말은 원망과 투정이었고, 마리아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 차이는 예배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예배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목사, 장로, 집사를 찾는 게 아니라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주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눈앞에 급한 일이 닥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며,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먼저 주님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예배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와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예배하고 신앙 고백으로 나아갔을 때,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33~35절에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우셨습니다. 우리는 기도, 신앙 고백, 예배 등으로 예수님을 울려보았습니까? 이런 눈물은 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것과 다릅니다. 아마 예수님의 눈이 빨갛게 되었을 것입니다. 눈에 핏줄이 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온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통’은 격렬한 감정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외로움, 질병 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가’하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연히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게 아닙니다. 또 단순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죽음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깊은 감정이 동요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부모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하며 통곡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감정, 고통 등을 느끼셨습니다. 내가 아플 때 그분도 아파하시고 내가 힘들 때 그분도 힘들어 하시며, 내가 외로울 때 그분도 외로워 하셨습니다. 자식이 다 잘되면 부모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식이 입시에 떨어졌을 때, 이혼했을 때, 병들었을 때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합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도 함께 안타까워하십니다. 이사야서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세 가지 일이 나옵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소외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 중에 가장 큰 것은 거절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절 당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고통을 아십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질병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질병, 간고, 외로움 등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아십니다.
34절에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한 분노로 인해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죽음을 대면하러 가겠다.’ ‘인간을 이토록 처절하게 만든 사망의 세력을 부수러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회피하신 분이 아니라 대면하신 분이시고 이기신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사망의 권세에 맞서 대면합니다. 죽음과 싸워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으실 때 주여 와서 보옵소서(34절) 하고 무덤으로 예수님을 인도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눈물은 인간의 당하는 고통과 신음에 죽음으로 맞는 슬픔을 아시고 흘리신 눈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살리려 오신 분이신데 지금 현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정에서 일어나 죽음의 문제를 겪게 되면서 인간의 슬픔 가운데 최고의 슬픔을 경험하시며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가장 비통해 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요구에 마리아의 고백을 보면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34절) 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39절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왜 무덤을 보시려고 하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대면하여 보시고 이적과 표적을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마시고 대면하여 보시고 주님의 도움을 통해 승리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36~37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이 나사로의 가정과 사람들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면서 나사로의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나사로의 죽음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또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헌실 속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의 눈물은 나면서 소경된 자는 고칠 수 있어도 죽어가는 자는 살릴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비탄에 우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마르다에게 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내가 믿나이다.” 하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말리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15절에 “내가 거지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나를 믿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살리시는 분임을 제자들에게 증거하게 됨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자신의 영광과 성취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증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증거를 드러냄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냄을 보일 믿음의 고백이 있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