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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세거지 이야기
이 수 영
마을은 한적하고 고즈넉하지만 만만치 않은 기품과 무게가 느껴진다.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바둑판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리 높지는 않지만 수려한 자태를 지닌 천수봉을 뒤로하고,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천내천을 마을 앞에 둔 배산임수의 지세를 갖추었다.
남평 문씨들은 목화 씨 전래로 잘 알려진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이 약 500년 전 대구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이곳 인흥으로 옮긴 것은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제(仁山齊) 문경호(文敬鎬 1812-1874)로 150년이 조금 넘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관광 안내소에서 마을 안내 자료를 받아들고 50m쯤 걸어가면 제일 처음 맞아 주는 곳이 수봉정사(壽峰精舍)이다. 수봉정사는 문중 자제들의 배움터이자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만권당을 설치한 수봉 문영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인 1936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수령이 족히 백 년은 넘어 보이는 노송 세 그루가 버티고 서 있고 현판에는 수백당(守白堂)이란 당호가 소박한 예서체로 객을 맞는다. 수봉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는 망해도 산하와 백성은 그대로이다(國破山河在)”라는 생각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였다. 그러니까 역사를 지키고 지혜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모아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책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곳곳을 찾아 다녔고, 중국에 까지 사람을 보내어 엄청난 재산을 들여가며 책을 모았다.
그가 모은 책들 가운데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중요한 역사책이 망라된 것으로 보아 그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수봉정사에서 오른쪽 담장 가운데 쯤, 유예문이란 소슬문을 들어서면 여기가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곳, 바로 책을 모아 놓은 인수문고이다 만권당에서 시작한 인수문고는 그 후에도 계속 수집되어 지금은 2만 여권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중문고로 자리를 잡았다.
인수문고, 중곡서고, 거경서사 라는 현판을 단 세 동의 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중 인수문고 건물은 1980년대 정부의 지원으로 새로 건축했다고 한다.
거기서 나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들머리에서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 마을에는 모두 몇 백 년씩은 되어보이는 노거수들이 드문드문 서서 마을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하기는 이곳이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의 기초가 되는 연대기를 작성하고 군위 인각사로 옮겨 가기까지 11년간이나 머물렀던 인흥사라는 절터였고,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서면 오른쪽 밭 가운데는 작지만 고색창연한 작은 돌탑이 자리를 하고 수봉정사 안에 있는 우물도 고려정이라 하여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 하니 마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나무의 연륜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회화나무를 앞에 두고 사죽헌(思竹軒) 대문에 써 놓은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이라 쓴 글귀가 사람의 가슴에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때 대구시장을 지낸 분의 생가이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토담길을 걷는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제법 높은 토담길에 가지런하게 박혀 있는 돌들이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투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고 그 옛날 이 길을 거닐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해 본다. 더러는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거닐었을 길, 담 안에 기댄 사다리에 올라 밖을 내다봤던 아낙네들의 호기심이 어린 곳, 지금은 연기를 올려본지 오래된 굴뚝들이 깨어진 기왓장과 흙으로 정성껏 쌓아 올린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다소곳이 서 있다.
지난 여름 이곳에 들렀을 때,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에는 드문드문 와송들이 자라고 있었고 토담 곳곳에 능소화 가 그 화려한 빛깔과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골목을 조금 벗어나면 다른 집들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리를 잡은 광거당(廣居堂)이 나타난다. 담장 밖으로는 호위병처럼 노송들이 빙 둘러섰고 대문안 오른쪽에는 역시 몇 백 년은 됨직한 회화나무와 함께 담장 밑으로는 오죽이 푸른 기개를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재실이자 오늘날 학교의 구실도 하던 곳이고 수많은 시인묵객이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광거당 오른쪽 누마루에는 추사의 글씨로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수석과 늙은 이끼와 연못으로 된 집”이란 뜻이니 아마도 이 마당이 옛날에는 수석과 이끼가 잘 가꾸어진 지당이었던 듯하다.
그래서인가. 황진이, 씨받이 등의 영화 촬영지이기도 했다는 이곳은 오랜 역사의 향기를 오늘날까지 간직한 채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광거당 앞에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에 노인들이 즐기는 게이트볼 장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다가 10여 년 전 인흥사지 문화재 발굴 작업을 하고 그 위에다가 공원으로 꾸며 놓은 곳이다.
뿌리 깊은 한 가문이 있어,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모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31년 수봉 선생이 사망하고 난 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문을 보낸 것을 보면, 다른 사람 모르게 임시정부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삼 가슴이 뭉클해진다.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 남평문씨 세거지 주변에는 꼭 한 번씩은 들러볼 만한 곳이 많다.
우선 세거지 앞 천내천 건너편 에 자리 잡은 인흥서원이다. 명심보감을 지은 노당 추적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대구 유형문화재인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 뒤쪽 수목원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들면, 그 초입에 오래 전 국회의장을 지낸 한솔 이효상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고, 차로 10분 남짓 거리에 마비정 벽화마을, 화원 자연휴양림, 대구 수목원 등의 가볼 만한 곳이 즐비하다. 지금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끼고 수십 동의 비닐하우스에 봄 미나리 향이 입맛을 돋군다. 세거지에서의 가슴 뿌듯한 느낌을 미나리와 삼겹살과 막걸리 한 잔으로 풀어본다. 보고 듣는 것도 좋지만, 먹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 아니랴.
2015. 2. 16
첫댓글 남평문씨 세거지를 다녀와도 자세하게는 살피지를 못했는데 잘 쓰신 글을 보고 곳곳이 생각납니다.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자문위원이신 문희갑 전 대구광역장님이 지금 거주하고 계신다고 듣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저는 영천이 고향이지만 화원의 세거지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멋지게 소개하여 주셔서 문중의 일원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흥서원엔 자주 가서 자연보호를 하곤 합니다만 인흥리에 산재된 대소 문화재에 대해 소상하게 잘 안내하여 잘 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