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가능케 한 제네바 협상의 기술과 ‘K-서비스’의 국격
[칼럼] 공정과 신뢰로 연 UN 하늘길, < 문화/교육 < 기사본문 - K뉴스통신
한상곤 교수/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전 KOTRA 취리히 무역관장)
2012년 2월, 만년설이 빛나는 스위스 취리히 무역관장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내가 '하늘길'을 뚫는 해결사가 될 줄은 몰랐다. 부임 직후 대한항공 취리히 지점장과 마주 앉은 오찬 자리, 의례적으로 건넨 "현장의 애로사항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어두운 안색을 보였다.
"관장님, 제네바 UN 국제기구는 우리에게 10년째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협상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제네바에는 UN 유럽본부(UNOG)를 필두로로 WHO, ILO, WIPO, ITU 등 기라성 같은 국제기구들이 밀집해 있다. 연간 항공서비스 예산만 약 2억 3천만 달러.
전 세계를 누비는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대부분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기에 상징성과 경제성 면에서 '꿈의 시장'이다. 하지만 그곳은 유럽 항공사들이 견고하게 카르텔을 형성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10년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업의 영업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서비스 산업이 국제무대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국격'의 문제였다.
1. 첫 번째 열쇠: '공통의 기억'으로 신뢰의 빗장을 풀다
2012년 4월, 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제안하기 위해 제네바를 첫 방문, UNOG 를 찾았다. 미팅 테이블에 앉은 유태인 태생의 담당자는 전형적인 원칙주의자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려 그가 과거 근무했던 국제무역센터(ITC) 시절의 인연을 언급했다.
"2004년 WTO/ITC 주최 세계 무역진흥기관(TPO) 경진대회 당시, KOTRA가 세계 1위를 차지했던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심지어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한국인으로 한국은 이제 국제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틈을 타, 나는 준비해 간 '다섯 가지 명분' 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한국 항공사의 세계적 안전성, 글로벌 네트워크(연계성), 서비스 품질, 합리적 가격, 그리고 OECD 선진국가로서의 기여도였다. 나는 구걸하지 않았다. 대신 "특혜가 아닌, 공정한 기준으로 평가받을 기회를 달라"고 정중히 제안하며 공식 회신을 요청했다.
열흘 뒤, 마침내 한 통의 공식 서한이 도착했다.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도록 관련 서류를 제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10년 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거대한 철문이 비로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2. 두 번째 열쇠: '국가적 과제'로 승격된 서비스 수출의 길
이 사업은 곧 KOTRA의 'UN 국제기구 항공서비스 진출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단일 기업의 지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UN 조달시장 진출 서비스 수출 과제'로 격상, 산업통상자원부에 보고되었고, 국회 상임위원회 보고 안건에도 포함되며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주목도가 높아진 만큼 날 선 질문도 뒤따랐다.
그해 6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왜 특정 기업에만 특혜를 주는가?"
공공기관으로서 가장 민감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서면 답변을 통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했다.
"우리는 대한항공뿐 아니라 아시아나항공에도 동일한 조건으로 동시에 참여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특정 기업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우리 기업 전체에 공정한 기회를 만든 것입니다."
공정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지 않으면서도 실력 있는 기업에 공정한 운동장을 보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공기관의 존재 이유임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3. 세 번째 열쇠: 2년의 협상을 6개월로 단축시킨 ‘시스템’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2012년 11월 서울에서 열릴 'WHO 세계 담배총회'를 타깃으로 잡았다. 통상 2년이 소요되는 UN 계약을 6개월 만에 끝내기 위해 전례 없는 '실시간 협의 체계'를 가동했다. '제네바의 UN협상팀, 취리히 무역관, 대한항공(서울본사 및 취리히지점)' 을 잇는 24시간 이메일 라인을 구축해 계약서 문구 하나까지 실시간으로 조율했다.
결과는 기적 같았다. 2012년 11월, 제네바에서는 12개 UN 국제기구 대표들이 계약서에 서명했고, 나는 서울로 날아가 WHO-대한항공간 공식 체결식에 입회했다. 대한민국 항공사가 UN 에 서비스하게되는 항공사로 공식 인정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에필로그: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이 계약으로 기대되는 매출보다 중요한 가치는 'K-서비스'의 신뢰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대한항공으로부터 "창사 이래의 쾌거이며 국격을 높인 성과"라는 감사 서신을 받았을 때, 나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뜨거운 보람을 느꼈다.
스위스에서의 그 치열했던 6개월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국제사회에서 문을 여는 열쇠는 힘이 아니라 신뢰이며, 그 신뢰를 지탱하는 힘은 과정의 공정함에 있다.
우리 기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뛰어놀 운동장을 만드는 것, 닫힌 문을 두드려 활짝 여는 '공정한 문지기'들의 용기 있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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